EP.1028 3부 3장 15
김누리.
그녀는 청화단의 간부로서, 자신이 지금까지 겪은 모든 경험을 바탕으로 현상을 파악하고자 했다.
검은 괴수를 물리치기 위해 필살기를 사용한 흑염룡.
어둠으로 전부 세상이 물들고, 어디론가로 빨려 들어간 듯한 느낌.
그리고 눈을 떠보니 마도기어의 전파가 통하지 않는 완전한 이세계.
"...이게 뭐임?"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세계에 떨어졌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지금 이런 이상한 자연환경은 그녀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곳이었고, 그녀의 지식과 능력이 능동적인 사고를 방해하고 있다.
이세계는 이세계다.
히카리의 마도기어가 기능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만, 데이터가 불통인 걸로 봐서는 다른 세계에 떨어진 게 분명하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 하나.
"...마력은 있네."
마도기어는 태양광 전지처럼 주변에 있는 마력을 흡수하여 작동하는 반영구동력기기다.
때로는 착용자의 마력을 흡수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마력은 자연이나 괴수들의 마석을 통해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구원 이후.
괴수가 없어진 현재, 마도기어는 지역마다 설치된 '마력방출기'에 가까이만 가면 바로 100% 배터리가 충전되었다.
-창염개진!
광장 한가운데, 태양을 향해 두 팔을 높이 치켜들며 'Y'자 형태의 모습을 취한 백청화 여신상의 앞에서 똑같은 포즈를 취하며 외치기.
그러면 마도기어는 불과 1분도 걸리지 않는 시간만에 바로 배터리를 100%로 채워준다.
프로페서 히카리가 한국에서 유통되는 모든 마도기어를 '여신상'앞에서 배터리가 충전되도록 개조했고, 히카리 또한 외부에서 마력을 흡수하여 마도기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개조 받았다.
그리고 지금, 외부에서 들어오는 마력이 마도기어에 충전된다.
...왜 이세계의 자연에서 마력을 충전할 수 있는 걸까.
비록 자신의 것은 아니지만, 누리는 대기에 흩어진 어두운 마력의 기운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진짜 영문을 모르겠네."
이세계는 이세계인데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이세계?
그건 너무 편의주의적 전개가 아닐까?
자신의 몸에 있는 마력은 사용할 수 있다.
이건 배터리로 치면 충전되어있던 거니까.
"...혹시 멸망한 지구?"
누리는 진심으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어디 뭐 미래에 떨어진 건가? 교수님의 위성들이 모두 파괴되고, 막 청화의 여신상이 어디 해안가에 얼굴만 내어놓은 채 처박혀있는 거 아님?"
정보가 희박하니 머릿속으로 온갖 고뇌가 가득 차오른다.
"아니면 이곳은 평행세계? 단장님이 구원에 실패하고 괴인들이 세상을 지배한 것임? 나는 거기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
과거에 석하랑과 함께 지내던 시절, 석하랑이 보던 TV 영화의 내용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니야. 그냥 이세계일 거야. 그래, 그럴 리가 없어. 지구는 안전할 거야."
안전해야 한다.
그곳에는 김누리의 가족들이 있으니까.
"우선순위를 생각해, 김누리. 단장님처럼 사고...하면 안 되겠구나."
청화단 단장, 피닉스의 사고방식대로 생각하면 너무나도 많은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두 가지만 생각해."
검은 괴수.
그리고 흑염룡.
"...나머지는 차근차근 확인하면 돼."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을 이 세계로 끌어들인 정체불명의 괴수에 대해서, 그리고 사라진 흑염룡에 대해서 대처하는 것도 중요했으니까.
"후."
단장은 말했다.
-어차피 무슨 지랄을 하든 무슨 무슨 변수로 인해서 좆될 거, 그냥 편하게 그 상황에 맞춰서 애드립으로 대처하는 게 베스트인 것이에요.
긍정적으로.
상황에 맞게.
하지만 목표를 정하고, 최선을 다해서.
"...될 대로 되라지."
청화단 간부로서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을 다잡으며, 김누리는 긍정적인 마인드로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그나저나 설마 이중깽을 현실로 하게 될 줄이야."
이세계 데뷔를 중3이 하게 되다니.
김누리는 마음껏 속으로 빈정거리며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아직 주변에 대한 정보는 없지만.
"힘도 있겠다."
마력을 쓸 수 있다는 것.
마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
"청화단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그것은 청화단의 간부로서, 이능력자로서 움직일 힘이 있다는 것.
타ㅡ앙!!
김누리는 바람처럼 달렸다.
그녀를 중심으로 어두운 기운이 사방으로 휘몰아치며 숲에 거대한 바람을 일으켰고, 김누리는 빠르게 메타세쿼이아처럼 높은 나무의 꼭대기로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와, 하늘에 무슨 달이."
일곱 개.
과거 최후의 성전에서 일곱 개로 쪼개져서 지구에 떨어지던 그게 생각나서 순간 아찔해졌지만, 누리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달들의 색을 확인했다.
"...마력 속성의 색이네?"
적색, 청색, 녹색, 황색, 흑색, 백색, 회색.
김누리는 깨달았다.
"아, 저거 코어구나."
밤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코어일 뿐.
바라만 봐도 영롱하게 빛나는 걸 보면 분명 저 거대한 구체가 지상에 막대한 마력을 뿌리는 원동력이 아닐까?
아님 말고.
"정말 영문을 모르겠네...."
이 세상은 도대체 뭘까.
결국 확인하려면 이 세계의 실체를 파악해야 하기에, 누리는 정보를 얻기 위한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민가든 뭐든, 사람이 있는 곳.
누리는 메타세쿼이아의 줄기를 밟으며, 상대적으로 마력이 더 많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도시다."
저 멀리 남쪽, 도시처럼 생긴 곳이 보이기 시작했다.
김누리는 어둠 속으로 파고들며 익숙하면서도 낯선 도시의 광경을 가까이에서 마주했다.
"...저게 머임?"
도시는 도시인데, 뭔가 우중충하다.
지구의 도시와 비슷하지만, 결정적으로는 뭔가 다른, 다채로운 네온사인이 아니라 우중충한 회색의 세계였다.
흔히들 회색 콘크리트의 숲이라고 표현하는 정도를 넘어, 그냥 무채색으로 가득한 회색의 세상이었다.
"......."
마치.
김누리의 어린 시절을 자극하는 듯한 세상.
2020년, 청화단에 들어가기 전 나 혼자 남겨진 세상에서 우울하게 하늘만 올려다보던 그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
만약.
누군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좋을 텐데.
김누리라는 존재가 아무리 청화단의 간부라고 한들, 혼자서는 뭔가를 할 수 없었다.
고작 나이 중3.
아무리 세계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세계 물을 먹었다고 해도, 어른의 도움과 울타리 아래에 있는 게 아니라면 그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이능력이 있는 건 천만다행이지만, 이게 이 세상에서도 S급만큼의 힘을 보장한다면 그건 모르는 일이니까.
행여나, 자신의 S급이 이곳에서는 고작 C급, D급밖에 안 되는 힘이라면?
또다시 누군가에 비교된다면, 그건 또 싫은....
"...응?"
치직, 치지직.
마도기어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뭔가 데이터가 닿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김누리는 급히 마도기어를 두드렸다.
그리고.
삐비비비비비비비비빅!!!
폭발할 것 같은 알림음.
가족의 연락, 친구들의 연락, 청화단의 연락.
무수히 쏟아지는 메시지를 보자마자 누리는 안도하며, 동시에 무겁게 버튼을 눌렀다.
"......회장님?"
[설마, 당신과 가장 먼저 연락이 될 줄이야.]
김누리로서는 제일 부담스러운 존재가 마도기어의 화상 너머로 나타났다.
비록 중간중간 화상이 끊기기는 했지만, 김누리는 옆에 나타난 또 다른 화상에 안도했다.
"교수님도 옆에 계시네요?"
[누리 양, 결론부터 얘기할게요. 그곳은 괴수들이 넘어오던 차원문 너머의 세계로 추정되고 있어요.]
"와우."
김누리는 단번에 의아함이 풀렸다.
어쩌면 가장 먼저 생각해봐야 했을 가능성이 아니었을까?
마력이 있다는 건, 분명 괴수와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니.
[우리는 이미 그 세계에 관측기를 보내놨어요. 그게 지금 중계기 역할로 누리와 저희를 연결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마력이 있으면 세계와 세계 사이도 연결할 수 있다니, 충격적이네요."
연락은 가능하다.
그렇다면.
"...저 사라진 지 얼마나 지났어요?"
[이제 하루.]
"...똑같네요?"
[......시간의 흐름은 똑같다라. 일치하네요. 다행이에요. 어느 한쪽이 막 빠르게 움직이거나 느리게 움직이거나 할 일이 없어서.]
김누리는 석하랑과 봤던 만화가 떠올랐다.
뭐라더라, 인간의 감각이 수만 배 확장되면 시간이 그만큼 빠르게 흘러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남들에게는 수 초가 자신에게는 수 만 년처럼 느껴진다던가.
"그런데 중계기라는 게 있었어요?"
[...이세계 탐사봇 같은 걸 하나 만들어서 보냈어요. 이미 이세계의 존재는 관측했고, 거기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으니까.]
"와, 다행이다. 까딱 잘못했으면 완전히 다른 세계로 떨어질 뻔했네요."
아는 사람과 이야기한다는 것.
그것만으로 김누리는 이미 구원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여기가 이계라면, 혹시...."
[고객님...피닉스 님이 거기에 있을지도 몰라요.]
"와, 대박. 진짜요?"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외형은 비슷해요.]
"여자요?"
[남자쪽. 어, 그러니까 과거의 피닉스 님이라고 해야 하나...?]
"......오."
김누리는 단장이 자신을 위해 준비해준 키다리 아저씨가 생각났다.
"단장님 실물 볼 수 있는 거임요?"
여자의 몸으로도 수많은 여인을 후리고 다녔는데, 만약 그 얼굴로 후리고 다녔다면-
"......어라?"
저기, 하늘에서 푸른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는 남자는...?
"......어?"
"넌, 누구지?"
귀를 간질이는 갈색 머리칼 청년의 목소리에, 김누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혹시, 이계인인가?"
타오르는 듯한 푸른 눈동자는, 김누리가 익히 알고 있던 눈동자였으니.
* * *
"어머, 크리슈나. 뭐 하니...?"
뀨잉, 뀨잉, 뀨잉!
크리슈나는 밝은 빛을 내며 하늘을 향해 Y자로 손을 뻗고 있었다.
미친 듯 하늘을 향해, 마구 뛰면서.
"너도 그분이 보고 싶은 모양이구나."
뀨이잉!!
"나도 보고 싶어."
뀨이이이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