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024화 (1,024/1,497)

EP.1024 3부 3장 11

신라와 데이트를 하러 간다.

요즘 매일 집에서 갇혀 지낸 지 꽤 됐고, 얼마 전에 석하랑과 부산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역시 신라와 함께 어딘가로 간다는 건 언제나 나를 기쁘게 만든다.

신라!

데이트!

기쁨!

나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신라는 뭔가 생각이 있는 듯했다.

"뭐 해?"

"데이트 코스 짜는 중이에요."

"코스가 필요해?"

평소, 신라와의 데이트는 대부분 먹으러 가거나, 신라가 이 나라 이 세계의 문화를 체험해보는 게 대부분이었다.

익스트림 스포츠 같은 건 제외.

우주에서 지구로 다이빙을 하며 성주와 죽음의 데스매치를 펼쳤던 우리에게 현실의 익스트림 스포츠는 별 감흥이 없었다.

일반 스포츠를 하기에도 신라의 스펙이 너무 강해서 무리.

결국 영화를 보거나, 차를 마시러 가거나, 이 나라에 있는 문화 유적지나 자연환경을 관찰하거나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여기 가볼래요?

-좋지. 그다음에는 여기 가볼까?

-음, 거기 말고 이쪽 박물관은 어때요?

-성기박물관? 나 참. 이런데 커플이 가면 괜히 욕먹는 거 아니야?

-커플이 아닌데 이런 곳을 와요...?

-보통 여자들끼리 이런데 오는 것 같던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조사하다 보니까.

우리의 데이트는 대부분 즉흥적이었다.

신라는 이 세상의 모든 곳에 관심이 많았고, 나는 신라와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그런데 신라가 이번에는 '목적'이 있는 데이트 코스를 스스로 짜고 있다.

정확히는 '테마'.

지난번 한복 데이트와 달리, 이번에는 데이트를 통해 무언가를 끌어내려는 데이트를 계획하고 있다.

"역시 이유는 테라 때문인가?"

"네. 마음에 드는 건 아니어도 이 데이트로 가장 이득을 보는 건 테라, 아그라마인이잖아요. 앙그네 나라에 있는 사람들이나 정령들, 조금 싫기는 해도 테라 사람들이니까."

이번 데이트는 단순한 데이트가 아니다.

우리의 데이트가 영상이 되어 편집될 것이며, 이는 아그라마인에 살포될 로맨섹스 판타지 드라마의 다음화가 될 예정이다.

즉, 신라는 아그라마인 사람들을 배려하는 코스를 짜는 중이다.

"착하네."

"신의 자비죠."

나는 신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가 짜는 코스를 살폈다.

신라도 딱히 숨길 생각이 없는지, 인터넷을 여러 곳 둘러보며 어딘가를 찾고 있었다.

"오락실?"

"네. 아무래도 아그라마인 사람들에게는 이런 곳이 익숙하지 않겠어요?"

"...너무 편견 아니야?"

"솔직히 아그라마인 사람들의 성향이 이쪽 아니에요?"

"...그건 그렇지."

아그라마인 사람들 대부분은 외향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누군가 강력하게 여행의 목적지를 이끌어주는 게 아니라면 여행 자체를 다니는 걸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조금 힘들지.'

여행을 계획하는 입장에서는 아무거나 다 좋다고 하는데, 진짜 좋아서 따라오는 건지 아니면 반론이나 대안을 꺼내기 싫어서 따라오는 건지 헷갈릴 때가 많다.

차라리 신라처럼 대놓고 역사 유적지구보다는 그래도 성기박물관도 한번 가보자면서 제안하는 게 낫지, 그냥 '좋네', '나쁘지 않네', '사진이나 찍고 가자'같은 말을 하는 경우는 사람을 살짝 화가 나게 만들기도 한다.

데이트 코스를 자기가 짜는 것도 아니면서.

자기한테 맞춰서 코스를 짰는데, 나쁘면 사이드로 준비한 코스로 빠지면 되는데, 그냥 영혼 없이 따라다니면서 사진만 찍고 다니면 준비한 사람으로서는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그리고 아그라마인의 사람들은 이렇게 준비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그라마인 사람들, 별스타 감성으로 데이트 코스 짜면 버틸 수 있을까?"

"초반부에 너무 인싸 농도가 높으면 아그라마인 사람들 감당하지 못할걸요? 일단 초반 컨셉을 여자가 리드하는 거로 잡았잖아요."

"그렇긴 하지."

아그라마인의 사람들이 가진 성향을 생각해보면, 여주인공이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거라면 몰라도 괜히 인싸형 주인공이 되면 안 된다.

"남자 주인공은 밖에서 사람들 많은 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가 빨리는 사람이에요. 여자가 사람들을 상대로 배리어가 되어줘야지, 클럽 같은데 데려가면 바로 기절할걸요?"

집-회사-집-회사.

주말에는 집에만 있고, 친구를 만나러 갈 일이 없거나 만날 친구도 없다.

차를 샀는데도 일주일에 한 번 탈까 말까.

24시간 집에 있다가 밖으로 나가는 건 편의점에서 캔 커피를 사러 갈 때뿐.

취미는 집에서 조용히 TV를, 영화를, 애니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정도.

누군가는 취미 생활에 돈 좀 쓰라고 하지만, 돈은 쓰는 것도 없는데 나가는 건 더럽게 많아서 부유해지지도 않는 삶.

그런 무미건조하고 무채색의 세상이야말로 아그라마인 그 자체.

회색 세상 속에서 백탁액만 가득한 아그라마인에 연분홍빛 봄바람 휘날리게 하며 벚꽃이 만개하도록 유도하는 게 이 영상을 찍는 목적이다.

"여자가 남자에게 관심을 보여주는 데이트는 말이에요, 남자가 관심이 있는 곳부터 접근해나가야 하거든요? 아그라마인 사람들의 보편적인 관심사부터 접근하자고요. 가볍게."

"나한테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당신은 섹스에 미쳐있어서 그랬고요."

"......."

내가 관심이 있던 곳이 오직 섹스뿐이었다니.

이건 음해다.

"야. 말은 바로 해야지. 누가 너무 예뻐서 가는 곳마다 시선 끌리는데 제대로 즐길 수나 있어?"

나는 신라의 볼에 손을 올리고 빙글빙글 돌렸다.

"영화관 가면 인간들 너 몰카 찍는다고 난리 쳐, 인파 많은 곳 가면 너랑 나 자꾸 사진 찍어대, 어디 조용한 수목원 같은 곳 가도 음습한 놈들 뒤에서 따라오면서 너를 뒤에서 촬영하지, 백화점 나가면 아주 개저씨들이 지랄하는 거…."

"히힛. 여신의 남편이 된 거니까 양해해주세요. 대신 집에서 할 거 다 하잖아요."

"그러니까 하는 얘기 아니야. 내가 너랑 섹스만 하고 싶은 게 아니라니까?"

"그럼요?"

"사랑하는 사람과 추억을 함께 쌓아나가고 싶은 거지."

신라가 워낙 미인이다 보니 조금만 꾸며도 금방 파리들이 꼬이게 된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추억을 더럽히는 놈들밖에 없잖아. 사진을 찍었는데 저기 멀리서 네 쪽으로 카메라 들이밀고 있던 놈을 발견한 내 심정을 네가 알아?"

지난번 한복 데이트도 상대적으로 펑퍼짐하게 옷을 입어서 그렇지, 청바지만 입어도 뒤에서 애새끼들이 몰래 폰카로 찰칵거리더라.

옆에서 내가 팔짱을 끼고 간다거나, 허리에 손을 올리고 간다고 해도 마찬가지.

이건 뭐 히잡을 씌워야 하는 것도 아니고, 신경 쓰이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후후. 내로남불 아니에요? 20년의 지구에서나 인게임에서는 다른 사람들 사진이나 영상 퍼지는 거에 신경도 안 쓰거나 오히려 이용하더니."

"내가 하면 로맨스잖아."

나는 신라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신라는 내 말에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무 당당해서 웃음이 나오네요. 누구보다 제 몸으로 당당히 전 세계를 활보하셨던 분이."

"가릴 건 전부 다 가리고 다녔지. 내가 그 많은 옷 중에서 굳이 어울리지도 않는 수녀복 입고 다닌 게 다 누구 때문인데? 네 육신 지키려고 그랬던 거 아냐."

"가루라랑 다른 애들은요?"

"신라가 아니니까. 도플갱어 같은 것까지 신경 쓰면 머리 아팠거든."

"...후후, 하긴. 뭐 완전히 똑같은 것도 아니었고…. 아, 찾았다."

신라는 눈을 반짝이며 목적지를 가리켰다.

"우리, 여기가요. 여기."

"...잠깐. 부산? 서울로 가는 게 아니고?"

"부산에도 오락실이 있겠죠. 서울은 어딜 가도 사람이 많으니까, 사람 없는 조용한 곳으로 가는 거예요."

"...지금 하랑이 티배깅 하려는 건 아니지?"

"으앙 들킴."

신라는 키득거리며 내 손을 잡아당겼다.

"...사실은 하랑이가 아니라, 다른 사람 놀리려고 하는 거랍니다."

"뭔데?"

"루살카 코스로 한 번 가보려고요."

"...뭐?"

"그렇잖아요. 광검이랑 루살카만큼 확실하게 여자가 리드한 커플이 있나요? 없죠? 당신과 저는 굳이 따지자면 당신이 계속 당기고 저는 계속 밀어낸 경우잖아요."

"그렇긴 하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갈 때마다 살해당했으니, 신라에게 닿기까지 정말 많이도 고생했다.

"그런데 광검은 그냥 바닷가에서 건져준 것만으로 루살카를 꿀꺽했잖아요. 게다가 루살카가 일부러 광검 고향으로 내려가자고 했고, 그 뒤에 부모님을 잃은 광검 옆에서 정신적 지주도 해주고. 그때 루살카가 광검의 기운를 북돋아 준 것처럼 데이트하는 거죠."

"과연…."

무기력한 남자와 그 원기를 깨워주려는 여자.

아그라마인 사람들에게 100% 먹힌다.

"이게 만약 티배깅이라고 한다면, 그건 하랑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티배깅이랍니다."

"누구?"

"물의 여신 루살카."

"......."

나는 신라의 계책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남자에게 반해서 암컷이 된 모습을 보면 그 여자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푸흐흐."

신라는.

절풍을 가장 혐오하는 것 같지만, 절풍과 마찬가지로 루살카-설야 또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걔, 이런 거 좋아할걸요? 드라마 보는 감성으로 보면서 아주 기뻐하다가...."

절풍은 그래도 테라가 오염되는 과정에서 싫어진 거지, 설야는 본래부터 싫어했던 것으로 안다.

"사실 여주인공의 모티프가 자기였다는 걸 알면 무슨 느낌이 들까요? 그것도 미래의 자신이 인간을 상대로 만나자마자 역강간 해버린 건? 푸흐흐."

불이 물을 싫어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앙그한테 편집해서 보낼 때, 나중에 로하랑 스킨 씌울 수 있으면 한 번 씌워서 물의 나라에 뿌려버릴까요? 너네 여신이 이렇게 남자 역강간하고 국밥 먹으면서 아양 떤다고."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너는…?"

"저는 암컷이 된 게 아니라, 아내이자 엄마가 된 거잖아요. 그리고 당신이 말했죠? 내로남불이라고."

"......."

하긴.

"그런데 너 있잖아.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는 것 같은데?"

"뭔데요?"

"루살카의 데이트, 8할이 섹스 아니야?"

"......."

오마케를 봤던 내가 기억하기로는 분명 부산 일대 전체에 영역표시를 하듯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부산에 있는 모텔 다 돌아다니면서 섹스할 생각이야?"

"모텔은 아니고…."

신라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스파 펜션이요."

"......."

"오션뷰."

"그, 너무 인싸 감성 아니야...?"

"푸흐흐. 왜요? 쫄?"

"......예약해."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힌 신라의 볼을 가볍게 토닥였다.

"수영복은 내가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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