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016화 (1,016/1,497)

EP.1016 3부 3장 03

아그라마인.

이곳은 어둠의 도시라고 했지만, 딱히 도시가 어둠으로 가득한 건 아니었다.

'그냥 도시인데?'

오히려 그냥 평범한 도시에 가까웠다.

단지 내가 '테라=판타지 세계'라고 생각했던 선입견이 박살이 났을 뿐.

"택시!!"

"어, 나야. 이제 집에 들어가려고."

"집에 들어가서 넷에서 만나자."

'여기 완전 서울이잖아.'

이곳은 서울이었다.

무슨 의미냐 하면, 콘크리트의 도시로 구축된 판타지식 SF 서울이었다.

인파로 가득하고, 사람들이 넘쳐나고, 항상 바쁜 사람들로 가득한 미래의 도시.

'설마 테라에서 네온사인이 가득한 거리를 보게 될 줄이야.'

뭔가 미묘하게 전부 섞여 있는 듯한, 뭔가 미묘하게 현대의 감성이 들어가 있는 듯한 디자인이었다.

거리를 가득 채운 네온사인.

마도 기어를 연상케 하는, 저마다 자신만의 통신기기를 가지고 각자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

콘크리트의 숲처럼 생겼지만, 당연히 건물은 콘크리트가 아닌 흑요석이나 검게 칠한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사실 가장 이곳이 서울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이유는….

'테라에 전봇대가 있다니.'

일정 거리마다 전봇대가 높이 솟아있었다.

검은 선이 줄줄 이어진 게 아무리 봐도 전선과 전봇대였지만, 눈에 마나를 흘려 보니 전혀 달랐다.

전선에 마력이 흐르고 있다.

전봇대에서 흘러간 작은 전선이 각 건물에 뻗어 나가고, 건물 안으로 촘촘한 선들이 뻗어 나가고 있다.

즉, 이 나라에서 전기는 마력이다.

지저 왕국 가이아나도 약간 이런 느낌이기는 했는데, 실제로 이런 모습을 보니 다소 충격적이다.

'이거 혹시 지구에서 누가 미리 넘어온 거 아니야?'

혹시나 지구에서 온 무언가가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지구에서 넘어온 누군가가 무분별하게 지구의 문명을 퍼뜨려서 뭔가 악영향을 미친 건 아닐까?

'그건 아닌 것 같네.'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일으킨 트롤링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또 그건 아닌 것이 건물 자체와 문화 자체가 오래되었다고 하더라.

이런 문화, 이런 도시의 구조는 최소한 수십 년에 걸쳐서 발전한 게 아니면 만들어질 수 없는 형태다.

"음. 테라-서울이군."

테라든 이세계든, 그냥 특이한 동네라고 생각하는 편이 건강에 좋을 것 같다.

'적응하기는 쉽겠어.'

판타지 왕국 그 자체였던 빛이국이나 기계문명이 발전한 지저세계보다는 확실히 더 내가 움직이기 쉽다.

현실처럼 움직이면 되니까.

'유리로 다 보여서 다행이다.'

나는 바로 의류점을 찾았다.

의류점으로 보이는 곳은 굳이 힘겹게 찾아볼 필요가 없었다.

'유리 벽 너머에 마네킹이랑 정장 있으면 그게 의류점이지.'

너무나도 익숙한 거리였기에, 나는 처음 와보는 곳임에도 금방 양복점을 찾을 수 있었다.

굳이 옷을 사는 이유?

가이아나 왕국에서 챙겨 온 옷을 입고 있으니, 괜히 여행자인 티를 낼 필요는 없었다.

마력으로 짜 맞추지 않은, 평범한 정장 확보 완료.

마음 같아서는 그냥 마력으로 만든 옷을 입고 다니고 싶지만….

'괜히 걸릴 수 있으니까.'

섬유로 된 옷을 입고 다니는 수많은 사람 중에 마력으로 짠 옷을 입은 놈이 있다?

무조건 위험분자로 분류된다.

그럴 바에는 그냥 현지에서 정장을 사는 게 낫다.

'최대한 조심히 움직여야지.'

이곳은 어둠의 땅.

아지다하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인간이 가장 마음의 어둠에 물들기 쉬운 곳이다.

끼이익.

나는 유리문을 열고, 자연스럽게 의류점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손님."

"......."

나를 맞이한 사람은 놀랍게도 정장을 입은 서큐버스였다.

정장을 입은 서큐버스라.

아그라마인이 마족이 많이 섞여 있는 도시라고 듣기는 했지만, 설마 서큐버스가 정장을 갖춰 입고 접객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정장을 한 벌 새로 맞추려고 합니다만."

"인간 사이즈는 기성복밖에 없을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예."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오셔서 골라주세요."

서큐버스 점원은 나를 마네킹이 있는 방향으로 안내했고, 나는 적당히 마네킹 중 내 체형과 얼추 비슷한 옷을 가리켰다.

"네. 금방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옷은…."

"여기서 갈아입을 거니까, 결제하고 바로 갈아입도록 하죠."

"네, 네?"

"안 됩니까?"

"아뇨.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럼 부탁드립니다."

나는 종업원에게 바로 금화를 건넸다.

다행히 화폐는 테라 전체가 통일되어 있어, 가이아나 왕국에서 가져온 화폐로 아주 쉽게 결제할 수 있었다.

다만.

'온통 검은색이네.'

셔츠, 넥타이, 조끼, 바지, 자켓.

어느 하나 빠짐없이 전부 검은색이다.

아무리 어둠의 나라라고는 하지만, 너무 검은색 일색인 건 아닐까.

'나중에 다른 색 있나 확인을ㅡ'

"...어, 존잘이야...쓰읍…."

"......?"

내가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사이, 카운터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내려와 봐. 한 번만 보고 가라니까? 아주 그냥 질질 지릴걸?"

"......."

이놈의 인기란.

역시 종업원이 친절하게 대해준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잠깐 담탐 한다고 내려오면 되잖아! 아니면 화장실 간다고 하든가. 후회한다니까?"

아마도 같이 일하는 동료거나 그런 사람일 터.

상대가 내려오든 말든, 나는 묵묵히 옷을 마저 갈아입ㅡ

"나, 오늘 한 발 제대로 뺄 수 있을 것 같아…!"

"......."

안 들린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들린다.

"이런 반찬 또 없어. 얼굴만 봐도 오늘 아주 질질 분수 터질 거야. 하, 씨발. 오늘 집에 가서 딜도 뒤졌다…. 하아."

종업원 서큐버스가 아무래도 발정기인 듯하다.

지나가는 바람만 스쳐도 발기하는 혈기 왕성한 청년도 아니고, 지금 손님을 상대로 음습한 생각을 하다니.

'뭔가 익숙한데.'

뭔가, 진짜로 익숙하다.

이 느낌은 분명 어디선가 느껴본 흐름이다.

"하, 쓰읍…. 셔츠랑 바지만 입혀놓고 유두 존나게 간지럼 태우고 싶다…."

분명 현실인데, 나는 뭔가 커뮤니티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커뮤니티라기보다는....

"시간 있을 때 내려와서 봐봐. 걸어 다니는 섹스라고, 섹스."

상당히, 성에 대해서 개방적이다.

* * *

정보가 필요하다.

정장을 갖춰 입은 나는 조금 더 정보를 얻기 위해, 정보를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곳이 내가 생각하는 서울과 비슷한 곳이라면, 분명 그곳에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이 있을 터.

룸카페.

객관적으로 가장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은 당연히 피시방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피시방의 구조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피시방에서 자료 찾을 수는 없지.'

오픈된 장소인 피시방에서 함부로 아그라마인의 자료를 조사할 수는 없다.

이곳도 나름 성인에 대한 최소한이 조치가 이루어져 있을 테고, 공공장소에서 함부로 이상한 걸 보면 분명 잡혀갈 테니.

감옥에서 시작하는 아그라마인 생활.

할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정보를 찾아야 한다면....

'밀폐된 곳에 있는 컴퓨터를 찾으면 되지.'

나는 거리를 서성이며 간판을 염탐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각자의 생활을 즐기고 있었고, 나는 이리저리 사람들을 피해 다니며 임시 베이스캠프를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혼자 오셨나요?"

"네, 혼자입니다."

룸카페가 있었다.

"개인실 있죠?"

"네, 밀폐형으로 있습니다."

"10시간 정액으로 끊어주세요."

"선불입니다."

너무나 익숙해서 어색할 지경이다.

"음료는 무한 리필이고요, 컵은 사용하시고 저기 꽂아두시면 됩니다."

"예...."

나, 지금 어디 서울에 온 건가?

의아함이 계속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지만, 개인 방으로 들어오고 나니 뭔가 생각이 달라지는 듯한 기분이다.

"...이거 진짜 그냥 넷 카페잖아."

그저, 넷 카페 그 자체.

나는 눈앞에 있는 컴퓨터처럼 보이는 기계의 전원을 켰다.

띠디디딩.

'누가 여기 와서 현대문물 전파한 게 분명한 것 같은데?'

사운드는 다르지만 버튼을 누르자마자 켜지는 컴퓨터라니.

조금 특이한 게 있다면, 컴퓨터가 마력으로 돌아간다는 것뿐.

"와."

UI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PC보다는 태블릿 쪽에 가까운 인터페이스였지만, 마력의 흐름이 보이니 조작하는 방법은 너무나도 쉬웠다.

'애초에 조작하는 법을 보고 들어왔으니까.'

피시방에 들어가서 사람들 하는 걸 은근슬쩍 구경한다거나, 마도 기어 같은 단말을 파는 곳 안쪽에 있는 직원들이 일하는 걸 멀리서 지켜본다거나.

그렇게 나는 컴퓨터-실제로 이름은 다르겠지만-의 조작 방법을 익혔다.

'인터넷.'

대충 인터넷처럼 생긴 걸 누르자, 바로 브라우저가 하나 열렸다.

'마도기어를 조작하는 거랑 비슷해.'

조금 투박하지만, 상당히 비슷하다.

마력을 이용해 화상키보드를 꺼내고, 마우스 손을 뻗어 직접 화상을 조작하는 행위.

'어쩌면 이쪽이 원조였을 지도?'

마도기어라는 개념은 분명 현실에서도 공상과학 영화에서 주로 나올 수 있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최소한 10년, 아니 20년은 기술이 앞선 천재 과학자에게서나 나올 법한 기술인 만큼, 20년의 지구에서 마도기어 같은 물건은 쉽게 나올 수 없었을 터.

어쩌면 테라에서 넘어온 존재들, 특히 간부들을 비롯한 괴인들이 마도기어의 개념과 방식을 퍼뜨린 걸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이런 걸 사용하다가 2000년의 지구에 떨어졌다?

당장 패킷이 오가는 속도 때문에 답답해서 죽을 터.

'다행히 여기는 좀 빠르네.'

집에서 컴퓨터를 하는 것과 큰 차이는 없다.

"......."

나는 방 안에 마력을 뿌렸다.

혹시나 방 안에 CCTV 같은 것이 설치되어있다면, 프라이버시에 상당한 악영향을 미치리라.

'조심해야지.'

내가 이 정보를 조사한다는 걸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된다.

"......없기를 바라야지."

만약 있다면, 나는 이 어둠의 세계를 없애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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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다행이다."

있었으면 모두 없애버렸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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