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014화 (1,014/1,497)

EP.1014 3부 3장 01

테라는 상당히 오랜만에 오는 느낌이다.

그간 주기적으로 테라에 진입해서 상황을 확인하고는 그랬는데, 아무래도 석하랑과의 부산 여행 이후 시간이 많이 흐른 듯한 기분이다.

"어라, 피닉스 님...?"

"음."

가이아나 왕국에서 나를 보좌하는 메이드, 빛이국 출신의 공주-유독 카르나를 닮은 금발금안의 '하리'가 나를 보며 놀랐다.

"왜 그러지?"

"아, 아뇨. 갑자기 모습을 바꾸셔서."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살폈다.

아마 가이아나 왕국에서 마지막으로 취했던 모습이 어린 소년의 모습이었던 거로 기억한다.

가이아나 왕국의 어둠을 거두는 데 큰 도움이 된 만큼 앞으로도 전략적으로 써먹을 생각이지만, 이제는 굳이 일부러 모습을 바꿀 생각은 없다.

그리고 또, 다른 방향으로 나의 몸을 테스트해 봐야 하는 것도 있고.

"당분간 이 모습으로 지낼 것 같다."

"아, 그렇구나.... 그러시구나...."

하리는 몹시 실망한 듯 보였다.

다 큰 성인 남자가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변해버렸는데 왜 이렇게 사람들은 좋아하는 걸까.

여러모로 이해할 수 없는 취향이지만, 신라가 그런 걸 좋아한다면 나는 바로 내일 응애가 될 의향도 있다.

즉, 신라가 상대가 아니라면.

즉, 어린아이로 변하는 게 나의 행동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굳이 이제는 어린아이로 모습을 바꿀 필요는 없다는 말.

"하리. 그동안 별일 없었지?"

"네. 정말...아무 일도 없었어요."

"역시나."

아무 일도 없다.

그것은 즉,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

혹은 가이아나 왕국에서는 관측하지 못했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혹시나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말.

"하리, 가이아나 왕국의 체제 전복 사태에 대해서 다른 곳에서 혹시 뭐 연락 오거나 그런 경우 있어?"

"아뇨, 없어요. 신관이 공석이라는 게 조금 뼈아프기는 하지만, 신께서 직접 신탁을 내려주시니까...."

"네오나치 녀석들은 따로 나온 녀석이 있고?"

"아뇨. 없어요. 모습을 꼭꼭 숨겨버렸어요."

"음...."

20년의 지구에서 넘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네오나치들은 전부 자취를 감췄다.

우리는, 청화단은 가이아나 왕국에 남은 네오나치의 부역자들을 확실히 처리하는 데 성공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네오나치들을 일망타진하는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아마도 가이아나 왕국에서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거나, 혹은 어둠의 존재, 혼돈의 세력에게 잡아먹혔거나.

그래서 가이아나 왕국 사람들의 인지에서 벗어난 곳에서 활동하고 있거나.

"아무래도 나는 그 녀석들을 잡으러 가야 할 것 같아."

"네, 그럼 저는...."

"여기에 있어."

"...네?"

하리는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저, 저 여기에 그냥 있어요...?"

"그래. 크리슈나랑 같이."

수상할 정도로 눈이 금빛 별로 반짝이는 정령 생명체와 함께, 나는 가이아나 왕국으로 왔던 일행인 하리를 가이아나 왕국에 두고 움직일 생각이다.

"이번에는 단독으로 움직이는 게 중요해서 그래. 상황을 파악하고 난 뒤에는 다시 데리고 다닐 테니까, 너무 그렇게 버림받은 강아지가 주인 보듯이 바라보지 마."

"그, 그렇게까지 바라본 건 아닌데...."

"뭐가 아니야? 지금 딱 그런 눈빛인데."

하리는 겸연쩍게 웃으며 딴청을 피웠다.

카르나의 얼굴로, 카르나의 몸으로 저러고 있으니 여러모로 언밸런스하기는 했지만....

'아무렴 어때.'

내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카르나, 개천광을 닮은 여인이 이상한 아저씨에게 강제로 결혼을 당해서 앙앙응응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걸 구해준 대가가 이런 의존증이라고 한다면, 그냥 의존증을 해소해주는 것으로 충분할 터.

"하리. 내가 지난번에 말했던 것 같은데, 나는 어디에든 존재할 수 있다."

"그런 얘기 하셨어요?"

"지나가면서 한 번 했을 거야. 굳이 기억하려고 하지는 마."

나는 하리에게 땅을 가리켰다.

"만약에 네가 위험에 빠지면, 무조건 땅에 피부를 대고 있어야 해. 알겠지? 무조건 바닥이야."

"바닥이요...?"

"그래. 땅과 연결되어있는 부분이면 좋고, 어디 마력의 힘으로 하늘에 떠 있는 공간이나 몸이 떠 있거나 하면 안 돼. 그래야 내가 바로 나타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가볍게 바닥을 두드렸다.

가볍게 마력을 일으키며, 하리에게 선물을 하나 건넸다.

"이번에는 이거야."

"이건...구슬이네요?"

"위험한 순간, 이걸 손에 쥐고 '창염개진'이라고 외치면 돼."

"차, 창염...."

"지금은 말고. 그냥 보여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나는 하리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진 뒤, 하리를 향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라운드 월.'

손가락을 튕기기 무섭게, 바닥에서 흙이 솟아나 순식간에 하리를 덮었다.

"꺄악?!"

마치 종처럼, 아이언 메이든 속에 갇힌 것처럼 하리는 기겁을 하며 벽을 두드렸다.

나는 그녀에게 안쪽을 가리켰고, 하리는 불안해하며 안쪽을 유심히 살폈다.

"아, 앉으라고요....?"

"그래."

하리의 뒤에는 그녀가 앉을 의자가 있었다.

하리는 순순히 내 지시에 따라 엉덩이를 붙이며 자리에 앉았고, 나는 방 안에 있는 촛대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

까ㅡㅡㅡ앙!!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나는 촛대를 아이언 메이든에 휘둘렀다.

하리는 깜짝 놀라며 눈을 질끈 감았고, 한쪽만 뜨며 벌벌 떨었다.

"......어?"

아이언 메이든은 안전했다.

오히려 아이언 메이든의 외형 때문에 촛대가 휘어졌다.

"미안, 내구도 테스트로 얼마나 단단한지 알려주려 했는데 놀라게 해버렸네."

"저, 정말...놀랐잖아요...."

놀라게 하려고 예고도 없이 휘두르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겁을 먹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안에 있으면 무조건 안전해. 신이 와서 이걸 부수지 않는 이상, 이걸 막을 수는 없어. 알겠지?"

"아, 알았어요. 그런데...."

하리는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이것도, 허락 없으면 함부로 나가면 안 되죠...?"

"......."

만들어둔 결계 밖으로 제발 나가지 말 것.

하리는 나의 신신당부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당연하지."

내 인생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지만, 나의 PTSD를 자극하는 요소가 몇 개 강렬한 게 존재한다.

트롤링 중에서도, 나를 뼈아프게 찌르는 트롤링이.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고, 안에서 급한 용무도 해결할 수 있으니까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알겠지?"

"......그냥, 안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거잖아요."

"당연하지. 이게 만들어지는 순간은 내가 나서지 않으면 해결이 되지 않는 상황이니까."

내가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제발 얌전히 좀 있어라.

나만이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안 만들어지는 게 가장 좋지만, 이 세계도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모양이니까.

* * *

하리에게 내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의 안전장치를 만들어 둔 뒤.

나는 광속성의 유사 정령, 크리슈나를 찾아 나섰다.

"음...."

생각보다 찾는 건 쉬웠다.

녀석은 얌전히 창고 근처에서 누워있었고, 나는 자는 녀석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움찔.

"역시."

녀석은 깨어있었다.

명백히 나를 경계하면서도 반기는 듯한 눈빛이었다.

꼭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염탐하는 듯했다.

'꼭 고양이 같네.'

애완동물은 키워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너, 하리한테 꼭 달라붙어 있어."

내가 하는 말이 잘 전달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똑똑한 녀석이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이해할 것이다.

"나는 지금부터 다른 곳으로 멀리 가야 해. 그동안 네가 하리 옆에 붙어서 하리가 무슨 이상한 짓을 하지 않게 잘 감시해줘. 알겠지?"

미니 피닉스를 남겨두기야 하겠지만, 미니 피닉스 조금 남겨두는 거로 세상만사가 전부 해결되지는 않더라.

더군다나 내가 이제 떠나야 할 곳은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

'변수를 만들 수는 없지.'

하리도 그렇고, 크리슈나도 그렇고.

둘 다 내게는 아직 신뢰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의심한다기보다는, 어떤 방면에서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는, 그야말로 히로인과 같은 존재라고 해야 할까.

'왜 하필이면 크리슈나가 생긴 모양이 이래서.'

나는 크리슈나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예전에 볼 때는 딱히 별생각이 없었지만, 인게임에서 신라가 카르나를 만나러 간다고 하니 떠올랐다.

카르나 루트에서만 만날 수 있는 괴수체, 그러니까 폭주 카르나에게서 혼돈의 요소를 제거하고 귀엽게 데포르메로 만든 것 같은 모습이었다.

마치 김펜릴이 길냥이로 변하듯, 이건 마치 카르나가 크리슈나로 바뀐 듯한 형태였으니.

'불안하게도 생겼네.'

귀엽기는 한데, 귀여운 만큼 뭔가 큰 사고를 저지를 것 같다.

혹은, 이미 큰 사고를 저질렀거나.

"하리를 잘 지켜줘. 알겠지?"

뀨이잉.

녀석은 마나를 뿜어내며 내게 반응했다.

그간 크리슈나도 봐온 게 있으니, 분명 하리를 잘 지키며 어디 사고를 치지 않을 터.

"그럼...."

나는 크리슈나를 내려놓았다.

마침 사람이 없는 창고였고, 괜히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떠나는 건 귀찮은 일만 생길 뿐이었다.

피닉스가 어디론가 가려고 한다더라.

그런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는 건 좋지 않은 일.

특히나 나의 존재를 알고 있는 적이라면 더더욱.

'모습은 바꾸는 게 좋겠지.'

주변에 보는 사람이 없....

"......."

보는 이라고는 크리슈나뿐.

나를 계속 빤히 바라보고 있기는 하지만, 크리슈나는 어디 가서 뭔가를 말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그렇다면.

'딱히 드러내도 상관없지 않나?'

어차피 나중에 전부 다 알게 될 거.

여기서 확 공개해버린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다.

"나의 곁으로 오라."

나는 가벼운 영창과 함께 앞으로 손을 뻗었다.

"여신 강림."

사아아.

내 앞에 나보다 더 키가 큰 갈색의 빛무리가 나타났다.

황갈색의 빛무리를 가진 그녀는 나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마치 세례를 하듯 손을 움직였고, 나는 가만히 그녀의 세례를 받았다.

여신, 이유나의.

그리고.

고오오오.

내 머리칼의 색이 물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검은색과는 다른, 유나 특유의 황갈색으로, 어찌 보면 금색 같기도 한 유나만의 색깔로 물들어간다.

"......음."

눈은 여전히 창염을 띄고 있다.

하지만 내 코어, 이 아바타에 깃든 마력의 반응은 전혀 다른 마력을 뿜어내고 있다.

창염.

그리고 지륜.

두 정령의 힘이 하나로 깃든 나는, 그야말로....

창염, 더 마그마-피닉스.

"그라운드 제로."

나는 가볍게 발을 굴러, 땅속으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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