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1013화 (1,013/1,497)

EP.1013 2(-1)부 10장 26

"당신, 그러고보니 테라는 어떻게 됐어요?"

"주기적으로 가고 있지."

마냥 놀고 먹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정기적으로 테라에 가서 상황을 보고 있다.

애초에 그곳은 내가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서 돈을 벌기도 하고, 과거의 신라를 구해야 하는 곳.

최근 며칠간 신라의 게임에 집중하느라 신경을 다소 쓰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과거의 신라를 구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비치의 나라 공주님 하리도 잘 지내고 있고, 대지의 나라에 있는 네오나치들도 제대로 잘 관리하고 있어. 나 혼자서는 감당하기 조금 어려운 문제라 테라의 청화단이 아래에서 일하고 있지."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별반 큰 문제가 없었다?"

"정확해."

아무런 이슈가 없었다.

딱히 혼돈의 세력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그곳을 본격적으로 관리해주는 다른 존재가 있었다.

"유나가 지금 남는 시간에 테라 관리하고 있잖아. 대지의 정령신으로서."

가이아나 왕국의 신관을 제압하면서, 유나는 대지모신의 위상에 자신을 덮어버렸다.

간부의 인격이 정령의 인격과 융화되듯, 유나는 대지모신과 하나가 되어 가이아나 왕국을 다스리고 있다.

낮에는 이세계의 신.

밤에는 스트리머.

그런 이중적인 생활을 하며, 그녀는 나와 마찬가지로 테라로 통하는 아바타를 만들어 수면 중에는 테라를 관리하고 있다.

"오히려 테라에 관심이 없었던 건 너 아냐?"

"음.... 하긴, 그런 것도 없잖아 있죠."

나나 유나나 둘 다 알게 모르게 집중적으로 테라를 관리해서, 신라는 테라 쪽에 별반 관심이 없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했다.

그녀에게 있어, 그곳은 아픈 기억이 남아있는 곳이니.

살면서 단 한 번도 패배를 겪어보지 못했던 존재가 스스로 깃발을 꺾었으니, 그 굴욕은 지금도 신라의 마음 한 켠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신라가 복수를 할 생각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신라가 테라에 관심을 보이는 경우는 오직 하나.

"테라에 있는 화속성 신을 만나게 될 때 얘기해주세요. 당신의 손에 따먹히는 걸 한 번 보고 싶으니까. 푸흐흐."

"네가 레즈보빔으로 범해버리고 싶은 건 아니고?"

"맛있는 건 남편 먼저 먹이고 싶은 게 아내 심정 아니겠어요?"

"그게 과거의 너인데?"

"20대 후반에 만난 예비신부의 20대 초반을 따먹을 수 있다면, 누구나 다 하고 싶을 걸요?"

"그런가."

과거의 자신을 레즈보빔으로 따먹을 생각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다.

"처녀 패러독스가 일어나겠군."

"그건 또 무슨 이상한 소리예요?"

"너의 처녀는 내가 여기서 가져갔는데, 과거의 테라에서 내가 너를 따먹으면 모순이 생기는 거잖아."

"무슨 이상한 소리를.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쪽.

신라는 내 손등에 가볍게 키스를 하며 윙크했다.

"하신라로서도, 창염으로서도, 게임 속 창염의 피닉스로서도. 제 모든 처음은 당신이니까."

"......."

생각해보니.

나는 신라의 처음을 몇 번이고 가져갔다.

처음을 몇 번이고 가져간다는 것이 말이 안 되기는 하지만, 어쩌다보니 신라라는 존재의 처녀를 세 번이나 가진 남자가 되었다.

"게임에서 한 번. 20년의 지구에서 의식 세계 속에서 한 번. 그리고 현실에서 한 번. 이제는 기어이 임신까지 시켰죠. 푸흐흐."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나 엄청 뿌듯한데."

"당신은 뿌듯하겠지만, 저는 왠지 억울하거든요? 확 제가 과거로 가서 당신 동정을 따먹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라고요."

"......."

그 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그러니까 이왕 제 모든 처음을 가져가는 거, 창염의 피닉스보다 훨씬 이전의 원시 피닉스의 처녀도 가져가는 거예요. 알겠죠?"

"알았어, 알았어."

아마 불의 나라까지 가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애초에 지금 신들과 대화를 나눈 게 하나밖에 없잖아.'

비치의 나라에서는 공주인 하리를 납치했을 뿐, 정령과 같은 존재들인 신의 위상과 이야기를 나누고 협력 관계를 맺은 건 가이아나 왕국의 대지모신이 유일하다.

즉, 당장 숫자만 따져봐도 무려 여섯 명의 신이나 남아있다.

"태양이 분유값 벌려면 열심히 일해야지."

"태양이는 모유 먹일 건데요?"

"아기 때부터 딸기우유 먹으면 버릇 나빠져."

"누가 다 모유 빨아먹으려고 하는 건 아니고요?"

"아무리 나라도 내 자식 먹을 걸 건드리지 않아."

나는 신라의 가슴을 가볍게 튕겼다.

"이거, 원래 내 거였다고."

"푸핫. 자식이랑 가슴을 나누는 것도 안 돼요?"

"반 정도는 줄 수 있어. 지금 정하면 되겠다. 이쪽은 내 거야."

농담이지만.

"나중에...."

삐이이.

"...양반은 못 되는군."

연락이 왔다.

유나에게서.

"응, 유나야."

[오빠. 하 사장님 쪽에서 급히 연락이 왔는데요.]

"하 사장?"

[네. 직접 오빠 집으로 찾아가서 말하겠다고 하는데요. 어떻게 하죠?]

"......옆에 있어?"

[네. 바꿔드릴까요?]

"응."

심호흡 한 번, 크게.

"하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하선태.

그의 목소리는 상당히 굳어있었다.

[혹시 옆에 신라 양, 하랑 양도 있습니까? 있다면 스피커폰으로 들어주세요.]

"하랑이 지금...잠시만요."

나는 신라에게 방 안쪽을 가리켰다.

부산 여행 이후 밀린 방송을 한참 진행하는 중이었고, 신라는 조용히 하랑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송 끄고 오는데 시간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죠?"

[테라에 변고가, 아니 테라말고 다른 곳도 변고가 생겼습니다.]

"다른 곳? 어디요?"

[20년의 지구.]

"......아니, 왜?"

거기가 왜?

[아무래도 당신과 위상을 바꿨던 그 놈이, 20년의 지구를 건드린 것 같습니다.]

"......아니, 잠시만요. 이해가 안 됩니다. 그쪽에서 어떻게 20년의 지구를 특정할 수 있습니까?"

[테라포밍.]

"아니."

테라포밍은 실제로 원래 게임에서도 이루어지는 이야기다.

특히 히로인 개별 루트 중에는 테라에서 삶을 이어나가는 이들도 존재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 새끼'가 20년의 지구를?

"자세하게 설명해봐요. 이게 무슨 일입니까?"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 * *

그 시각, 모 회사 건물 최상층.

"세 줄로 요약해서 보고해."

"20년의 지구 사람들이 차원문을 열었습니다. 거기가 하필 재수 없게 과거의 테라였습니다. 그리고 피닉스 님이 간 곳도 거기였고요."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라는 건가?"

대머리는 복잡한 얼굴로 한탄했다.

"세계가 얼마나 넓고 다양하며, 우주에 펼쳐져있는 별의 개수 만큼이나 세계가 다양한데, 하필이면 과거의 테라를 접점으로 현실과 이어졌다? 이게 말이 돼?"

"...누군가를 너무나 만나고 싶어하는 이들의 염원 때문이 아닐까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정확히 딱딱 맞아떨어질 수 있냐고."

대머리는 손가락을 튕겼다.

"혹시 히로인 중에 누군가가 트롤링 한 거 아니냐?"

"아닙니다. 관측은 전부 끝났습니다. 순수하게 우연히 공간이 이어진 겁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거지. 후우."

위잉.

넓은 유리창에 화상 스크린이 펼쳐졌다.

동시에 여러 곳을 훑는 스크린 속에는 서로 다른 세계가 각기 펼쳐졌다.

"아무리 용을 써도 이곳, 한 단계 더 높은 고위차원으로는 넘어오지 못할 거야. 신이 아닌 이상. 그렇지?"

"예. 20년의 지구에 더이상 싱크로 할 수 있는 존재는 없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런데 테라로 피닉스가 내려갔잖아?"

"거기서는 접촉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르죠."

"그러면 말이야."

대머리는 빠르게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만약. 상위 차원에서 내려간 존재가 지상의 존재에게 씨를 뿌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상위 차원으로 승천할 연결점이 생기는 거죠."

"나이스!!"

대머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다.

"그럼 피닉스가 저기서 막 질싸하고 다니면 현실로 넘어올 수 있다는 거 아니냐! 20년의 지구에서 넘어오는 존재든, 아니면 테라의 존재든!"

"이론상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다만."

"다만?"

"지금까지 질싸를 한 적은 없잖아요."

테라에서의 일은 대머리가 직접 관찰하고 있다.

하지만 피닉스는 단 한 번도 다른 여인에게 함부로 질내사정을 한 적이 없다.

마나를 강제로 자궁에 쑤셔넣은 적은 있어도, 실제로 자지를 넣고 허리를 흔든 적은 없다.

"그, 편법으로 어떻게 안 되나?"

"이미 우회로가 만들어진 것 자체도 편법입니다."

"그래, 그렇지."

대머리는 비어있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진짜 섹스에 질싸하는 거 아니면 못 꺼내오나?"

"예."

"정말?"

"예. 가망이 없습니다."

"음...."

대머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아무튼 다른 조건들 다 집어치우고. 결론부터 말하자고."

결론.

"피닉스가 테라에서 섹스해서 임신시키면, 걔는 누구든 꺼내올 수 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럼 됐어."

대머리는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제발, 섹스 좀 하게 해주십쇼...."

"......."

한 신화의 초월적 존재, 오직 유일한 자가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때는, 과연 어떻게 될까.

* * *

"본격적으로 넘어가는 것도 되게 오랜만이네."

넘어가기 전에, 몇 가지 점검.

"만약, 20년의 지구에서 넘어온 이들이 있더라도...."

"함부로 아는 척을 하면 안 돼. 오빠야, 이유 알제?"

"당연히 알지."

나를 아는 자들이 테라에 존재한다.

그럼 그건 대부분 '히로인'이었던 이들일 가능성이 높다.

히로인.

그것은 트롤링이라는 단어를 내포하고 있다.

"트롤링이 아니더라도, 오빠야가 진짜 오빠야인 걸 알면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넘어올라고 할 거다. 그게 히로인들만 그런 줄 아나? 세계를 구원한 영웅을 다시 만나고 싶어하는 이들이 한 둘인 줄 아나?"

"세계를 구한 영웅이 다른 세계로 넘어가서 다시 싸우고 있으니, 그걸 도와줘야겠다! 라고 하면서 나서려는 이들도 있겠죠."

유나는 히죽거리며 내 손을 잡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하랑 언니. 제가 같이 가니까."

"...그래. 퍼뜩 다녀온나. 그리고."

하랑은 밖에서 잠깐 뭔가를 확인하고 있는 신라 몰래, 유나와 내 손을 붙잡았다.

"...물의 나라가서 빨리 물의 신도 덮쳐라. 알겠제? 그래야 나도 간섭할 수 있으니까."

"그래, 그래."

나는 하랑을 진정시킨 뒤, 확인을 마치고 돌아온 신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금방 다녀올게."

"네. 그런데 이거 하나만 약속해요."

신라는, 뭔가 조급해보이는 목소리로 내게 새끼 손가락을 뻗었다.

"만약에."

"만약?"

"정 섹스를 하고 싶거든...거기서는 유나랑만 하는 거예요. 알았죠?"

"...알았어, 알았어."

애초에 테라의 사람들, 정령들과 섹스를 할 생각도 없다.

"사랑하는 아내가 현실에 있는데, 섹스를 왜 하겠어."

큥큥, 다시 스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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