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12 2(-1)부 10장 25
쩌저적.대지가 얼어붙었다.
대지와 함께, 검은 괴물도 얼어붙었다.
"어휴, 힘드네."
백발의 소녀는 우울한 목소리로 손에 들고 있던 스태프를 좌우로 움직였다.
"저거 지금 안에서 계속 날뛰고 있는 거 느껴져?"
"몸이 얼음에 구속된 상태라는 겁니까?"
"정답이야."
하얀 코트를 입고 있는 백발의 청년은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며 손에 든 소총을 만지작거렸다.
K-2.
한반도에 사는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 소총을 들고, 청년은 얼어붙은 괴물을 향해 선 자세 그대로 조정간을 단발에 놓았다.
"쏠까요?"
"아니, 아직. 한기가 안으로 침투하고 있으니까, 얼어붙으면 그 뒤에 쏴죽이면 돼."
"얼음을 해제하면 밖으로 튀어나오는 거 아닙니까?"
"...그럴 지도 모르겠네."
소녀는 주먹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그러면 바로 쏴버리렴."
"아니, 루살카!!"
"그렇게 큰 소리 안 쳐도 들린단다."
소녀, 루살카가 얼음장벽을 해제했다.
그러자마자 바로 검은 괴물은 꿈틀거리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청년은 방아쇠를 당겼다.
타ㅡ앙.
짧은 총소리가 울려퍼졌고, 검은 괴수의 몸에 푸른 불꽃이 내려앉았다.
키이이익!!
검은 괴물은 푸른 불꽃을 꺼뜨리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푸른 불꽃-창염이 그렇듯, 적을 모두 불태우기 전까지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다만.
"생각보다 시간 좀 걸릴 것 같은데요…?"
"저거 계속 난동부리겠지? 그럼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어야지."
탁.
루살카는 두 손을 합장하듯 모아 눈을 번뜩였다.
그러자 바닥을 뒹구는 검은 괴수를 중심으로 거대한 이글루가 형성되어 순식간에 괴수를 가뒀다.
키이익!!
괴수에게 남은 출구는 루살카와 청년이 서있는 곳 뿐.
괴수는 비명을 지르며 출구를 향해 나오려고 했고, 청년은 능숙한 손길로 연발로 돌려 방아쇠를 당겼다.
투두두두두.
푸른 불꽃이 탄환이 되어 날아갔다.
검은 괴수는 탄환에 맞으면서도 앞으로 계속 나아가려고 했으나, 창염의 힘에 의해 점점 몸이 타들어가며 쪼그라들었다.
끼, 이이익….
비명과도 같은 단말마.
검은 재조차 남기지 않는, 안개가 되어 흩어지지도 않는, 마치 존재 자체가 지워지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모습에 청년은 인상을 찌푸렸다.
"...저렇게 사라질 리가 없는데."
"무슨 말이니?"
"괴수라면 코어가 남고, 마룡이라면 사체라도 남아야죠. 저건 괴수도 마룡도 아닌 별개의 존재입니다."
"차원문을 넘어왔는데?"
"차원문을 넘어왔다고 해도, 저건 평범한 괴수가 아닙니다."
청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검은 괴수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오직 창염만이, 이 심장에 깃든 푸른 불꽃만이 저 놈들을 완전히 불태울 수 있어요."
"그럼 너도 그렇고, 다른 '파편'들도 똑같이 할 수 있다는 말이지?"
"예. 아마 제가 처음 잡은 것 같지만."
청년은 K-2를 등 뒤로 걸며 루살카에게 손을 뻗었다.
"루살카 덕분이에요."
"고마워하렴. 그리고 루살카가 뭐니, 루살카가."
"그럼요?"
"장모님이라고 하렴, 13호 군."
"......."
13호.
석하랑에게 할당된 피닉스는 볼을 긁적였다.
석하랑이 사라지면서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가 없어졌지만, 13호는 엄밀히 따지면 '설야의 루살카'에 해당하는 존재에게 할당된 개체.
루살카가 그걸 데리고 다닌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장모님이라는 건 좀 그렇네요. 그러면 제가 그 인간을 장인어른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네."
루살카는 피식 웃었다.
"그 인간은 지금도 아나스타샤랑 섹스를 하고 있겠지. 세상이 다시 위험해지는 것도 모른 채."
"코어 만드느라 바쁜데 놔두죠."
"코어도 적당히 만들어야 할 거 아냐. 지금 하얀 코어가 세상에 얼마나 퍼진지 알아? 다른 것들도 생산량이 그리 적은 편은 아니지만, 수속성 코어는 유럽이랑 아프리카 일대를 전부 충당하고도 남는다고."
코어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피닉스로이드와 간부가 정을 나누어 만들어진다.
카르나와 앙그가 피닉스로이드를 상대로 무한착정을 하여 광속성과 환속성 코어를 뽑아내는 것처럼, 수속성 코어 또한 화수분처럼 생산되고 있다.
괴인 광검과 아나스타샤라는 여인의 섹스로.
아나스타샤는 인간이지만, 분신을 이용해 아이 대신 열심히 코어를 낳고 있다.
"정말, 섹스에 미쳐가지고…어휴."
"루살카도 아나스타샤잖아요."
"조금 다르지? 뭐, 그걸 따질 시간은 없으니까 빨리 너희 피닉스 네트워크에 업로드 하렴. 지금 이계에서 넘어오는 검은 존재들, 성공적으로 제거하려면 창염의 힘이 필요하다고."
창염의 힘.
세계를 정화하는 푸른 불꽃의 힘은 여전히 이 지구 상에 남아 오염된 것들을 정화하고 있다.
그래.
구원 이후.
한동안 잠잠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나타난 '검은 존재'들이 전 세계를 다시 불안에 떨게 한 이후, 청화단은 창염의 피닉스가 남긴 힘들이 그것들을 충분히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가장 진하게 남은 궁극의 힘은 당연히 그의 파편.
"이제 너희들 바빠지겠네. 후후."
창염의 피닉스 '1/100*1/16'가 함유된 각각의 피닉스로이드들 중 일부는 파트너와 함께 전세계를 누비며 검은 흔적들을 제거하고 다닐 것이다.
구원으로 얻은 세계 평화를 위해서.
다만.
"루살카.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을 겁니다. 저희의 창염은 만능이 아니니까요."
"피닉스의 조각이 할 말은 아니네. 어떻게 창염이 만능이 아니야?"
"신이 아닌 S급밖에 안 되는데, 어떻게 만능이겠어요."
13호는 자신의 가슴, 심장부를 가리켰다.
"태양광을 받아서 쌓이는 마력보다 소모되는 마력이 더 클 겁니다. 앞으로 이런 놈들이, 아니 그보다 더 강한 놈들이 자꾸 지구로 넘어오면 그 때는 감당할 수 없을 지도 몰라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어?"
"싹을 잘라야죠."
13호는 엄지로 자신의 목을 그었다.
"어둠의 존재들이 이쪽 지구로 넘어오는 걸 막아야 합니다."
"차원문을 넘어가려고?"
"차원문을 넘어오는 녀석들을 제거하려면, 차원문 반대로 넘어가서 적을 제거해야죠."
"...그렇긴 하지."
루살카는 이글루를 해제했다.
검은 괴수는 완전히 흔적도 없이 소멸했고, 아래에는 괴수가 날뛰며 일으킨 소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땅이, 썩어있었다.
과거 테라사이트나 테라리스트들이 일으켰던 지구 오염보다도 더 심각한, 폭주 차원문에서 넘어오는 괴수들이 죽고 난 뒤의 땅이 그러하듯 괴수가 사라진 땅은 오염되어 있었다.
"저기. 어둠의 존재가 넘어오는 원인은 뭐라고 생각해?"
"...몇 가지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추론해보자면."
13호는 허공에 두 개의 불꽃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누군가가 과거의 테라로 가는 포털을 열었고, 그곳에서 오염된 테라의 마나와 성주와 같은 자들이 테라에서 지구로 역류하는 거죠. 한 명이 들어가면 한 명이 나오듯."
"즉, 지구인이 문제라는 거네?"
"...부정은 할 수 없겠군요."
타닥, 타닥.
13호는 마도기어를 두드려 어떤 이들의 사진들을 허공에 펼쳤다.
"창염의 피닉스가 빌런이라고 생각했던, 요주의 인물들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하나 둘 실종되고 있어요. 아돌프 빌헬름이라거나, 테이엥 마마르라거나. 전 세계의 온갖 독재자, 학살자, 빌런들이 행방불명되었죠."
"그들이 과거의 테라로 도망갔다는 말이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닙니다. '테라포밍'이라는 말이 왜 테라포밍인 줄 아세요?"
"그런 썰렁한 농담은…."
루살카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좋아하는 편이야."
"...이상한 곳에서 이런 말장난을 좋아하는 군요."
"언제나 삶의 여유를 잃지 않겠다는 거지. 그래서 13호 군, 네 말은…."
스륵.
루살카는 13호가 허공에 펼친 불꽃에 마력으로 만든 얼음 덩어리를 집어던졌다.
하나가 들어가고, 반대쪽에서 하나가 나왔다.
"이쪽 세상에서 빌런들이 탈지구로 과거의 테라로 넘어가고, 과거의 테라에서는 성주가 빌런들이 열어둔 포털을 타고 넘어오는 셈이네. 과거의, 성주가."
까드득.
루살카는 이를 갈며 마력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루살카를 중심으로 하얀 서리가 가득 내려앉기 시작했다.
"...복수전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걸까?"
"복수전이겠네요, 루살카의 입장에서는."
"그럼. 신이었던 자들이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는데. 물론 여기와서 행복을 찾았지만,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루살카는 살기를 내비쳤다.
"과거의 테라. 만약 아직 신들이 정령으로 격하되는, 세뇌되기 전이라면 해볼만 해."
과거의 테라이기에, 희망이 있었다.
여섯 신들이 모두 타락한 정령으로 격하되어 한 명의 신만이 자신의 신전에서 버티고 또 버티던, 희망도 꿈도 없는 상황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테라에는 창염이 있어."
창염의 피닉스'가 될 존재'.
"그러면 좋은 거 아닙니까?"
"...그거, 조금 문제가 있어."
루살카는 떫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창염은 원래 '푸른 불꽃'이 아니었어. 불꽃이 어떻게 푸른색이니? 붉은색이지."
"예?"
"푸른색은 오히려 내 색깔에 가까웠다고. 물이 파란색이고 불이 붉은색인 건 국룰이잖아?"
"...그러고보니."
13호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창염은, '창염이 될 신'을 성주가 간부로 타락시키면서 만들어낸 거였죠? 이계신을 카운터치기 위한 불꽃으로 개조한...."
"그래. 나는 알고 있어. 걔가 창염이 아니라는 걸. 신, 라는...."
사아아.
찬 바람이 루살카의 머리를 스쳤다.
"원래, 홍염이었어."
붉은 머리에, 붉은 눈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