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89 2부 10장 02
그 시각, 인천 앞바다.
서울에서의 괴수 소동이 일단락 된지도 어언 이 주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서울을 주름잡던 괴수들은 모조리 사방팔방으로 흩어졌고, 서울공략에 참가하지 못한 헌터들은 이들이라도 주워먹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후우."
인천 앞바다.
드넓은 모래사장을 향해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기우는 씁쓸한 미소로 주저앉았다.
"이제서야 되찾았네, 씨벌…."
치직, 칙.
싸구려 담배에 불을 붙인 뒤, 기우는 플라스틱컵 하나에 향을 두 개 피우고 담배를 빨았다.
"엄마, 아빠. 보고 있습니까? 저 이기우, 드디어 우리 건물들을 되찾았습니다."
기우는 마도기어를 두드렸다.
그가 신서울에서 그렇게 개고생을 하면서까지 지켜왔던 건물들에 대한 소유권.
그렇게 주변에서 팔라고 말을 해도 버티고 또 버티고, 반지하 월세방에서 지내면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살아온 오 년의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비록 일부 건물을 정말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처분하기도 했지만, 그대로 그게 어디랴.
남아있는 건물이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나중에 큥큥단 만나면 요청이나 한 번 해볼까 합니다. 저희 건물, 한옥 건물로 리모델링 해달라고. 안에 사람들 월세 내놓고, 1층에는 유성 체인점 고깃집 차려가지고 한 번 장사나 해볼랍니다. 편의점은 진짜 아니었어요, 쓰벌."
치직, 칙.
기우는 한탄을 담배 연기에 싣고 단숨에 내뿜었다.
담배 연기와 피어오르는 향이 뒤섞여 공허하게 하늘로 올라가고, 기우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씨발, 그러니까 일단 몸부터 빼자니까…."
부동산 불패.
그 신화는 괴수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괴수로부터 안전한 곳인가?'라는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아무리 헌터나 히어로들이 38선을 지키는 국군 용사들처럼 경기 남부와 인천 일대를 지키고 있었다고 한들, 결국 밀리는 걸 봤다면 몸이라도 먼저 도망쳤어야 했다.
"뒤 따라 온다면서, 먼저 가라고 해놓고 왜 안 돌아오는 겁니까? 젠장, 차라리 서울 지하로 도망쳐서 살아계시기라도 하시지 그러셨어요."
기우는 다시금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이 나라, 이 땅에서 가족을 잃은 이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과거에는 인구가 4천, 아니 5천 만에 이른다고 하던 그 수많은 인구도 어느덧 3천 만 정도로 줄었으니, 4인 가정으로 치면 넷 중 한 명이 죽은 셈이었다.
"...에휴, 산 사람은 살아야지."
기우는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끈 뒤, 플라스틱 컵 안에 집어넣었다.
향은 뚝 끊어서 바닥에 던진 뒤, 파도가 앞뒤로 몰아치는 인천 바다를 보면서 바닷바람을 즐겼다.
"하아, 이제 세상이 변할…."
첨벙!!
어두운 밤바다.
분명, 뭔가가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씨발?"
기우는 플라스틱컵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마도기어를 누를 준비를 마쳤다.
혹시나 괴수라면 당하기 전에 급히 알리면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며 도망칠 채비를 마쳤다.
스륵, 스륵.
"...어?"
어둠 속에서 걸어오는 건 인간의 인영이었다.
실루엣으로만 보이지만, 뭔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었다.
"...어, 씨, 씨발…?!"
여자였다.
검은 머리가 마치 미역처럼 축 늘어져있었지만, 여자는 알몸인 채로 인천 앞바다에 나타났다.
"여기요! 여기 사람, 아, 씨, 괴인인가? 마도기어에는 아무 반응도 없는데? 젠장, 어쩌지…?"
기우는 고뇌에 빠졌다.
여자는 점차 기우를 향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고, 마도기어는 아무리 눌러봐도 괴수나 괴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즉, 저 여자는 그냥 인간이다.
'그냥 인간일 리가 없잖아!'
정정. 이능력자다.
이능력자라서 인천 앞바다에서 수영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가장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면….
"그냥 미친 년이거나, 마법소녀가 되고 싶어 미친 년이거나. 씨발, 지금 황해를 헤엄쳐 온 건가? 혹시 빨갱이? 이거 간첩신고를…? 으으으으!!!"
기우는 머리를 쥐어 뜯다가 급히 백사장 방향으로 달렸다.
"이봐요!!"
기우는 급히 여인을 불렀다.
여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기우를 바라봤고, 기우는 여인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바람막이를 건넸다.
"뭐라도 좀 걸쳐요! 지금 알몸으로...어우, 진짜. 미치겠네."
"......감사."
"...응? 마도기어 없는데 한국말 할 줄 알아요?"
"공부. 배움."
"와…."
여인은 기우가 건넨 바람막이를 걸쳤다.
다리는 훤칠하게 길었지만, 바람막이가 남성용이라 다행히 아주 위험한 부위는 아슬아슬하게 가려줄 수 있었다.
마치 진짜 짧은 핫팬츠를 입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젠장…. 옷 없어요?"
"없다."
"으으…!! 경찰에 신고해야ㅡ"
"그만."
갑자기 공기가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나, 불법체류."
"아니, 누가 불법체류를 이렇게 당당하게 얘기해요?"
"신고하면, 공안."
"공안? 중국사람이에요? 쎼쎼?"
"하오."
"와, 발음 죽이네. 로컬이구나."
기우는 상대 여인의 국적을 알아냈다.
하지만 스스로 중국인임을 밝히기 싫어하는 여인이 아마도 마력을 써가며 자신을 압박하니, 차마 경찰에 신고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 사성. 마법소녀. 희망."
"지휘관의 팀에 들어가고 싶어서 중국에서 탈출해서 바다를 거슬러 왔다?"
"정답."
"와…그냥 썰로만 들었는데 진짜로 실행하는 사람이 있네."
기우는 혀를 내두르며 여인에게 뒤를 가리켰다.
"일단 따라와요. 이 바로 앞에 제 건물이 있으니까."
"위험…?"
"아니, 이능력자가 일반인 상대로 위험하네 마네 말을 할 일이 뭐가 있어요?"
"감사."
여인은 기우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기우의 건물 안으로 향했다.
기우는 중간중간 여인이 어둠 속에서 거의 알몸과 같은 자신의 모습에도 약간은 부끄러워하지만, 그걸 마치 즐기는 듯하여 등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어쩌랴.
마법소녀가 되고 싶어하는 중국 사성이면 'A급'을 의미한다.
자신은 이 자리에서 한 주먹에 살해될 수도 있는 만큼, 건물을 괴수들로부터 되찾은 현 시점에서 기우는 괴인도 괴수도 아니고 사람에게 살해당하고 싶지 않았다.
"잠깐 기다려봐요. 여기 분명 엄마가 입던 작업복이...여깄다."
"......."
여인은 기우가 꺼내온 옷을 보고 사색이 되었다.
기우는 여인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보고 머리를 긁적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 여성복 이것밖에 없는데 그러면 어떡해. 그나마 편의점 창고에 여성용 속옷이랑 스타킹 정도는 있지만…."
"다른 거, 사 줘."
"아니…."
거부할 수 없는 마성의 제안에 기우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아. 내가 진짜 이능력자라서 참는다."
기우는 작업복-꽃무늬 몸빼바지 대신 박스 안에 들어있던 여성용 속옷과 스타킹, 그리고 남성용 티셔츠를 건넸다.
"이거밖에 없으니까 이거라도 먼저 입으세요. 나머지는 내가 내일 복귀하기 전에 어떻게든 여기로 주문시켜놓을테니까. 택배 기다리세요. 알겠습니까?"
"그러면, 늦다."
"아, 진짜. 나도 내 삶이 있는 사람이라고요. 오늘 여기 온 것도 무리해서 온 건데. 나 알바 안 하면 당장 먹을 것도 없어요. 여기 편의점 있는 거, 전부 5년이나 지난 거라고요. 예?"
"이능력자, 식중독, 없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하아."
기우는 이 막무가내인 여인이 답답할 따름이었다.
어디 사막에 던져놓기라도 하면 전갈이라도 씹어먹으려고 하지 않을까?
"거래, 하지."
"무슨 거래요?"
"나, 무조건 지휘관 마법소녀 된다. 그 때, 당신 기억한다. 은혜, 반드시 갚는다. 그것이, 협."
"무슨 무협도 아니고 협은…."
빈정거리려던 기우였지만,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에 기우는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에휴. 알겠어요. 내일 출근하기 전에 이 근처에 옷 가게에서 여자 옷 한 벌 사줄테니까, 군말없이 입어요. 당신 데리고 나갈 수도 없으니까."
"......잠시."
여인은 기우에게서 건네받은 옷가지를 가지고 다른 방으로 향했다.
사락사락 거리는 소리에 기우는 침이 꿀꺽 넘어갔지만, 애써 마인드컨트롤을 하며 자신을 다잡았다.
'진정해. 저 여자는 갈 때면 '봉쥬푸쒸써'하면서 가버릴 여자다.'
뭣보다도 이능력자인 여자의 알몸을 훔쳐볼 생각은 없다.
이미 알몸에 가까운 모습은 백사장에서 봤지만, 그걸 굳이 또 보고 싶은 생각은….
"이 정도. 괜찮지 않나?"
"......아니."
기우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너무나 당당하게 두 팔을 벌리는 여인에 기우는 정면을 바라볼 수 없었다.
"있는 그대로 얘기해도 됩니까?"
"그렇다."
"검은 팬티에 살색 스타킹, 노브라에 흰 티셔츠 입고 지금 밖으로 나서겠다고요?"
"......좀 그런가?"
"불법체류 이전에 공연음란죄로 잡혀갈 겁니다! 젠장, 뭐라도 좀 가리세요!"
"뭘? 가릴 거, 다 가렸다."
"가슴!!"
"아."
여인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주먹을 부딪쳤다.
"밴드 있나?"
"아아아악!!"
기우는 자신을 괴롭히는 여인을 향해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밴드는 어디에 써먹으려고요?!"
"니플패치."
"갸아아악!!!"
기우는 비명을 질렀다.
"이 개변태같은 니취팔련아!!"
"밥 먹었냐고? 아직. 배고프다. 밥 줘."
"끄아아악!!!"
* * *
7월 14일, 오전 8시.
아침이 되었다.
나는 태양빛을 받으며, 서서히 변하기 시작하는 내 몸에 한숨이 나왔다.
'이거 은근히 불편하네.'
게임 속 창염의 피닉스가 무슨 생각으로 지휘관의 몸에 TS빔을 발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아니 실은 알고 있지만, 역시 시간마다 다른 성별로 움직여야 한다는 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행동이 강제되니까.
밤에는 섹스 오토를 돌려놓느라 움직이지 못하고, 낮에는 이 상태로 돌아다니느라 지휘관인 걸 숨겨야 한다.
무엇보다, 레즈 섹스를 못 한다.
레즈 섹스 좀 한 번 해보려고 해도 히로인들은 자지가 더 좋다며 단체로 시위를 벌이는 터라, 나는 아직까지 제대로 보벼보지 못했다.
'후반부 애들은 부탁하면 해줄텐데.'
앞으로 남은 정령은 일단 둘.
카르나는 내가 승리를 하면 승자의 권리라면서 다리를 벌려줄 것이고, 환룡은 내가 보비든 말든 그냥 잠이나 자고 있을 것이다.
석하랑은 현실에서도 하고 있으니까 논외.
그렇다면 마지막에는….
"...혹시 그 녀석, 나를 상대로 보빔강간을 하려고…?"
창염의 피닉스.
그녀가 큐브를 쓰면서까지 내가 낮에는 여자가 되는 몸으로 만든 이유는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뿐이다.
"......좋은데요?"
강제로 바닥에 눕게 만든 다음, 하반신만 하늘로 향하게 한 다음 가위치기라.
"하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히 하리다.
"탑은 저예요."
하신라가 탑이고, 창염의 피닉스는 바텀이 되리.
"그러려면…."
[지휘관 님, 한 명 걸렸어요.]
히카리의 연락에 나는 바로 표정을 바꿨다.
"누구요? 누가 걸렸다는 거죠?"
[지휘관 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사람들이요. 그….]
히카리는 조금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여자인 상태여도 보지로 따먹고 싶은 사람들 중에 한 명, 원서 들어왔어요.]
나는 바로 침대에서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