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986화 (986/1,497)

EP.986 [현실외전] 황금연휴를 지내는 방법 No.2 박라온

몸관리를 위해서는 운동이 필수다.

비록 직장을 다니느라 평일에는 야근을 하고 운동을 하러 가는 게 쉽지는 않지만, 그러면 주말이라도 최대한 운동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었다.

달그락, 달그락.

바퀴가 포장된 도로를 달린다.

그리 비싼 자전거는 아니지만, 자전거 전용 도로를 달리기에는 충분한 내구성과 성능을 가지고 있다.

본래 나는 자전거를 할 생각은 없었다.

주말만이라도 적당히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했지만, 나는 예상 외의 복병을 만나 자전거를 시작했다.

"왜 그러십니까?"

"슬슬 지쳐서요."

"아직 한 시간 달렸습니다. 조금만 더 갑시다."

"......."

이 여자, 아주 자기 멋대로다.

아는 지인을 통해 소개팅으로 만나서 몇 차례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는데, 설마 이렇게 주말에 같이 운동을 하러 가는 관계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라온 씨,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잠깐만 쉽시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저기서 쉬죠."

라온은 나를 공원의 벤치로 데려갔다.

자전거를 바로 옆에 세운 뒤, 나는 벤치에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하아."

전속력으로 자전거를 달리면 신이 나기 마련.

하지만 그걸 수십 분 내내 속도를 유지하면서 달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중간 중간 어쩔 수 없이 속도를 늦출 때, 그 순간의 휴식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모른다.

"개운하지 않습니까?"

"개운…."

개운하기는 하다.

이대로 쓰러져 죽어도 상쾌하게 죽겠구나 싶을 정도로 개운하다.

"포카리 사왔습니다."

"고맙습니다, 라온 씨."

나는 라온이 건넨 이온음료를 들이켰다.

청량감도 청량감이지만, 눈앞에 있는 존재의 영향으로 정말 상쾌하고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후…."

라온은 몸에 착 달라붙는 사이클 전용 스포츠복을 입었다.

다리를 훤히 드러내는 팬츠도 팬츠지만, 가슴의 형태를 온전히 드러내는 상의도 상당했다.

"하아, 하아."

호흡을 가쁘게 고르며 흔들리는 가슴이 너무나 인상적이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하지만, 눈에 밟히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신경 끄자.'

아직 정식으로 연인이 된 것도 아니고, 상대방의 가슴을 함부로 바라보는 건 크나큰 실례이며 성희롱이다.

연인이라고 해서 바라봐도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왜 그러십니까?"

"......."

라온은 상체를 숙이며 내게 고개를 가까이했다.

눈을 조금만 내려도 아래로 뚝 떨어진 그녀의 가슴이 보일 것 같았지만, 나는 라온을 최대한 마주보며 물었다.

"라온 씨는 운동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군요?"

"네. 운동도 운동이지만, 몸을 쓰는 걸 정말 좋아합니다."

다른 몸 쓰는 것도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라온은 곧 루틴이니 프로틴이니 하는 말을 하며 혼자만의 세계에 빠졌다.

순간.

쏴아아.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라온은 급히 짐과 자전거를 챙겨 내게 그늘을 가리켰고, 나는 라온과 함께 급히 공원에 있는 정자로 향했다.

쏴아아아.

소나기는 생각보다 거칠었다.

어쩌면 이대로 비가 계속 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

라온의 옷은 흰색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흰색 타이즈 아래, 검은색으로 반짝이는 스포츠브라에 침이 꿀꺽 넘어갔다.

스포츠 브라를 입고도 저 크기다?

과연 벗었을 때는 얼마나 클까.

"...날씨가 갑자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라온은 내가 앉은 벤치 의자 바로 옆에 붙어앉았다.

따스한 체온이 느껴질 정도로 그녀는 몸을 가까이 붙였고, 나는 그녀와 직접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당신."

라온은 담담한 얼굴로 내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렸다.

"아까부터 제대로 허리를 펴지 못하고 있던데, 왜 그러십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됩니까?"

"뭐든지."

"라온 씨가 너무 예뻐서."

직구.

이미 서로 떠볼 대로 떠본 이상, 지금부터는 이쪽에서 리드를 하고 나선다.

"이제는 확실하게 정해야 할 것 같군요. 라온 씨, 저랑...."

"쉿."

라온은 검지로 내 입술을 막았다.

"아직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 왜요?"

"그건...."

라온은 무안한듯 웃으며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저는 지금 이 나이까지 연애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여자입니다."

"라온 씨가요?"

"네."

주변에서 남자들이 그렇게 추파를 던졌을 텐데 연애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솔직히, 거짓말일 것이다.

"믿지 못하는 눈치입니다?"

"라온 씨 같은 사람을 남자들이 가만히 뒀을 리가 없을텐데요."

"추파...라고 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번호를 묻거나 고백을 듣기도 했습니다. 찼다는 표현도 조금 그렇지만, 그건 전부 다 거절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딱히 이 남자다, 하는 생각이 안 들어서."

라온은 배시시 웃으며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왕이면 처음 사귀어 본 남자가 평생 함께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세상에...."

이런 마인드를 가진 여자가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로망 그 자체가 아닐까.

처음으로 사귀어 본 남자와 처음으로 키스를 하고, 처음으로 몸을 섞고, 처음으로 결혼을 하고 함께 늙어간다는.

그런 건 정말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이야기지, 현실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서 찾으셨습니까?"

"예."

라온의 두 눈은 올곧게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저는 찾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귀자'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닙니다."

"그러면 혹시...."

"좀 더, 높은 단계의, 깊은 관계를 원합니다."

"......."

우리가 만난 지 얼마나 됐더라.

그건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제가 평생의 반려로 적합하다고 생각이 들면, 그 때 다시 고백해주십시오. 저와 함께 평생을 같이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면ㅡ"

"라온 씨."

나는 라온의 허리를 당겨, 그녀와 입술이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했다.

"!!"

"피하지 않네요."

"그, 그건. 너무 놀라서...."

"당신의 모든 처음을 빼앗아간 남자가 알고보니 당신이 잘못 본 거라면, 그 때는 어떻게 할 겁니까?"

"......."

"당신의 로망은, 꿈은 전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이에 비해 상당히 어린, 소녀 감성을 가지고 있는 여자.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딱딱하고 똑부러진 모습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그 누구보다 여린 공주님 같은 여자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당찬 여자다.

눈에 콩깍지가 씌인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녀가 나를 향한 눈빛에서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애초에 소개팅으로 만나서 이렇게 주말에 따로 자전거를 타러 오는 시점에서 이미 게임은 끝났다.

단지 나는 가벼운 관계부터 시작하기를 바랐지만, 라온은 시작부터 가슴만큼이나 무겁게 시작하기를 바라고 있을 뿐.

'다행이다.'

아직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좀 더 만나보면 확신이 들지 않을까.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고, 라온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면 더 깊은 관계부터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투둑, 툭.

소나기가 그쳤다.

따스한 햇살이 주변을 밝히기 시작했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온에게 자전거를 가리켰다.

"그럼 자전거 계속 타러 갈까요? 슬슬 날씨도 화창해졌는데."

"아, 그...."

라온은 난감한 얼굴로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혹시, 자전거 싫어하십니까?"

"싫어하지는 않는데...."

"그, 제가 듣기로는 엄청 좋아하신다고...."

"......?"

내가?

자전거를?

라온이 이쪽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급히 입문용을 사서 타고 다니며 연습을 했을 뿐이다.

"라온 씨가 자전거 좋아하시잖아요."

"그, 실은 저 자전거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

"...자전거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아니었습니까?"

이게 무슨 소리람.

나는 뭔가 서로 오해가 있음을 깨달았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까?"

"그, 소개 해준 사람이 타는 거 그렇게 잘 한다고...."

"......."

이 자식이.

라온이 이해를 잘못 해서 망정이지, 소개팅을 주선한 녀석이 소개팅을 망치려고 드는 경우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뭘 탄다고 하던가요?"

"네?"

"혹시 그 녀석이 뭐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뭐든지 잘 타고, 타는 거 좋아한다고."

"그랬는데...."

"......."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자전거를 하면서 운동을 한 덕분에 라온의 육체미를 한껏 감상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적어도 내가 잘 타는 건 자전거가 아니다.

"잘 타는 게 따로 있기는 한데, 궁금하면 나중에 확인하시면 될 겁니다."

"나중에? 어디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음...글쎄요."

내가 정말로 라온과 관계가 깊어지기를 바란다면, 여기서 이 말은 꼭 해야겠다.

"...허니문에서?"

"......."

라온은 고개를 숙인 채 내 뒤를 따라왔다.

* * *

수 개월 뒤.

나는 드디어 라온과 구청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 섰다.

남녀가 구청에 온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도장을 찍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을 것이다.

"라온 씨, 도장 찍고 나면 물릴 수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어디 면접을 가거나 전투를 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정장을 입은 라온은 당당한 발걸음으로 내 손을 잡고 구청 안으로 나를 당겼다.

"아니면, 아직도 빼는 겁니까?"

"빼기는 뭘 빼요. 라온 씨가 미루고 미루라고 해서 아직 고백도 못 했는데."

"그건 나중에 결혼식장에서 하면 됩니다."

"...하여튼 이상한 사람이야. 그렇게 사ㄹㅡ"

스륵.

라온은 내 입술을 손으로 붙잡았다.

"그건 아껴두십시오. 주례 선생님 앞에서 말할 때까지."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니까."

"그런 이상한 사람이랑 도장 찍으러 오신 분이 누굽니까?"

"...하아."

라온은 키득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귀에 속삭였다.

"너, 신혼여행 때 죽었어."

"...어떻게 죽이려고 합니까?"

"첫 키스부터 시작해서 아주 몸에 나라는 사람의 흔적을 전부다 새겨놓을 거야."

"음...그건 곤란합니다."

구청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라온은 역으로 내 귀에 속삭였다.

"첫 키스는 결혼식장에서 해야합니다."

"그럼 허니문에서는?"

"......첫 섹스?"

"...하, 하하."

정말, 미쳐버리겠다.

"섹스도 아직 안해본 사람이. 라온 씨, 그거 압니까? 부부 사이에 궁합이 안 맞으면 그것도 이혼 사유가 된다고 합니다."

"지금 도장찍으러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불안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라온은 음흉한 눈으로 윙크를 했다.

"자전거 탈 때마다 서로 눈으로 확인했는데.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는 완벽할 겁니다."

"...하아, 나는 이제 모르겠다."

아직 그쪽 말고는 우리는 모든 것을 서로 확인하고 공유했다.

그러니, 이것은 도박이다.

소개팅에서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서로가 서로를 만나오면서 봐온 서로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제발 그쪽으로도 확실하기를.

"...가시죠. 인생에 있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는, 혼인신고 하러."

"...네."

불안감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의 손을 꼭 붙잡았다.

신혼 여행.

"...섹스부터 했으면 저희 그 날 바로 결혼식 잡지 않았을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허니문에서 처음으로 확인한 라온과의 속궁합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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