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84 [현실외전] 황금연휴를 지내는 방법 No.18 루살카
객관적으로, 나는 편견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선입견과 편견 없이 모든 것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고자 했고, 판단을 내릴 때도 항상 함부로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누구나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나는 이런 상황이라면 편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저기…."
"왜 그러시죠?"
내 앞에는 머리가 내 허리만큼 오는 여인이 있었다.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그녀는 러시아제 인형과 같은 모습이었고, 정말 어린 아이 인형과 같았다.
그래.
누가봐도 성인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이 작은 여인이 '성인'이며, 한 아이의 '어머니'란다.
"과외, 맞으시죠…?"
"그럼요. 과외. 제가 받는 게 아니라, 우리 딸이 받는 거 맞아요."
"......."
혹시나 나를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과외 선생으로 생각하는 줄 알았지만,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우리 딸이 고1이니까 잘 부탁해요. 실력 믿고 남자분에게 맡기는 거니."
"...딸?"
"네. 여기 사진."
여인-소녀라고 해야하지만, 일단 자신이 딸이 있다고 하니 여인이라고 하자-은 내게 사진 하나를 건넸다.
그곳에는 정말 다정하게 서로를 안고 있는 백발의 모녀가 있….
'이게 무슨 모녀야. 자매지.'
어린 소녀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듯한, 언니같은 소녀는 고등학생에서 이제 대학생으로 올라가는 단계처럼 보였다.
"머리는…."
"염색이에요. 아이들이 백발이면 놀리니까."
"아."
내가 과외를 하기로 한 학생은 상당한 미모를 자랑했다.
아마 내년에 대학교에 입학하면 과 퀸카는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상대는 미성년자.
과외를 함에 있어서 프로인 나는 결코 미성년자를 상대로 구설수를 만드는 일은 없다.
미성년자가 아니라면?
...그건 논외.
그래도 과외 실력 하나는 일품이고, 작년에는 내가 가르치던 과외 학생 중 한 명이 수능 만점을 받기도 했다.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고, 나는 제법 비싼 과외를 따낼 때마다 그 아이를 가르친 노하우를 언급해왔다.
그러면서 정말 많은 어머님들을 만났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저는 류상화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네, 안녕하세요, 류상화 어머님."
"러시아 사람이고요, 원래 이름은...대충 루살카예요."
"대충?"
"미들 네임이랑 성까지 포함하면 한 열댓자 돼요. 그냥 루살카라고 부르세요."
"아, 알겠습니다. 그럼...류상화 어머님…?"
"...그냥 편하게 대해도 되죠? 루살카라고 부르렴."
"...아, 네."
아무래도 어머님이라는 칭호는 듣기 싫은 모양이다.
나는 고객의 니즈를 잘 파악하는 사람인 만큼, 화제를 본 목적으로 돌렸다.
"그럼 루살카 씨. 과외에 대한 건…."
"딸이 오려면 한 시간 넘게 걸릴 것 같아요. 원래 이 시간에 오기로 했는데, 오늘 스터디에서 일이 생겨서 늦게 온다고 하네요."
"성실하네요."
주말인데도 스터디를 하러 나간다니.
고1이 그러기 쉽지 않은데, 정말 학구열이 대단한 아이다.
문제는 한 시간 뒤에 과외가 시작된다는 것.
'한 시간을 허비한다고? 아니지.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면서 어머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유지하면 돼.'
이 시간은 당장 눈앞에 있는 루살카 씨와의 관계를 돈독히 맺을 중요한 시간이다.
다른 이의 소개를 받고 온 과외인 만큼, 내가 여기서 실수를 한다면 소개를 해주신 분에게도 욕을 먹게 된다.
그러면 이 일대의 고액 과외는 전부 캔슬되게 되고, 내 밥줄은 끊어지고 등록금을 구하기 위해 공사판을 다니거나 잠을 줄여가며 뛰어다니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
최저 시급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최저시급에 '0'을 붙여서 시간 당 수당을 받을 것인가.
과외를 하는데 있어서 능력이 있다면, 누구나 후자를 선택하리라.
'그리고 지금 엄청 바쁜 것도 아니고.'
딱히 시간적인 문제는 없다.
한 시간 정도 대기하는 건 솔직히 매일매일이라도 상관없을 정도로 고액 과외라 지금 한 시간 기다리는 걸 수당으로 안 쳐도 될 정도지만….
"차는 뭐가 좋니? 커피? 아니면 녹차?"
"커피면 됩니다."
"블랙?"
"있는 거 아무거나 주시면 되는데…."
"그럼 블랙으로 내릴게. 쓰면 말하렴."
루살카는 부엌으로 향했다.
아무리 봐도 어린 학생이 장난을 치는 것 같았지만,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느긋함에 나는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이런 어머님은 처음이네.'
어머님 같지 않은 어머님.
내가 지금까지 과외를 하면서 봤던 다른 어머니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진짜 유부녀인가?'
저 몸으로 아이를 낳았다고?
저 몸으로 자식을 길렀다고?
과외비도 그렇지만 집은 상당히 부유해보였다.
아마 따로 일을 하는 것 같지는 않고, 집에서 자산을 관리하는 일을 할 터.
저런 몸만 아니었다면, 만약 내가 자주 접하던 전형적인 어머님들의 모습이었다면 나는 그냥 부유한 가정에서 과외를 부른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 시럽 필요하면 바로 줄게."
"감사합니다. ...어."
"왜 그러니?"
"아이스라고 말씀 안 드렸던 것 같은데. 고맙습니다."
"...흐흥, 기본이지."
루살카는 눈을 찡긋이며 내 앞에 마주 앉았다.
그녀는 자기 몫의 커피를 홀짝이며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자기, 나이가 몇이니?"
"네?"
"내가 듣던 대로 그 나이 맞니?"
"아, 네. 여기…."
나는 일부러 내 운전면허증을 꺼냈다.
자격증이라는 건 설령 운전면허증이라도 내가 사회를 살아가면서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설령 지금 당장 차가 없다고 한들, 이런 사소한 요소를 어필하는 것도 중요하다.
"흐응, 그렇구나. 나랑 띠동갑이네?"
"...예?"
"이거 봐봐."
루살카는 외국인 등록증을 꺼냈다.
그녀의 출생 연도는 분명히 나의 것에서 '-12'를 한 값이었고, 이게 위조되지 않았다면 루살카는 진짜로 나보다 열 두살 많은 여인이었다.
즉, 거의 20살 전후에 딸을 낳았다…?
"겨, 결혼을 일찍 하셨네요…?"
"결혼 아니란다."
"네?"
"애는 생겼는데, 남자가 죽었어."
"......."
엄청나게 복잡한 가정 환경이 있는 게 틀림없다.
내가 실수를 하지 않게 하기 위한 루살카의 배려였지만, 이런 배려는 다소 무섭다.
이거 꼭, 예전에 당할 뻔한 '그 패턴'이라서….
"자기, 왜 그러니?"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가 보면 내가 자기 잡아먹는 줄 알겠어."
"......."
솔직히 그럴까봐 무섭다.
하지만 루살카는 그런 내 심정을 눈치챘는지, 슬며시 미소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그럴 생각 없단다."
"그, 그렇군요. ...아직은?"
"아직은. 아, 잠깐만."
루살카는 벨소리가 울리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엄마! 내 오늘 친구 집에서 자고 들어가도 되나?!]
"뭐? 안 돼. 오늘 과외 선생님 오시기로 한 날이잖니. 벌써 와 계셔."
[진짜가?! 아, 까먹었네…. 어, 엄마. 그….]
"괜찮습니다."
나는 환한 미소로, 일부러 수화기 너머에 있는 학생이 들리게 목소리를 높였다.
"오리엔테이션은 다음 시간에 해도 됩니다."
[어, 엄마? 쌤 옆에 계셔…?]
"응, 있단다."
[있으면 있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이...크흠! 알았어. 그래서 괜찮아?]
"응. 다녀오렴. 자기 전에 문자 한 번 주고."
[알았어. 고마워, 엄마. 과외 선생님한테도 정말 감사하고, 죄송하다고 전해줘!!]
뚝.
전화는 끊어졌다.
나는 담담히 커피를 홀짝이며 입꼬리를 들었다.
"따님께서 정말 착하군요."
"약속도 까먹고 친구랑 놀러가는 아이란다. 하아."
"원래 그 나이대에는 다들 놀고 싶어하죠."
"어머, 과외 선생이 할 말이니?"
"놀고 싶은 학생들도 S대에 보내는 남자, 바로 접니다."
내 자신감 넘치는 발언에 루살카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제가 업계에서는 '불사조'라고 불립니다. 죽은 성적도 다시 살려낸다고 어머님들이 그러시더라고요."
"어머, 불사조?"
"예. 그냥 들으면 조금 부끄럽기는 하지만, 저 작년에는 학교 다닐 때는 9등급 내신 밑바닥에 있던 재수생 친구를 S예대에 진학시키기도 했습니다."
"어머.... 불사조 맞네."
순간.
손 위로 드러난 반달처럼 휜 눈동자는 마치 먹이를 노리는 포식자와도 같았다.
"우리 딸이 그 정도로 성적이 나쁘거나 머리가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심성이 나쁜 아이는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아줘."
"괜찮습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요."
원래라면 첫 날에 강의를 펑크냈으니, 앞으로도 이럴 거면 나는 못한다고 으름장을 놓아야 했다.
하지만 그런 건 그 과외를 포기했을 때의 반동을 모두 받아내고 내가 다른 과외를 선택했을 때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을 때의 이야기.
지금은 다르다.
다른 과외 세 개를 내가 펑크내고 루살카 가정의 과외에 집중해도 될 정도로 페이가 세니까.
그러니....
"그러면 루살카 씨와 따님에 대한 걸...."
"자기."
"...네?"
"내가 아까 얘기했잖아. 아는 사람 소개받고 왔다고."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전신에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윽."
갑자기 아랫배가 화끈거린다 싶더니, 앉아있는 자세를 풀 수 없게 되었다.
"저기, 루살카 씨...?"
"생각해보니까 젊은 청년을 내 딸이랑 같은 공간 안에 두면 이상한 일이 벌어지지 않겠어? 내 딸이 조금 이뻐야지. 그러니까 미리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려는 거란다."
"아니, 저기!!"
"과외비에 이거 포함이란다."
"!!"
당했다.
역시 그냥 고액과외라고 덥석 물어버린 게 화근이었다.
"아, 안 됩니다! 남편분에게...."
"결혼 안했다니까? 러시아에 유학 온 남편이 나 덮쳐서 애 낳은 거니까. 참고로 한국인이야."
"......."
이 더러운 한ㄴ-
"자, 잠시만요. 역시 마음의 준비를...?!"
"마음의 준비는 네 물건을 받아들일 내가 할 거고, 너는 그냥 조용히 입 꾹 닫고 있으면 되는 거란다."
사락.
루살카가 내 셔츠를 조금씩 풀기 시작했다.
"어디.... 어머나, 이거, 내 배보다 더 높게 들어오겠네...."
"......."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차라리 놀러간 딸이라도 빨리 돌아와주기를 바랐으나, 그런 건 일어나지 않았다.
"자기, 혹시 생각 있으면...."
루살카는 내 볼을 만지작거리며 야릇하게 웃었다.
"누나랑 비밀과외 하나 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