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983화 (983/1,497)

EP.983 [현실외전] 황금연휴를 지내는 방법 No.10 백희아

처음에 한옥 데이트를 하자고 했을 때, 나는 뭐 이런 여자가 있나 싶었다.

간혹 광화문이나 경복궁 인근을 지나가면 한복을 입은 여자들이 무리지어 지나가고는 한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 구경을 다니는 이들이거나, 한국은 처음인 외국인들이 전통복장을 입고 여행을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내가 갈 곳은 지방이다.

기차를 타고 내려가야 하는 곳이며, 여행이 아니라면 굳이 갈 일도 잘 없는 곳이다.

그런 곳에 굳이 한복을 입고 데이트를 하러 간다?

심지어 카페는 한옥을 컨셉으로 잡은 카페만 찾아가고-애초에 이곳을 '카페'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산책도 무슨 역사유적지구 같은 곳을 돌아다니며, 숙소도 그 비싼 돈을 주고 한옥을 예약했다.

'데이트 코스를 전부 맡기는 게 아니었어.'

아무리 역덕에 역사학자라도 그렇지, 이건 데이트하는 남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컨셉을 잡아도 정도가 있지, 모든 것을 마치 전통 체험 코스로 잡으면 어쩌잔 말인가.

이러다가 오후에는 다도 체험을 하러 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나'.

"...에휴."

남자 화장실에서 지나가며 만나는 남자들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

전형적인 한국인 외형이기는 하지만, 그런 사람이 현대에 이렇게 갓을 쓰고 양반의 도포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건 명백히 특이했다.

그렇다.

나는 지금 한복 데이트를 하고 있다.

아니, 전통 체험 데이트를 하고 있다.

저녁으로는 미슐랭에서 별 두 개를 받은 한식당에서 코스 요리를 즐길 예정이다.

...이게 어째서 전통 데이트?

아니, 데이트라고 하기에도 좀 그렇지 않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선배."

"네 생각."

"...어머나."

백희아는 검지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옅게 웃었다.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역시 네가 한복 입으니까 정말 예쁘다는 생각?"

"한복 아니어도 예쁘지 않아요?"

"예쁘긴 한데 평소에는 약간 제복 비슷한 디자인으로 입잖아."

백희아는 평소 정장 스타일의 옷을 자주 입는다.

그녀의 인생에서 '캐쥬얼'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듯, 대학생이라기보다 어느 은행이나 깐깐한 회사에서 자주 볼 법한 옷을 입고 다녔다.

"한복도 예쁜 거 새삼 다시금 느끼게 되네."

"그렇긴 하죠? 그런데...."

그리고 지금 그녀가 입은 옷은 한복.

"저는 치마가 발목까지 내려오는 거였으면 좋았을텐데."

백희아는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치마를 원했다.

하지만 날씨가 봄이기는 해도 슬슬 덥기도 하고, 렌탈로 빌리는 한복을 괜히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기에는 여러모로 신경이 쓰였다.

"무릎까지 오는 것도 좋지만, 역시 원래 한복이...."

"나한테는 이게 예쁜데? 아니면 나한테만 맨다리 보여주고 싶은 거야?"

"그런 것도 있기는 하지만, 긴 한복 입어야 하는 이유가 있어서...."

"이유?"

"그런 게 있어요."

백희아는 침묵했다.

만약 내가 그녀를 위해 한복을 '사'주기로 한 게 아니었으면, 그녀는 렌탈을 고집했을 것이다.

출혈은 조금 컸지만, 백희아가 이런 걸 입고 있으니 너무 만족스러웠다.

위는 하얀 색으로, 아래는 회색으로 물들인 생활한복은 한복이라기보다는 얼핏 밑가슴까지 오는 치마 같은 느낌도 들었다.

신발 마저도 단아한 느낌이 드는 로퍼로 맞춰온 걸 생각하면 나는 이 여자가 가진 전통 문화에 대한 집념과 사랑이 정말 현대의 다른 누구보다도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쩌랴.

그게 이 여자의 매력인 것을.

만약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가 있다면, 연기력을 차치하고 조선시대라는 배경에 가장 어울리는 여자는 백희아가 단연 일등을 차지하리라.

위이잉.

"아, 잠시만요."

백희아는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스마트폰의 케이스마저도 왠지 국가의 색체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어, 나는 이 여자의 취향에 대해 이제는 슬슬 광기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 전화예요. 잠깐만 받고 올게요."

"그래."

백희아는 스마트폰을 들고 잠시 자리를 떠났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가방을 내게 맡겼고, 나 또한 자연스럽게 그녀의 가방을 건네받았다.

남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상황.

여자가 화장실을 가거나 어딘가로 갔을 때, 여자 가방을 들고 있기.

'다들 이해할 거야.'

싫은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데이트를 하는 도중에 발생하는 일이니 딱히 억울하지는 않다.

다만.

"......Lx대신에 훈민정음이 적힌 클러치라니. 흐...."

안에 들어있는 물건들도 대부분 한국에 대한 사랑이 철철 넘치는 물건들이 가득하다.

백희아는 전생에 분명 애국을 하다가 나라를 구하지 못해 죽은 게 분명하다.

'그래도 선물할 때는 쉬우니까.'

처음에는 몇 번 시행착오를 겪었다.

누구나 좋아할만한 물건을 사주기도 했고, 천만 관객이 넘은 영화 티켓을 두 장 사서 함께 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약 세 달.

나는 백희아의 취향이 어느 한쪽으로 귀결되어 있음을 깨달았고, 백희아라는 사람이 어디에 정말 관심이 많은지 알고 한 가지 좋은 장소를 찾아냈다.

국립중앙박물관 굿즈샵.

선물용으로 딱 좋은 전통 공예품과 생활용품을 비롯하여 온갖 물건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나는 많은 신세를 졌고, 여행을 갈 때도 백희아가 어디를 가면 좋아할 지 구상하기도 쉬웠다.

'한국사 1급 공부해둔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전공이 역사학인 백희아만큼은 아니지만, 아예 모르는 것보다 대충이라도 아는 걸 꺼내면 백희아는 정말 신나서 자신이 아는 바를 알려준다.

백희아가 좋아하는 분야가 역사와 전통 부분이라는 걸 제외하면, 백희아는 전혀 나쁠 게 없는 여자다.

미모면 미모, 성격이면 성격, 능력이면 능력.

솔직히 졸업하고 난 뒤에도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고, 가능하다면 그 뒤의 관계를 더 나아가고 싶다.

어른들이 백희아를 볼 때마다 항상 하는 소리는 '참하다'였다.

현모양처.

백희아는 누구의 아내가 되든 좋은 아내가 될 것이다.

이왕이면....

"선배, 또 제 생각하고 계셨어요?"

"응."

"어떤 생각이요?"

"희아는 좋은 아내가 될 거라는 생각."

"...헤에."

백희아는 내게서 가방을 건네받은 뒤, 나와 얼굴을 가까이했다.

"누구 아내요?"

"누구 아내겠어?"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나는 너를 대하면서 거짓으로 대한 적은 없어."

"음...."

백희아는 싱글벙글 웃으며 나와 팔짱을 꼈다.

"할아버지가 허락하셨어요."

"...잠깐, 뭘 허락하셔?"

"음, 여러 가지?"

"잠깐만. 희아야. 너 설마 어르신께 나랑 온다는 거 말하고 온 거 아니지?"

"선배도 참, 제가 그런 거 이야기하고 오는 여자로 보여요?"

"응. 너, 부모님이나 어르신께 거짓말 할 사람은 아니잖아."

"맞아요. 근데 부모님께는 말하지 않았고, 할아버지한테만 몰래 말했어요."

"......."

홀리.

"선배, 궁금하지 않아요? 제가 결혼식 때 웨딩 드레스를 입을 지, 아니면 한복을 입고 비녀를 꽂을 지."

"음...."

궁금하기는 한데,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청첩장이 날아와서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가는 과정을 멀리서 지켜보기보다는, 내가 백희아와 함께 걸으며 많은 이들에게 청첩장을 날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선배는 정답을 알고 계시잖아요."

"뭐? 내가?"

"네. 선배는 저를 잘 아니까."

"...그런가."

결혼식 때 무엇을 입을 것인가.

백희아는 정해져있다.

"...남편이 원하는 걸로 입겠지."

싱긋.

"그래서, 뭘 입히고 싶으세요?"

...조만간, 옥가락지 하나 준비해야 할 지도.

* * *

일정을 마치고 난 뒤, 숙소.

전통적인 한옥 가옥의 구조를 갖추고 있지만, 나의 간곡한 부탁으로 우리는 침대가 있는 방을 예약했다.

"이거 은근히 시원하네."

"그렇죠?"

나는 고등학교 한자 교사가 자주 입고다니던 개량 한복을 입었고, 백희아는 가벼운 저고리와 치마를 입었다.

낮에 데이트를 할 때와는 달리, 정말 잠들기 전에 입는 소복같은 느낌으로 그녀는 안쪽의 살갗이 살짝 비치는 저고리에 발목까지 오는 치마를 입었다.

"그러고보니, 그건 또 언제 가져온 거야?"

"이거요? 인터넷에서 싸게 샀어요."

"싸게...?"

백희아는 한복에 진심이다.

그래서 내가 그녀를 위한 생활한복을 살 때도, 상당히 가격이 나가는 걸로 구매를 했었다.

"희아가 한복을 이런 거 사는 건 처음 보네."

"진짜 얼마 안 해요. 위아래 세트가 2만원인가...?"

"......."

차라리 이 돈으로 어디 한강이 보이는 레스토랑에 가서 분위기 좋게 한 끼 풀코스로 식사를 하는 건 어떨까 싶은 가격으로 샀던 만큼, 치킨 한 세트 가격에 한복 치마를 구입했다는 백희아의 말에 나는 뜨악할 수밖에 없었다.

'얘가 이런 걸 샀다고? 왜?'

"선배, 지금 표정 되게 이상하네요."

"...어울리기는 한데, 너라면 좀 더 고급스러운 걸 살 거라고 생각했거든. 메이커 신경쓰면서."

"신경은 쓰죠. 근데 이건 조금...상할 수 있는 용도라서."

"상해?"

"비싼 거 상하게 하는 것보다, 싸게 산 걸 쓰는 게 더 좋잖아요."

백희아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선배, 조상님들이 얼마나 대단한 분들인지 아세요?"

"뭔데?"

"한복 치마 있잖아요."

백희아는 벽을 향해 선 뒤, 천천히 책상을 향해 상체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 구도, 너무 예쁘지 않아요?"

"......남자 입장에서는 최고의 구도네."

나는 백희아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발끝에서부터 치맛자락을 붙잡고 서서히 위로 걷어올렸다.

"희아야."

"네, 선배...."

"이제 우리 슬슬 편하게 불러도 되지 않을까?"

"편하게요? ...참, 선배도 그걸로 불리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응."

한 살이라도 젊어보이고 싶어하는 게 여자들이 당연한 것처럼, 오빠소리 싫어하는 남자는 없다.

백희아와 사귄 지도 제법 시간이 많이 지난 만큼, 나도 슬슬 백희아로부터 '오빠'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럼...."

백희아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앞을 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해주세요, 오라버니."

"오라버니...."

오빠는 아니다.

하지만 이건 이것대로 좋다.

"밖에서는 하지말고, 나랑 단 둘이 있을 때만 하는 거야. 알겠지?"

"...네."

밖에 있을 때는 항상 당차고 자신감 넘치지만, 이렇게 밤이면 조숙한 여인이 된다.

"오늘 희아 하고 싶은대로 해줄게. 뭐 어떻게 해줄까?"

"...다른 건 없고. 그거 아세요? 옛날에는 말이에요, 피임도구가 없었어요."

"......."

앗.

"...전통, 지켜주실 거죠?"

일년 뒤.

나는 결국 백희아에게 한복이 아닌 드레스를 입히는데 성공했다.

순백의 하얀 드레스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