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55 2부 9장 12 1여고생=
이능력이라는 새로운 힘이 현대에 각성하게 되면 항상 생기는 문제가 있다.
냉병기는 당연하고, 인간이 백여년간 아성을 쌓아온 화기는 과연 이능력자를 상대로 쓸모가 있는가?
있다.
강력한 저지력을 가진 산탄총을 이용하면 이능력자를 저지할 수 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이능력자가 자신을 마력으로 칭칭 휘감아 몸을 보호하게 되면, 아무리 화기라도 이능력자를 당해낼 수 없다.
누군가가 그러더라.
D급 정도 되면 파출소에서 나온 경찰들로는 대처가 불가능하며,
C급 정도 되면 총을 들고 온 진압부대가 와도 저지가 힘들고,
B급이 되면 대테러 특수부대가 출동해도 막을 수 없다고.
하물며 A급 이상 올라가기 시작하면, 그들은 그냥 존재 자체가 일개 사단에 이르게 된다.
S급 정도가 되면 한 국가의 군대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그래서 괴수나 빌런은 히어로와 같은 이능력자들이 제어하고 통제해왔다.
그러나 기존 세대의 무기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총알이 통하지 않더라도 화망을 펼쳐 괴수가 오지 못하게 쫓아내거나, 아군 히어로의 공격을 숨겨주는 시야 교란을 위해 여러 국가는 새로운 형태의 무기를 개발해왔다.
즉, 아무리 코어웨폰의 시대가 도래했다고는 하지만 100년-아니 머스킷으로부터 이어지는 수백년 화기의 역사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
각 국가들은 여전히 대량의 화기를 가지고 있다.
그걸 어떻게 쓰는가에 대해서는 대부분 괴수저지용으로 쓴다고 할 수 있지만.
구구구.
이렇게.
8차선 도로 한복판에 아스팔트를 갈아버리며 탱크가 포구를 여기저기 겨누며 돌아다니는 경우도 발생하고는 한다.
"김뱀, 우리 좆된 거 아닙니까?"
"몰라, 씨발…."
탱크를 조종하는 두 청년은 뒤에서 목이 터져라 소리치는 간부가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거, 진짜 계엄입니다. 긴급조치인가 뭔가 하는 그거라고요.
"씨발, 지금이 6070도 아니고…."
"어쩌면 좋습니까, 김뱀?"
"야. 목숨 챙겨."
병장은 묵묵히 헬멧을 눌러썼다.
탱크가 전복되어 머리를 다칠까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뒤에 타고 있는 전차장이 들고있는 K-5 권총에 헬멧이 날아갈까봐 두려웠다.
"...저 새기, 누구 지지하는지 알잖아."
"......."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전차 내부에 어떤 남자의 얼굴 사진을 걸어놓은 남자는 전차장이기도 했지만, 군대 내부에서도 은근히-아니 대놓고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라고 말하는 극성 지지자였다.
선의철의.
"...어."
"야, 뭐야. 왜 멈춰?"
"전방에 인파가 있습니다."
전자 모니터에 비춰지는 대로의 맞은 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은 마치 장례식인 것 마냥 검은색 복장을 입은 채, 손에 횃불을 들고 서있었다.
"씨발, 21세기에 무슨 횃불로 시위를 하고 지랄이야? 어? 저건 또 뭐야."
시위대의 최전방에는 흑발의 여인이 팔짱을 낀 채 서있었다.
넥타이는 검은 색으로 맞춰왔지만, 검은 정장에는 붉은색과 녹색의 체크무늬가 얼핏 보였다.
"여, 여고생…?"
"나라가 말세지. 씨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빨갱이 놈들 말에 혹해서 반동짓이나 하고 말이야. 야."
전차장은 옆에 있던 포수에게로 다가가 헬멧을 후려쳤다.
"조준해."
"예?!"
"예? 씨발, 집중 똑바로 안 하지?"
"아, 아닙니다!"
"그럼 여기가 탱크 안이지 밖이냐? 뭐 해! 당장 저 무장폭도들에게 조준하라니까!"
막무가내.
하지만 일개 전차장이 어쩌면 무고한 시민들일지도 모르는, 선의철의 실체에 환멸을 느끼고 시위를 위해 나온 이들을 향해 거리낌없이 발포를 명령할 수 있을까?
"각하께서 계엄하라고 하셨잖아! 여기서 저 놈들 죽여도 너희 잘못 아니라고. 응? 야, 너 탱크 게임 좋아한다며. 그거랑 똑같은 거라니까? 조준하고, 발사키 누르고, 팡! 끝. 간단하지?"
"그, 그건 게임이고 이건 현실이 잖습니까?!"
"그럼 현실이지. 네가 한 게임, 그거 다 국방부에서 배포한 탱크 시뮬레이터라고 생각해. 자, 어서."
전차장의 눈에는 광기가 흐르고 있었다.
선글라스 아래에 가려진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서는 끈적한 검보라색 같은 무언가가 흘러나오는 듯 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면 이대로 직진해서 밟아버리는 건 어때? 대로가 넓잖아. 가!"
"그, 그건…!"
[국가의 부름을 받아 나라를 지키는 호국 용사들께 묻습니다.]
여고생치고는 조금 딱딱한 듯한, 하지만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저, 저거 이능력자…?"
[진짜로 애국을 하는 길이 무엇인지 잘 판단하여 주십시오. 사람을 무참히 죽이고 폭력으로 지배하는 괴물이 정말로 이 나라의 지도자인지!]
"저거, 쏴버려! 아가리 막아!!"
전차장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포수도 포탄병도 쉽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화륵, 화륵.
늘어나는 횃불의 수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치 진짜 불이 나는 것 마냥 번지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국가의 부름을 받고 그 자리에 계십니다. 우리 또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국가를 좀먹는 썩은 암덩어리를 도려낼 것입니다!]
"저 년의 아가리를 막으라고!"
[선의철이라는 자가 어떤 자입니다! 나라를 지키는 영웅들이여!]
"빨리 쏘라고!!"
전차장의 목소리에 누군가가 화답이라도 한 걸까.
콰ㅡㅡㅡ앙!!
전차의 포구가 불을 뿜었다.
그들이 탄 전차는 아니었지만, 옆에 함께 나섰던 전차가 기어이 여고생을 향해 조준사격을 날렸다.
"좆 됐ㅡ"
카ㅡ앙!!
경쾌한 소리.
마치 알루미늄 배트로 야구공을 치는 듯한 소리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야?"
"포탄을...손으로 막았어?"
선두의 여고생은 포탄의 포격을 손바닥을 펼치는 것으로 막았다.
마치 두꺼운 벽에 머리부터 박고 찌그러진 것처럼, 포탄은 말 그대로 찌그러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죽이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계속 공격을 한다면 응당 대응하겠습니다.]
저벅, 저벅.
선두의 여고생들이 하나 둘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전차를 상대로는 어울리지 않는, 화기는 커녕 도검과 둔기를 손에 움켜쥔 채 전차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카앙, 카앙, 으드득!!
여고생들은 자신들을 향한 포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전진했다.
탱크가 눈앞에서 달려온다면, 그걸 몸으로 막을 기세였다.
"이 나라에는 전설이 있지."
포수는 코를 쓱 닦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한 명의 여고생은 전차 세 대 만큼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선두의 여고생은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한 나라의 지도자라는 자가 3cm가 말이 되냐!!]
와아아아ㅡㅡㅡㅡ!!
쿵.
자리에서 뛰어오른 여고생들이 하나 둘 전차를 점거하면서 시위는 더욱더 격화되었다.
[선꼬삼은 하야하라ㅡㅡㅡ!]
시위대의 중심.
유독 눈동자가 검은 여고생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선꼬삼은, 물러나라ㅡㅡㅡ!]
* * *
그 시각, 서울 여의도.
"이야, 난리났다."
신서울에서 모 코스프레 여고생이 주도한 시위는 이능력자와 민간인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마치 이전부터 시위를 준비한 듯한 체계적인 움직임은 분명 하루 이틀로 가능한 게 아니다.
상대가 계엄을 할 걸 알면서도 전차와 총기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이능력자들을 중심으로, 진짜로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는 이들을 제압하며 시위는 격화되었다.
"아무리 뒤에서 간부가 권총으로 위협한다고 해도 사람들한테 진짜로 총을 쏘지는 못하지."
아무리 군인이라고는 하지만, 개개인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안다.
하지만 군인은 기본적으로 상명하복.
뒤에서 간부가 총들고 지시를 내리는데 누가 간부의 명령을 무시할 수 있을까?
"신서울, 위험한 거 아닙니까?"
"괜찮아. 거기 있는 히어로나 헌터들도 시민들이 당하는 거 보면 같이 합류해서 군인들 제압할 거니까."
군인들도 자신들이 죽는 게 아니면 순순히 제압당해 줄 것이다.
일부 극성인 자들도 있을테지만….
'그런 자들부터 제압하고 있지.'
거대한 스카이넷과도 같은 존재는 은유하만 있는 게 아니다.
은유하와 대척점에 있는 정치계의 거물, '백희아' 또한 마찬가지다.
'계획대로 진행되어 다행이다.'
나는 그녀에게도 이번 작전의 개요를 대략적으로 알렸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그저 한 가지 부탁만 했다.
만약 선의철이 선을 넘는다면, 그 때는 저질러버리라는 것.
아마 마지막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테지만, 선의철의 수호신과 같은 광검이 신서울이 아닌 서울을 택한 것이 그녀에게 결단을 내리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아니면….
"역시 국가원수가 꼬삼인 건 아니지."
차라리 성추문이 크게 터져서 왼쪽으로 휘었다거나 하는 경우라면 모를까, 꼬삼이라는 건 한 국가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국격에 걸맞지 않는 물건을 가진 남자.
미안하지만 이제 스토리에서 물러나주셔야겠다.
"지휘관 님. 신서울, 정말 괜찮을까요?"
"물론이지. 거기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리는 서울에 집중하자."
신서울은 백희아와 뒤에서 몰래몰래 움직이고 있을 은유하가 알아서 정리할 것이다.
"히카리, 한강 이북에 있는 괴수는?"
[그게….]
히카리는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조금 허탈하고 질린 듯한 목소리였고, 나는 그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몇 마리야?"
[...최소한 오만.]
"등급은?"
[하나하나가 D급 수준 밖에 안 되는데, 크기가 너무 작아요...! 한 마리에 대략 30cm 정도...!]
"딱 좋네."
나는 지금이 때라는 것을 직감했다.
"도망쳐!!"
뱀의 몸속에는 기생충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