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52 2부 9장 09 키잡
S급 괴수들은 기본적으로 거대 괴수다.
아주 특별한 녀석을 제외하고는 몸체의 길이가 적게는 10m에서 크게는 70m에 이를 정도로 정말 다양하다.
그리고 시청사의 뱀은 게임의 난이도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는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평균 50m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캬오오오!
서울 시청의 잔해를 부수며, 괴수는 기어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양의 용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을 한 검은 괴수는 손에 여의주와 같은 물건을 쥔 채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청사의 뱀.
유저들은 대권잠룡이라고 사람들이 부르기는 하지만, 인게임 내에서의 공식 명칭은 따로 있다.
'유미르'.
다른 의미는 없다.
그저 유 씨 성을 가진 미르라는 의미다.
국제 히어로 협회에서 정한 이름 치고는 한국적인 색채가 강한 이름이지만, 문제는 이 '미르'라는 것이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불쾌한 요소로 받아들여진다는 것.
-아니, 서울을 점령한 빨갱이 괴수인데 왜 용이냐!
수많은 사람을 죽인 괴수를 상대로 용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하지 않아했다.
그건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괴수를 '시청사의 뱀'이라고 부르고, 플레이어들은 '대권잠룡'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은 정식 레이드.
"조심해. 유미르 콧물 쏜다.
인게임 속 공식명칭을 존중하여 레이드를 해야 하는 것이 지휘관의 숙명.
"브레스 조심."
캬오오오오오ㅡㅡㅡ!!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미르가 아가리를 벌리며 검은 브레스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여러 마룡들의 특징이나 마찬가지인 브레스를 뿜어내는 모습에서 괜히 가슴이 철렁내려앉았지만, 저건 유미르가 서울에 나타난 마룡조차 씹어먹고 스스로 배운 기술이다.
즉, 마룡도 아닌 놈이 마룡의 기술을 알고 있다.
놈은 학습하는 괴수다.
"그라운드 월."
히드라가 구두로 땅을 가볍게 두드리자, 우리가 서있던 곳으로 빌딩 하나가 기울어지며 브레스를 막아냈다.
콰ㅡㅡㅡ앙!!
빌딩이 무너졌다.
우리 쪽으로 날아오는 브레스는 일절 없었고, 파편조차 히드라가 세운 벽에 가로막혀 닿지 않았다.
"히드라, 저기 있는 빌딩 무너뜨릴 수 있어? 옆으로."
"아하. 식은 죽 먹기지."
히드라는 내가 지시한 곳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빌딩 한쪽이 갸우뚱 기울기 시작했고, 빌딩은 옆으로 기울어 땅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내 차례지?"
아지다하카는 내 시선을 받자마자 바로 모습을 감췄다.
곧 빌딩이 쓰러지던 곳에 빌딩 전체를 감싸는 검은 그림자가 펼쳐졌다.
캬오오오!
유미르는 대가리를 이리 저리 흔들며 자신의 머리 주변에 달라붙는 둘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라온, 누리. 7초 뒤 폭격 들어갈 거야."
"알겠습니다!"
"7초 동안 극딜하고 빠지면 되는 거임!"
라온은 바람으로 만든 창을 유미르에게 던지며 뒤로 물러났고, 누리는 검은 오라를 감싼 검으로 유미르의 비늘을 난자하며 꼬리 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7초 뒤.
위이잉ㅡ!
허공에 거대한 검은 균열이 열리며, 히드라가 무너뜨린 빌딩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마치 포탈과도 같은 형태로 반짝이던 균열 사이에서 아지다하카는 유미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인사 대신이야."
콰ㅡㅡㅡ앙!!
고층 빌딩이 통째로 유미르의 위로 떨어졌다.
비록 수직으로 꽂아버리지는 못했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H빔에 몸이 깔려도 뼈와 살이 찌그러지는 건 마찬가지.
아무리 S급 괴수라고 한들, 고층 빌딩을 통째로 얻어맞은 건 참을 수 없을 터.
그리고 공격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슈리랑 가온이가 같이 힘을 합쳐봐. 너희도 합체기 같은 거 만들어봐야지 않겠어?"
"합체기라뇨. 표현을 좀 바꿔주실래요?"
"저거랑 합체하라고? 으, 극혐이다, 정말."
"누가 할 소리."
서로 질색을 하면서도 슈리와 가온은 순순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폭발, 응집."
슈리의 불꽃이 한 점으로 응축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구체 덩어리 주변으로 가온의 손에서 솟구친 물줄기가 마치 그물망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ㅡㅡ!"
둘은 마치 자로 잰 듯한 타이밍에 구체를 집어던졌다.
무너진 건물의 시멘트 사이로 간신히 고개를 빼낸 유미르는 구체를 향해 브레스를 뿜었다.
"유나야!"
"빛이여!"
유나는 유미르의 눈을 향해 광탄을 터뜨렸다.
순간적으로 시야를 빛으로 물들인 사이, 거칠게 회전하는 물줄기는 브레스를 사방으로 튕겨내며 그 역할을 다했다.
나머지는 물줄기 안쪽에 숨어있던 구체가 유미르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 뿐.
"쾅."
내가 손뼉을 튕기자, 유미르의 입안에 들어간 불꽃의 구체가 폭발했다.
끼이익....
유미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리 봐도 괴수가 쓰러진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고, 마법소녀들은 한 자리에 모였다.
"아키택트, 잘 찍었어?"
"물론입니다, 지휘관!"
우리의 활약은 아키택트의 마도기어를 통해 영상으로 전달될 것이다.
비록 20초 정도 딜레이가 되어 생중계가 될 테지만-혹시나 모를 변수를 차단하기 위해 은유하가 열심히 정보 통제 중이다-, S급 괴수가 고개를 처박고 쓰러지는 모습은 분명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리라.
"역시 이제는 S급도 간단하게 처리하는 구나."
하지만.
원래 희망이 높아지면 그에 따른 절망도 깊어지는 법.
"이왕 잡는 거, 키워서 먹어야지."
DLC의 효과를 톡톡히 봐야하지 않겠는가.
"아키택트. 잠시 방송 멈춰 줄래?"
"뭘 하려는 겁니까?"
"마법."
DLC의 특별한 기능.
그것은 바로 자체 하드모드 진입이 가능하다는 것.
'원래 트롤링은 히로인의 기본 속성인 것이야.'
이것만큼 짜릿한 트롤링이 또 어디있을까.
나는 애써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상쾌하게 뱉어냈다.
"해치웠나?"
DLC, '난 키워서 먹어.'
[지휘관!! 유미르의 반응이 이상해요! 마치-]
"진화하는 것 같지?"
위잉, 위잉, 위잉ㅡㅡㅡㅡ!!
유미르의 머리 위로, 마치 바코드와 같은 검은 계단이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 * *
두두두.
헬기가 서울 상공을 난다.
이전에는 서울까지 날아가다가 상공에서 괴수를 만나 요격당할까봐, 설령 서울에 도착하더라도 지상에서 괴수가 독침이라도 발사할까봐 걱정되어 헬기는 커녕 드론도 띄우지 못했지만,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보이십니까! 서울의 주민들로 보이는 이들이 마포대교를 사수하고 있습니다!"
리포터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아래를 가리켰다.
카메라에 담기는 K-2 마도소총의 포연과 괴수들의 사체, 그리고 동료 괴수의 사체를 밟고 달려오는 괴수들은 이미 19세 미만 관람 불가를 운운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전쟁이었다.
지난 25년간 지구 곳곳에서 일어난 인류와 괴수 간의 전쟁이 마포대교라는 다리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한강 이남에 있는 괴수들은 모두 소탕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강 이북에서 넘어오는 괴수들은 더 강하고 더 많습니다. 과연 저들이 여의도를 지킬 수 있을까요...?"
리포터가 해서는 안 될 말이기는 했지만,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한강 이남에 흩어진 무수히 많은 코어들을 수거하기 전까지, 과연 여의도 방어선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왜냐면 마이크를 잡은 그녀조차도 서울을 탈환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
방송사의 지침도 그렇지만, 지난 13년 동안 단 한 번도 서울을 되찾지 못한 만큼 그녀는 서울을 다시 되찾는 다는 것에 대해 신뢰를 가질 수 없었다.
설령 그녀의 집이 저기 한강 북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앗, 말씀드리는 순간 괴수들이 최종 저지선을 돌파!!"
끼에엑!!
괴수 하나가 기어이 마포대교의 끝자락, 바리게이트를 넘었다.
비록 마도소총의 화망에 벌집이 되어 바리게이트에 걸쳐졌지만, 모자이크가 시급한 괴수의 머리가 바리게이트에 걸려 축 늘어졌다.
죽어 말라비틀어진 개불같은 모습에 잠시 웃음도 나왔으나, 그 뒤로 따라오는 수많은 괴수들의 행렬에 방송을 보는 모든 이들이 좌절하고 절망했다.
그러나.
"아아, 저 사람들은...!"
서울 시민들의 틈사이로 또다른 사람들이 나타났다.
시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장비를 더 잘 갖추고 온 이들은 바리게이트의 최전방에 서서 시민들이 탄환을 장전할 시간을 벌었다.
"히어로와 헌터들입니다! 서울 시민들의 탈환에 호응하며 나선 이들입니다!"
극히 일부.
정부의 성명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왔던 이들이 하나 둘 여의도에 집결했다.
그들은 코어를 서리하지도 않았고, 코어를 회수할 수도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서울 시민들의 앞에 서서 괴수들과의 싸움에 나섰다.
비록 그 수는 괴수들에 비해 현저히 적었으나, 모두가 하나가 되어 싸우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아, 저들이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요? 저 무수히 많은...."
구구구.
갑자기, 대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충격에 헬기 전체가 흔들렸고, 리포터는 간신히 안전벨트를 붙잡아 허공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뭐, 뭐야?!"
끼에에에엑ㅡㅡㅡㅡ!!
한강 북쪽.
종로 방면에서 뭔가 거대한 것이 하늘로 솟구쳤다.
마치 용오름같이 치솟아오른 검은 안개는 주변을 모두 어둠으로 뒤덮기 시작했고, 검게 물든 구름에서는 보라색 번개가 내려치기 시작했다.
키이익....
괴수들은 일제히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는 거대한 용오름을 향해 몸을 돌리며 대가리를 땅에 박기 시작했다.
"저, 저건 설마.... 서울의 S급 괴수...?"
S급의 박력이 아니다.
S급 그 이상의 박력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괴수들이 공포에 질릴 정도로, 서울시민들의 총구에서 등을 보일 정도로 거대 괴수를 향해 경배하는 게 더 급선무인양 행동할 정도로 괴수의 박력은 넘쳐 흘렀다.
키이잇ㅡㅡ!!
검은 용오름은 하늘로 치솟나 싶더니, 남쪽으로 크게 뛰었다.
그 모습이 마치 하늘을 유유자적 날아가는 것 같은 모습이었고, 카메라는 그 모습을 여과없이 렌즈에 담을 수 있었다.
몸길이가 무려 100m가 넘는 거대한 뱀.
그것은 마치 전설 속의 용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아, 아아...."
무려 2km가량 허공을 유유히 날아간 괴수는 형체만 간신히 남아있는 남산타워에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마치 뱀이 기둥에 똬리를 틀 듯, 거대한 용은 남산타워의 정상에서 큰 아가리를 벌렸다.
■■■■■■ㅡㅡㅡㅡ!!
서울을 지키는 모두가 긴장으로 고개를 숙였다.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거대 괴수의
S급, 아니 SS급 괴수의 포효가 울려퍼졌다.
"DLC 만세."
이제 SS급 코어는 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