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935화 (935/1,497)

EP.935부 막간의 이야기 - 현실과 테라

<그 시각, 제주공항.>

"우리 회사는 제주도에 있는 게 참 불만이야. 그렇지 않나?"

"그렇긴 하죠."

선글라스를 낀 금발 남자는 하품을 하며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앉은 스포츠 머리 사내는 뒷자석에 앉은 사내를 흘긋 보며 물었다.

"어떻게 되셨습니까?"

"아주 좋게 되었지. 일차 계약은 끝났네. 이제 작업이 완료되는 걸 기다리기만 하면 돼."

남자, 하선태는 선글라스를 벗어 안경닦이로 닦으며 구시렁거렸다.

"그나저나 유감이군. 왜 위에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겠어."

"회장님 지시사항이 아닙니까?"

"회장님은 회장님대로 따로 진행하는 게 있다. 우리들은 한 명을 골라서 모델로 선정하기로 했고...."

하선태는 스마트 패드를 켜서 갤러리를 확인했다.

안에는 백발에 청안에 가까운 여인이 온갖 인상을 쓰고 있는 사진이 가득했다.

"왜 석하랑이 선정되었을까."

"글쎄요. 하신라 씨 다음으로 넘어온 사람이라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다음에는 유나 나오냐?"

하선태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하지만 그의 운전기사, 이탁환은 그저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안 나오지 않을까요."

"왜, 우리 유나가 뭐 어때서!"

"이번 프로젝트에 유나 양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기 때문 아닙니까?"

"큭...!"

하선태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부분 하신라 씨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죠. 그리고 그 다음으로 유명한 사람이 아마 석하랑 씨일 겁니다. 개인적인 팬덤도 상당히 보유하고 있고요."

"유나는?!"

"유나는 제작사가 밀어주는 메인 히로인일 뿐이죠."

"큭...!"

하선태의 일픽.

이유나는 제작사의 편애주의에서 밀어주는 히로인일 뿐이었다.

만약 과거의 이야기나 또다른 현실의 이야기가 널리 퍼져서 많은 관심을 끌었다면 모두가 유나의 현실강림에 감동을 하며 납득을 했겠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유나는 이미 '공략이 전부 끝나버린'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개인의 특성을 이용해 현실로 넘어왔지만, 정말 유감스럽게도 다른 두 여신보다 끗발이 밀리는 것이 사실.

"우씨. 어디 테라 넘어가기만 해봐. 그 때부터는 유나의 피닉스가 시작될테니."

"유나맘이시네요."

"틀린 말은 아니지.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나로부터 유나가 태어났으니."

하선태는 선글라스를 치켜올렸다.

"그보다 테라 쪽은 어때? 거기도 슬슬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데."

"별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피닉스의 아바타는 휴면 모드에 들어간 상태고, 가이아나 왕국이나 다른 곳도 딱히 별 이상은 없습니다. 애초에...."

이탁환은 시계를 가리켰다.

"테라의 시간은 그렇게 많이 흐르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긴 하지."

피닉스가 잠시 휴식을 취하겠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하신라가 다시 헤드기어를 쓴 시점에서 고작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일주일 사이.

테라는 아직 별 다른 문제가 없다.

"하지만 곧 있으면...."

삐비비빅.

알람이 울렸다.

하선태는 자신의 스마트폰 너머에 비친 이를 보고 깜짝 놀라 전화를 받았다.

"예, 조 회장님."

[어, 난데. 너 지금 서울 좀 올라가야겠다.]

"...잘못들었습니다?"

[너 다시 서울로 올라가서 걔들 좀 만나고 와야할 것 같다고."

"...예?"

끼이익.

이탁환은 차를 잠시 갓길에 세웠다.

하선태는 심각해진 얼굴로 전화기에 대고 언성을 높였다.

"아니, 저보고 제주도 내려가서 본격적으로 작업 시작 하라면서요?"

[일감 하나 더 잡혔다. 이번에 아트팀에 들어갈 예산, 전부 그쪽으로 돌리기로 했어.]

"...정말입니까?"

하선태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럼 우리 쪽에 도대체 얼마나 예산이 투입되는 겁니까?"

[다른 쪽에 투입되는 예산만큼. 걱정마라. 첫 끗발이 좋았으니까, 이번에도 분명 좋을 거다.]

"하지만 저쪽도 만만찮은데 괜찮은 겁니까? 괜히 어줍잖은 걸로 하면...."

[그러니까 너보고 만나고 오라는 거 아니야. 이번 모델은....]

대머리는 하선태의 패드에 데이터 하나를 보냈다.

[이 자식이다.]

"이 자식이 아니라, 이 여신 아닙니까?"

[내용물이 다르잖아.]

"......오."

하선태는 턱을 손으로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닉스가 드디어 등판하는 건가요?"

[그래. 이미 작업은 섭외해뒀다. 너는 가서 계약서에 도장 찍고 사인만 받아오면 돼.]

"그럼 탁환이 시켜도 될 걸 왜 저한데...."

[뭐?]

하선태는 소심한 반항을 했지만, 상대에게는 도무지 통할 리가 없었다.

[야! 첫 프로젝트 아주 좋게 성공했으면 그걸로 다음 프로젝트를 크게 한 방 이어나갈 생각을 해야지, 귀찮다고 안 할래? 내가 어떻게 계약을 따냈는데!]

"회, 회장님이 직접 컨택을 하신 겁니까?"

[그래! 메일 보내고 DM보내고 아주 별 짓을 다했다!]

"아니, 그거 연락 안 와서 벌써 다른 두 팀에게 의뢰한 거 아니었습니까?"

[마침 연락와서 세 팀 작업을 들어가기로 했다.]

"아니...."

하선태는 황당함에 콧김이 절로 나왔다.

"미친 거 아닙니까?"

[그만큼 이번 프로젝트에 진심이라는 거지.]

"위험한 거 아닙니까?"

[위험하면 뭐 어때? 결과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하아."

하선태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얼마나 많이 벌었길래 그렇게까지 투자를 하는 겁니까?"

[언제는 많이 벌어서 작업 시작했냐? 다 좋아서 그러는 거지.]

"누구 좋으라고요?"

[모두가.]

회장의 말에 하선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혹시 20개 자리 중에 유나 자리는 있습니까?"

[없어! 다 피닉스야.]

"...하나도요?"

[어.]

"그럼 혹시 유나콘이 나올까요?"

[유나콘?]

조 회장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그, 뭐냐. 콘을 제작하려고 하면 제작할 수도 있지.]

"오...!"

[근데 지금은 아니야.]

"아...."

[일단 석하랑 쪽부터 먼저 되고 난 뒤에 생각해보자고. 다행히 'Ms.tteokbokki' 양도 문제가 없다고 했고, 아티스트 쪽도 기쁜 마음으로 작업 해줄거야. 네가 콘티만 제대로 준비한다면.]

"제가 또 준비해야 하는 겁니까?"

[그래. 당연하지. 피닉스콘도 제대로 준비해라. 처음 것만큼 잘 만들어야 할 거다. 알겠지?]

뚝. 뚜, 뚜, 뚜.

전화는 끊겼다.

하선태는 패드를 내려다보며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후. 그 돈으로 떡볶이나 사먹을 것이지."

하선태는 패드로 전달된 자료를 보며 입꼬리를 삐죽였다.

"유나콘 나올 때까지 숨 참는다. 흡...!"

"......두 달은 넘게 걸릴텐데."

하선태는 고개를 푹 숙였다.

* * *

<어느 세계의 지구. 네오 서울 여의도 C 호텔.>

"생각해보니 당신의 취향은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네요."

"네? 저요?"

히카리는 입에 물고 있던 케이크를 내려놓았다.

갑작스런 은유하의 질문은 그녀를 당황시키기에는 충분했고, 특히 질문의 내용도 보통 내용이 아니었다.

"회장님, 저 아직도 미성년자인데요."

"앗."

은유하는 표정이 굳었다.

X로이드를 만들며 너무나 자연스레 행동을 해와서 그렇지, 히카리는 명백한 어린이였다.

어린이가 여의도를 하늘 높이 띄우는 마도혁명을 일으키기도 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지구의 누구도 히카리를 따라올 수 없다는 것이 충격과 공포였다.

어리지만 알 건 다 아는 존재.

히카리는 케이크를 마저 입에 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음...취향이라."

히카리는 손뼉을 치며 손을 들었다.

"이 지구의 미성년자인 저는 할 게 아니니까 괜찮겠죠?"

"지금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거예요?"

"사차원에 존재하고 있을 저에게?"

히카리의 말에 은유하는 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

"저쪽 세계에는 당신이 없어요, 히카리."

"혹시 모르죠. 카르나 닮은 여자도 피닉스 님 옆에서 계속 달라붙어있는데, 저 닮은 여자도 한 명 정도는 있을 지도 모르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은유하는 히카리의 추측에 대해 부정할 수 없었다.

서로 다른 세계.

하지만 또다른 세계에서 존재할 지도 모르는 가능성의 존재.

그것은 마치, 은유하를 사랑하는 피닉스와도 같은 것...!

"그래서 당신 취향은 뭐냐니까요?"

"음.... 딱히?"

히카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바라는 건 없는데요. 제가 뭐 온갖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면서 히키코모리가 된 것도 아니고, 일본에서 넘어오자마자 피닉스 님 도움으로 하고 싶은 연구 다하고 지내는데 뭐가 불만이겠어요."

"당신의 취향을 말하라고 하니까...."

"그러니까요. 딱히 뭔가 특별한 취향이라고 말할 것도 없을 정도로 평범하게 성장해서 그래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면, 특별한 성벽이 생겼을 지도 모르죠."

히카리는 다시금 케이크를 퍼먹었다.

"다중차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저는 '유니크'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특이점이나 마찬가지인 히카리예요. 다른 히메지 히카리들은 다를 수 있죠. 가령 여자가 된 오빠랑 같이 피닉스 님 같은 분에게 퍗퍗 당한다거나."

"......."

은유하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좀."

"그냥 예시예요."

"진짜 그런 게 취향인가요?"

"그럴 리가요. 굳이 따지자면 제 취향은...."

히카리는 잠시 고개를 푹 숙였다 들어 올렸다.

"회장님은 어떤 음식을 좋아하세요?"

"음식? 갑자기?"

"예. 커피는 좋아하시지만, 다른 건 본 적이 없어서."

"음...커피와 어울리는 것들?"

"그렇구나...."

히카리는 은유하를 향해 링크 하나를 보냈다.

은유하는 그걸 받아보자마자 바로 얼굴을 붉혔다.

"아니."

"취향이라고 한다면, 그게 제 취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사락, 사락.

"사장님, 혹시 온천 좋아하시나요?"

히카리는 활짝 웃으며 은유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혹시 노천 혼욕탕 만들어보실래요? 오직 사랑하는 남자와 단 둘이서만 쓸 수 있는, 그런 온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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