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28 2부 8장 13
"오빠야, 점마가 말한 거 뭔데?"
석하랑은 인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는 피닉스가 한 말에 표정이 굳었다.
나는 그녀가 어떤 식으로 원작을 접했는지 잠시 생각한 뒤, 대전의 시설을 가리켰다.
"말 그대로의 의미야. 신서울의 전력, 광검의 마력을 뽑아다 쓰고 있었어."
"...진짜가?"
"그래. 2025년에는."
2025년의 한국은 여러모로 몰려있던 나라였다.
S급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늘어나지 않고, 정부는 부정부패하여 영화나 만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극단적인 막장국가의 모습을 보이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기주의가 팽배하여 트루-헬조선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뒹굴었다.
"20년의 지구는 그래도 나름 굴러갔잖아? 그런데 25년의 지구는 아니야."
"선의철이 고작 6년 정도 더 집권했는데?"
"그래서 계속 망해가기 시작했지."
악회일로를 거듭하는 게 하나의 지방자치단체면 단체장을 갈아치우면 그만이지만, 25년의 한국은 선의철의 자리를 함부로 교체할 수 없을만큼 나라가 부패해져버렸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한강에는 괴수들이 득실거렸고, 수출강국으로 우뚝 솟으려고 하니 바닷길이 막혀버렸다.
한국 내의 발전소는 더이상 발전기를 돌리지 못했고, 원자력은 평양 사태가 터질까봐 함부로 원자력을 굴리지도 못했다.
"프로페서 H는 아주 획기적인 방법을 내어놓았어. 마력을 전력으로 변환하는 거야. 다행히 아주 쉽게 해결할 수 있었지. 프로페서 H만이 발견해낸 공식과 기계를 이용하면 전력으로 바꿀 수 있었어."
"히카리가?"
"그래. 히카리가 만든 기계로 마력을 전력으로 바꿀 수 있었지. 대신 효율이 조금 나빴지만."
코어 하나가 다른 곳에서 낼 수 있는 에너지원이 전력으로 바꾸면 효율이 극명하게 떨어졌다.
그 바람에 괴수를 사냥하여 얻은 코어에서 마력을 추출한다는 계획은 의미가 없어졌다.
-마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뭔가 없을까?
-사람한테서는 뽑아낼 수 없나?
-오, 그래. 문신사가 잡은 소나무부대를 인간 배터리로 쓰는 거야. 평소에는 캡슐 속에 재워서 깨어나지 못하게 만든 다음, 그들로부터 마력을 뽑아내는 거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건 아니잖나. 그렇지?
"선의철의 발상은 지극히 반인륜적이었어. 빌런에 범죄자들을 국가의 발전...진짜 발전-전기 생산을 위해 써먹겠다는 발상에 어떤 인권단체가 대놓고 반기를 들겠어? 사람을 죽인 살인자로부터 무한히 혈액을 뽑아내는 거랑 같은 이치였던 거야."
"미쳤나. 그러다가 갑자기 괴수 나타나면 우짤라고 그랬는데?"
"석하랑 부르는 거지. 아니면 뭔가 기적같은 상황으로 우주가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든가. 누가 그러더라. 전쟁 같은 건 21세기에 일어나지 않으니까 국방비는 감축해도 된다고 했잖아? 그 설정이 고스란히 적용된 상황이라 이거지."
평소에 광검이 마력을 쓸 일이 없으니, 그 마력을 전력으로 뽑아내자!
미친 발상이었지만, 우리의 호구 광검은 애국이라는 말과 협박으로 채워진 목줄에 순순히 마력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는 폭주하는 루살카를 제어하느라 밖으로 나서지 못했지만, 인간발전기가 바로 선의철이 어떠한 이유에서든 광검을 신서울 밖으로 보내지 못하게 만든 배경이었다.
"20년의 지구에서는 그렇게까지 또라이는 아니었지 않나?"
"무능함을 언론 플레이와 협잡으로 버티고 버티다가 한계가 다가온 거지. 원래 상처는 곪으면 터지는 법이잖아. 20년의 선의철이나 25년의 선의철이나 성격이 큰 차이는 없었어. 무능을 살인멸구로 덮은 횟수 차이는 좀 많지."
"와, 진짜 소름돋네."
석하랑은 선의철의 행보에 치를 떨었다.
직접 선의철에 의해 국가를 위해 헌신할 히어로로서 이미지메이킹을 당한 장본인으로서, 비록 게임 속 모습이라고는 하지만 말기암 4기 환자처럼 내부가 무너져버린 나라의 모습에 석하랑은 이를 갈았다.
"그래서 발전기로 써먹던 사람 중에 가장 대표가 우리 아빠였다 이거가?"
"그래. 장인...어른이지."
광검 허윤환.
내게 장인어른으로 불릴만한 사람은 20년의 그 남자지만, 그 남자를 장인어른이라고 부르기에는 뭐라고 해야할까….
"생물학적 장인어른은 25년의 지구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어. 그건 알지?"
"울 아빠가 아무리 어른답지 않다고는 해도, 지금 여기에 살아있지 않다고 해도 생물학적 장인어른은 좀 그렇지 않나?"
"미안. 너무 호칭이 그랬지?"
"그냥 오빠 편한대로 광검이라케라. 우리 아빠 빙구같은 거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서슴없이 패드립을 날리는 석하랑이 무섭다.
패드립이 아니라 진짜 패륜이라서 더 무섭다.
하지만 광검은 이렇게 당해도 싼 사람이다.
선의철이 모든 지구를 둘러봐도 3cm인 것처럼,
신라가 어느 세계를 돌아봐도 사랑스럽고 예쁘고 귀엽고 쎅쓰하고 싶은 것처럼,
광검이 제대로 아버지 역할을 한 세계는 어떤 지구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빙구처럼 나라에서 마력 좀 뽑아서 애국전력으로 돌리겠다고 하니까 뽑아갔겠지. 맞나?"
"맞아. 그리고 그 바람에...아주 치명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지."
원작 게임에서는 특정 조건을 만족했을 때만 발현되게 되어 있다.
그리고 20년의 지구에서는 나, 피닉스의 행보로 인해 구현되지 않은 게 하나 있다.
"장모님 있잖아, 내가 20년의 지구에서 00년부터 움직인 바람에 아나스타샤가 되었잖아?"'
"응. 그런데?"
"원래는 21년 정도인가…. 그 때 펜릴에게 살해당해서 죽었어야 했어. 아무도 그녀가 루살카의 빙의체라는 걸 모르고, 루살카의 혼은 자아를 상실하고 폭주하는 원념만 흔적을 찾아가지. 그럼 여기서 질문. 모스크바에서 가장 가까운 흔적은 어디에 있었을까?"
"...신서울이 여기서는 세종이니까, 어."
석하랑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아빠?"
"그래. 모스크바에서 세종이 부산보다 가깝지. 루살카의 원념이 광검에게 깃든 거야. 이미 이전부터 애국전력 발전기로 쓰이던 광검은 루살카의 원념이 깃들게 되고 몸이 붕괴되는데…."
여기서 아는 사람만 아는 진실.
"남자의 몸에 오염된 정령의 힘이 폭주하여 발현되기 시작했어. 이러면 어떻게 될까?"
"...그 간부의 살인충동을 얻는 거 아이가? 원작 석하랑이 부산의 수백만을 학살한 얼음마녀가 된 것처럼."
"그래. 마녀가 되지. 광검도 마녀가 되고."
"뭣."
석하랑은 진심으로 혐오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게임 속 광검은 실시간으로 루살카가 되어가던 중이었어."
사랑하던 여자로 변하게 되는 자기 자신을 보며, 결국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미쳐버린 그는 순간적으로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갑작스럽게 폭주를 하게 되었고, 그게 석하랑의 부산 학살로 이어지게 되었다.
"허윤화 씨."
원작 게임속, 히어로 협회에서 종종 보이던 금발의 루살카.
바로 그녀가 광검이 루살카 병에 걸려 TS된 캐릭터였다.
"네 아빠가 루살카 된 거 스샷있는데 한 번 볼래?"
"도랐나?"
"농담이야."
나는 떨리는 석하랑을 토닥이며 진정시켰다.
"괜찮아. 이제 저 시설, 망가지면 루살카 화가 당장은 멈출테니까."
"그건 또 뭔소린데?"
"간단한 이치야. 몸안의 마력이 빠져나가잖아. 그러면 다시 마력이 자연히 회복될텐데, 누구 마력이 충전되겠어?"
"앗."
깨끗한 물이 빠져나가고 오염된 물이 다시 차오르는 악순환의 반복.
그게 허윤환의 폭주 배경 중 하나였다.
"선의철, 완전 도라이 새끼네?"
"당연하지. 한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쓰레기같은 존재인 걸."
무서운 것, 하나.
"정말 무섭지 않아? 인게임 속 지구는 20년의 지구를 그대로 스캔떠서 만들어진 거잖아. 그렇다면 20년의 지구 속 선의철도 저런 자였다는 거지."
"갱생의 여지는 없나?"
"가능성은 있지."
자지가 18cm가 된다면.
...아니, 큐브를 얻는다면.
"그런데 그런 미래는 없을 거야."
그 어떤 세계에서도 선의철이 큐브를 얻은 미래는 없다.
그리고 지금 신라가 플레이하고 있는 게임 속도 마찬가지.
* * *
<인게임,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
"정말 이대로 내려가면 그 프로페서라는 사람이 있는 거 맞음?"
"물론이지."
우리는 연구원 가운을 입고 계속 내려갔다.
안에는 슈트를 받쳐입고, 가운의 앞 단추를 채우고 연구보고서처럼 생긴 종이뭉치를 잔뜩 챙겼다.
"좋은 아침."
"아침 아닌데요…."
"어차피 좀 있다가 아침 될텐데 뭘."
"그것도 그런가. 흐아암. 어디가?"
"18랩."
"으아, 싫겠다. 고생해."
누구도 우리를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우리를 의심하는 자가 나타날 때마다 적당한 대사로 그들을 받아쳤고, 우리는 너무나 쉽게 계단과 엘레베이터로 내려갈 수 있는 지하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여기 아니면 냄새나는 환풍구로 와야했을텐데.'
다행이다.
다행히 그가 이미 '환풍구 아닌 루트'를 찾아봐서 다행이었다.
"그, 선배님."
"왜 그래, 유나 연구원."
"저희 진짜 이렇게 내려가는 거...너무 쉽게 내려가는 거 아닌가요?"
"그렇긴 하지."
공략집을 들고 공략 대사만 선택하는 미연시만큼 쉬운 일이다.
더군다나 현재 내가 함께 내려온 셋은 트롤링의 빈도가 가장 낮은 스타팅 셋.
그나마 트롤링을 할 수 있는 누리가 잠잠하니, 긴장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CCTV가 우리를 찍고 있을텐데."
"걱정하지마, 유나야. 저 CCTV로 우리가 내려오는 걸 보고 있을 사람은 자기를 구해달라는 신호를 보낸 사람일테니까."
나는 우리를 찍고 있는 벽걸이 CCTV를 향해 손을 들었다.
그러자 CCTV는 고개를 끄덕이듯 위아래로 움직였다.
"봤지?"
"신기하네요…. 정말로 여기가 그런 시설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예요."
"그러니까 말이야."
광검 발전소.
이건 어지간히 원작 세계관을 파고들지 않으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요소다.
그도 나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조사했기 때문에 알게 된 거지, 몰랐으면 그냥 히카리와 큐브를 얻는 연구소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다왔어. 이제 이거 타고 내려가면 돼."
"위로 올라가는 엘레베이터인데요?"
"이걸 어떻게 누르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야."
나는 셋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부터는 양동작전이지. 우리가 침입한 걸 아직 모르지만, 지금부터는 시선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거든."
"어디로요?"
"지상에서."
슬슬 시간이 됐는데.
"트롤, On.”
* * *
"으으으, 배불러."
기우는 배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몸서리를 쳤다.
그의 몸에는 떡볶이와 튀김 냄새가 가득 풍겼고, 그건 관리실의 방 안도 마찬가지였다.
"...응? 저거 뭐야?"
창문을 열려고 창가쪽으로 오니, 뭔가 어둠 속에서 붉은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트럭?"
상당히 거대한 트럭에 기우는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저게 왜 저기…?"
잠시 이상을 느껴 마도기어에 손을 뻗기 무섭게.
"어, 어어?!"
□□□□□□□!!!
굉음을 울리기 시작한 트럭이, 연구소 정문을 향해 달려왔다.
그리고.
콰ㅡㅡㅡㅡㅡ앙!!!
트럭은, 연구소 정문을 박살내며 당당히 건물 앞에 멈췄다.
안에서 내린 이들은ㅡ
"...저것들 뭐야?"
철컥.
얼굴에 각기 동물과도 같은 가면을 쓴 괴한들이었고,
[모두, 뒈져라냥!!]
투두두두두두두두!!
총을 들고 있었다.
[이 몸은 펜릴 마스크!]
[나는 아지다하카 마스크!]
[...히드라 마스크.]
[그리고 나.]
[태극 마스크.]
[[[[우리는 빌런 민초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