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15 3부 3장 000 창염개진
"오호호! 너희들은 이제 끝이다!"
마녀의 웃음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히드라를 닮은 듯한 여인은 깔깔대며 자신의 손에 있는 스태프를 앞으로 휘둘렀다.
구구구.
몸집이 십수 미터는 넘는 거대한 흙의 거인이 앞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거인의 주먹에 검은 강철의 푸른 괴인, 피닉스는 전방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카가가강!
피닉스는 거인의 주먹을 손으로 받아냈다.
등 뒤의 날개에 최대한 강한 힘을 불어넣으며, 날개를 크게 펼치며 거인과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거인과 하늘을 나는 존재의 대결은 누가봐도 불리한 대결이었다.
"피닉스 님!!"
금발의 여인이 비명처럼 피닉스의 이름을 불렀다.
피닉스는 아주 천천히 거인과의 힘겨루기에서 밀리고 있었으나, 여인에게 이름을 듣자 마력을 더욱 끌어올리며 거인의 주먹을 더 강하게 밀었다.
카가가강!
불꽃의 마력과 땅의 마력이 부딪혀 마력의 분류가 일어났다.
주변에 있던 이들은 전부 사방으로 흩어지며 피닉스와 신관의 대결을 주시했다.
이번 대결이, 가이아나 왕국의 운명을 결정한다…!
"오호호호! 소용없다! 네놈이 아무리 용을 쓴다고 한들, 이곳은 지하! 가이아나의 영지! 이 땅에서 나, 땅의 신관을 이길 수는 없는 법!"
[그래, 땅에 달라붙어있으면 이기기 힘들지.]
콰ㅡ앙!
피닉스는 기어이 거인의 주먹을 튕겨냈다.
거인의 몸이 뒤로 갸우뚱 넘어갔으나, 거인은 발을 뒤로 뻗는 것으로 간신히 자세를 붙잡았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봐주지 않겠다.]
피닉스는 하늘을 향해 한 손을 뻗었다.
[창염개진.]
평소와 같은 기술명이지만, 평소와는 다른 자세.
피닉스가 펼쳤던 손을 움켜쥐자, 피닉스의 전신으로부터 푸른 불꽃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푸른 불꽃이 피닉스의 전신을 뒤덮기 시작했다.
뒤덮는 것으로도 모자라,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거인과 대등하게 볼 수 있을만큼, 아니, 거인과 같은 키의 '상반신'과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이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오랜만이군.]
"뭐, 뭐야…!"
신관은 창염으로 반짝이는 거대한 '정령'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 이런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
[이제 처음 봤으니,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이다.]
"도대체 뭔데?!"
[얼티메이트 폼.]
창염의 거인은 공중에 뜬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푸른 화염을 가두는 듯한 검은 갑주에는 금빛의 테두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대지의 신관이여. 너에게 봉인된 땅의 신을 해방하겠다.]
"마, 말도 안 돼! 설마 당신은…!"
[창염의 일격.]
창염의 거인, 피닉스는 팔 하나를 뒤로 넘겼다.
[압도적인 창염의 세례를 받아라!!!]
피닉스의 불타는 주먹이, 거대 골렘의 배를 꿰뚫었다.
[창염개진.]
화르르르르르륵!!
세계가, 푸른 불꽃으로 물들었다.
* * *
"음, 완벽해."
(주) 킅훑류의 회장, 조모씨는 오늘도 편집된 영상을 보며 만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이게 합성이지."
조모씨는 편집팀을 닥달하여 새로운 영상을 만들어냈다.
피닉스가 거대한 바위 괴인을 상대로 싸우는 모습은 실제가 아니다.
CG 그래픽 작업이다.
이전과 달리 상당히 CG의 이질적인 느낌이 강했지만, 적어도 현대의 그 어떤 영상매체에서도 이런 사실적인 느낌을 주지는 못했기에 조모씨는 몹시 만족하고 있었다.
"회장님, 어떻게 할까요? 승인할까요?"
"왜? 이거 완성본 아니냐?"
"실무팀 사이에서 회장님의 결정을 바라는 사안이 하나 있습니다."
"보자."
조모씨는 비서로부터 스마트 패드 속 자료를 건네받고 인상을 찌푸렸다.
"'마지막 일격은 그래도 '파이어 펀치'로 해야하는 거 아니냐'고?"
"예."
"에반데."
"예? 뭐라고요?"
"아무것도 아니다. 음…."
조모씨는 자료가 담긴 파일을 튕겨 날려버렸다.
"안전하게 창염개진으로 해."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리고 저거, 얼티메이트 폼말고 다른 거 없나?"
"원본을 얼티메이트 폼이라고 부릅니다."
"그럼 좀 티 안나게 잘 버무려봐. 궁극피닉스. 어때?"
"......."
비서는 아무 말도 없이 스마트패드를 넘겨받았다.
"쯧. 매정하기는. 그에게 전해. 앞으로도 이렇게 큥큥으로 싸운다면, 약속한 씬당 2천만원은 지급하기 어렵다고. CG값이 더 나오겠다."
조 회장은 구시렁거리며 누군가를 욕했다.
"젠장. 좀 더 멋있게 싸우란 말이야. 쉬운 길을 선택하지 말고. 이제는 죽어도 안 죽는데 왜 자꾸 좆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거지?"
"그게 가장 쉽고 빠른 길이니까요?"
"젠장! 내가 보고 싶은 건 섹스가 아니야! 그놈의 섹스는 이미 진작에 많이 봐왔다고! 엉?! 내가 그놈이 히로인들이랑 하는 섹스 보려고 이렇게 사는 줄 알아?"
"하지만 그녀와의 섹스는 보고싶어 하시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뚱해있던 조 회장의 얼굴에 비통함이 내려앉았다.
"쯧쯧, 불쌍한 여자. 파트너도 빼앗겨, 다른 세계선에서는 다른 남자랑 엮이는 것 때문에 욕 먹어. 으휴, 안타깝기 짝이 없다니까."
"그래도 중간에 그녀의 루트를 타는 세계선도 있었지 않습니까?"
"그거, 중간에 날아갔어."
"네?"
"날아갔다고. 개발 도중에 루트가 삭제된 히로인 같은 거야. 선의철 딸 선겨울의 경우처럼."
조 회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테라에서 다시 만날 가능성도 희박할텐데. 안타깝구나, 안타까워."
"진심으로 안타까워하시면, 좀 도와주지 그러셨어요."
"도와줘? 나 진짜 많이 노력했는데? 그 가슴을 가지고 유혹 못한 녀석이 잘못이지."
조 회장의 목소리는 더욱 안타까워질 뿐이었다.
"에휴. 됐다. 테라의 환몽경으로 가는 거라도 봐야지."
"아, 그거 말입니다만…."
비서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열었다.
"그, 어제 저희가 출시한 오토체크 디펜스 게임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거 왜?"
"그가 지금 그것만 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조 회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왜?!"
"여성형 피닉스가 최초 공개 되었으니까요."
"......."
조 회장은 머리를 탁 쳤다.
* * *
"신라야, 너 너무 약해."
"게임이잖아요. 과몰입하지 마요."
"과금을 해도 약하면 어떻게 하지?"
"침대 위에서는 강하니까 괜찮은 거 아닐까요?"
"스마트폰 속에서도 강했으면 좋겠는데."
게임 오버.
나는 또다시 패배를 겪었다.
"전화할까? 신라가 왜 이렇게 약하냐고?"
"약한 게 아니라 컨트롤이 안 좋은 거 아닌가요?"
"인정해. 이런 게임에는 약하니까. 그래도 이왕이면 2스킬이나 3스킬 같은 것도 달렸으면 좋겠어."
"뭔데요?"
"여캐랑 붙어있으면 능력치 버프, 남캐 옆에 있으면 능력치 디버프."
"음습하네요, 당신."
신라가 나를 향해 음습하다고 말했다.
충격적이다.
"유나나 라온, 누리 같이 다른 애들은 이렇게 강하게 나오는데, 왜 너만 이렇게 약하게 나오는 거야? 누리 한 명 있으니까 초반 웨이브를 몇 웨이브나 그냥 넘어가잖아."
슉슉, 슉슉슉.
안 그래도 캐릭터의 수가 많지 않은데, 조합은 여섯 명으로 한정되어 있는데, 초반에 뽑지 못하면 압도적으로 몰려드는 지상군에 쓸려버리고 만다.
"하신라 셋이 나와서 3웨이브에서 게임오버 당한 내 슬픔을 알아?"
"그건 제가 약한 게 아니라, 저는 디버프를 거는 캐릭터라서 그런 거예요. 다 알면서 왜 그래요?"
"가챠로 캐릭터가 나오니까 그렇지!"
"가챠로 캐릭터 뽑는 건 개랜디 시절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전통이었다고요."
"네가 어떻게 그걸 알아?"
"다 해봤으니까요. 푸흐흐."
신라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자랑스럽다고요. 제가 이렇게 모두에게 보일 수 있다는 게. 제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를 사방에 널리 퍼뜨릴 수 있는 게 얼마나 좋아요?"
"응, 성능이 곧 사랑이죠? 성능 개같아서 사랑은 커녕 다들 하신라 빼고 다른 캐릭터 넣으라고 하고 있죠?"
옆에서 라운드를 플레이하던 석하랑이 끼어들었다.
"성능 구리면 사랑도 식는 법이죠?"
"싸우자는 거예요?"
"진정하세요, 신라 님. 세상에는 오빠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있어요."
유나는 신라를 진정시키며 엄지를 척 들어올렸다.
"애정충."
"그거, 별로 좋은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나 신라 애정충 맞아."
유나의 말을 듣고 나니 뭔가 깨우친 것 같다.
"신라의 성능이 안좋다는 건 아무도 신라를 안 쓰려고 한다는 거잖아? 그럼 내가 그만큼 열심히 쓰면 된다 이거지."
"당신…."
"남들은 다 신라를 다른 캐릭터로 교체해도, 나는 신라를 끝까지 데리고 갈 거야."
캐릭터가 삭제되지 않는 한, 나는 신라를 최종전투-아니 게임이 서비스가 종료되는 그날까지 함께 할 것이다.
그것이, 최애캐니까.
"성능이 모자란다면, 성능을 늘리면 돼."
"캐릭터 자체 성능 올리려면 파편이 필요한데요?"
"파편도 뽑을 수 있잖아."
가챠!
"근데 이왕이면 성능이 조금 더 좋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안 드나?"
"......."
"하신라라는 이름보다 창염이라는 이름으로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텐데."
"아, 그건 아니야."
나는 석하랑의 의견에 전면부인했다.
"하신라가 사랑하는 사람은 여기, '블루버드' 뿐이라고 되어있잖아. 만족했어."
"블루버드가 뭔데?"
"오빠 계정 명이요."
"나 참…."
석하랑은 진심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직히 불만은 없어. 조금 기대가 높아서 기대와는 다른 스펙에 약간 아쉽다는 마음은 있지. 내가 제일 불만인 건 이거야."
나는 시계를 봤다.
어느덧 벌써 시간은 75분이 지나간 시점이었다.
"75분에 한 판이라니. 남는게 시간뿐인 내게는 너무나 잔인한 게임이야."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잠시 짬이 날 때 하는 게임 정도로 여길 수 있겠지만, 한 게임을 주야장천 잡고 플레이 할 수 있는 내게는 너무나 긴 주기다.
"안 되겠다. 플레이 티켓을 코어 주고 사야겠어."
"네? 당신, 미쳤어요?"
"그, 그래. 빙구야, 그걸 돈 주고 사는 멍청이가 어디있는데?"
"다시 생각해봐요. 오빠, 그건 돈 주고 사라고 만든 게 아니에요."
"아니지."
나는 스마트폰을 눌러 화면을 보여줬다.
"이렇게, 300코어만 주면 살 수 있게 만들어놨잖아? 이건 사서 하라는 거야."
나는 가차없이 스마트폰의 화면을 눌렀다.
"하신라 만렙 찍을 때까지 존버한다."
"그럼 테라는요?"
"테라?"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 없어도 며칠은 잘 돌아가지 않을까?"
"하……."
내가 하루 이틀 게임 좀 한다고 망할 세상이었으면, 진작 망했을 것이다.
* * *
"네가 그걸 하러 가면 우리는 뭘 관측하라고."
졸지에 테라의 데이터를 수집하던 팀은 강제로 일을 쉬게 되었다.
"어떻게 하죠, 팀장님?"
"이렇게 된 이상…."
팀장은 스마트폰을 열었다.
"떡볶이 주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