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14 3부 3장 00 정령들의 속사정
"뭔가 내가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느낌이야. 마치 백시안도 있고 백시우도 있고 청시우도 있는 그런 느낌.""그건 무슨 말이에요?"
"그냥, 감이 그래. 내가 사방에서 우후죽순으로 튀어나오고 있는 그런 느낌이 들어."
나는 좀처럼 기시감을 지울 수 없었다.
20년의 지구에서 세상을 구하고, 그곳에서 창염을 구해내고 현실로 돌아온 나는 분명히 나로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흔히들 말하는 평행 세계 곳곳에는 또다른 내가, 또다른 피닉스가 존재할 지도 모른다.
"가능성은 무궁무진하잖아. 안 그래?"
"피닉스 멀티버스가 생성되는 거로군요."
"그런 셈이지."
우리의 현실이 메인스트림이라고 한다면, 나로부터 파생된 수많은 가지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가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너를 구하겠다고 하는 세상도 있을테고."
"만나자마자 '섹스를 하러 왔다!'면서 제 정신을 일깨우는 피닉스요?"
"그래."
20년의 지구에서 했던 모든 것들을 뒤로 한 채 과거로 돌아가 똑같은 상황을 다시 반복하게 되었으니, 그 피닉스를 두고 우리는 '배드 피닉스'라고 부르기로 했다.
"어쩌면 현대에 남아서 다른 여자의 피닉스가 된 녀석도 있을테고."
"그건 당신이 저 대신 희생하는 길을 제가 막았을 때의 이야기잖아요."
"그렇지."
나는 도달했지만, 어쩌면 또다른 내가 도달하지 못했을 지도 모르는 길.
20년간, 혹은 25년간 계속 이어진 창염의 거절에 지치고 포기한 내가 다른 히로인들에게로 눈을 돌려 더이상 '창염의' 피닉스가 아니게 된 길.
"평범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갈아타죠."
"유나든 하랑이든, 그도 아니면 다른 히로인이든. 내가 아무리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한들, 계속 거절당하면 마음이 꺾이는 법이니까."
창염에 대한, 하신라에 대한 애정을 버리고 다른 여자로 갈아탄 피닉스.
우리는 그를 '노말 피닉스'라고 칭하기로 했다.
"노말 피닉스만 거의 17명 나오겠네."
"유나의 피닉스, 하랑의 피닉스, 히로인들, 정령에 간부들마다 한 명씩 나오면 10 더하기 6 곱하기 2니까...단순 계산으로도 21명의 노말 피닉스가 나오네요. 푸흐흐. 바람둥이."
"그거, 나는 아니다."
나는 창염을 제외한 16명의 히로인을 생각했건만, 신라는 여섯 명의 정령을 정령으로 만들지 않고 간부로 계산하여 노말 피닉스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왜 21명이야? 22명이지."
"당신이 그 자식에게 반한다는 세상은 있을 수 없어요."
"...절풍?"
"네."
세상이 뒤집혀도 절혐은 끝나지 않는다.
"그건 선의철의 18cm 페니스 만큼이나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요. 솔직히 당신, 절풍보다는 펜릴이 더 좋죠? 당신 플레이 로그를 뒤져봤을 때 알았어요. 절풍으로 각성시킨 거, 절풍 루트를 탈 때나 올정령 각성 클리어가 아니면 굳이 절풍으로 각성 안 시켰잖아요."
"......그건 그렇지."
떠받들어야 할 절풍보다는 유쾌하고 재미있는 펜릴이 더 낫다.
민트초코만 먹을 수 있다면.
"사실 절풍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절풍보다 펜릴이 더 좋은 점이 하나 있어."
"뭔데요?"
"절풍은 펨돔을 좋아해."
"......."
신라의 표정이 더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래서 펨돔으로 했어요?"
"살면서 한 번은 해볼 수 있는 값진 경험이었어. 그래도 뒤가 뚫리지는 않았다고. 강제로 얼굴을 그곳에 처박아야 하는 상황은 생겼지만."
절풍의 성향은 펨돔이다.
다른 성향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절풍은 누군가의 위에 서기를 바란다.
"내가 게임 플레이를 할 때도 그랬지만, 정령으로 각성시키고 난 뒤에는 정령에 빙의한 히로인들이랑 주로 했거든? 그래서 나름 최대한 내가 원하는 대로 하려고 조절했다고."
아무리 가상현실이라고 한들, 싱글 플레이 미연시 게임에서 히로인이 바라는 섹스를 하기 위해 내가 희생하면서까지 할 이유는 없다.
"그치만 저를 상대로는 그렇게 할 거잖아요."
"그건 너니까 그런 거지."
"그거 되게 가슴이 큥큥거리는 말이네요."
하신라는 나를 향해 게슴츠레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럼 다른 정령들은 어때요?"
"뭐, 별 거 없지."
진짜로 별 거 없다.
"앙그라 마이뉴는 요바이. 자는 척하는데 밤에 강제로 들어와서 이불 밑에서 희롱하다가 강제로 당하는 걸 좋아하지."
"음습하네요."
"어둠 속성이니까."
다른 취향도 많기는 하지만, 앙그는 기본적으로 어둠 속에서 하는 걸 좋아한다.
"지륜은...역시 쇼타?"
"그것도 있지만, 쇼타이기 전에 마망 플레이를 좋아하더라. 쇼타가 취향저격인 것도 있지만, 본인이 모성애를 느낄 수 있는 행위를 좋아하더라고."
지륜은 대지모신이라는 배경답게 마망이 되기를 바란다.
그게 엇나가고 또 엇나가고 비틀려서 쇼타콘이 되어버렸다.
이건 성주가 잘못한 것이다.
"테라가 오염되지만 않았어도 그냥 거유 누님캐가 되었을텐데."
"그런 것 치고는 지금 저희가 보고 있는 과거의 테라도 비슷하지 않아요?"
"가이아나치의 경우랑은 조금 다르지 않아? 이건 20년의 지구에서 악역향을 받은 빌런이 저지를 거잖아."
히틀러의 환생이 차원문을 넘어 테라에 넘어가 가이아나 왕국을 네오 나치로 만들었다.
차원문이 열리게 된 계기를 따져봐도, 역시 성주가 원인이다.
"내가 지륜이나 히드라를 옹호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녀석도 원래부터 쇼타를 가장 좋아하던 건 아니었을 거야. 단지 180cm 정도 되는 남자가 응애거리는 것보다는 진짜 작은 아이들이 눈나하는 게 더 자기한테는 좋아서 그랬던 거겠지. 음, 그럴 거야."
"절풍은 펨돔, 앙그는 요바이, 지륜은 쇼타. 정령들 정말 끝장이네요."
하신라는 자신과 같은 위상들이 내면에 가지고 있던 음습한 욕망들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다른 셋은 어땠어요? 당신이 게임에서 만났던 그들은."
"개천광, 환룡, 루살카?"
"네. 아, 루살카는 우리가 아는 그 루살카로 해야할까요…?"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돼. 눈갱이기는 하지만, DLC로 광검과 루살카의 생활을 체험할 수 있었으니까."
"...네?"
"허윤환 체험이 괜히 있던 게 아니다 이 말씀."
DLC, ‘A Snow White’.
백설공주를 뜻하기도 하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들에게는 석하랑이 정령으로 각성하면서 간접적으로 깨닫게 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추억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DLC이다.
"플레이어는 D급 히어로 허윤환이 되어서 속초의 군부대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여기서 루살카랑 만날 수 있지."
"그래서 루살카랑 큥큥하는 거예요?"
"루살카랑 큥큥하는 거 아니야. 루살카는…."
혹시나 석하랑이 들을까봐 나는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지금은 석하랑이 스트리밍 중이었고, 전자 민속놀이 중에서도 하필이면 남들이 하지도 않는 '깐포지드'를 하느라 개고생을 하는 중이었다.
-야언좆이라고 하지 말라고오오오! 진짜 얼음은 프로스트 노바라 안 카나! 휴먼 하라는 놈들 밴 한다! 선 리치 하는 게 뭐가 나빠! 너 얼라지!!
"하랑이 스컬지 다 됐네."
"그만큼 지금 이 지구에 적응을 잘 했다는 거죠. 푸흐흐."
누가 스트리머 서카랑에게 깐포지드를 추천한 것인가.
"협곡으로 안 가는 게 다행인 건가."
"갔을 걸요? 얼음법사 캐릭터 원챔으로 꽤 높은 곳까지 올라간 걸로 알고 있어요."
"역시 루살카 딸이야."
속성은 물속성임에도 불구하고 얼음 기술만 쓰는 루살카의 딸 답다.
"...하랑이가 루살카의 얼음 속성 기질은 물려받았어도, 성벽은 아니야."
"루살카의 성벽이 뭔데요? 사랑하는 사람한테 꽂히면 섹스 중독이라도 되는 거?"
"......."
루살카는 섹스 중독이다.
정령 시절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성에 대한 관념을 간부가 되면서 깨닫게 되고, 이는 '설야'도 마찬가지.
"게임 속 설야는 사실상 하랑이지만, 테라의 설야는 분명 그런 여신일 거야. 성에 대해 무지했지만, 성에 대해 알고 난 뒤에는 섹스가 주는 쾌락에 미쳐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거지."
"...혹시 유나의 기질이 설야에게서 온 걸 지도?"
"그럴 수도 있지."
처녀였던 유나가 큥큥머신...아니 큥큥여신이 되는데 베이스 역할을 한 정령은 분명 설야가 틀림없다.
솔직히, 석하랑도 한 번 불 붙었다 하면 저녁에 해서 새벽까지 하기를 좋아하니까.
"그럼 남은 둘은 개천광이랑 환룡인가."
"...환룡은 어때요?"
신라의 목소리가 심상찮아졌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환룡은 좀 알아야겠어요."
"갑자기?"
"요즘 뭔가 그런 기분이 들어서요. 왜, 집에 나오던 모기를 분명 죽였는데 또다시 모기가 기어나오는 듯한 그런 느낌?"
"환룡이 모기야?"
"귀찮게 앵앵거리는 건 똑같죠."
"......환룡은 말이야."
나는 나를 부추기는 신라의 말에 바로 답했다.
"스와핑이야."
"......예?"
"정정. 영혼을 바꿔서 하기를 좋아해. 그러니까,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그런 거."
그래서 '혼돈환'룡이다.
카오스스럽고, 정신계열에 특화되어있는 이유가 다 있다.
"만약 내가 환룡의 피닉스가 되기로 했다면, 나는 내가 환룡이 내 몸을 쓰는 것까지 감안하고 환룡의 몸에 깃들었을 걸."
"그거, 암컷 타락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겠지."
"혹시 게임에서도 환룡에게 박혀봤어요?"
"설마. 게임에서는 주인공이 박히는 일은 전혀 없어."
실제로 겪어본 적은 없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환룡이라면, 분명 그런 것도 바라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정령은, 성주에 의해 한 번 간부가 되었다가 세탁된 정령들은 음습한 욕망을 전부 다 깨우치고 말았으니까.
"개천광은요?"
"승리욕에 패배중독이었지?"
"물어본 내가 잘못이죠."
"그나마 개천광이 가장 건전했어. 주인공 이외의 존재에게는 패배하지 않으니까."
개천광은 그나마 낫다.
솔직히 말해서 정령들 중 음습함의 순위를 따지고 들자면, 개천광이 건전함의 순위로 2등이라고 할 수 있다.
"푸흐흐, 그럼 당신. 저는 어때요?"
"너?"
"네. 저는 어떤 여신이었을까-요?"
"그거야 당연하지."
다른 정령이라면 몰라도, 하신라만큼은 내가 명확히 알고 있다.
"나르시스트잖아."
"......."
신라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신라를 향해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창염도 아닌, 테라의 불꽃신인 너는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어. 너는 누구보다도 너 자신을 사랑했던 거야. 그게 피닉스가 되면서 '여자'를 좋아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던 거지."
"...헤에. 그래요? 저는 제가 레즈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여자의 몸인 상태로 여자인 자신과 사랑을 나누면 그게 레즈지."
창염은 단순 레즈가 아니다.
간부에 의해 오염되고 난 뒤의 그녀는 '자기 자신과 견줄만큼 아름답고 가치있는 여자'를, 그리고 그런 여자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자기애의 화신.
그게, 불의 신이다.
"아마 수많은 세계 중에는 네가 나를 여자로 만들어서 진심으로 보비려고 하는 세계도 있을 걸? 내가 진짜 암컷 타락을 해서, 네게 가장 이상적인 상황을 만들어주는 거지. 또다른 너랑 보비는 거. 네 모습을 한 너와 섹스하는 것 만큼 창염에게 이상적인 상황이 있을까?"
"...그렇군요."
하신라는 담담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그들은 저랑 다른 사람이네요."
"응?"
"그도 그럴게…."
쪽.
하신라는 머리 위로 키스를 하고, 자신의 가슴에 내 얼굴을 묻게 했다.
"저는 저만큼이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
그래.
이게 내가 눈앞의 이 여인을 '창염'이 아닌 '하신라'라고 부르는 이유.
"아, 아니다. 푸흐흐."
하신라는, 더이상 자기애의 화신이 아니다.
"저보다도 더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