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913화 (913/1,497)

EP.913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2권 외전 04

<사건 7>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

"우와, 짜증나."

누리는 커피를 테이블에 거칠게 내려놓으며 신경질을 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가온도 테이블에 얼굴을 처박고 이를 갈고 있었다.

"유명세에 어느 정도 영향이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김가온. 어떡해? 우리 조땐 거 아님?"

"상스럽게 말하지 마."

가온은 이 왈가닥같은 철부지를 어찌해야 할지 걱정이 눈앞을 가렸다. 가장의 무게는 가온의 작은 체구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고, 그들에게 현금은 거의 없었다.

"지불 기한 다 되어가는데...."

가온은 테이블 위에 펼쳐진 수많은 임대차 계약서를 두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오백, 칠백, 천. 다양한 보증금이 한 곳에 모이니 거의 수천만원에 육박하는 거금이 되었다.

"현금...없지?"

"건물에 히어로 슈트, 거의 다 부동산이니까. 씨이...."

가온은 마도기어에 정리해놓은 자산을 살피며 침울해졌다. 부모의 병원비, 간병인에게 지급할 대금, 그리고 기본적으로 그들이 사용할 생활비 등.

"너 시안 님한테 돈 받은 거 있니?"

"히어로 슈트 공짜로 받았는데 거기서 월급 내놓으라고 하면 쓰레기 인증각 아님? ...그나마 받은 것도 밥 사는데 쓰고 있잖아."

방학 중 사무보조로 일했던 알바비 대부분은 생활비 통장에 박아넣었다.

2월 중 사무실의 일을 하며 받은 정산금은 20세의 갓 성년이 된 이에게는 엄청나게 큰 금액이었지만, 그마저도 병원비에 할애하고 생계비로 남겨두느라 많지 않았다.

"당장 지급할 현금이 없어서 문제네."

"시끄러워서 방 빼겠다는 데 우리가 잡을 수도 없고."

자매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대학 근처의 원룸 건물이라 대부분의 계약이 2월을 마지막으로 마무리가 되었고, 301호만 계약이 남아있었다.

"야, 그거 아저씨 잖아."

"시안 님이 갑자기 방을 빼지는 않겠지?"

유일하게 전세로 목돈을 가지고 들어온 임차인. 하지만 그 목돈은 또 오월로 흘러들어가 공중분해 되어버렸다. 둘에게 남은 현금으로는 계약이 종료된 세입자들에게 지불해야할 보증금까지 빠듯했다.

"어쩌지.... 던전 막공이라도 뜀?"

"그러다 사고 나면 어쩌려고."

"그럼 당장 이 돈 어디서 구해? 미친 놈 하나가 보증금 내놓으라고 엄빠 병실 찾아가려다 너한테 막혔다며."

"...202호였었나. 그 쪽도 자기 동생 수술비가 급하니까.... 어쩔 수 없지."

사람이 마음이 급해지면 생각이 짧아지기 마련이다. 가온도 그의 절박한 상황을 이해하였기에, 간신히 현금을 모아 일부나마 보증금을 반환했다.

"너 그 천만원이 어디서 나온 거야?"

"붕붕이 급매로 팔았어."

"......그 정도로 심각해?"

누리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마다 항상 세차하고 드라이브를 하며 신서울을 한바퀴 돌던, 가온의 보물 1호나 다름없던 자차를 가온 스스로 중고로 팔아치웠다.

"왜 진작에 말 안했어?!"

"너 바빴잖아. 서울까지 올라가고."

"그래도 그렇지!"

"...너한테 이런 무거운 짐을 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내가 그래도 언니인데."

자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창 테이블 위에서 숫자들을 끄적이던 가온이 계약서들을 가지런히 모으며 숨을 크게 골랐다.

"누리야. 아무래도 최후의 수단을 써야할 것 같아."

"......최후의 수단?"

누리는 비장한 가온의 목소리에 입이 바싹 말랐다. 가온은 치욕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 몸으로 때우자."

* * *

"그래서 둘이 같이 나한테 온 거야?"

시안은 자율주행차의 운전석에 앉아 둘을 뒤에 태웠다. 가온이 시안의 바로 뒤에 앉고, 누리가 조수석 뒤에 앉아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아저씨 말고는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까."

"민폐인 건 알아요. 하지만...."

"아냐, 민폐 아니야. 마침 잘 됐어.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네."

시안은 자동차의 기기판을 조작해 자율주행 모드로 변경하고, 거치대에 올려둔 단말을 왼손으로 들어올렸다. 가온이 고개를 운전석으로 빼꼼히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차가 지금 없어서...."

"뭘 그렇게까지. 이럴 때 쓰려고 돈 있는 거잖아. 안 그래? 나 돈 많아."

"...아저씨는 돈 많아서 좋겠네."

누리가 유리창에 머리를 처박고 중얼거렸다. 가온이 누리의 말을 듣자마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누리 본인도 스스로 내뱉은 말에 입을 두손으로 막으며 경악하고 있었다.

"......."

시안은 아무 말 없이 단말을 엄지로 두드렸다. 시안이 침묵한 채 단말만 보고 있자, 누리가 몸을 일으켜 운전석을 향해 상체를 내밀었다.

"아, 아저씨? 내 말은 그런게 아니라-"

"응? 뭐라고 했어?"

시안은 멍청한 얼굴로 누리에게 되물었다. 그는 단말에 저장된 사진들을 하나하나 옮기고 있었고, 누리는 색정적인 사진들에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이...!"

누구는 지금 돈 때문에 골머리를 썩히고 있는데, 그걸 듣는 척 하면서 얼굴없는 D컵 속옷 모델의 란제리 사진을 보고 있다니. 누리가 눈을 부라리며 빽 소리질렀다.

"아저씨!!!"

끼이이익.

시안이 당황해 브레이크를 밟았다. 급브레이크임에도 주변 도로 상황을 파악한 AI가 핸들을 유유히 꺾어 주변 갓길에 부드럽게 차를 정차시켰다.

"봐, 봤어?! 오해야! 그, 그러니까 이건 여러 사정이-"

"누구는 지금 미쳐 돌아버릴 것 같은데, 누구는 팔자좋게 쭉쭉빵빵 그라비아나 보고 뭐하는 거야!!"

누리는 벨트를 풀고 거칠게 차문을 열었다. 씩씩대며 차에서 내린 누리는 인도를 달리기 시작했고, 가온이 누리를 쫓으려다가 시안에게 제지당했다.

"김가온."

"......예, <연금술사>님."

"무슨 일 인지 설명해."

단말을 조작하던 시안의 눈은 차분히 가라앉아있었다.

잠시 뒤.

사정을 설명한 가온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시안은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얼굴로 가온에게 물었다.

"왜 진작에 말하지 않았어?"

"그, 그게 최대한 제 선에서 처리하려고 했는데...."

"나야 그렇다쳐도 누리는 네 동생이잖아. 가족아니야?"

"......죄송합니다."

가온의 치마에 눈물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시안은 머리를 긁적이며 단말을 두드려 하유준을 호출했다.

"예, 형님. 길드 하우스 문제 말입니다."

"......?"

"...죄송하지만 그 건물은 없던 일로 해야할 것 같습니다. 다른 건물 하나 찾았는데...일단 와서 보시겠어요?"

시안은 전문가를 호출했다.

* * *

"내가 공인중개사도 아니고 소유권 이전 방법을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시안은 하유준과 건물 <가온누리> 앞에 섰다. 울음을 멈춘 가온은 시안의 의도를 깨닫고 극구 사양했다.

"저, 저희 사정 때문에 일부러 여기를 길드 하우스로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무슨 일인데?"

하유준이 심상찮은 얼굴로 시안을 추궁했다.

기껏 발품팔아가며 길드 하우스를 찾아다녔더니 갑자기 자신이 구한 원룸 건물을 길드 하우스로 쓰겠다고 하더라. 하유준은 울컥했지만 가온의 눈가가 촉촉한 것을 보고 상황을 파악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아가씨한테는 내가 잘 커버칠게."

"죄송합니다, 하유준 씨."

"네가 뭐 죄송할게 있냐. 상사한테 닦이는 거 샐러리맨들 일상인데. 괜찮아, 쌍욕 좀 들으면 돼."

하유준은 쪼그려앉아 가온과 눈을 마주하며 싱긋 웃었다. 가온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고, 시안은 접점이 적었던 두 팀원이 가까워진 것에 만족하며 다른 팀원들을 호출했다.

"라온아. 여차저차해서...."

[저는 좋습니다. 제가 경비를 서겠습니다.]

"유나야. 이러쿵저러쿵...."

[그럼 저는 302호 할게요.]

"...한국은 길드 하우스 개념이 좀 다른가?"

시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음 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두어번 울리자마자 단말 너머에는 백발의 여인이 나타났다.

[......뭐예요, 여자들 뒤에 두고 거유 사진이나 보는 변태가.]

"오해입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고 있어요?"

[처, 척하면 척이죠. 이래서 금발 하렘남은-]

"누리랑 혹시 통화했습니까?"

석하랑은 침묵했다. 시안은 또 오해를 할까봐 재빨리 상황을 요약했다.

[누리가 잘못했네요. 당신도 잘못했고. 그러게 왜 애 힘든데 그런 거나 보고 있어요?]

"......실수로 연 겁니다. 일부러 보고 싶어서 본 건 아녜요."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전에 화제를 차단한 시안은 석하랑에게 부탁했다.

"혹시 누리 보면 이야기해줘요.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오해하지 말고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고."

[아, 그거 말인데....]

석하랑인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누리 아까 5분 전에 저랑 전화 끊으면서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님들이 왜 여기있음?"

시안의 뒤에는 손에 캔맥주를 들고 있는 누리가 뚱한 얼굴로 셋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긴 걸어가면 차가 사람보다 빠르긴 하지."

[누리야. 일단 집에 들어가서 저 개변태랑 이야기 좀 할래? 언니랑 너랑 개변태한테 사과할 게 생겼어.]

"......언니 말이라면."

누리는 단말 너머에서 들려온 석하랑의 중재를 받아들였다. 그 자리에 모인 팀원들은 누리의 뒤를 따라 4층으로 올라갔다.

"왠지 저 친언니 포지션 빼앗긴 것 같지 않아요?"

"일단 뭐 차이가 안 나니까 맞먹으려 들-"

하유준이 가온을 위아래로 훑었다가 로우킥을 맞을 뻔 했다.

* * *

"...아저씨, 진짜 미안!"

누리는 무릎까지 꿇으며 사과했다. 시안은 그게 영 부담스러웠지만, 이참에 확실히 하기 위해 양반다리로 앉아 누리와 시선을 마주했다.

"누리야. 돈 빌려달라고 하기 자존심 상했지?"

"응."

누리는 진솔하게 대답했다. 누리의 방, 가온 조차도 없는 그들만의 공간에서 둘은 속내를 털어놓는 진실의 약을 한 캔씩 비운 상태였다.

"그런데 가온이가 너랑 상의도 안 해서 더 화가났고."

"...어."

"그래서 나한테 월급 미리 받을 수 없냐고 부탁하러 왔다가, 내가 그....사진들 보고 있어서 화가 났고."

"......너무 태평해보여서, 갑자기 화가 뻗쳤어."

시안은 제 무릎위에 올려진 누리의 손을 마주잡으며 살짝 흔들었다. 비록 한 손 뿐이지만 따뜻한 온기가 손을 타고 흘러갔고, 누리는 시안의 온기에 시야가 흐려졌다.

"속상하고, 화나는 것도 당연해. 그건 누리가 잘못한 게 아냐. 너를 화나게 만든 건, 가온이랑 나잖아?"

"...멋대로 오해하고 짜증 낸 것도 나야."

"오해할 수 있지. 짜증 낼 수도 있지. ...말실수도 할 수 있고."

누리가 흠칫거렸다. 가슴이 철렁거려 시안에게 잡혀있던 손을 저도 모르게 빼려고 했지만, 시안은 이능력자인 누리의 손을 완력으로 잡아챘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야. 서로 오해해도 대화로 풀고, 짜증나는 일이 있으면 말하고, 말실수 한 거 있으면 사과하고."

"......미안."

툭. 누리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시안은 그 모습에서 가온이 울던 모습이 떠올라, 아무리 자주 싸우더라도 자매는 자매이구나 싶었다.

"어, 음. 그러니까 이제는-"

"안아줘."

"...응?"

시안은 눈을 껌뻑거렸다. 누리는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숙인 채 시안에게 재촉했다.

"나 이대로 있으면 쪼다같이 눈물 질질 짤 것 같으니까.... 좀 진정 좀 시켜달라고...."

"......후우."

시안은 손을 풀어 누리에게 다가가, 등을 토닥였다. 누리는 그대로 팔을 벌려 시안의 품에 안겼다.

"......그래, 그래."

시안은 누리를 지탱하듯 자세를 바로잡고, 누리가 편안히 울 수 있도록 가슴을 빌려줬다. 셔츠가 점점 축축해질수록, 누리의 떨리던 몸도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아저씨, 그거 암?"

누리가 시안의 품에서 작게 속삭였다.

"아저씨 만나고 나서부터...하루하루가 즐거워졌다는 거."

누리가 고개를 들어 시안과 눈을 마주했다. 평소의 장난기 스러운 모습은 전부 다 사라지고, 눈에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환하게 웃는 모습은 이제 막 봉우리를 틔어 올린 한떨기 봄꽃 같았다.

"그러니까 잘 들어. 다른 길드 가라고 해도 안 가. 나 평생 여기에 뼈 묻을 거야. 졸업하고 마감하려던 인생 멋대로 즐겁게 만들어줬으니...책임져야지?"

"...너, 지금 무슨 소리를-"

"여태까지 몰랐어? 나 그 날 술먹고 사고치려 했거든. 흐흐흐."

누리는 언제나처럼 쾌활한 목소리로 시안의 목을 끌어안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누리의 거친 입김에서는 진한 알코올 향이 풍겼다.

"오늘도 술 마셨으니까...한 번 나랑 사고 쳐볼까?"

딱!

"아얏!"

누리가 딱밤을 맞고 뒤로 넘어졌다. 시안은 얼굴을 찌푸리며 누리를 향해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다."

"우 씨, 가족은 무슨-"

"이유나, 박라온, 그리고 김누리. ...적어도 이 셋만큼은, 지금 나한테 가족이라고."

시안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했다. 누리는 입을 벌리고 멍하니 시안을 바라봤다. 그는 분명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유준 형님도, 가온이도, ...석하랑은 아직까지는 아니긴 한데, 최소한 너희 셋은 나한테 있어서 가족 그 이상의 존재-"

"아하하하하하하하! 가족, 가족이래! 아하하하하!"

누리는 배를 잡으며 깔깔 웃었다. 시안은 머쓱한 얼굴로 캔맥주를 집어 한 모금 마셨다.

"가족, 가족.... 으흐흐! 그래, 가족이라 이거지."

누리는 자리에서 번쩍 일어났다. 시안의 고개가 살짝 올라가고, 누리는 시안을 향해 아래로 삿대질하며 선언했다.

"좋아! 가족! 가족이라면 마음껏 부탁할 수 있지! 안 그럼?!"

"그래. 얼마든지 부탁해라."

"흐흐흐. 아저씨가 우리를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네. ...아."

누리가 손가락을 튕기며 호다닥 시안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똘망똘망 눈을 반짝거리며 웃는 누리의 모습에 시안은 안도와 불안감이 동시에 들었다. 누리는 합장하듯 두 손을 모아 살짝 비틀고, 고개를 반대로 살짝 꺾으며 낮게 속삭였다.

"저 용돈 좀 주시면 안 돼요?"

"...하아, 지금 이 상황에서 용돈이라는 장난을-"

"...안 될까요, 오빠?"

"......."

시안은 숨이 멎었다.

"아아아! 역시 오빠는 아닌 듯! 그냥 아저씨 해!"

"누리야. 다시 한 번만 더 불러볼래? 오빠라고. 아니다, 오빠라고 해. 길드장 명령이다."

"이딴 거에 명령하는 게 어디있어! 무릎 꿇어봐! 그럼 불러줄게!"

"......좀 체통을 지키자, 시안 오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