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11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2권 외전 02
<사건 3> 신혼 살림이 아닙니다.
"염치불구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집을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2층 사무실, 이제는 연구 공방이 된 곳에서 한 손으로나마 연구를 하던 시안은 라온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라온과 가온의 트러블은 상상 이상으로 심각했고, 결국 아랫 집에서 주인 집을 상대로 경찰을 신고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원흉인 제가 나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집으로 내려오는 건...."
시안은 오한이 들어 몸을 떨었다. 그런 짓을 저질렀다가는 C/Y/A/N 이 될 게 분명했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왠지 예감이 그랬다.
"안 되겠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합니다."
라온이 허리를 숙이며 부탁했다.
"저를 다시 이 사무실에서 살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내일 아침에 집 보러 가자."
시안은 라온의 부탁을 거절했다. 이미 공방에는 시안이 숙식을 해결할만큼 기자재가 갖추어져 있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라온이 못 믿는 건 아닌데...."
시안이 창틀에 놓인 우유통에 민트 초코 우유를 부으며 대답했다.
"내가 여기서 살 거거든. 나도 거기서 이제 못 살겠더라."
"......."
* * *
다음 날.
"그래서 이 사무실 근처에 여자 한 명 살 좋은 집을 알아봐달라?"
"예."
시안은 길드 사무소에 또다시 들이닥친 은유하에게 고개숙여 부탁했다.
비록 은유하가 공인중개사는 아니었지만, 은유하의 한 마디면 공인중개사가 몰고온 자동차가 도로를 점거할 것이다.
"이 근처 비싼데요?"
"압니다. 시세대로 지불할 예정입니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시안은 은유하에게 자신의 플랜은 설명했다.
길드 하우스.
으레 수도권에 위치한 길드들이 전문으로 운영하는 길드 하우스는 건물 전체를 길드에서 운영하는 오피스텔 같은 건물이었다.
"꼭 길드 하우스는 아니더라도, 앞으로 더 들어올 길드원들을 위한 기숙사 같은 것을 운영하고 싶습니다."
"그 첫 입주자가 운사 님이라는 거죠?"
"아직 그 이명을 자칭하기에는 멀었습니다. 제 현재 이명은 <거품>입니다."
라온은 담담히 자신의 이명을 읊었다. 구름을 누비던 운사에서 금방 터져버리르 것 같은 거품으로의 변경. 서울에서의 활약이 전해지며 라온의 프로필도 업데이트 되었고, 그에게는 <거품>이라는 이명이 생겼다.
"전 운사 님이라고 부르겠어요. 야, 하유준. 매물 나온 거 있어?"
"현재는 없습니다. 서울 수복 작전이 진행되기 직전에 기존에 내놓았던 매물을 다 팔아버려서...."
하유준은 쩔쩔 메며 은유하의 뒤에서 상황을 설명했다. 밖에서는 자신감 넘치는 유성맨이었지만, 정작 유성의 상사를 눈앞에 두고 있으니 전형적인 샐러리맨의 자세였다.
"쯧, 쓸모 없기는."
"...송구합니다."
"송구할 시간에 당장 가서 건물 알아봐. 지금 당장!"
"저, 데스니다스에서의 업무가...."
"그래서 내 말을 안 듣겠다는 거야?!"
"아닙니다!"
하유준이 시안의 눈치를 봤고, 시안은 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십년 감수한 안도의 한숨을 내쉰 하유준은 부리나케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아주 제 사람 부리시듯 하십니다."
"내 사람이니까요. 굳이 따지자면 파견 직원 같은 느낌? 그리고 당신의 팀에도 그다지 나쁜 건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죠. 새집 구하는 거니까."
"흠...."
은유하가 손가락을 쫙 펼치며 물었다.
"10억 정도 쓸 수 있어요?"
"그거야 당장에라도 쓸 수 있습니다만...."
시안의 수중에는 67, 아니 66억이 남아있다. 은유하가 씩 웃으며 활짝 웃었다.
"그럼 두 분은 침대 뭐 살지 보고 오세요. 새 집 장만은 제가 10억에 맞춰서 해드릴테니까."
* * *
"뭔가 데자뷰가 느껴지는데."
"착각일 겁니다. 그보다 시안. 어서 누워보시길 바랍니다."
라온은 퀸 사이즈 매트리스에 누워 옆 자리를 손으로 팡팡 두드렸다. 어린 아이처럼 장난치는 라온의 행동에 시안은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침대 위에서 퐁퐁 뛰면 안 된다."
"...?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시안이 침대를 왼손으로 쑥 눌렀다. 매트리스가 훅 꺼지고, 라온이 몸이 스프링에 튕겨졌다.
"꺅?!"
"......꺅?"
"......자, 잘못 들은 겁니다!"
라온이 얼굴을 붉히며 몸을 움츠렸다. 시안은 침대 위에 누워 자신을 올려다보는 라온의 움츠린 자세에 침을 꿀꺽 삼켰다.
"......."
퐁, 퐁퐁.
시안이 매트리스를 누를 때마다, 스프링이 격하게 움직이며 라온을 띄워올렸다. 라온도 몸이 살짝 떴다 꺼졌다 하는 감각에 입을 꾹 다물었다.
"......즐거우십니까?"
"아니, 우리 집에 꼬맹이 하나 있으니까 이 정도는 해야겠다 싶어서."
"꼬맹이?"
"김누리."
라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리라면 침대를 보자마자 전력으로 점프해 몸을 던지리라.
'안봐도 비디오지.'
몸을 던져 침대 위에 팡팡 뛰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단지 최초의 점프를 앞으로 뛰냐 뒤로 뛰냐의 차이일 뿐. 시안이 눈을 감고 침대 위에서 난장판을 벌이는 누리를 상상하는 사이, 시안의 코트가 잡아당겨졌다.
"시, 시안."
라온은 말을 더듬었다. 시안을 향해 몸을 엎드린 라온의 정확히 시안이 누울 만큼의 공간을 옆에 비워두었다.
"치, 침대에 두 명 누울 수 있는지도 테스트 해봐야 하지 안겠습니까?"
"왜? 두 개 사면 되지."
"...혹시나 같은 침대를 쓰는 경우가 생길 수 있지 않습니까."
라온이 침대 위에 공손한 자세로 무릎을 꿇었다. 마치 무도가의 사범이 심신을 경건하게 하듯, 라온은 엄한 얼굴로 제 의견의 당위성을 읊었다.
"나중에 길드원이 늘어나고 침대의 개수가 모자란다면, 임시로나마 같은 침대에서 둘이 자야할지도 모릅니다. 이 정도 사이즈면 체구가 작은 이들은 둘이서도 충분히 잘 수 있는 너비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시안과 제가 실험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가?"
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라온이 시안의 왼팔을 잡아당겼다.
"어어?!"
푹. 시안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침대끝에 걸터앉았다. 정확히는 라온의 인도에 따라 몸이 뒤집히며 안혀'졌'다. 라온은 슬며시 미소지으며 몸을 뒤로 빼며 침대에 누웠다.
"자, 실험입니다. 한 번 누워보십시오."
"......후우."
시안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1자로 누운 라온의 옆에 앉았다. 허리를 뒤로 눕히면 함께 천장을 바라보며 눕는 자세에, 시안은 왠지 부끄러워졌다.
"......눕는다."
시안이 침을 꿀꺽 삼키며 등을 침대에 붙였다. 눈을 옆으로 돌리기만 해도 라온의 얼굴이 들어왔고, 그 아래로 내려가면-
"후우, 후우."
라온은 잠을 자듯 숨을 쉬었다. 폐에 공기가 차올랐다 빠지길 수 차례 반복하였고, 시안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눈을 떼었다.
"......."
잠깐, 잠깐이면 되지 않을까? 시안은 다시 고개를 돌려 천장을 응시했다. 오른쪽 아래, 하얗고 동그란 부표 두 개가 잔잔한 바다 위에서 파도에 넘실거리듯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크다.'
시안은 오른 다리를 잡아당겨 무릎을 굽혔다. 그 순간, 라온이 시안을 향해 몸을 뒤집었다.
출렁.
"?!?!"
"과연. 옆으로 누워도 그닥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부표가 전복되었다. 중력에 이끌려 매트리스 위에 또다른 쿠션이 층으로 쌓였다. 라온은 왼팔로 제 옆구리를 받치고, 오른팔을 시안에게 뻗으며 시안의 접혀진 셔츠 카라를 쓸었다. 자연히 두 팔 사이에 끼인 쿠션은 살포시 모여 도드라졌다. 그리고 그 쿠션에서 튀어나온-
'잠깐만.'
시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고보니 라온이 옷을 여러 벌 가지고 있던가? 시안은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맨날 청바지에 니트-'
"어머! 손님, 거기 누우시면 안 돼요!"
근처를 지나가던 여직원이 황급히 달려와 시안과 라온을 제지했다. 시안과 라온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직원은 반대편의 킹 사이즈 침대를 가리켰다.
"신혼 부부 분들 테스트용 침대는 저 쪽입니다!"
"......."
"푹신하기는 했습니다."
"응. 엄청."
* * *
<사건 4> 크림 파이 낭낭하게 드립니다^^
"자네에게는 신세를 졌군."
"아녜요. 저희 팀원 일인데 제가 나서야죠."
유나는 접시에 예쁘게 담은 크림 파이를 유리 선반 안에 조심스레 넣었다. 후안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정교한 손길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손님이 많이 빠지긴 했네요."
"그래. 문제는 그만큼 더 힘들어졌지."
후안은 식은땀을 흘리며 손수건으로 눈가에 맺힌 땀을 닦았다. 가게 안에 손님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하나하나 면면이 그를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유나가 카페 곳곳에 펼쳐져 각자 테이블을 하나씩 차지하고 앉은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환몽>, <선구자>, 거기에 <김치 학살자>까지. 아카데미에서나 보던 A급 히어로 분들을 여기서 볼 줄 몰랐어요."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 없지."
유성가 개망나니가 커피 맛이 떨어졌다고 깽판을 쳐놓은 카페. 그게 김누리 이슈와 연동이 되면서 범인(凡人)들은 쉬쉬하며 자리를 피했지만, 굳이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들도 하나 둘 생겨났다.
- 아니 도대체 얼마나 커피가 맛있길래 개망나니가 칼춤을 춘단 말인가.
은유하의 별명이 '커피에 미친 X-줄여서 커친년'이었던 만큼, 내노라하는 커피 매니아들이 후안의 카페로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생긴 후안도 심혈을 기울여 커피를 내렸고, 결국 후안의 카페는 입맛 까다로운 이들만이 드나드는 최고급 카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 중에서도 일종의 '챌린지'를 하러 온 이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풍마TV 여러분! 오늘은 명성이 자자한 '농부 후안'에 왔습니다!"
"Padre Juan 이건만."
후안이 굳은 얼굴로 커피콩을 손으로 갈았다. 빠드득 갈려나가는 커피콩 소리에 유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라도 가서 주의를 줘야 하나. 하지만 상대는 자신과 악연이 있는 자인데.
"이보쇼."
가장 구석 쪽에서 에스프레소를 음미하던 남자가 풍마, 김규민의 옆에 섰다. 마도기어에 시끄럽게 재잘대던 풍마는 신경질을 부리며 자신이 방송 중임을 알렸다.
"지금 시청자 분들이랑 대화 중인.... 거...."
"아가씨 명령인데."
남자, 하유준은 어느새 Padre Juan의 제복을 입고 풍마에게 문 밖을 가리켰다.
"나가."
"너, 너너! 고작 C급 주제에?!"
풍마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카페 안의 모든 이들의 시선이 풍마에게 쏠렸다.
"등급으로 따지는 건가, 지금?"
"간신히 A급을 딴 녀석이."
"......조용히."
"뭐, 뭐야! 나도 내 돈주고 커피 시킨 거라고! 내가 그렇게 시끄럽게 하지는 않았잖아!"
풍마가 오히려 역정을 내며 소리질렀다. 후안이 눈을 질끈 감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유나가 저벅저벅 걸어가 풍마의 앞에 섰다.
"실례합니다."
"응? 너, 그 때 E급-"
"곧 '그 분'이 방문하시기로 하신 시간이라서요."
유나가 테이블을 가리키며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유나의 손끝이 가리킨 방향에는 'YU☆HA'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정말로 죄송하지만.... 예약석이라 그런데 다른 자리로 옮겨주시면 안 될까요?"
"......."
풍마는 바람처럼 자리를 떠났다.
"...테이크아웃."
가 다시 돌아와 처량한 얼굴로 커피를 챙겨 카페를 떠났다. 후안이 미안함에 크림 파이를 하나 포장하여 선물로 주었고, 풍마는 곧 기뻐하며 하늘로 높이 날아올랐다.
"참 특이한 사람이에요."
"그러게. 그보다 유나 양. 예약 얘기는 무슨 얘기인가? 나는 못들었네만."
카페 안의 히어로들은 숨이 멎었다. 갈색 단발의 일개 점원이 은유하를 걸고 넘어져 사기를 쳤다? 풍마도 풍마거니와, 은유하 본인 에게도 호되게 당할 위험이 있었다.
"후훗, 걱정 마세요."
유나가 마도기어를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10분만에 오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9분 뒤.
"신작 레시피 나왔다는 게 사실이에요?!"
"봤죠?"
유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크림 파이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낭낭하게, 접시에 수북히 쌓아서.
"이게 그의 신작 레시피...! 마스터, 항상 마시던 그걸로 부탁드려요!"
"후후후."
후안은 떨리는 손으로 커피를 내리며, 차마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