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05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2권 022
[전화 안 받으면 스튜디오 들이닥칠 겁니다.]
석하랑의 협박아닌 협박에 시안은 굴복했다.
이미 카페 주변은 시안의 정체를 파악한 기자들과 이능력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고, 여기에 설화공주 같은 유명인사까지 나타나는 건 주변에 상당한 민폐였다.
"그래서 전화한 목적은?"
[되게 까칠하시네요. 일단-]
석하랑은 시안의 안부를 물은 뒤, 전화의 목적을 간략히 읊었다.
시안의 부상 문제. 팔이 잘린 소식을 늦게 전해들은 석하랑이 큰 충격을 받았으나, 곧 의수라는 것을 전해듣고 안도감을 내비쳤다.
현상금 문제. 액수가 너무 커서 개인 단위로 진행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협회 측이 헌터들과 중재에 나서기로 했다.
"그게 끝이에요?"
[아뇨.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석하랑은 시안의 옆에 앉아있는 누리와 라온을 가리키며 제안했다.
[협회에서 여러분을 정식으로 초청했어요. 시안 씨 팀원들 전부.]
* * *
<오전 10시, 히어로 협회 신서울 본부.>
"협회 본부에 오기는 또 오랜만이네요."
전화를 받고 합류한 유나가 시안의 오른쪽에 서서 지도를 펼쳤다. 시안은 영 어색한 얼굴로 유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무 그렇게 안 챙겨줘도 돼. 없이 산지 꽤 돼서 익숙-"
"......."
유나는 말없이 시안을 올려다봤다. 이미 눈빛으로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시안은 시선을 앞으로 돌리며 한탄과 함께 부탁했다.
"의수 다시 만들 때 까지만 좀 도와줘."
"당연하죠."
유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시안에게 더욱 달라붙었다. 그 뒤를 따르던 라온과 누리는 한 발자국 떨어져서 몰래 속삭였다.
"지금 살짝 더 붙여서 어필하는 거 보이십니까?"
"...와, 저게 말로만 듣던 불여시-"
찌릿. 누리는 순간적으로 마주친 유나와의 시선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들었겠지? 들었을 거다. 들었으니까 저렇게 눈으로 경고를 보낸 게 틀림없다.
누리가 한 발자국 더 거리를 벌리고, 라온이 발걸음을 맞췄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고양이는 커녕 천년 묵은 구렁이인듯."
"시안이 제대로 콩깍지가 씌인 겁니다."
"...씨이."
누리는 이를 갈며 분을 삭였다. 라온이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누리의 어깨에 손을 올려 토닥였다.
"힘 내십시오. 기회가 또 있을 겁니다."
"언니도 따지면 경쟁자 아님?"
누리가 부루퉁 입술을 내며 딴죽을 걸자, 라온은 쿡쿡 웃으며 누리의 귀에 속삭였다.
"저야 연상이라는 차별화된 포지션이 있지만, 누리는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겹치지 않습니까?"
"...와, 와, ...와. 이 언니도 대박이네, 진짜. 개소름."
누리는 라온에게서 거리를 벌리며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암묵적 동맹 관계인 줄 알았더니, 상대는 다른 공략 루트로 손을 벌리고 있었다.
"흥. 두고봐. 아저씨랑 나랑 같은 지붕 이고 산다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언니 쫓겨나고 싶어서 그러는 거임?"
"저런. 쫓겨나면 시안에게 재워달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만."
"삐에에에에에에엑!!"
누리가 약이 올라 괴성을 질렀다. 앞서가던 시안과 유나, 거기에 지나가던 주변인들도 누리를 쳐다 볼 정도로 높은 비명이었다.
"...또 왜?"
시안은 '또 저 지랄인가'하는 뜨뜻 미지근한 눈빛으로 누리를 바라봤다. 누리는 분을 삭이며 여전히 포근한 미소를 짓는 라온을 흘겼다가 바닥을 쿵 굴렀다.
"돈 아까워서 그런다, 왜!"
"...? 아, 현상금?"
누리가 화제를 돌린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시안은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말했다.
"뭐,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할 수는 없지. 100 억 안 준다고 하면 난리가 날 걸?"
"난리로 끝나겠습니까. ...저로서도 조금 아깝기야 합니다만."
금전적으로 심한 고생을 했던 라온도 입맛을 다시며 아쉬움을 표했다. 물론 그 돈의 주인은 시안이고 스튜디오의 주인도 시안인 만큼, 돈을 어떻게 쓰는 지도 그의 자유였다.
하지만 막대한 금액을 두고 사람 마음이라는게 그렇게 쉬이 수긍할 수 없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너무 걱정하지마."
시안은 사람 좋은 미소로 팀원들을 다독였다.
"설마 개인이 2천억을 질렀는데, 한푼도 안 도와주겠어?"
* * *
한 시간 뒤.
"...시발."
시안이 그답지 않게 대놓고 욕지기를 내뱉었다. 팀원들도 그의 심정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어느새 합류해 자리를 차지한 석하랑은 쌤통이라는 얼굴로 종이컵을 들었다.
"디스 이즈 코리아. 치얼스?"
"...건배."
시안은 커피를, 석하랑은 차가 든 컵을 부딪히며 건배했다. 블랙 커피라서 그런지 혀가 텁텁하고 쓰기 그지없었다.
"......석하랑 씨."
"네. 말씀하세요."
"한국 본부에서는 진짜 아무런 금전적 지원도 없습니까?"
"네. 염치없게도 저보고 그 말을 전하라고 하더군요. 정말, 정나미 떨어지게."
시안이 성을 내는 이상으로 석하랑도 함께 화를 냈다. 팀원들은 '부산의 수호신'이라고 불리던 여인이 협회와 나라에 대한 반감을 보이는 것에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미 그들은 석하랑의 길드 가입 희망 소식을 전해들었다. 누리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설화공주 님, 진짜로 한국 뜨실 생각이세요?"
"...이 남자 말대로 망명은 아니고, 해외를 좀 돌아다니고 싶어서 그래."
석하랑은 순순히 속내를 토해냈다. 시안이 요 두 달간 안 좋은 이미지가 쌓였던 것 이상으로 석하랑은 '국가'라는 울타리에 깊은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다. 석하랑은 누리에게 부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농담 아니고 내가 부산 밖으로 나온 게 손에 꼽을 정도야. 맨날 부산을 지켜야 하니 어쩌니 하면서 한 번도 나오지 못했다고."
"누리를 기르겠다 하신 건 당신을 대신할 대용품으로 육성하려 한 겁니까?"
라온이 누리를 보호하듯 끌어안으며 물었다. 던전에서 파트너로서 동고동락한 둘은 어느새 친자매 이상으로 서로를 아끼기 시작했다. 한 가지 불편한 진실을 빼면.
"그건 아녜요, 운사 님."
석하랑은 라온의 의문을 확실히 부정했다.
"혹시나 또 협회에서 누리 양에게 올가미를 씌울까봐 미리 선수를 치려고 했던 겁니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만요."
석하랑이 시안의 눈치를 봤다. 김누리를 핑계로 시안을 평가하려던 석하랑은 이제 시안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을'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S급 이능력자 한 명 영입 하시는 건 어때요?"
석하랑이 대놓고 폭탄을 던졌다.
라온과 누리는 입을 쩍 벌리며 석하랑의 말을 들었던 제 귀가 잘못되었나 기억을 곱씹었고, 유나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얼굴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셋의 시선이 자연스레 시안에게 향했다.
"...내가 길드원 받을 때 두 가지 원칙이 있어."
시안은 왼손을 뻗어 손가락을 두 개 펼쳤다. 검지와 중지로 V자를 그린 시안은 손가락을 흔들었다.
"가는 사람은 안 붙잡지만 오는 사람은 가려. 내가 1차적으로 거름망을 하는 거지. 그리고 두번째 원칙은...."
시안이 검지를 접으려다가 화들짝 놀라 중지를 접었다. 석하랑의 눈썹이 잠시 씰룩거렸다.
"기존 팀원들의 과반수 이상 찬성. 길드원으로 지내면 당연히 나보단 동료들과 잘 지내야할텐데, 나 혼자서만 결정할 수는 없잖아?"
시안이 유나와 라온, 누리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 셋을 설득시켜 봐. 두 명 이상 영입을 반대하면 나도 거절할 테니까."
"네? 잠깐만요! 당신이 대장이잖아요!"
갑자기 분위기가 면접이 되어버리자, 석하랑은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혹감을 내비치는 건 팀원들도 마찬가지였으나, 시안만이 담담한 얼굴로 유나의 뒤로 다가가 어깨에 왼손을 올려 두드렸다.
"내가 소개가 늦었네. 이 분이 우리 길드장님이셔."
"......???"
이러쿵 저러쿵.
혼란스러운 석하랑에게 유나를 길드장으로 내세운다는 계획에 대해 설명을 마친 시안은 상쾌한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그러면 유나, 라온, 누리. 셋이서 새로운 길드원 인턴으로 채용하는 거 면접 좀 봐줄래?"
"시안, 그래도 상대는 S급 아닙니까. 저희가 뭐라고...."
"아니에요, 라온 언니. 우린 할 수 있어요."
유나가 결의에 찬 얼굴로 팀원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최선을 다할게요. 괜찮죠, 시안 님?"
"......어, 응, 그래."
시안은 공평성을 위해 팀원들과 석하랑에게 엄지를 척 올린 뒤 방을 빠져나왔다.
"그럼 지원자분, 면접 화이팅!"
"아니, 진짜로, 당신이 아니고 이 분들이 정한다고요...? 진심?"
"그보다 시안 님, 옆에서 안 보시고 어디 가시려고요?"
면접을 방폐하고 따라 나서겠다는 유나의 적극적인 봉사 정신을 '볼 일 보러 간다'는 한 마디로 격침시킨 시안은 간신히 방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휴우. 알아서 잘 하겠지...?"
셋이라면 결코 사심없이 객관적인 눈에서 석하랑의 영입의 장단점을 저울질 하리라. 시안은 잰걸음으로 복도를 오다니며 화장실을 찾았다.
"잠깐."
모퉁이를 지나기 직전, 뒷편에서 누군가가 시안을 불렀다. 편견이라고 하기에는 명백한 여성의 미성이었다.
"거기 젊은이."
"......?"
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들리는 목소리는 자신과 비슷한 20대 중반-많이 쳐봐야 20대 후반 같은데, 어조나 분위기는 왜이리 나이가 들어보인단 말인가.
"...그래, 거기 금발 청년. 자네 말일세."
"저 말입니까?"
시안은 그제서야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을 찾는지 깨닫고 몸을 돌렸다.
"헉."
그리고 시안은 흑발의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컬이 들어간 흑단발에 졸린 듯 처진 눈. 금방이라도 닫힐 것만 같은 눈동자는 금빛 별을 녹여놓은 듯 반짝거렸다. 상아색 피부는 아주 연하게 상기되어 있었고, 립스틱 없이도 선명한 선홍색 얇은 입술은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엄청 동안이네.'
얼굴만 봐서는 20대 초반이 의심될 정도였다. 그런데 말투나 행동거지, 심지어 꽉 막혀 보이는 정장 차림은 여러모로 여인을 '나이들게' 보이게 했다. 눈동자와 매칭이라도 한 듯 금색 넥타이를 꽉 동여메어, 일부러 나이가 들어보이는 룩을 선택했나 싶을 정도로.
'근데 누구지...?'
분명 어디선가 보고 들은 것 같은 사람인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시안이 여인을 모르는 눈치를 보이자, 여인은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금전과 세속에 초연한 자가 세상의 평화를 위해 나섰다더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군. 맞나?"
"네? 네, 네네."
신원을 숨기고 공방에만 틀어박혀 연구만 하고 있다가 한국행을 선택했으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시안의 말에서 거짓을 느끼지 못한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나온 방을 가리켰다.
"잠시 나와 담소를 좀 나누겠나? 둘이서만 말일세."
"......지금요?"
"그럼 지금이 아니고 언제가 되겠는가? 빨리 들어오시게. 일각이 여삼추일세, 당장 들어오지 않고 뭣하는 겐가?"
"저기 저는-"
여인은 들뜬 걸음으로 시안의 말을 듣지도 않고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어떡하지. 아니 그전에 저거 누구야. 뭔데 나보고 지금 들어오라고 유혹하는 건데? 아니 것보다-'
시안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돌아선 여인이 허리 뒤에 숨겨둔 손에는 분명히 찰랑거리는 맥주캔이 있었다.
'히어로 협회 본부에서 술 처마시는 미친 놈은 제로니모 이후로 처음이네.'
왠지, 제대로 잘못 걸린 것 같았다. 시안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의 심정으로 여인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 시각, 신서울 모처.>
"메그레즈 길드의 , 서예성 군이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정장을 입은 남자가 넓은 사무실 한가운데 앉은 노인에게 보고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보고만 있어도 지쳐보이는게 눈에 훤히 들어왔다. 그의 눈은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다행일세. 어떻게 복귀 가능하겠던가?"
"아쉽게도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일상 생활에는 지장이 없지만-"
남자는 심장을 가리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상 생활에는 지장 없음. 그건 즉 이능력자로서 은퇴하게 생겼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아까운 인재를 잃었군. 위로금 전해주고 퇴직 시키시게."
"알겠습니다. 지난 번처럼 사과 한 박스로 되겠습니까?"
"그래. ...아니, 잠시만."
노인이 손을 들어 떠나가려는 비서를 제지했다. 노인은 젊은 나이에 은퇴를 하게된 청년의 퇴직금이 고작 사과 한 박스라는 것에 마음이 영 켕기는 눈치였다.
"물 건너 온 자도 이 나라를 위해 이백장을 썼는데, 우리 대 유성이 고작 한 박스 정도로 인색한 면모를 보여서야 되겠는가?"
"...회장님? 혹시?"
남자는 반색하며 노인에게 물었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다 안다는 얼굴로 남자의 실태를 용인했다.
"괜찮네. 자네가 인천에서부터 키워온 아이 아니었던가.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면목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감으로 그를 더 챙겨주려거나 하는 건 절대-"
"아니. 그와 별개로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런 걸세."
그간 노인을 보필해 온 십 수년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아, 노인의 말은 진심이었다.
"깔끔하게 퇴직금으로 100억 줘. 대신 다른 말 안 나오게 자네가 직접 주고 뒷탈없이 위로해주고. 알겠나?"
"......감사합니다, 회장님."
남자는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하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홀로 자신의 집무실에 남은 노인은 네트워크에서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금발 남자의 사진을 바라보며 턱수염을 쓸었다.
"이 놈이라면...내 딸도 혹시...?"
노인의 눈에는 금빛의 별이 반짝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