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03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2권 020
뚜둑, 뚝.
피가 흘렀다. 천봄이는 아득해진 감각에 두눈을 깜빡거렸다.
'뭐야?'
자꾸만 자신의 몸은 들썩거리고, 거친 남자의 숨소리가 들렸다. 제 둔부를 남자가 왼손으로 받치고 있다는 불쾌한 감각을 깨닫고 나서야, 천봄이는 자신이 남자에게 '업혀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구야?'
시야가 흐릿하다. 마지막에 맞은 총격에 눈이라도 터진 건지, 온 세상이 회색으로 물들어있다.
하지만 이성은 어느정도 돌아왔다. 천봄이는 자신을 업고 도망칠만한 이가 누가 있나 곰곰이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 새끼?'
자신을 지옥의 수렁에 빠뜨렸던 그 남자.
시체를 발견한다면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그 남자는 분명 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자신을 챙겨 도망칠 만한 작자였다.
동료의식이나 의리 따위는 없으니, 자신의 유일한 재산이라 할 수 있는 '천봄이의 몸'만을 챙겨 도망칠 쓰레기 중의 쓰레기.
"......?"
하지만 이상했다. 회색 안개가 쌓인 듯 흐려진 천봄이의 눈에는 피에 절은 듯한 금발이 보였다. 무채색의 세계에서 오직 눈가를 간질거리는 금발만이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그 새끼가...아냐?'
선글라스의 그 새끼는 서울 한복판에서 머리를 노랗게 물들일 정도로 강짜가 없다.
그렇다면 자신을 등에 업고 달리고 있는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한 명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결코 자신을 구해주거나 할 이유가 없었다.
시안. 그는 라온으로 변신했던 천봄이의 심장에 총탄을 박아넣어 코어로 만들었고, 다시 기회를 잡은 천봄이는 어둠을 틈타 시안의 오른팔을 베었다.
그런 그가 왜 자신을 등에 업고 '무너지는 동굴에서 도망'치고 있다는 말인가.
천봄이는 깨어났으면서도 깨어나지 않은 척, 귀를 쫑긋 열었다.
그들은 분명 무너지는 동굴 속에서 탈출할 길을 찾고 있었다.
* * *
"라온! 그쪽에 길 있어?!"
"없습니다! 따로 장치도 보이지 않습니다!"
시안은 의식을 잃은 천봄이를 등에 업은 상태로 주변을 살폈다.
개미굴같은 통로는 여러 갈래로 길이 뚫려있었지만, 정작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지상으로의 통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 이거 계속 지하로 더 내려가는 것 같은데?"
누리는 떨떠름한 얼굴로 바닥의 경사를 가리켰다. 계단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분명 통로는 미묘하게 지하로 향하는 경사가 존재했다.
"......흐끅, 흐끅!"
유나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딸꾹질을 했다.
시안이 오른팔이 잘려 피를 흘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유나는 이미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무리 시안이 스스로의 팔을 '의수'라고 말했어도, 잘려나간 단면과 비릿한 혈향은 진짜에 가까웠다.
그래서 쐈다. 당장 통로가 무너지더라도 길을 막은 천봄이를 치우는 게 급선무였고, 유나는 뒤를 돌아볼 생각도 못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유나야, 진정해. 응? 봐봐, 나 이제 피도 안나잖아."
시안은 안절부절 못하며 유나에게 오른쪽 어깨를 내밀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이 빈 코트만 헐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울지 마. 응? 애초에 가짜였으니까 오른팔로 방어한 거라고."
시안의 말마따나 그의 오른팔은 진짜로 의수였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마도공학에 의해 체세포 복제를 통해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생체형 의수'.
"봐봐, 나 아무렇지도 않다니까?"
팔꿈치 아래가 전부 잘려나가 사라졌지만, 시안은 대수롭지 않은 양 붉어진 소맷자락을 흔들었다. 라온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공격을 당했을 때 고통은 진짜처럼 보였습니다만."
"아, 그건 맞아. 신경계는 연동되어 있거든."
"......네?"
"최대한 진짜 팔처럼 만들었으니까 그것도 그렇지. ...지금 자세하게 설명할 시간은 없을 것 같아. 탈출 루트부터 찾자. 이러다 지하까지 내려가겠어."
설명을 얼버무린 시안은 기절한 천봄이를 들어올려 자세를 조정했다. 그에 누리가 얼척없는 얼굴로 짜증을 부렸다.
"사람 좋은 것도 정도가 있지, 아저씨 팔 자른 괴인을 왜 챙겨 오는건데? 암만 의수라도."
"...원금 100억이라도 회수해야지?"
"그럼 코어로 만들어서 집어넣으면 되잖아. 내려놔. 아저씨가 정 못하겠으면 내가 코어 뺄 거임."
"......심정은 이해하겠는데, 최소한 정보원 하나 정도는 남겨놔야하지 않겠어? 혹시 모르잖아."
시안은 떫떠름한 얼굴로 더욱 아래를 향해 내려가는 통로를 보며 숨을 골랐다. 왼손이 저려와 서서히 떨릴 때마다, 시안은 천봄이를 들쳐 업으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다른 헌터들이 괴인들 체포해오겠지? 그럼 아마 대부분 코어로 만들어서 잡아올 거야. 그래서 우리라도 하나는 입이 살아있는 상태로 확보해야지. 보험이야, 보험."
"그럼 첨부터 생포하라고 했으면 됐지 않음?"
누리가 벽을 짚으며 시안의 말을 지적했다. 어조 자체가 퉁명스럽기는 했으나, 누리의 지적은 분명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저씨가 잡을 때는 그냥 쏴 죽여놓고, 왜 지금은 그 꼬라지가 됐으면서도 굳이 살리겠다고 난리치는 건데."
"그건 저도 공감합니다. 만약 인권적인 측면의 문제 때문에 그러시다면, 괴인에 대한 인권은 2023년부로 국제적으로 소멸-"
"..펜릴의 괴인이라서 그런 거야."
시안은 천봄이를 벽에 눕히고 왼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두팔로 지탱했다면 모를까, 팔 하나로 사람 한 명을 업고 지하 통로를 도망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다행히 그들이 멈춰선 곳은 진동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누가 이 여자에게 '펜릴'의 힘을 줘서 부활시킨 건지 찾을 필요가 있었어. 북유럽에 있어야 할 그 괴물의 힘이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는지."
펜릴 본인의 반응이 없는데 펜릴의 괴인이 우연히 만들어졌을 리가 없다. 시안은 이를 두고 두 가지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나는 펜릴 본인이 와서 숨어있다는 것. 근데 그건 우리들 이미 다 죽은 목숨이라는 얘기나 다름 없으니까 패스."
"펜릴이 직접 왔으면 서울은 커녕 신서울까지 쑥대밭이 됐을 겁니다."
몸집만 40m에 달하는 초특급 괴수를 상대로 그 누가 맞상대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시안은 오한이 들어 몸이 절로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두번째는 '하수인'이 있을 가능성이야. 펜릴에게 '세례'를 받은 괴인이 이 땅에서 새롭게 괴인을 만든 거지."
현실적으로 후자가 더 가능성이 높다고 시안은 판단했다.
무슨 목적으로 펜릴의 하수인이 서울에 괴인을 새로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천봄이를 위시한 괴인들은 그 목적을 알아낼 단편적인 단서였다.
"그런데 혹시나 내부자가 있을 수 있으니, 괜히 생포하라고 했다가 오해를 살 수 있었어. 괴인은 사살이 기본이니까. ...하아."
시안은 현기증이 나는 듯 벽에 등을 기대었다.
"시안 님.... 괜찮으세요? 흐끅!"
유나가 옆으로 다가가 울먹거리며 부축했다.
"괜찮아. 조금 지쳐서 그래. ...아무튼 올라가자. 이대로 죽을 수는-"
먀아아.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넷은 깜짝 놀라 경계 태세를 갖추고 뒤돌았다.
어둠속에서 녹색의 두 안광이 눈에 들어오자, 라온이 침을 꿀꺽 삼키며 앞으로 나섰다. 곧 그들은 어둠을 헤치고 나온 괴물의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고양이?"
냐아아.
시안은 꼭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고양이의 모습에 기시감이 들었다.
알싸한 박하향을 풍기며 나타난 고양이는 시안을 향해 입맛을 다시다가, 그들을 지나쳐 앞장서서 어둠속으로 향했다.
"이런 곳에 고양이가...?"
"시안 님."
눈시울이 붉어진 유나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훌쩍거렸다.
"저 고양이, 흑! ...따라오라고 하는 것 같아요. 히끅!"
눈물은 멈췄어도 딸꾹질은 멈추지 않는지, 유나는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애써 진정하려 했다. 시안은 뒷짐진 왼손으로 유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 내렸다.
"...일단 따라가보자. 저건-"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시안이 천봄이를 다시 업으려하자 라온이 선수를 쳐서 천봄이를 안아 들었다. 허벅지 아래와 등허리를 팔로 받치듯 공주님처럼 안은 모습에 누리가 눈을 껌뻑거렸다.
"라온 언니, 언니도 너무 잘 챙겨주는 거 아님?"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다 사전작업하기 좋게 하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리가 도와줄 게 하나 있습니다."
라온은 천봄이의 팔과 다리를 가리켰다. 허벅지를 움켜쥔 라온은 입으로 계획을 설명했고, 누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마력을 일으켰다.
움찔.
"......?"
라온이 자세를 바로잡으며 천봄이의 옆가슴 쪽을 눌렀다가, 이상한 기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곧 그 의문은 누리의 질문에 사그라들었다.
"언니, 이렇게 하면 됨?"
"......누리 양, 이 구속 방법은 어디서 배웠습니까?"
"김가온 보던 소설책에 보니까 죄다 이렇게 하던데?"
라온이 탄식했다.
누리의 친언니, 김가온과는 허심탄회한 이야기가 필요할 것만 같았다.
* * *
유나가 총을 무려 두 번이나 사격하면서 그들이 싸우던 곳은 반동으로 인해 통로는 무너졌지만, 의외로 다른 통로는 무너지지 않았다.
"나 집에 가면 고양이 한 마리 키워볼까봐."
"나도."
누리와 시안은 괴인들의 비밀통로를 제 영역처럼 오다니는 고양이를 보며 감탄했다.
혹시나 괴수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저러나 싶을 정도로 대담하게 움직이는 고양이는 도도한 발걸음으로 시안 일행을 이끌었다.
"진짜 출구일까요?"
"아까까지는 내리막이었지만, 분명 올라가고 있습니다."
울음을 멈춘 유나가 마도기어의 던전용 매핑 앱으로 지도를 작성하는 동안, 라온은 어깨에 낚싯대처럼 걸어둔 유나의 지팡이를 흔들었다.
동시에, 지팡이에 묶여있던 천봄이의 몸이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천봄이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지만, 일행 중 그 누구도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너무 야하게 묶지 않았어?"
시안은 그저 유나의 지팡이에 결박된 천봄이를 보며 시선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라온은 흘깃 천봄이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혹시나 깨어난다면 누구로 변할지 모르잖습니까. 꽉 쪼여둬야 합니다."
"목이랑 배랑 허벅지랑 발목, 그리고 팔목 말고는 안 묶었잖아. ...아저씨 눈 돌려. 뭘 보는 거야?"
라온은 누리에게 마력이 실린 물을 뽑아내 손발목을 결박했다.
누리는 한술 더 떠 구속력을 갖춘 물의 밧줄에 마력을 더욱 실어 천봄이를 코일 감듯 꽁꽁 묶었고, 거기에 유나가 제 지팡이에 묶어서 들고 가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심지어 그 묶는 방식은 시안을 탄식하게 만들었다.
"아니 암만 괴인이라도 이런 취급은...."
"시안 님 팔을 자른 악당이잖아요. 이 정도는 약과에요."
결국 괴인 천봄이는 사냥당한 짐승처럼 지팡이에 결박된 채 라온과 시안에게 들려 옮겨졌다.
그나마도 중간에 피로를 호소한 시안 덕분에, 괴인 천봄이는 라온 한 명에 의해 낚싯대처럼 들려 이송되었다.
"여러모로 괘씸하기는 한데, 그래도 중요 참고인인데...."
"아저씨 금붕어임? 아저씨 팔 자른 또라이가 누군데? 능력 조금만 더 강했으면 아저씨 모가지 날아갈 뻔 한 거 인정?"
"생각 같아서는 목에 줄만 묶어서 바닥에 질질 끌고 오려다가 참은 겁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당장에라도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시안 님?"
"알았어. ...아니, 진짜로 알겠어."
시안은 힘들어도 자신이 끝까지 뒤에 업고 갈 걸 그랬나 속으로 되뇌이며 고양이의 뒤를 따랐다. 고양이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시안을 바라보며 킬킬 거리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 도도히 걸어갔다.
그렇게 고양이의 꽁무니만 따라가기를 수십 분. 갈림길에 선 고양이가 왼쪽 방향으로 기수를 틀며 그르렁거렸다.
냐아아아.
어느새 고양이는 가파른 경사를 올라 위를 향해 뛰었다. 저 멀리서 차가운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저거 고양이 아닐지도 몰라."
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양이의 뒤를 따라갔으나, 고양이는 막다른 길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
"?????"
모두가 귀신에 홀린 듯 주변를 살펴 고양이를 찾았지만, 고양이 대신 흙에 가려진 비밀 장치만 발견했을 뿐이었다.
끼이익.
감춰진 문이 열리고, 그들은 지하철이 오다녔던 지하도에 발을 디뎠다.
어느덧 마도기어에 외부와의 통신감도도 양호해졌고, 시안의 마도기어가 시끄럽게 울렸다.
"모르는 번혼데?"
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받았고, 스크린 너머에는 화가 잔뜩 솟아오른 백발의 마녀가 있었다.
[당신 뭐에요! 나 차단했던 거야?! 왜 내가 전화할 때는 안 받고 다른 전화로 거니까 바로 받는 건데?!?!]
시안은 그저 이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오해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는 구나. 시안은 혀를 내두르며 마도기어로 상황을 전달했다. 분노에 찬 백발 마녀, 석하랑은 진지한 얼굴로 시안의 상황을 파악한 뒤 구조대를 파견했다.
"살 것 같다."
구조대가 그들을 발견한 곳은 여의도.
괴인 천봄이는 코어가 되지 않은 상태로 석하랑의 이능에 얼음수정이 되어 아무도 모르게 이송되었고, 시안은 습관처럼 오른팔을 흔들어 인사하려다가 잘려나간 것이 들통나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의수라니까!"
"거짓말 마요! 아니, 거짓말이어야 해!"
"유나 너 그럼 내가 진짜 팔이 잘렸으면 하는 거야?!"
"지, 지금 그런 의도로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좋아요, 그럼 당장 의사선생님한테 가봐요!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의사 확진.
"의수입니다."
시안, 그의 오른팔은 진짜로 의수였다. 유나는 병실에서 다시 눈물을 왈칵 터뜨렸다.
정말로 다행히, 시안이 과다출혈로 사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 *
2025년 3월 2일 23시 07분.
구로의 지하로 숨어든 괴인 천봄이를 끝으로 19명의 괴인은 모조리 체포되었다.
비록 탈취당한 코어의 개수와 체포한 괴인들의 수가 하나 차이가 났지만, 여의도 어귀에서 객사한 펜릴의 괴인 사체가 발견되며 대소동은 막을 내렸다.
<서울 지하 소탕 작전>.
서울 수복 작전의 연장선에서 진행된 작전은 기존의 체포 인원에 더불어, 불과 하루만에 약 천 여명에 달하는 빌런과 삼백에 달하는 괴인,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타난 '펜릴의 괴인' 스물을 체포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 단일 작전 역사상 세계 최고의 실적.
서울의 헌터들과 히어로들이 기쁨과 아쉬움에 긴장감을 풀고 승리를 만끽했다.
냐아아아.
그리고 그들은 아주 작은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서울을 빠져나가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