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01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2권 018
잠시 뒤.
약 30m 길이의 비밀통로를 기어온 일행은 라온이 납치당했던 그 장소, 선글라스 괴인의 비밀기지에 도착했다.
"윽, 냄새."
누리는 일어나자마자 코를 찡그렸다. 뒤따라 나오던 라온은 주변을 살피며 눈을 감았다.
"홀애비 냄새 나는 이 곳. 맞습니다. 조금 흐트러지기는 했지만 여깁니다."
"어둡긴 하네요."
유나가 마도기어의 손전등을 켜 어둠을 밝혔다.
"...아오, 환기 좀 하고 살...안 되겠구나."
다른 이들보다 훨씬 늦게 나타난 시안은 무엇이 그리 성이 났는지 얼굴이 잔뜩 붉어져있었다.
"아저씨 왜 또 엉거주춤하게 서있어?"
"......묻지 마."
시안은 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아 팔짱을 꼈다. 라온이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변을 샅샅이 뒤지는 동안, 유나는 치마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광탄을 피웠다.
"불 킬게요."
팟-!
어두운 토굴에 형광등이 켜지듯 어둠이 걷혔다. 시안은 6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 갖춰진 집기들을 눈으로 살피며 감탄했다.
"완전 남자 원룸인데?"
"대격변 이전의 물건들을 챙겨 숨어든 모양입니다."
라온의 추리대로 토굴 안에는 플라스틱으로 된 집기들이 여럿 있었고, 대부분은 수년 가까이 사용한 듯 이가 빠져있거나 낡아있었다. 시안은 땟자국이 가득한 머그컵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커피도 태워먹었네. ......?"
시안이 잠시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누리가 이불로 덮여진 곳을 펼쳤다가 얼굴을 붉혔다.
"이, 이거 완전 개변태 아냐?!"
"누리야 왜? 거기 뭐--"
유나가 말문이 막혔다. 라온도 떨떠름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시안은 볼을 긁적이며 무안해했다.
"...괴인도 그 짓을 하긴 하는구나."
"아저씨!!"
누리가 빽 소리를 지르며 이불을 다시 덮었다. 자신도 보기 민망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렇다고 시안도 봐선 안 될 것들도 있었다.
"잠시만. 이게 증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라온이 이불 속에 있던 속옷을 집어들었다. 남자의 방에서 발견된 회색 브래지어는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했다. 라온이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침묵한 뒤, 속옷을 그대로 이불 아래에 쑤셔넣었다.
"......죄송합니다. 증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증거 같은데."
"여장이 취미인 모양입니다. 아니면 여자 속옷 모으는 이상성욕을 가진 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가?"
어느새 자세를 바로잡은 시안은 관심을 끄고 주변을 살폈다. 괴인이 성생활을 한다는 건 분명 특이한 일이었으나, 시안에게 있어서는 그건 짐승의 교미 이상의 일은 아니었다.
달칵.
벽을 짚고 움직이던 시안이 이상한 스위치를 눌렀다. 곧 시안의 아래 벽에 틈이 생겼고, 시안은 벽을 짚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또 통로가 있네."
단순한 토굴이 아니라 진짜로 비밀 통로가 있는 것에 시안의 얼굴이 구겨졌다. 당장에라도 지상에 올라가 포위망을 재구성 해야할지도 몰랐다. 마도기어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구구궁...!
"뭣."
갑자기 땅이 크게 흔들렸다. 전조도 없는 지진에 시안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거 자연 지진이 아니라-'
구구구궁!
"위험해!"
시안은 유나를 끌어안고 몸을 숙였다. 라온도 누리를 챙겨 머리를 보호했다. 아주 잠깐의 지진이 일어난 뒤, 시안은 핼쓱한 얼굴로 돌아가는 길을 살폈다.
"......히익."
돌아가는 길은 무너졌다. 아직 지상은 여진이 계속되고 있었다. 동시에 그 지진파에는 미약한 마력의 흔적이 실려있었다.
"...위에서 아주 난리를 치고 있는 모양이네."
"시안. 이거 까딱 잘못하면...."
"그래. 여기 이대로 깔려서 압사당할 수 있어. 문제는..."
도대체 누가 지상에서 저렇게 천방지축으로 싸우나 싶기도 했지만, 시안은 최소한 들어온 통로로 다시 돌아가기에는 무리임을 직감했다.
"아아. 아."
시안이 통로에다 고개를 내밀어 소리를 질렀다. 시안의 예상대로 소리는 메아리 치며 안쪽으로 돌아왔다.
"방금 그걸로 들어온 길이 막혔다는 거지."
"아, 아저씨?"
누리가 잔뜩 겁을 먹은 상태로 주변을 살폈다. 유나도 다른 통로가 있을까 탐색했지만, 시안이 발견한 곳 말고는 별다른 통로가 없었다.
"가자."
시안의 결정은 거침이 없었다. 이미 천장의 흙먼지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들어온 이상 앞에 뭐가 있든 움직일 수 밖에 없어. 괴수가 있든 괴인이 있든, 아니면 던전의 입구가 있든간에 여기서 깔려 죽을 수는 없잖아."
시안이 고개를 숙여 통로에 들어갔다. 다행히 이쪽 통로는 기어가야할 정도로 높이가 낮지 않았다.
두근, 두근.
고요할 정도로 조용한 동굴에 넷의 발소리만 가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안은 동굴의 벽에 짜맞춰진 문을 발견했고, 그건 썩 '나가는 문' 같았다.
"아저씨 신발."
"뭐? 신발?"
시안은 잘못들었나 놀랐다가 누리가 가리킨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널브러져 있다 시피 한 신발들은 낡고 종류가 다양했지만, 사이즈는 대동소이했다.
"신발들이 왜...?"
라온은 신발의 방향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이 공간에서 나갈 때나 신는 것 처럼' 놓여진 신발들에 기시감이 들었다.
"이거...현관?"
유나가 흘린 말에 다른 셋도 고개를 끄덕였다. 시안은 침을 꿀꺽 삼키며 문고리를 잡았다. 만약 생각에 틀리지 않았다면-
끼익.
시안은 문고리를 돌려 밖으로 밀었다.
"아."
지하도 안, 비밀통로를 통해 들어온 괴인의 방-집을 빠져나온 밖에는 넓은 광장같은 공동구가 있었다. 테니스장 만한 넓은 공간, 어둠 속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누리가 칼을 뽑아들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여기에도 펜릴의 괴수가...?!"
"아무래도 당첨인 모양이야."
시안이 마도기어의 손전등을 꺼버렸다. 손전등 수준의 밝기로는 공터를 밝힐 수 없었고, 곧장 유나가 지팡이 끝에 불빛을 피워 천장으로 띄워 올렸다.
팟.
"......와오."
시안은 어둠이 걷혀진 공터에 나타난 면면을 보며 감탄했다. 나타났다기보다는 마치 시안의 팀이 문을 열고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듯 한 포진이었다.
"함정?"
"유인한 걸 수도 있어요."
열 세 명의 괴인. 비록 펜릴의 괴인은 아니지만, 그들은 이지를 상실하고 '상위 괴인'에게 정신 지배를 받는 자들이었다.
"어쨌든 펜릴의 괴인이 하나는 있다는 거잖아! 아저씨, 스캔 돌려봐!"
"...E급 여덟에 D급 넷."
단순 전력으로만 따지면 시안 측이 훨씬 유리했다. 시안이 총 한 발의 화력도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이니.
"아저씨! 갈겨!"
"...안 돼. 무너져."
시안은 천장과 주변을 흘기며 입술을 비틀었다. 화력이 가장 낮은 탄환을 쓴다고 하더라도 그 진동 때문에 공터가 무너질 수 있다.
"쳇."
시안이 총을 손도끼처럼 거꾸로 쥐었다. 유일하게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시안이 근접전으로 전환한 것에, 셋도 마력을 일으켜 근접전을 준비했다.
"풋. 비장의 수가 안 먹히니까 곤란한가봐?"
공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시안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한탄했다.
"아니, 어떻게 스무 명 중에 딱 선별됐대?"
"내가 알게 뭐 있어? 중요한 건 내가 다시 살아났다는 거지."
간부의 권속이 된 괴인 특유의 복장-노출도가 심한 갑주를 입고 당당히 나선 회색 장발의 여인은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를 끼고 있었다.
"언니...!"
"정체를 다 아는데 마스크가 무슨 소용입니까?"
누리와 라온이 앞으로 나서며 무기를 들었다. 괴인은 제 얼굴에 걸린 가면을 톡톡 건드리며 낮게 웃었다.
"이건 말이야, 내 새로운 주인께서 내게 주신 새로운 힘이야."
파지직! 괴인이 가면을 손으로 쓸어내리자, 괴인의 주변에서 좀비처럼 기고 있던 괴인들의 얼굴에도 마스크가 씌였다.
"그 분이 나를 괴인으로 만드셨을 때는 그저 변신으로만 끝났지."
가면의 괴인은 쿡쿡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에 괴인들은 실이 달려 조종되는 인형처럼 두 팔이 들린 채 똑같은 행동을 했다.
"이제는 달라. 내 새로운 주인께서 나를 권속으로 만들어 주시면서...."
가면 괴인이 가면을 벗었다.
"이런 것도 가능해졌지."
누리가 가면 아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다.
"나, 나?!"
"몸은 안 바뀌었지만."
"내가 저런 젖비린내 나는 꼬맹이로 변해서 뭐하겠어?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야."
이목구비만 누리의 모습으로 변한 가면 괴인은 경멸어린 눈빛으로 누리를 무시한 뒤, 손을 뻗어 물로 된 검을 만들어냈다.
"어?!"
"...타인의 이능력을 복사한다고?"
속은 비었지만 검을 감싸는 듯한 물줄기. 그건 분명 누리가 수속성으로 각성해 주로 사용하던 이능력이었다.
"와! 미친! 왜 남의 꺼 훔치고 지랄이야?!"
누리가 머리 끝까지 열이 올라 소리를 질렀다.
"화 내지 마라."
"어떻게 화 안 내?! 나잇살 처먹은 게 지금 나 따라하잖아! 이능력까지!!"
납치당한 걸로 속이던 과정에서 겪은 배신감의 폭발인지, 몇 주간 고생해 확립한 제 이능력을 카피 당했다는 분노인지, 그도 아니면 속옷도 없이 십자형으로 위험한 부분만 가리는 흉갑 아래 드러난 존재감의 차이 때문인지 시안은 알 수 없었다.
누리의 얼굴을 한 가면 괴인의 얼굴에 금이 갔다.
"요즘 애들이라 그런 지 싸가지가 없네. 나 때는-"
"그런 옷 입고 쪽팔리지도 않나?"
시안이 빈정거리며 말을 끊었다.
"싸우러 왔으면 입 닫고 싸워. 아니면 그냥 비켜주던가."
상대가 무슨 생각을 가진지는 잘 모르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 탐나는 이능력의 보유자가 악연으로 이어지다 못해 당장 사생결단을 내야 할 '적'이라는 것.
"후후후, 그래. 너...금발...."
가면 괴인이 눈에 보라색 귀기를 내뿜었다.
"새벽에는 잘도 내 가슴에 한 발 쎄게 박으셨겠다?"
가면 괴인-천봄이가 누리의 얼굴로 빈정거렸다.
"그대로 갚아줄게! 싹다 죽어버려!"
"응전!"
서울의 지하 비밀 공터.
팀 데스디나스와 다크 레기온의 하수인이 격돌했다.
* * *
<그 시각, 신서울 모 카페.>
서울, 펜릴 등장.
본인이 나온 건지 아니면 그 수하가 나타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한동안 잠잠하던 '다크 레기온'의 간부 한 명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야, 서울 박살났다. 크크크, 펜릴 뜨고 난리났는데?"
"본인 아니겠지. 본인이 왔으면 설화공주 결계 바로 박살났을 걸?"
"설화공주 판단 쩔었다. 학부생들 징징 거리는 거 받아주고 서울 남겼으면 어쩔 뻔 했어?"
서울이 난리난 것과는 달리, 신서울은 시시각각 들어오는 정보들을 확인하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상황을 살폈다.
현지에 파견된 헌터들의 연락, 서울 외곽에 긴급 파견된 기자들의 보도, 오랜만에 움직인 히어로 협회의 기민한 대처.
아직까지 펜릴 본인이 나타났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당장의 상황은 설화공주의 대처가 유능하다는 평이었다.
"<적송>은 뭐하다가 괴인 수용소 들키고 습격당했대?"
"바로 대전으로 보냈어야 하는 거 괜히 욕심부리다가 들킨 거 아닐까? 그러길래 왜 지들이 호송한다고 자처해가지고."
"야, 말 조심해. 그러다 너 '솔방울' 당한다?"
이미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커졌고, 괴인의 코어를 지키던 <적송>과 그 뒷 배경도 손쓸 수 없을 만큼 진실은 퍼져나갔다. 평소라면 쉬쉬 거리며 정보의 확산을 억제하던 이들도 물만난 물고기 마냥 가십을 떠들어댔다.
"이번에 습격당한 이능력자 중에 유성 산하 길드의 길드장이 있었대. 은하수 개빡쳤을 걸?"
"회장 홧병나서 쓰러지면 안 되는데. 지금 유언대로라면 그룹은 그 개망나니가 이어받잖아."
"나라 망할 징조야, 징조. 야, 그보다 저기 앉아있는 여자 존나 예쁘지 않냐? 시발 아까 지나가는데 거기도 존나 대단하더라고."
"......쯧."
지금까지 조용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푸른 머리칼의 소녀가 혀를 차며 티스푼을 집어들었다. 남자는 소녀의 입으로 들어가는 딸기에 자신도 침을 꿀꺽 삼켰-
화륵.
" ?!"
남자는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열기에 탁자에 얼굴을 묻고 쓰러졌다. 맹장이라도 꼬인 양 고통스러워 하던 남자는 일행의 부축을 받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어휴."
소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파르페의 아이스크림을 스푼으로 휘휘 저었다. 정보가 취합되는 것은 좋으나, 애초에 이런 자리에서 정보를 모으고 있다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죽이고 오면 될 것을 뭐하러 이런 난장판을 만드는 거예요?"
소녀는 벽걸이 TV속 뉴스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내용을 보고 들으며 시름에 빠졌다. 다크 레기온 활동 재개, 펜릴의 한국 상륙, 타 간부들의 행적, 과거 그들이 저지른 사건 등등 온 나라가 시끌벅적해졌다.
"이런 일 일어나지 말라고 자기한테 시켰더니...."
속된 말로 깽판을 쳐도 제대로 쳐놨다. 소녀는 끓어오르는 속을 파르페 속 아이스크림으로 달래며 분을 삭였다.
"실패하기만 해봐요. 아주 요절을 내어 놓을테니."
소녀의 맞은 편, 주인없는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이 하염없이 녹아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