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899화 (899/1,497)

EP.899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2권 016

펜릴.

2021년 경 북유럽에서 발생한 '오슬로 게이트' 사태에서 최초로 등장해, 핀란드를 거쳐 러시아의 서부까지 점령한 대괴수.

기존에 알려진 '풍마룡(風魔龍)'의 원형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강력했던 거대 괴수는 러시아에 이르러 당시 원탁이었던 <운디네>를 잡아먹는 것을 끝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그 뒤로 대륙 곳곳에서 헛소문 처럼 돌던 'SS급 괴수'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던전에서 발견되지 않은 일곱 대괴수를 두고 히어로 협회에서는 총력을 기울여 이 괴수들을 퇴치하는 데 애썼다.

대격변으로 던전이 생기고 S급 괴수들이 SS급이 되어 사라졌지만, 아직 그들은 지구에 남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그리고 2024년.

인류는 펜릴을 위시한 일곱 대괴수가 인간 이상의 지성을 가진 초월적인 존재이며,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 내려온 일곱 재앙임을 직시했다.

스스로를 '다크 레기온의 7간부 중 한 명-개천광(開天光)'이라고 소개한 괴인은 당시 세계 최강의 히어로였던 '가웨인 경'과 생사를 건 대결을 펼쳤고, 사흘 밤낮의 격전끝에 무승부를 내어 약간의 정보를 흘렸다.

괴수를 조종하고 괴인을 부리는 일곱 간부.

세계를 지배하고 인류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일곱 절대자.

아직까지 행방이 묘연한 두 개체를 제외한 다섯 개체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그 고유의 마력 패턴을 분석해 그들이 마력을 흘리는 순간 국가, 아니 전세계에 비상이 걸렸다.

그리고 2025년.

약 2개월간 잠잠했던 다크 레기온의 활동은 일곱 간부 중 펜릴이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이 처음 등장했던 북유럽이 아닌, 유라시아를 횡단한 극동아시아의 한반도-서울 땅에.

* * *

"진정하세요! 아직 본인이 온 건지는 모릅니다!"

시안은 무너지기 시작한 포위망에 호통을 쳤다.

"협회측 탐지기 주목! 펜릴의 마력 패턴은 검출됐지만, SS급 괴수가 나온 건 아녜요! 포위망 유지! 도망치지 마요!"

석하랑도 어떻게든 히어로들의 포위망을 유지하고자 안간힘을 썼지만, '펜릴'이라는 이름값만으로도 어지간한 이능력자를 공포에 빠드리기는 쉬웠다.

"절풍이 왜 이런 곳에...?"

"왜 여기 있는가는 나중 일입니다! 우선 진짜 '본인'이 온 건지부터 확인해요!"

시안이 습관처럼 명령을 내렸지만, 그 누구도 시안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오직 시안의 팀, <데스디나스>의 멤버들을 빼고.

"아저씨! 남산에 괴인 반응 스물!"

누리가 협회의 긴급 정보망을 훑어 괴인의 출몰을 알렸다.

그들이 구로의 지하도에서 퇴치한 괴인과 같은 자들과는 달리, 7간부에게서 직접 마력을 부여받은 '진짜배기들'. 하나하나가 최소 C급 수준의 마력을 갖추고 있었다.

"S급은 없습니다!"

"시안 님!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어요!"

펜릴의 괴인들은 제각기 다른 방면으로 흩어졌다. 마치 서울 곳곳에 흩어진 이능력자들을 요격이라도 하려는 듯, 괴인들은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마포에 있던 히어로들이 응전하러 갔습니다!"

"종로에 누가 있어! 당장 대치하라고 해! 내가 갈테니까!"

"젠장, 누구든 남아! 구로 지켜!"

하필이면 서울에 있던 핵심 전력이라고 할만한 이들이 전부 구로에 모여있었다.

한 번 습격을 허용하기는 했어도 괴인 수용소가 구로에 있는 만큼, 구로는 괴인들에게서 반드시 사수해야할 요충지였다.

"아냐. 여길 노리거나 그런 움직임이 아냐, 지금."

시안은 누리가 찾아낸 협회의 실시간 레이더 정보를 확인하며 이를 갈았다. 괴인들의 반응이 중간부터 사라졌지만, 그 직전까지 분명 중구난방으로 흩어졌다.

"도대체 목적이 뭐야...?!"

그저 흩어지기만 하고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려는 듯한 움직임에 시안은 골머리가 아파왔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의 전황이 결코 서울의 이능력자들에게 불리하지는 않다는 것.

시안은 아직까지 서울의 이능력자들에게 연결된 스크린에 소리를 질렀다.

"펜릴의 마력 패턴은 나왔지만 펜릴 본인은 미확인! 그냥 7간부 중 하나의 마력을 가진 괴인들일 뿐입니다!"

히어로들이 정신을 차렸다.

시안의 말대로 펜릴 본인-SS급의 마력을 가진 괴물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헌터들 뿐만 아니라 히어로들도 서울 한복판에 펜릴이 나타나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괴인일 뿐이야!"

"결계 밖으로 도망치기 못하게 막아! 서울 벗어나면 민간인 피해가 생겨!"

"경기 쪽에 연락해서 민간인들은 빨리 피난 시켜!"

히어로들은 상정 외의 사태에도 침착하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 중심에는 설화공주가 있었고, 시안은 한숨을 돌리며 일행을 불렀다.

"우리도 거들자. 다같이 모이면 B급 하나 정도는 충분히-"

"헌터들이 도주? 야!"

석하랑이 빽 소리를 질렀다. 석하랑의 앞 스크린에는 신서울의 히어로 협회 지부의 상황실과 곧장 이어져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요!"

[안 돼요! 벌써 포위망이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이탈율 13%!]

"젠장, 전직 히어로라는 것들이...!"

석하랑이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에 빠졌다.

서울에 올라온 헌터들 중 약 90%는 본디 협회에 적을 두고 있던 '히어로'들. 그들은 코어와 현상금이 주는 돈의 맛에 히어로의 사명을 포기하고 헌터 길을 걷기 시작했다.

목숨 바쳐 일해도 알아주는 이 없고, 경제적으로 어렵기만 하더라.

던전의 등장과 함께 코어 사냥꾼, 헌터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들은 이제 괴수를 퇴치해야한다는 인류의 사명보다 제 목숨값을 더 중시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상황에서 도망쳐버리면...!"

"유나야, 잠시 질문 좀."

시안이 총에 탄환을 집어넣으며 유나에게 질문했다.

"히어로 협회 한국 지부에서나 정부에서 괴인을 체포할 경우, 별다른 포상금이나 지원이 따로 있어?"

"......사실상 없어요. 공로상 명패에 표창장 정도가 전부예요."

"후우...."

시안은 한숨을 푹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덧 석양이 지고 서서히 달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시간이 되었다.

'헌터들을 동원할 방법이 뭐가 있을까.'

평소라면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겠지만, 지금은 그런 깊은 사고를 할 틈이 없었다.

히어로의 수는 절대적으로 부족. 서울 포위망을 유지하려면 헌터들의 지원이 필수였다.

'말로 설득? 아냐, 씨알도 안 먹혀. 협박? 무슨 방법으로? 이미 공포에 질려서 도망치고 있는 자들에게. 히어로의 사명? 그것도 무리야. 저들은 자본의 논리에 휩쌓인-'

"아."

돈. 숭고한 사명 대신 돈과 목숨을 택한 이들.

어쩌면, 돈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시안은 '왠지 가장 잘 알 것 같은 사람'에게 질문했다.

"유준 형님, 이 자리에서 저 괴인들한테 현상금 붙인다면 얼마 정도 되겠습니까?"

"그걸 나한테? ......잠시만."

질문의 내용도, 질문을 받은 사람도 쌩뚱맞았지만, 하유준은 손을 들어 계산을 마쳤다.

헌터들이 목숨을 걸고 괴인 퇴치에 나설법한, 그것도 '펜릴'이라는 이름값을 꺾을 수 있는 압도적인 숫자.

"......괴인 하나에 100억은 질러야하지 않을까? 그 정도는 돼야 목숨걸고 펜릴의 괴인 잡으러 다닐 걸?"

"그럼 도합 2천억?"

순간, 시안은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십새기가.'

자금 치트라는 명목으로 돈을 빌렸을 때, 오라클은 최대 한도까지 넣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하필이면 2천억.

두당 100억씩 치면 딱 스무명이 되는 금액.

오라클이 전직 원탁으로 세계의 멸망을 예고한 '예언가'였던 만큼, 그는 이 상황을 예견해 시안에게 미리 그만큼의 돈을 주고 떠난 걸지도 모른다.

'설마 그럴 리가.... 아냐.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다.'

"그쪽 헌터 길드 연합에서라도 헌터들 동원해야죠! 서울 뚫리면 난리나는 거 몰라요?!"

[아니! 우리가 히어로 협회처럼 강제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통제를 합니까! 우리가 군대도 아니고! 이런 일이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에 협조 요청을 했어야죠!]

"장난쳐요?!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어요?!"

"잠깐, 진정하시고."

시안은 헌터 길드의 중앙에 직접 연락을 걸어 따지기 시작하는 석하랑을 진정시키며 상대방에게 물었다.

"지금 헌터들 이탈율이 몇이나 됩니까?"

[현재 27%.... 당신은 또 누구야?!]

"소개는 나중에. ...펜릴의 괴인에 대한 현상금 두 당 삼십억 정도면 헌터들 다 동원 가능합니까? 목숨걸고 펜릴의 괴인 잡으러 다닐 만큼?"

시안의 질문에 헌터 길드 연합에서 연락을 하던 대표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그거 세 배는 되어야 혹할 겁니다.]

"......."

시안이 하유준을 슬쩍 쳐다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오라클 스튜디오 현지 지사 대표 시안입니다. ...두당 100억씩 현상금 걸면 헌터들 발길 돌릴 수 있습니까?"

[그 정도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겁니다. 혹시 그 쪽에서-]

후우. 시안은 하늘을 향해 숨을 깊게 토해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현상금 걸죠. 펜릴의 괴인들 제 앞에 체포해 오면 그 자리에서 바로 100억 드린다고 알려주세요."

목숨이 아까워 돈을 포기한다면, 그 목숨을 걸만큼의 돈을 쥐어주리라.

시안은 피눈물을 흘리며 계좌의 돈을 뽑아냈다.

* * *

남산타워, 전망대 꼭대기.

녹색 단발의 소녀, 펜릴은 서울의 저녁 바람을 만끽하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후우, 다들 무서워서 난리났네."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아비규환이 절로 느껴진다.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남자의 절규. 제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는 여자의 비명. 자신의 마력에 반응해 곳곳에서 생성되기 시작한 괴수들의 울음소리.

"이 몸이 나설 필요도 없겠네!"

펜릴은 자신의 마력이 들키지 않게 최대한 기를 숨겼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만든 열아홉의 괴인들은 마음껏 활개를 칠 수 있도록, 자신의 마력을 한계까지 집어넣어 권속으로 만들었다.

결계가 깨지지 않는 한, 서울 전역에 펜릴의 마력 향기가 퍼질 것이다.

"그럼 이 몸은 그 틈을 타서 타깃을 죽이고!"

펜릴은 손뼉을 치며 자축했다. 평소같았으면 그냥 달려가서 모가지를 땄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재미없게' 암살로 죽이기가 싫었다.

"여기까지 날아왔는데 이 몸도 좀 즐기다 가야하지 않겠어?"

명령을 잘 수행하기만 한다면 대장도 이 정도의 혼란은 잘 이해할 것이다.

어차피 자신들의 사명은 인류의 전멸과 동시에 지구, 세계의 멸망이니까.

겸사겸사 코어도 맛있게 '섭취'도 좀 하고.

"그러면 이 몸은 여기서 누워서 구경이나....응?"

킁킁. 펜릴은 바람에 섞인 냄새를 맡고는 침묵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공포와 절규가 가득한 바람이, 어느새 열망과 흥분에 따른 열기로 잔뜩 데워져 있었다.

"와, 안 쪼네? 여기 애들 좀 강단있구나?"

도망치던 자들도 발길을 돌려 권속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펜릴은 오랜만에 생긴 즐거운 구경거리에 혼란이 더욱 가중되기를 바랐다.

"아직까지 영웅 놀이 하는 애들이 참 많네."

펜릴은 설마 돈으로 사명을 샀을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 * *

때로는 돈이 사람을 움직이게도 한다. 하지만 그 돈을 포기하고 다른 걸 챙기는 이들도 존재하기는 한다.

서울 포위망을 구축했던 헌터들의 이탈율 22%.

나머지 78%는 펜릴 본인의 부재, 두당 100억이라는 거금의 유혹, 그리고 상대 전력의 분석을 통해 '이 정도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따라 발벗고 괴인들을 찾아 나섰다.

"아저씨 진짜 무슨 생각으로 저지른 거임?"

"괴인들 잡아야겠다는 생각."

시안은 담담한 목소리로 총을 손질했다. 유나가 꺼낸 광탄 덕분에 승강장은 대낮처럼 훤히 밝았다. 라온이 창대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펜릴의 괴인이 정말 100억의 가치가 있겠습니까?"

7간부의 마력을 가진 괴인은 일반 괴인과는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려 10배 가까운 현상금을 올려버린 시안의 행동은 분명 무리가 있었다.

"C급 이능력자가 은퇴할 즈음까지 얻는 총 수익이 대략 100억 쯤 돼요, 라온 누님."

하유준은 통계 자료를 근거로 100억의 당위성에 대해 강변했다.

설화공주같은 S급에게는 새발의 피같은 돈이었지만, 약 90%의 C급 이하 히어로들에게는 10년 가까이 헌터 업계에서 굴러야 벌 수 있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그래도 존나 아까운데...."

누리는 칼로 승강장의 바닥 타일을 긁으며 아쉬움에 노래를 불렀다.

만전을 기해야한다는 시안의 말에는 공감했지만, 누리는 굳이 길드의 자금을 쓰면서까지 현상금을 걸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했다.

"괜찮아. 2천억 이상으로 뽕을 뽑으면 되지."

피눈물을 머금고 종잣돈을 끌어다 바친 만큼, 시안은 그 2천억의 값어치 이상의 무언가가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겸사겸사 원금도 좀 회수하고."

"저희가 현상금을 내건 이상, 저희가 직접 잡아도 뭐라 하지는 않을 겁니다. 괴인이 정말 이곳으로 온다면."

라온이 승강장 끝에 서서 창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지하도 너머에서 흘러오는 바람에 이질적인 마력의 잔향이 실려있었다.

"아저씨 근데 진짜 여기로 올까? 하나라도?"

"올 걸? 왜냐면...."

시안은 저 멀리서 들려오는 뜀박질 소리에 씩 웃으며 총을 빙빙 돌렸다.

"제일 맛있는 먹잇감이 이쪽 지상에 있잖아!"

키에에에엑!!

녹빛의 분류를 흘리며 괴수들이 지하도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펜릴의 마력을 받고 다시 태어난 괴인들이 생성한 괴수들. 유나가 스태프를 통해 마력을 연동하여 괴수들의 전력을 탐지했다.

"열일곱! 전부 펜릴의 권속이에요! C급!"

"충분해! 그럼 모두-"

시안이 왼손을 들어올려 수신호를 보냈다. 대합실로 올라가는 계단마다 자리잡은 히어로들과 헌터들이 신호와 함께 마력을 끌어올렸다.

"요격, 개시!"

카아아아앙!

펜릴의 괴수들이 승강장으로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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