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890화 (890/1,497)

EP.890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2권 007

파밧!

금빛 마력을 머금은 주먹이 괴수의 관자놀이를 때린다. 늑대 괴수는 날카로운 이빨을 어떻게든 인간에게 넣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이미 괴수의 허리에는 길쭉한 창 하나가 꽂혀있었다.

키에엑....

생명력이 다한 괴수는 신음을 내며 축 늘어졌다. 라온은 괴수가 죽은 것을 확인하고 창을 회수했다.

"괜찮으십니까?"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죠, 누님."

하유준은 라온의 두 배 가까운 팔뚝을 자랑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히어로 슈트는 커녕 변변찮은 방어구 없이 맨몸으로 전방에 나선 하유준의 무모함에 라온이 끊임없이 잔소리했다.

"전장에서 제대로 된 방어구도 없이....위험한 행동은....몸만 믿고 까불다가는 만용이...."

"저, 누, 누님?"

"잔말말고 듣습니다!"

멀찍이 서서 전황을 살피던 시안은 꼼짝도 못하고 라온의 잔소리를 듣는 하유준에 동정심이 생겼다.

"제대로 혼나네."

"혹시나 사고날까봐 걱정하는 거예요."

유나가 라온의 심정을 대변했다. 하유준은 성장 한계치가 낮기는 했지만 준수한 이능력자였고, 라온은 그런 하유준이 전장에서 자기처럼 다치는 걸 바라지 않았다.

"힐러는 사람 치료할 일이 없는게 제일 좋아요. 그건 누구 다치지 않는다는 말이니까."

"그래도 심심하지 않아? 던전에서는 그래도 활약했잖아. 그제까지 활성화된 마력 분명 C-"

"시안 님."

유나가 눈을 찡긋였다.

"저는 시안 님 지시하시기 전까지 제 힘을 드러낼 생각 없어요."

"...고마워. 다음에 둘이서 데이트 가자."

"네, 네. 킹슬라임 잡으러 던전 가자고요? 후후. 그보다 저쪽은 이제 정리가 됐고, 반대편은요?"

유나가 건물 안쪽을 가리켰다. 시안은 협회를 통해 지급받은 괴수 탐지기의 반응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못 잡았나봐. 살아있어."

"...무슨 일 난 건 아니겠죠? 다쳐서 괴수랑 서로 대치 중 이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유나가 지팡이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다쳤으면 언제든 치료하려고 호들갑을 떨자 시안이 유나의 손을 잡으며 만류했다.

"괜찮아. 천봄이 씨도 같이 갔잖아."

시안은 괴수 소탕의 효율성을 위해 4인의 팀원을 2인 1조로 나누었다. 누리와 천봄이, 라온과 하유준으로 구성한 각 팀은 건물의 안과 밖을 각각 맡았다.

"반응 봐서는 겨우 D급이야. 바디 슈트도 뚫지 못한다고. 진짜 위험했으면 긴급 알림 울렸을 거야."

"그러면 다행이지만...."

여전히 유나는 걱정이 앞섰다. 애써 웃음을 참은 시안은 괴수의 코어를 회수해 온 라온과 하유준에게 박수를 보내며 건물 안을 가리켰다.

"코어 감사하고요, 안쪽에 아직 정리 안 된 것 같으니 도우러 갈까요?"

"예? 혹시 무슨 일 생겼습니까?"

"...그걸 확인하러 가려고. 큰 문제는 아닐 거야."

구로 디지털단지, 약 20층에 이른 건물. 괴수의 코어를 수습한 일행은 시안의 탐지기에 따라 조심스럽게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 시각, 마포대교.>

백발의 히어로, 설화공주 석하랑은 버스 위에 서서 각지의 전황을 살폈다.

- 관악, S대학교 지부 공과대학 지하에 던전을 발견했습니다. D급 던전으로 확인, <헌터 킬러>에서 학부생을 이끌고 던전에 진입했습니다.

- 강남, <적송>에서 대대적인 괴수 색출 작업에 나섰습니다. 건물 내에 숨어든 괴수들을 전부 찾아서 퇴치하도록 하겠습니다.

"코어나 부산물로 싸우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협회 측에서 무조건 한 명씩 증인으로 서서 정산이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뒷 말이 안나옵니다."

석하랑의 지시하에 각 길드에 파견된 협회의 직원들이 즉시 명령을 받아 빠르게 움직였다.

협회 직원들의 분석에따라 13개 길드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후방은 괴수 소탕을, 그리고 설화공주가 있는 전방은 한강을 넘어갈 준비를 마쳤다.

"예. 그렇게 배치해주시고요, 후방 지원은...."

석하랑은 여의도 공원에 서서 한강 너머를 바라봤다. 모든 다리가 파괴되어 더이상 한강을 통해 서울을 오다닐수 없지만, 석하랑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현 시각 10시 08분. 정확히 10분에 작전을 개시합니다."

석하랑은 알람을 맞추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했다. 머리칼만큼 머릿속도 복잡해졌고, 그 고민의 이유는 그 건방진 금발 남자 때문이었다.

- 망명각 재시고....

"......대체 뭐야, 그 인간."

생각만 해도 절로 짜증이 난다. 깐족거리던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그 남자가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지만, 석하랑은 그의 팀 배치를 후방으로 배치했다.

"여기는 석하랑. 김누리 팀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

[구로로 갔습니다. <청송>과 <메그레즈>의 일부 팀이 호위로 붙었습니다.]

"아, 구로요?"

천방지축으로 날뛸 줄 알았더니 그래도 제 분수는 아는 모양이다. 석하랑은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듯 상쾌한 얼굴로 서서히 체내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10시 09분 57초.

"전군, 도하 준비!"

석하랑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강을 향해 저벅저벅 걸었다. 신발이 한강에 닿는 순간, 과거 마포대교가 있었던 곳에 길고 두꺼운 얼음의 다리가 이어졌다.

58초.

키에에엑! 석하랑의 마력을 읽은 강 아래 괴수들이 뛰쳐나왔다. 히어로들의 석하랑의 뒤를 쫓아 달렸다.

59초. 석하랑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마력을 담아 소리를 질렀다.

"도하!!"

10시 10분. 최전방 히어로들이 한강에 발을 디뎠다.

* * *

"꺄아아아아악!!"

계단위에서 누리의 비명이 들렸다. 넷은 황급히 계단을 두 세칸 씩 뛰어오르며 누리가 비명을 지른 층으로 올랐다.

"누리야!"

시안이 철문을 오른쪽 어깨로 밀었다. 굳게 닫혀있던 문은 아주 손 쉽게 열렸고, 그들은 사무실 안 쪽에 주저앉아 벌벌 떠는 누리를 발견했다.

"아, 아저씨! 이 안에!"

"큿, 젠장!"

혹시 탐지기에 걸리지 않은 괴수일까. 시안은 코트 안에 손을 넣고 탕비실 안으로 달렸다.

"......?"

"아, 시안 씨. 누리 양이 시체를 보고 놀라서 그래요. 사람 시체."

천봄이는 탕비실 안에 벽에 기대 앉은 시체를 가리켰다 . 살점하나 없는 인골은 굶어 죽기라도 한듯 삐쩍 곯아있었다. 시안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커피 믹스 봉지를 집어들었다.

"이거 혹시...."

"네. 탕비실에 갇혀 굶어죽었나봐요."

천봄이는 문을 가리켰다. 가려진 문의 뒤를 살핀 시안은 괴수의 것 같은 손톱자국을 확인했다.

"아하. 탕비실 안에 갇혀서 못 나왔구나."

"아사하기 전까지 이걸로 배를 채웠나봐요. ...불쌍하게도."

천봄이는 합장하듯 기도하며 고인의 넋을 기렸다. 시안은 아직도 긴장한 누리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시선은 마주했다.

"진정해, 김누리."

"아, 아저씨. 저 사람 불쌍해서 어떡해? 여기 갇혀서 죽은 거잖아."

"서울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갇혀버린 이들의 수는 꽤 됩니다. 보다보면 익숙해질 겁니다."

라온이 코를 막으며 탕비실 안에 들어와 시체를 살피고는 고개를 푹 숙여 묵념했다. 시안은 천봄이에게 밖으로 나오라 눈짓했다.

"누리야, 괜찮아. 괜찮아."

"흐아아앙, 서울 난민들 불쌍해서 어떡해? 다들 여기서 이러다 죽었을 거 아냐."

"아사한 정도면 양반이지. 버려진 도시의 난민들은 괴수에게 산채로 잡아먹히거나...."

시안은 뒷말을 아꼈다. 처음 시체를 목격해 정시적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이에게 굳이 그걸 말하는 건 긁어 부스럼이었다.

"...아무튼 이런 시체는 앞으로 자주 볼 거야. 공식적으로 서울에서 행방불명 된 인구는 약 5백만 명이니까."

"...안 되겠어!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수 없어!"

김누리가 바닥을 짚고 일어서 열의를 불태웠다.

"괴수 놈들, 내가 다 조져버릴게! 아저씨! 탐지기 좀 보여줘! 어딨어?!"

"......천봄이 씨, 유준 형님. 누리랑 같이 위층에 있을 괴수 좀 잡아주세요. 유나야, 너는 나랑 같이 시신 수습하자."

"알겠어요."

시안에게서 탐지기를 받은 천봄이가 누리와 하유준을 인솔해 윗층으로 떠났고, 시안은 유나와 라온의 도움을 받아 시신을 사무실 안으로 옮겼다. 시신을 옮기는 라온의 얼굴은 착잡하기 그지 없었다.

"라온 언니...."

"...제가 1차 때 그렇게 쉽게 당하지 않았다면, 혹시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라온은 자책하고 있었다. 꼭 남자를 구하지 못해서 그런게 아니라, 한국의 히어로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 서울에 대한 부채감의 연장선이었다.

칙. 시안이 비품가방에서 소각용 토치를 들었다. 라온이 마력을 살짝 일으켜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시체 주변을 감쌌다.

"좋은 곳 가십시오."

화륵. 붉은 불꽃이 타들어가며 시체를 태웠다. 셋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도하며 원혼의 넋을 기렸다.

"......."

묵념을 마친 시안이 다시 탕비실 안으로 들어가 상태를 살폈다. 밖으로 연결된 창문이 하나 있었고, 그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에 비친 벽에는 수많은 작대기가 그어져 있었다.

"유언이구나."

시안은 시체가 가리고 있던 벽면을 살폈다. 피로 적은 짧은 문장은 일부가 지워져 잘 보이지 않았다.

"기지ㅘ 개ㅐ기...?"

지워졌어도 무슨 의도를 담고 유언을 적었는지 바로 이해했다. 시안은 다시금 고인의 넋을 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시럭.

시안의 발에 빈 커피믹스 봉지가 밟혔다. 시안이 아까 집어들었다 버린 봉지였다.

"......어?"

시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침을 꿀꺽 삼키며 봉지를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콰광! 윗층에서 괴수를 때려잡는 누리의 발놀림이 아래층까지 쿵쿵 울렸다. 잠시 유나와 라온의 양해를 구한 시안은 아주 잠시 탕비실을 요모조모 살피고는 위로 올라갔다.

* * *

오후 1시. 구로의 옛 디지털단지에 자리잡은 일행은 일대의 괴수를 모조리 소탕하고 베이스 캠프로 돌아왔다.

2박 3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기간동안 후방의 이능력자들은 전방에서 배후의 기습을 대비하는 역할을 했다.

"2021년 11월, 제 3차였던가요? 영악한 괴수들이 강을 넘으려던 히어로들의 진지를 야밤에 습격한 적이 있었죠."

스프를 국자로 뜨던 유나가 그릇을 넘기며 설명했다. 누리는 그릇을 받아 플라스틱 스푼으로 스프를 퍼마시며 유나의 말을 경청했다.

"사주경계는 철저했는데, 갑자기 괴수들이 베이스 캠프를 야습한 거예요. 거기서 히어로 셋이 사망한 아주 큰 사건이었죠."

"어떻게 그래?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했나?"

"네. 지하를 이용해서 습격했어요."

유나는 땅 아래를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창백해진 누리에 막 빵을 씹던 시안이 설명을 이었다.

"다리는 다 파괴했어도, 지하도가 남아있잖아. 서울 아래 지하철이 다니듯 괴수들도 지하를 통해서 한강을 넘어오는 거지."

"......그게 가능?"

"육교야 다시 세우면 되지만, 지하는 그게 어렵잖습니까. 여러모로 의견이 많았습니다. 결국 지하는 건드리지 않고 올라오는 족족 죽이기로 했죠. 서울을 부수는 게 아니라 되찾는 게 목적이었으니."

라온의 생생한 증언에 일행이 식사를 하며 귀를 기울였다.

"실제로 꽤 성공적인 작전이었습니다. 승강장 위에서 대기하다 올라오는 괴수를 죽이기만 하면 됐으니까. 결국 괴수들은 지상으로 올라오지 못했습니다."

"그게 2022년에 대격변이 일어나면서, 서울의 지하에 있는 모든 역이 '던전'이 되었어요. 지금 우리가 소탕하는 괴수들은 그 던전에서 밀려나오 '잡졸'들이고요."

"...그게 나보고 지금 지하철로 가지 말라고 하는 이유야?"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봄이가 지도를 살폈다. 일행이 베이스 캠프를 차린 구역은 디지털단지의 북서쪽에 치우친 위치였다.

"이 근방에서 지하철 역이라고 하면 대림역이네요."

"아, 거기도 던전 입구에요. 7호선 쪽 승강장으로 오다니면 던전으로 들어간다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김누리, 행여나 던전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라. 던전 주인 SS급 괴수야."

"잠깐만!"

김누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면 왜 그 던전을 공략 안 하는 건데? 서울수복작전이라며?!"

"......코어가 나오니까요."

유나가 단장의 심정으로 설명했다.

"던전에서 코어가 나오니까, 아무리 서울의 던전이라도 닫지 못하는 거예요. 던전을 공략하는 순간, 지금처럼 무한히 코어가 쏟아지지 않을테니."

"그런 게 어딨어?!"

"뭐, 버려진 땅이니까 던전에서 코어라도 수급하자는 높으신 분들 생각이지. 옛날로 치면 서울은 지금 가만히 두면 마르지 않는 유전이니까. 그리고 설령 이 땅을 공략한다고 해도...."

시안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주변을 가리켰다.

"막말로 던전있던 곳 바로 위에서 살고 싶겠어? 시체들이 즐비했고 재건하는 데 수 십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땅을?"

"......아, 짜증나!"

누리가 다 먹은 그릇을 옆에 살포시 두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저씨! 우리 길드 방침을 정했어! 우리 손으로 서울을 수복하는 거야!"

"누리야!"

유나가 누리를 엄하게 꾸짖었다. 왜 자신에게 화를 내나 놀랐던 누리가 제 말실수를 깨닫고 식은 땀을 흘렸다.

"...길드요?"

하유준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시선은 누리와 시안을 번갈아보기 시작했다. 시안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누리가 자기 길드 들어가도 끝까지 매니저 해달라고 난리라서요. 나 참, 스튜디오는 길드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도 고쳐지질 않네요."

"히어로 양성소라는게 한국에서 흔한 곳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 길드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바로 영입하는게 업계의 상식입니다만, 누리 양은 아무래도 저희를 함께 길드로 데려가고 싶어하는 모양입니다."

시안과 라온이 적당적당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누리를 바보로 만드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제 실수를 자각한 누리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매니저 님은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천봄이가 그릇을 정리하며 눈웃음을 쳤다.

"어쩌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셈이잖아요? 누리 양이 성공적으로 S급으로 성장하면 너도 나도 유망주를 보낼 거예요. '우리 애도 S급으로 만들어주세요!' 하고 말이죠."

"봄이 씨. 그 정도는 아닙니다. 하하."

시안은 머쓱한 얼굴로 너스레를 떨고는 자리를 정리했다. 다른 이들도 식사를 마치고 인스턴트 커피로 목을 축이고 있었다.

"...? 형님, 식후 커피 안 하십니까?"

"......곧 양치할 건데 무슨. 나는 됐어."

한사코 종이컵에 든 커피를 거부하던 하유준은 짐칸으로 가 양치도구를 챙겨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안이 코를 킁킁거리며 피식 웃었다.

"벌써 한 잔 마셨구만. ......?"

시안은 하유준이 떠난 자리를 말없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 * *

반나절이 지났다.

해가 떨어지고 달이 서울의 밤하늘에 드리운 순간, 종로의 괴수를 소탕한 석하랑이 전 부대에 1일차 일과의 종료를 알렸다.

- 오후 9시까지 베이스캠프를 구축해 휴식을 취하고 다음 날을 준비할 것.

그 명령에 따라 시안은 일행을 이끌고 디지털단지의 베이스캠프로 복귀했고, 미리 설치해둔 2인용 텐트 세 개에 각각 2인 1조로 들어갔다.

"나 그냥 노숙하면 안 되냐...?"

"형님 저랑 같이 긴 밤 보내기 싫으세요?"

중간에 하유준이 앙탈을 부리는 순간도 있었지만, 남자는 남자끼리 같은 텐트 아래에서 자기로 되었다.

"유나야, 유나는 라온 씨 좀 챙겨줘."

"네? 아하, 네."

시안은 유나가 라온에게 붙어 멘탈 케어를 해주기를 요청했고, 유나는 아직까지 불안해하는 라온을 토닥여줬다.

"저희 막내 잘 부탁드립니다. 천봄이 씨."

"물론이죠. 잘 부탁해, 누리."

"......."

졸지에 만난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함께 잠을 자게 되자 누리는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천봄이는 특유의 포용력으로 누리와 친해졌다.

"그래서 그 연예인 A씨랑 C씨가 사귀는 관계였는데, 거기서 원래 A씨 전 여자친구인 B씨가 나타나서 C 머리채를 쥐어잡고...."

"대박. 그 언니 그렇게 안 봤는데 한 성깔하네. 드라마에선 허구한날 리트리버처럼 헤실거리며 웃더니 그게 다 연기라고?"

"그래서 배우잖아. 걔가 나한테 눈 어떻게 뜨는 지 아니?"

...전직 급식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 연예계의 비사를 하나 둘 꺼내며 동료들의 치부를 밝혀야했지만, 결국 천봄이는 누리의 마음의 문을 여는데 성공했다.

"흐흐, 봄이 언니도 우리 길드 들어왔으면 좋겠다!"

"...? 뭐, 후후. 알겠어. 그 때는 누리가 나 지켜주는 거야?"

"당연하지. 나 SS급도 될 수 있는 거 모름? 언니 나만 믿어. 내가 캐리해줄게."

"? 어, 으, 응."

그 대화를 끝으로 둘은 깊은 잠에 빠졌다.

* * *

그 날 새벽.

"언니, 불침번 할 시간이야."

잠에서 깨어난 누리는 베시시 웃으며 천봄이의 침낭을 건드렸다. 하지만 침낭을 누른 손이 푹 꺼저버렸고, 그 형이상학적인 감각에 누리는 잠이 달아났다.

"어, 언니?!"

새벽 2시 9분. 천봄이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