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86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2권 003
처음 석하랑과 마주 앉았던 순간, 시안은 '살면서 이런 미인과 독대를 할 기회가 얼마나 있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 한 점 묻지 않은 순백이 내려앉은듯한 머리칼. 연회색 눈동자 속 얼음결정이 박힌 것 같은 문양. 한국계 같지 않은 서구적인 이목구비. 립스틱을 바르지 않았음에도 선명한 심홍색 입술.
시안은 삭막한 사무실 안에 홀로 이질적인 색채를 가진 설화공주, 석하랑에 대한 세간의 평에 격한 공감을 느꼈다.
'생김새는 SS라더니 진짜 예쁘긴 예쁘네.'
물론 그 말 속에는 '성장 한계치 값을 못하는 만년 S급'이라는 질시가 담겨있었지만, 시안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궁금한 것은 한 가지. 왜 이런 거물이 이 스튜디오를 찾아왔는가.
"무슨 용무로 오셨나요?"
시안은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상대 또한 서론으로 사담을 늘어놓을 생각이 없는지, 석하랑은 자세를 다소곳이 하며 입술을 떼었다.
"김누리를 놓아주세요."
"거절합니다."
"......."
"......."
공기가 차가워졌다. 시안은 또 히터가 고장났나싶어 스위치를 확인했다가 유리창에 서리가 생긴걸 보았다. 시안이 얼어붙은 유리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무능력자입니다. 이렇게 마력으로 위협하시면 됩니까?"
"다짜고짜 거절하시니까 그러죠."
"다짜고짜 오셔서 누리를 놓아달라고 하시니까 그러죠."
"혹시 저 싫어하세요?"
"아니요."
시안은 볼을 긁적거리며 제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나 되돌아봤다. 하지만 아무리 돌이켜봐도 평소처럼 이야기했다. 점점 차가워지는 석하랑의 표정에 시안은 미리 끓여놓은 커피를 내어놓았다.
"일단 서론으로 돌아갈까요?"
"그러죠."
석하랑은 커피에 손도 대지 않고 즉답했다. 무안해진 시안은 제 몫의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석하랑을 환대했다.
"어려운 발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오라클 스튜디오 한국 지사의 매니저, 시안.w.히비스커스 입니다."
"한국 히어로, 석하랑이에요."
서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어색함과 불편함에 숨이 턱턱 막혔다.
"그, 예정보다 일찍 오셨네요."
"밤 늦게 또 일정이 생겨서 불가피하게 지금 방문했습니다. 그건 죄송해요."
일찍와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게 어불성설이었지만, 석하랑은 사무실 구석 한 켠에 놓인 컵라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 젓가락 들지도 못한 이미 컵라면은 불어터지고 식어버린지 오래였다.
"아. 컵라면은 괜찮습니다. 커피로 배 채우면 됩니다."
시안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석하랑은 그게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느껴 더 당황했다.
"그럼 아까는 왜 화내신 건데요?"
"네? 화 안 냈는데요."
"화 내셨잖아요. 딱 잘라서 안된다고 하시고."
"그거야 안 되니까 그런 거죠."
"왜 안 되는데?"
석하랑이 짜증을 부리다가 헛기침을 하며 황급히 말을 이었다.
"요."
"...석하랑 씨. 올해 나이가 26? 00년생이시죠?"
"갑자기 나이 얘기는 왜 해요?"
"저도 00년생이거든요. 12월 25일생."
시안이 2개월 정도 생일이 늦기는 하지만 둘은 나이가 같았다. 석하랑은 눈살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지금 나이 얘기가 왜 나와요? 말 놓으시겠다거나 그런 말 하려고 하시나요?"
"아뇨? 전혀요. 당신이 김누리를 내놓으라는 말을 두고 현실을 직시하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어요."
"......내놓으라고는 안 했어요. 놓아달라고 했지. 근데 그게 제 나이랑 무슨 관계가 있어요?"
"그게 그 말 아닌가. 김누리 놓아주면 바로 당신이 낚아채려고 하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요? 광검이 와서 제자로 들이겠다면 연륜이 있으니까 이해하겠지만."
본심을 들켜서일까, 무표정을 고수하던 석하랑의 얼굴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누리가 제자로 키우기에 상당히 탐나는 인재라는 건 저도 인정해요."
시안은 느긋한 자세로 여유를 부렸다.
"누리가 어쩌면 한국 최초로 SS가 될지 모르는 인재기는 하죠. 그래서 언제든 누구 하나는 와서 이런 식으로 어깃장을 놓을 거라고는 생각했어요. 자기들이 더 잘 키울 수 있을 거라면서. 그게 당신이 될 줄을 몰랐지만."
"......알면 제게 김누리 양을 맡기시지 그러세요?"
"당신의 무얼 믿고? SS도 되지 못한 양반이 누리를 SS로 만들 수 있다고?"
파지직. 유리창에 낀 서리에 쩍쩍 금이가기 시작했다. 시안은 비록 무능력자이나, 말에 뼈를 담아 석하랑을 찔렀다.
"그럼 그쪽은요?"
결국 석하랑은 적반하장 식으로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어떤 방식으로 김누리 양을 성장시키겠다는 거죠? 이해할만한 내용이면 순순히 물러갈게요."
"뭐? 파하, 이보세요."
마력까지 동원해 압박하는 모양새에 시안도 불쾌감을 드러내며, 주머니에 손을 넣고 일어나 허리를 ㄱ자로 숙여 석하랑을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했다.
"이거 완전 날강도네? 남의 영업비밀을 아주 하나부터 열까지 까발리라고 온 겁니까? 저 CCTV 녹화하고 있거든요? 소리도 녹음됩니다. 이거 완전 국제 문제로 고소 가능한 문제입니다?"
"......나중에 미국으로 데려갈 수도 있잖아요. 당신이."
"그건 누리 양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저는 누리 양 한 명으로 끝낼 생각은 없어요. 누리 양은 첫 시작일 뿐입니다. 단지 첫 스타트인 누리 양의 재능이 너무 뛰어나서 이목이 쏠렸을 뿐입니다. 막말로-"
"당신이 누리 양과 만난 일화는 익히 들었어요."
석하랑이 시안의 말을 끊으며, 그가 기자와 나누었던 인터뷰 내용을 언급했다.
- 무능력자인 김누리가 술 취한 노숙자의 습격을 받을 뻔 했던 걸 시안이 구해준 것을 계기로 서로 알게되었고, 제 각성 여부에 대해 긴가민가하던 누리를 시안이 제 돈으로 재검 비용을 치뤄 김누리의 잠재력을 알게 되었다.
그게 시안이 누리와 합의하에 벌인 대국민 사기극이었다. 시안은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공식적으로 말했습니다. S급까지는 제가 전적으로 지원하고, 그 뒤는 누리의 선택을 전적으로 지지하겠다고. 길드나 협회 입장에서는 좋은 거 아닙니까? 외국인이 자국민 인재 자기 돈으로 육성해준다던데."
시안이 두 팔을 벌리며 고개를 옆으로 살짝 꺾었다. 석하랑은 그게 썩 거만하다고 느꼈다.
"...좋아요. 그러면 제가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근거를 제시해주세요."
"아니 정 까발리고 싶으면 그쪽도 다 까보시-"
팟. 시안의 눈앞에 스크린이 떠올랐다. 하던 말조차 멈추고 스크린 속 글을 읽어내려가는 시안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실적.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납득할만한 실적을 제시해주세요. 그러면 저도 순순히 물러날게요."
"......."
시안은 침묵을 고수하며 석하랑이 슬슬 시안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알아요. 저도. 무례하고 민폐인 거. 하지만 그만큼 당신이 믿을만한 사람인지 판단할 근거가 필요해요. 진짜 오랜만에 나온 S급이라 그만큼 세간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요. 잠재력 A급인 인재들이 벌써 중국이나 일본에서 빼간게 무려 50명 가까이 되는데...."
"'서울수복작전'이 뭡니까?"
시안은 스크린을 가리키며 물었다. 석하랑은 잠시 멍한 얼굴로 시안을 바라보다가 눈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이 나라에, 신서울에 와서 어떻게 서울수복작전을 모를 수 있어요? 거의 매 분기마다 있었는데."
"......? 아, 아!"
시안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손뼉을 치며 얼굴을 폈다.
"그 이름만 거창한 작전! 실상은 되찾기는 커녕 서울에 있는 괴수들 남하하기 전에 주기적으로 히어로들 동원해서 처리하고 온다는 그 잡초제거 작업 말씀하시는 거죠?"
"뭐?"
쩌적. 유리창에 붙었던 서리에 금이 갔다. 감정조절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석하랑은 지금 몹시 분노하고 있었다.
"이봐요! 지금 남의 나라 일이라고 말을 막하는데-"
"망명각 재시는 분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
석하랑은 화를 내던 얼굴 그대로 굳어버렸다. 몹시 당황한 석하랑의 표정에 시안은 제가 더 당황했다.
"뭐야. 진짜로? 그냥 찔러본 건데 진짜 그럴 의도로 온 거였어요?"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제가 무슨 망명같은 짓을...."
"그럼 왜 굳이 다른 사람도 대동 안하고 혼자 오셨을까? 개인적으로."
얼음처럼 굳은 석하랑에게 시안이 손가락을 세 개 들었다.
"아무리 S급 히어로라고 할지라도 동행인이나 수행원 없이 혼자 왔다는 점. 기존에 예정된 시각보다 훨씬 일찍왔다는 점. 그리고 부산에서 꼼짝도 않던 사람이 굳이 신서울까지 올라와서 나를 찾아왔다는 점."
손가락을 세 개 전부 내린 시안이 석하랑의 눈을 뚫어져라 처다봤다.
"망명은 사실 좀 오버하기는 했지만, 의도는 비슷하잖아요. 우리 스튜디오에 들어와서 '합법적'으로 외국으로 다닐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거죠. 김누리는 사실 핑곗거리에 불과하고, 사실은 당신이 우리 스튜디오를 통해 SS급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석하랑이 아무말고 못하자, 시안은 신이 나서 더 추궁을 이어나갔다.
"전직 원탁인 오라클이 대주주로 있겠다, 혹시 다른 원탁을 만날 기회가 생길 수 있겠죠. 당신은 그걸 위해 우리를 테스트하기 위한 실적을 요구하는 거죠. 흐흐, 정곡이 찔리셨나?"
"......하아."
길게 추궁을 마친 시안에 석하랑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아닌데요."
"......"
"하, 짜증나. 시간만 버렸네."
시안은 쥐구멍을 찾고 싶었다.
* * *
<다음날 오전 9시 50분. 시안의 사무실.>
"꼴값 오졌죠. 지가 뭔데 나를 내놓니 뭐니 이래라 저래라야? 나라에서 떠받들어주니까 아주 지가 상전이야, 상전."
"물속성인 꼴값은 수꼴이라고 해야하나?"
"아저씨. 내가 그냥 입에 붙어서 아저씨라고 하는데 진짜 농담도 아저씨처럼 하지마. 아, 생각해보니 또 열받네! 지가 뭔데 나를 물건취급해?! 아저씨는 왜 거기서 그냥 멍청하게 듣고만 있었냐고! 아아악!"
누리는 책상위에 놓인 설화공주의 잡지 사진을 반으로 찢어버리며 화를 풀었다. 1층에서 커피를 가져온 라온이 해탈한 듯한 시안에게 커피를 주며 물었다. 시안은 이미 석하랑이 한 입도 대지 않은 차가운 커피를 마신지 오래였다.
"정말로 그런 의도로 왔다고 합니까? 외국인이라서 못 믿겠으니 누리 양을 내놓으라고? 그리고 본인이 육성하겠다?"
"본인은 그렇게 말했어."
시안은 탐탁찮은 얼굴로 벽면에 설치해둔 대형 TV를 노려보고 있었다. 뉴스를 틀어놓은 듯 TV에는 두 패널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고, 곧 일어날 회견의 내용에 대해 예상과 분석을 내놓고 있었다.
- 설화공주가 부산에서 올라온 이유는 작전의 참가에....
- 그럼 이번 작전의 총책임자는 설화공주라는....
- 부산의 빈 전력은 어떻게...
"소문이 사실이었네요."
주변에 쭉 펼쳐놓은 스크린에서 정보를 취합한 유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셋의 이목이 유나에게 쏠리자, 유나는 히어로 아카데미의 커리큘럼을 띄우며 설명했다.
"아카데미 2학년은 3월 초부터 실습을 가요. 옛 수도, 서울의 남쪽 곳곳에 거점을 잡고 괴수를 소탕하는 작업을 펼쳐요."
"말그대로 현장실습이네. 근데 학부생들만 가면 안 되나?"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라온이 제 심장을 가리켰다. 유나가 잠시 침묵했다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D급이 기준이 된 이유도 그런 이유죠. 지금이야 학부생들이 갈만한 곳이지만, 예전에는 진짜 편의점마다 괴수가 터를 잡은 마경이었으니까요."
"그걸 아카데미 후보생들 동원해서 소탕한다고? 허허."
시안을 헛웃음을 지었다. 유나가 정리한 자료들을 살피던 시안은 눈에 띄는 부분을 확인하고는 아예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뭐야. 길드에서는 등급 단위로 무조건 동원?"
"예. 길드에서는 작전에 동원되어야 할 필수 인원을 차출해야 하기 때문에,아카데미 학부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실습생을 받으면 인원수를 충당할 수 있거든요."
"그럼 아카데미 후보생은 깍두기 아냐?"
"맞습니다."
라온이 말을 거들었다.
"예비군 동원 할당량에 사관학교에서 실습나온 학생을 끼워넣는 식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천군에 있을 때 어르신들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길드에서 후보생 눈에 불을 켜고 영입하는 이유가 있었네."
시안은 유나가 찾아서 정리한 '서울수복작전 히어로 아카데미 후보생의 연계와 활용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집어들었다.
"이름도 기네. 논문인가?"
"원래 500페이지에요. 학부생일 때 정리 좀 했어요."
유나는 핫초코를 마시며 마지막 문단을 가리켰다. 간략하게 정리된 내용에 시안이 소리내어 유나의 요약 정리를 읽었다.
"초심자인 후보생을 베테랑인 길드원과 매칭시켜 실습을 통해 얻는 것. 후보생, 실제 전투 경험과 베테랑 선배들의 조언. 길드, 작전 동원 필수 할당량 충족과 코어 수급, 유망주 발굴."
"그러니까 쪼렙들 데리고 다니면서 쩔해준다는 거 아님?"
설화공주의 찢어진 잡지 사진을 쓰레기통에 처박은 누리가 설명을 듣고는 제멋대로 요약했다. 대번에 이해한 시안이 누리를 향해 감탄의 박수를 보냈다.
"역시 누가 급식 아니랄까봐 그 마저도 줄여버리네."
"졸업했거든요? 이제 급식 아니거든요?"
"네 다음 고졸."
"삐에에에에에ㅔㄱ!!!"
발광하며 달려드는 누리를 적당히 제압한 시안이 서서히 변하는 TV속 상황에 시계를 슬쩍 확인했다. 단상이 마련되고, 기자들은 하나 둘 숨을 죽이기 시작한다. 곧 옆에서 단정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나타나 마이크를 잡았다.
10시 2분.
"이제 시작하네. 원래 10시라더니."
"발표 지연되는 건 기본 소양이죠. 시작합니다."
[지금부터 제 13차 서울수복작전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넷의 이목이 TV로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