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883화 (883/1,497)

EP.883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1권 외전 '발렌타인 데이'

2월 13일 오전 9시. '팀 데스디나스'가 성공적으로 D급 고블린 던전을 공략하고 난 다음 날.

시안은 홀로 사무실 책상에 앉아 멍하니 던전을 공략했던 영상들을 차근차근 살펴나갔다.

"흠."

손이 절로 턱 아래를 쓸어내린다. 고블린들을 하나 둘 정리해나가며 보스방에 닿기 직전까지, 네 이능력자의 움직임은 거칠게 없었다.

"역시 원딜이 뒤에서 든든히 받쳐주니까 안심하고 나설 수 있구나."

시안은 영상의 중간을 다시 재생했다.

라온이 옆구리에서 튀어나온 고블린의 독단검에 미처 반응을 못해 놀랐지만, 고블린이 슈트 사이의 피부를 찌르기 전에 이미 가온이 쏜 물의 화살이 고블린의 손을 꿰뚫었다. 라온은 곧장 고블린을 걷어차 코어를 적출했다.

그 뒤의 누리도 마찬가지. 가온은 철저하게 라온과 누리, 두 근접 이능력자를 보호하는 식으로 화살을 쏘았다.

던전이라 남 눈치를 더이상 보지 않게 된 A급이 전면에 나서면 혼자서도 공략 가능해지니, 전위의 D급과 C급 두 명이 경험을 쌓고 싶다고 말했다.

어쨌든 던전 공략은 성공. 차원문이 발생하는 위험은 없었고, 팀은 무사히 던전을 공략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만 가면 되겠다. 좋네."

시안은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여러모로 아직 부족한 것은 많지만, 그래도 첫 삽은 어떻게든 제대로 뜰 수 있었다.

남은 것은 길드 심사를 넣는 것. 시안은 느긋한 손길로 커피잔을 들어올렸다.

"그래서 너 언제 미국 돌아갈 거냐."

"내 맘인데."

소파에 누운 연회색 머리의 소년, 오라클은 낄낄거리며 홀로그램 스크린을 두드리고 있었다. 도대체 뭘 하는가 싶어 시안이 가까이 다가가니, 오라클은 슬쩍 몸을 돌리며 화면을 가렸다.

"어허. 프라이버시 위반."

"너랑 나 사이에 무슨. 뭔데, 무슨 일이야? 또 누구 결혼시키려고?"

"...엉. 내가 지금 재미있는 썸을 발견해서."

오라클은 스크린위를 손으로 잡고 쓱 내렸다. 눈앞에 고착화된 마력이 흩어지고, 마도기어의 배터리가 아주 약간 줄어들었다. 시안은 흥미가 식었다는 듯 벽에 놓아둔 집기들을 정리했다.

"스포일러 미리 알면 재미없지. 대신 기사 뜨면 알려줘."

"......."

멍청한 놈. 오라클은 혹시나 들을까봐 속으로만 말을 하고는 시안을 향해 혀를 찼다. 오라클이 가져온 제 마도구를 정리하던 시안은 막 공구를 옮기다 혼잣말로 빈정거렸다.

"우리 애들이 일만 안 생겼어도 너 여기서 쫓아내는데."

"뭐? 크흐, 크크크."

오라클은 시안의 뒤에다 중지를 날리며 비웃었다.

'너희 팀원들 오늘 절대로 안 돌아온다.'

내가 그렇게 만들거거든. 오라클은 다시 스크린을 띄워 자신이 적은 글을 확인하고는 음흉한 얼굴로 웃었다. 시안은 오라클을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그대로 사무실 문으로 향했다.

"야. 나 나간다."

"뭐? 외투도 안 입고 어디?"

"나? 밑에. 카페에."

시안은 미리 받아놓은 카페의 앞치마를 앞에 두르며 말했다.

"누리랑 가온이가 갑자기 펑크를 내서 내가 대신 이틀 뛰기로 했거든. 오랜만에 빵 좀 굽겠네. 아니다, 케이크도 좀 만들까? 후안 사장님도 초콜릿 엄청 받으셨던데. 너 온 기념으로 마카롱도 좀 구워줄게. 사장님한테 허락받으면."

"......."

* * *

[혹시 지금 당신, 사랑을 하고 계십니까?]

근 몇 달만에 새롭게 업데이트 된 오라클의 SNS, 'Love Manager'에 새로운 글이 올라왔다. 한국에 방문해서 그런지 특별히 한국어로 따로 글을 쓴 것에, 뭇 많은 연예지에서 오라클의 SNS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 누군가가 당신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어 주던가요? 인생의 막장이라고 생각한 순간, 누군가 당신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던가요? 모든게 짜증나고 싫증난 때, 누군가 당신의 짜증을 전부 받아주고 즐겁게 해주던 가요?]

평소와는 다르게 제법 장문으로 쓰는 오라클의 글에 한국의 가십계가 뒤덮였다.

오라클이 이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군가 썸을 타고 있다'는 신호나 다름없었고, 온갖 연예지에서는 그간 오라클이 만나 온 연예인, 유명인사, 셀럽들을 시간 별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보답을 한 번 해보심이 어떻습니까? 내일은 발렌타인 데이. 의리와 우정이라는 포장 아래 달콤한 사랑을 담아, 직접 만든 초콜릿을 선물하는 건 어떻습니까?]

오라클의 동선은 제법 길었다. 한국에 있던 지인의 병문안을 제외하면 극장가, 히어로 협회, 외교부, 이능력자 양성소 등 마주친 사람의 수만 수 백명에 이르렀다.

그 중에 약 두 명은 확실하게 썸을 타고 있다. 오라클이 나서서 하는 사랑의 코칭은 한번도 빗나간 적이 없고, 그의 SNS 덕분에 맺어진 연예인 또는 이능력자 부부의 수만 수 백에 이르렀다.

[저런. 하지만 이번 난이도는 몹시 쉬우면서도 어려울 것 같군요. 호감을 얻을 수는 있어도 사랑은 내어주지 않는 아주 어려운 상대입니다. 이능력자라면 차라리 단독으로 S급 던전을 공략함이 어떠실지?]

놀리는 걸까. 하지만 난이도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의 사랑도 깊다는 걸 의미했다. 오라클은 항상 상대가 주는 사랑의 난이도와 그 사랑을 던전과 그에 따른 보상으로 비유하고는 했다.

[벌써부터 다른 경쟁자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군요. 혹시 자신이 한발짝 앞서 있다고 착각하십니까? 이미 다른 사람은 던전의 보스방 앞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니 지체하지 마십시오. 당신에게는 아직 하루의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날짜는 2월 13일. 그리고 다음 날은 2월 14일.

[뭐합니까, 당장 부엌으로 가서 초콜릿을 만들지 않고. 설마 성의도 없이 편의점에서 1+1초콜릿을 사서 의리라며 줄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죠? 그건 손만 잡아도 손주 손녀 이름까지 생각하는 금사빠들이나 먹히는 겁니다.]

몇몇 이들이 스크롤을 내리다가 흠칫거렸다. 편의점에서 초콜릿을 잡았던 손들이 하나 둘 내려갔다.

[최소한 그거 녹여서 새로 형태라도 만드세요. 그리고 절대 이상한 거 넣지 마세요. 맛, 형태, 포장. 그 세가지가 삼위일체를 이루어서야만이 진정한 정성이 되는 겁ㄴ]

급하게 문장이 끝난 오라클은 추후 한 문장을 덧붙이는 걸로 글을 마쳤다.

[아니다. 만들지 마요, 그냥. 어차피 안 될게 뻔한데 그 돈으로 치킨이나 혼자 사드세요.]

그 날, 초콜릿 회사의 매출이 그래프 천장을 뚫었다. 초콜릿을 사러 오는 이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분노로 붉어져 있었다는 목격자의 진술이 잇달았다.

* * *

"딸, 혹시 스타트업이 초콜릿 회사니?"

유나의 어머니는 부엌에 수북히 쌓인 초콜릿의 무덤에 기가 다 질렸다.

공부할 때나 히어로 아카데미에 들어갈 때나, 항상 유나는 자신이 무언가 열의를 가지고 할 때는 확실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중학교 졸업 까지도 성적이 바닥을 쳤던 과거, 마도공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신서울대학 마도공학 차석을 따낸 유나의 전적을 믿기에, 유나의 어머니는 유나가 히어로 아카데미를 나온다고 했을 때도 전적으로 믿었다.

그런데 지금 그 의지가 초콜릿을 향해 빛나고 있다. 유나의 어머니는 걱정이 눈앞을 가렸다.

"그런 건 아니야. 이번에 알게된 분들이랑 사무실 열 건데, 내가 대표를 하게 됐거든."

"......응?"

"이능력자 양성을 위해 모인 프로젝트 팀 같은 건데, 그분들을 위해서 초콜릿 좀 선물로 주려고."

"유, 유나야. 그건-"

아무리 스타트업 기업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성향이 짙다고는 해도, 유나가 대표를 맡는 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도, 돈은? 아무리 아빠가 뭘하든 금전적으로 도와준다고 했어도 네 아빠 성격 알잖아."

"알지. 돈 빌려달라고 말하면 당장 사업계획서부터 내놓으라고 으름장 놓을 걸?"

유나는 초콜릿을 조각내며 잘게 자르며 싱글벙글 웃었다.

"괜찮아. 나는 몸만 가면 되거든."

"너 어디가서 말조심부터 해야겠다. 듣는 사람 오해하게-"

쾅! 유나의 식칼이 도마 위를 내리찍었다. 두꺼운 초콜릿이 일격에 두동강이 났다.

"미안. 잘 안 잘려서. 이 회사 초콜릿은 못 쓰겠네. 어디야, 유성?"

유나는 포장지를 보고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유성에서 만든 초콜릿을 모조리 치워버렸다. 아예 쓰레기통에 버리려는 기세에 유나의 어머니는 아까워져서 주전부리 겸 챙겨 부엌을 빠져나왔다.

"뭔지는 몰라도 애가 단단히 꽂히긴 한 것 같은데."

설마 사랑은 아니겠지. 유나의 어머니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초콜릿을 중탕하는 유나의 뒷모습을 보며 시름을 앓았다.

* * *

"아, 존나 어렵네 싯팔!"

누리는 볼을 바닥에 집어던지며 짜증을 부렸다. 플라스틱 볼에 담긴 초콜릿은 끈적하기는 커녕 물에 초코파우더를 뿌린듯 흥건했다.

"아까보다는 나아졌습니다."

라온은 지친 얼굴로 볼을 집어 싱크대에 부었다. 이미 싱크대의 거름망은 갈색 초코 가루가 덕지덕지 늘어져 있었다.

"이걸로 아홉번째입니다. 지금이라도 백화점 가서 하나 사거나 평범하게 만드는 게?"

"언니! 오라클이 직접 만드는 게 낫다고 하잖아! 유나 언니도 분명 수제 초콜릿으로 만들어 올 거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초콜릿에 마력을 넣는다는 생각은 아무도 안 할 겁니다."

간혹 초콜릿에 이상한 것을 넣어 선물로 주는 이들이 있다고 썰로 듣기는 했다. 하지만 초콜릿에 제 마력을 넣어 선물로 주겠다는 누리의 기상천외한 생각에 라온은 혀를 내두르면서도 말리지 못했다.

"잘 보십시오, 누리 양."

라온은 검지를 들고는 단전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쥐꼬리만한 마력이 뼈를 타고 흘렀고, 마력은 손가락 끝에서 아주 작은 녹색의 구슬을 만들어냈다.

"마력을 체외에 방출해 형태를 고착화하는 아주 좋은 훈련방법입니다. 마력 운용에 아주 도움이 되어 길드에서도 . ...누리 양은 지금 초콜릿에 넣겠다고 그걸 홀로 깨우친겁니다."

"뭐? 진짜? 나 님 개쩌네. 흐흐흐."

기상천외한 발상과 천부적인 재능이 결합한 행동이 널리 알려진 훈련 방법을 본능적으로 깨우쳤다. 그 발상의 동기는 불순하기 짝이 없었으나, 라온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다만.

"마력을 너무 많이 방출하는 겁니다. 초콜릿이 형태를 잡기 전에 이미 안에서 수속성 마력이 터져서 물처럼 되는 겁니다. 집중하고, 아주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리십시오."

"하아, 어렵네. 언니, 언니는 어떻게 한 거야?"

"저 말입니까? 일단 드셔보시면 압니다."

라온은 이미 초콜릿을 만들고 포장까지 마쳤다. 시식을 위해 따로 꺼내뒀다 남은 라온의 초콜릿을 입안에 넣은 누리는 초콜릿을 깨물며 터진 상쾌함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대박."

"풍속성의 마력으로 향기를 가둔 다음, 그 위에 초콜릿을 씌운 겁니다. 입으로 터뜨릴 수 있는 아주 얇은 막이죠."

"역시 전직 A급."

마력의 양은 제한되어있으나, 마력을 세심하게 컨트롤하는 정밀함은 가온조차도 라온을 이길 수 없었다. 누리는 입안에 터진 박하향에 상쾌함을 느끼며 다시 초콜릿을 중탕하기 시작했다.

"좋아, 오늘내로 하나 꼭 만든다!"

"옆에서 돕겠습니다."

결국 그들은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간신히 계획한 하나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 * *

<2025년 2월 14일 오전 11시, 시안의 사무실.>

세 여자는 제 앞에 놓인 초콜릿 무스 케이크를 보며 침묵했다. 유명 제과점에서 주문한 케이크가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케이크는 예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맨 아랫층에 다크 초콜릿, 그 위에 화이트 초콜릿, 그리고 그 위에 녹차 파우더를 섞은 듯한 녹색 초콜릿이 겹겹이 쌓여 층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3층 초콜릿을 덮는 연갈색 젤라틴 코팅 위에 하얀 꽃잎 다섯 개가 올려져 있다.

감히 포크로 건드리기조차 아까운 디자인에 셋은 제 품마다 숨겨둔 상자나 주머니를 절로 숨겨야 했다. 라온이 케이크 조각을 가리키며 물었다.

"시안. 이건?"

"어제 사장님 일손 돕다가 시간 남아서 하나 만들었어. 마침 사장님한테 재료가 다 있더라고."

시안은 볼을 긁적이며 쑥쓰러운 미소를 지었다. 시안의 말에 셋은 침음성을 흘렸다.

"그럼 이건 아저씨가...?"

"어. 너희가 어제랑 오늘 안 된다고 해서 내가 대신 알바뛰고 있잖아. 너 없다고 하니까 사람들 다 빠져나가서 한산해지더라고."

시안은 앞치마를 팡팡 두드리며 웃고는 사무실 밖으로 향했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안 바쁘면 사장님한테 양해 구하고 잠깐 올라올 거니까. 아, 그리고...."

시안이 팔을 걷으며 자부심이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사장님이 메뉴에 올릴까 물으시더라. 먹어보고 평가 좀 해줘."

"......."

셋은 아무 말 없이 포크를 들었다.

으적.

달콤쌉싸름한게 맛있어서 더 열받았다.

1장 외전. <발렌타인 데이> ~시안의 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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