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80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1권 027
신서울 종합병원.
협회에 의해 특별히 마련된 병실에 들어간 부모를 바라보는 누리의 표정은 착잡하기 그지 없었다.
잘못을 따지자면 그들이 잘못한게 맞다. 누리가 졸업식 날 길드 문제에 관하여,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생각해보겠다' 말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는 곧장 오월의 유혹에 홀려버렸다. 물론 그게 괴인의 술수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결과는 이렇게 되어버렸다.
"......."
옆에 있던 가온은 죄인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사코 불안감을 주장하던 누리를 무시했던 건 가온이고, 만약 시안이 누리를 믿어주지 않았다면 그들의 부모는 지금쯤 괴인의 하수인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비록 가온이 괴인 하나를 소멸시켰다 할지라도, 마음의 죄책감은 쉽게 떨치지 못했다.
"나, 길드 나올 거야."
가온이 간신히 입을 열었고, 누리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부모님이 위험에 빠진 것도 모르고, 거기에 지키지도 못하는 애가 무슨 원탁 히어로를 지망한다고 그러겠어. 그냥 엄빠 옆에서 있을래."
"언니 에스콰이어 길드라며? 한 번 나오면 못 들어가잖아."
"어쩔 수 없잖니. 너나 나나 둘 중에 한 명은 두분 병간호를 해야하는데."
가온은 자포자기한 얼굴로 웃었다. 손이 부족한 경우에는 사람을 부르기야 하겠지만, 가온은 죄책감 때문이라도 부모의 병간호를 자기가 하고자 했다. 누리는 그런 가온을 슬며시 보다가 대답했다.
"알겠어."
"......."
가온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예전이라면 '왜 그러느냐', '미친 거 아니냐'하고 따졌을 동생의 단언이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마치 전혀 관계없는 타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 마냥, 누리의 목소리는 가라앉아있었다.
"언니도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겠지. 협회에서 1년동안은 병원비 지원해준다고 하니까 당장은 괜찮을 거야."
"...나도 모아둔 돈 있어."
"에스콰이어 길드 인턴십이라 거의 무급인 거 뻔히 아는데 무슨."
둘은 동시에 한숨을 푹 내뱉었다. 현대의 로또라고 불리는 이능력은 각성했지만, 누리 가족에게는 항상 금전적으로 힘이 들었다.
그 원인은 대부분 부모의 무리한 투자와 실패의 반복이었지만, 그로 인한 채무는 이제 고스란히 두 자매가 떠앉게 되었다.
"누리 양."
복도 끝에서 팔에 붕대를 감은 라온이 다가왔다. 시안이 차를 험하게 몰면서 두 부부를 지키기 위해 무리를 하게 되었고, 벽에 부딪힌 충격으로 잠시 붓기가 빠질 때까지 깁스를 해야했다. 누리가 라온을 반기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죄송합니다. 의료진도 별다른 해결책이 없었습니다."
혼수상태에 빠진 두 부부를 두고 의료진은 현대 의학으로는 내리기 힘든 결론을 내렸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갔다'는 듯 말했습니다. 협회에서도 최대한 이유를 알아보겠다고 했습니다만...."
"사실상 식물인간 상태라 이거네. 원인불명의 이유로."
누리는 자조하며 등을 돌렸다. 저멀리 차단문 너머로 기웃거리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와 절로 짜증이 났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특별병동의 복도까지 발을 들이밀어 누리를 영입하거나 인터뷰를 하려는 정신나간 자는 없었다. 누리는 의료진들만 오다니는 조용한 곳에서 숨을 골랐다.
"괜찮아. 내가 어떻게든 돈 벌어볼게."
"......어떻게?"
가온은 고개를 들었다. 항상 저보다 우월하고 재능 넘치던 언니가 무너질 것 같은 얼굴로 울고 있었다. 누리는 주먹을 불끈 쥐며 라온을 가리켰다.
"이 언니랑 같이 길드 들어갈 거야. 아저씨 길드."
"뭐? ...시안 님?"
"님? ...그래. 그 아저씨 길드. 아저씨가 나한테 수백억 벌어주게 하겠다고 단언했거든. 그러니까...."
누리는 제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자신감을 보였다.
"나만 믿어, 언니. SS급 돼서 던전이든 빌런이든 다 때려잡은 다음에, 우리 엄빠 이렇게 만든 괴인놈들 배후를 아주 제대로 후려쳐줄테니까."
"......응, 알았어."
가온은 담담히 누리의 말을 받아들였다.
"난 언니가 차라리 다른 길드 들어가라고 할 줄 알았는데."
"...너 그 분이 누군지 몰라?"
"아저씨가 아저씨지. 뭐 정체는 좀 숨기려하는 것 같다만...."
누리는 눈썹을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오라클이 유나 언니만큼 병실 지킨 거 봐서는 대충 감이 오던데."
정체를 확신하는 듯한 누리의 말에 가온이 주변을 훑고는 사색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리야, 그거 절대 말하면 안 된-"
"오라클 이거 아님?"
누리는 새끼손가락만 펼친 채 흔들었다. 라온이 얼굴을 붉히고, 가온은 기가막힌 얼굴로 굳어버렸다. 회심의 드립이 먹혀들지 않자, 예상외의 반응에 무안해진 누리는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너, 너무 분위기 다운되어 있어서 농담한 거야. 그러니까 이제는 기운 좀 차리자고. 응? 설마 아저씨가 오라클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겠어? ...라온 언니는 왜 좋아하는데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크흠."
"하, 하하. 나 참.... 너란 인간은...."
누리가 농담으로 누그러뜨린 분위기에 가온의 눈에 약간이나마 활기를 띠었다. 누리는 입꼬리를 활짝 들어올리며 애써 웃었다.
"그래야지. 웃어. 엄빠 일어나면 언제든지 웃으면서 반길 수 있게."
"그래. 돈 걱정은 하지마. 언니 그래도 모아둔 돈 조금이라도 있어."
"알겠어. 그래도 너무 무리는 하지마. 내가 지금은 C급이라도...."
누리는 병상을 바라보며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아저씨네 길드에서 SS급 돼서 우리 가족 돈 걱정 없게 만든다. 걱정마, 이 길드의 에이스는 나야."
* * *
<오전 11시, 시안의 사무실>
-라는 각오를 하기도 잠시.
누리의 계획은 초장부터 어그러졌다.
"그래서 이제는 길드장이 유나 언니다? 지금 아저씨 나랑 장난해?"
"...이건 납득할 수 없습니다."
누리는 왠지 모르게 억울해졌다. 라온도 이해를 하기 어려워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시안은 오른손으로 커피를 마셨고, 왼손은 왼쪽에 앉은 유나의 손등을 꾹 잡고 있었다. 라온과 누리는 그게 더 약이 올랐다.
"자, 잠깐만. 일단 들어봐."
시안이 오른손으로 손사레를 치며 변명했다.
"장난하는 건 아니고, 이번 <오월> 사태 때문에 외국인이 길드를 만드는 건 사실상 어려워졌잖아. 원래 플랜도 사실상 이루기 힘들었고."
"그건 맞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라온은 유나를 보며 뒷말을 삼켰다. 유나는 그 시선을 눈치채고 곧장 변명했다.
"이름만 올려두는 거예요. 실제로 길드장님은 당연히 이쪽."
"<오월>이 했던 거랑 다를 게 없지. 유나가 길드장으로 나서는게 제일 낫기도 하고. 공식적으로는 유나 아래에 다같이 모여서 길드가 만들어지는 거야. 공식적으로는. 그리고 뭣보다 나중에 뒷감당도 훨씬 수월할 테고."
"나중?"
시안은 유나의 허락을 받고 다른 둘에게 유나의 검사 결과를 보였다.
"소개합니다, 우리 길드의 여신님입니다."
"제발 부탁이니까 그것 좀 안 하시면 안 될까요...."
인간을 벗어난 압도적인 수치에 라온과 누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유나 양,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히어로 아카데미 낙제생 21살 이유나. 우리 길드의 유일신이자 여신. 그냥 그렇게 생각해. 나도 유나가 어떻게 이런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으니까."
"네.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라온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사기. 개에반데, 이거. 올백? 거기어 광속성 101? 이거 검사 조작 아님?"
"안 믿기면 너도 다시 재검해볼래?"
"아저씨 검사기 내놔봐. 언니가 이렇다면 나는 분명 암속성 1000-"
삑. 누리의 검사 결과가 나왔고, 다를 건 없었다. 누리는 제 검사지에 찍힌 암속성 친화율 94라는 수치가 왜이렇게 초라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누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유나에게 물었다.
"언니 솔직히 말해. 인생 2회차지?"
"...그랬으면 1년 허송세월 보냈겠니?"
"그건 그렇긴 한데...아, 왜! 그런 거 있잖아! 내가 무릎을 꿇은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격한 누리의 반응에 라온이 손을 올리며 제지했다.
"누리 양, 이왕이면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로 정정합시다."
"...으아아! 억울하다아아아!"
누리는 소파에 앉아 아둥바둥거리며 신경질을 부렸다. 라온은 뜨뜻 미지근한 눈빛으로 누리에게 동정을 보내다가 다른 둘에게 변명했다.
"여기 오기 전에 자기가 이 길드의 에이스라고 자랑하고 왔었습니다."
"언니!"
라온의 실토에 누리가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유나는 누리의 질투에 시선을 피했고, 시안은 누리를 진정시키며 애써 위로를 보냈다.
"어, 음. 누리야. 암속성 S급이 전 세계에 100명 될까말까 하거든? 암속성 SS급은 열 명 밖에 없고. 너도 전세계에서 손에 꼽을 잠재력의-"
"지금 60억 분의 1을 앞에 두고 내가 콧대 세우면 완전 병신 되는 거 아냐?"
적나라한 누리의 지적에 유나가 더 부끄러워졌고, 라온은 누리의 말에 격한 공감을 하며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셈이죠."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누리는 머리를 양손으로 쥐어뜯다가 시안을 노려봤다.
"아저씨, 무슨 신기있어? 나도 그렇고 유나 언니도 그렇고, 어떻게 만나는 사람마다 각성시키고 다녀?"
"그런건 아니고, 그냥 인재를 보는 눈이 좋다고 하자. 이게 내 몇 안 되는 재능이거든."
시안은 제 눈동자를 가리켰다.
"왜 스포츠 감독들 보면 사람 보는 눈이 어쩌고 저쩌고 하잖아? 나도 마찬가지야. 단지 그게 '이능력자'들을 상대로 조금 더 특화되어 있을 뿐. 물론 그냥 감에 의존하는 거라 나도 이런 정확한 데이터 없이는 섣불리 판단 못 해."
시안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검사기를 가리켰다.
"그래서 내가 발굴한 김누리 양에게 부탁을 한 가지 하고 싶은데, 혹시 나랑 같이 길드 들어갈 생각 있어?"
"길드는 유나 언니 길드고?"
"당연하지."
시안의 말에 누리는 천장을 향해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약속대로 돈은 벌게 해주는 거다. 아저씨가 다 책임져야 해."
"물론. ...그런데 생각보다 쿨하게 들어온다? 고맙기야 하지만."
"당연한 거 아냐? 아저씨가 내 인생 2막을 열게 만들어줬는데."
누리는 커피를 마시며 목을 축였다.
"아저씨 아니었으면 올해는 인생 나락으로 떨어졌을 걸? 정기 재검 전까지 개막장으로 살다가 인생 종칠 수도 있었잖아."
"누리야, 그건-"
"말이 그렇다는 거야. 말이."
누리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그 바람에 엄빠가 저 상황이 된 건 마음이 아프지만, 그렇다고 아저씨가 그걸 신경쓸 이유는 없어. 아저씨는 어떻게든 엄빠 도와주려고 했잖아? 정 마음이 신경쓰이면 이렇게 해."
누리는 허리를 꼿꼿이 세워 반듯한 자세로 시안과 시선을 마주했다.
"나 김누리가 SS급 딜러로 각성할 수 있도록 도와줘. 그리고 돈도 왕창 벌게 해주고. ...가능?"
"...당연히 가능하지. 환영한다. 우리 길드에 온 걸."
시안은 누리를 향해 왼손을 뻗었고, 누리는 마찬가지로 왼손을 뻗어 시안과 악수를 했다. 유나는 손뼉을 치며 누리의 가입을 반겼다. 라온이 잠시 깁스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누리 양이 초기 멤버로 등록된 길드가 제대로 심사에서 통과 될까요?"
"그건 문제 없어요. 절차상의 문제가 없는 이상 그건 시간의 문제였으니까."
유나는 자신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2월 안에 제가 길드에 가입되어야 했기에 시간적으로 쫓겼던 거지, 이제는 저도 마음을 굳혔어요. 저...."
유나가 시안의 무릎을 잡으며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아카데미 때려치고 시안 님 길드의 길드장이 될 거예요. 퇴학당하라지."
"와, 이 언니 진짜...."
누리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도 S급 잠재력을 믿고 막나가기로 했지만, 유나는 저보다 더한 막무가내였다. 라온은 수긍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알겠습니다. 그 정도 각오라면 저도 이해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유나 길드장님."
"...고마워요. 그럼 이제 길드 만들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아뇨. 아직 문제가 많습니다."
라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으로 넷을 각각 가리켰다.
"저는 조건을 충족하니 괜찮다 치고, 누리 양이야 본인이 선택했다고 강짜를 부리면 얼버무릴 수 있겠죠. 하지만 시안, 유나 양을 진짜 전면에 내세우실 겁니까? 누리보다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아니. 유나는 우리 조커 카드야. 이제 막 자각했으니 성장하려면 한참 남기도 했고. 다들 비밀로 해줘. 그래서 한 명을 더 뽑아야하는데...."
"그럼 됐네. 방금 실업한 이능력자 한 명 더 있어."
누리는 마도기어를 두드렸다.
"이름만 올리면 되는 거잖아? 언니 이름 좀 빌리자."
"...가온 씨 에스콰이어 길드잖아. 암만 그래도 쉽게-"
"엄빠 병간호한다고 때려친다고 하네. 이제 내가 언니도 먹여 살려야 함. 아저씨, 우리 언니도 좀 책임져 줄래? 아. 이제는 언니한테 허락 받아야 하는 거임?"
"......저는 좋습니다."
지금까지 시안이 했던 고뇌가 무색하게, 상황은 아주 간결히 해결되었다.
길드장 이유나.
예비 길드원 박라온, 김누리, 김가온.
그리고 스카우터이자 물주이자 자금원이자 사무실 임대인이자 커피 심부름꾼인 시안.
그들은 길드 등록 조건의 최소 조건 중 하나를 만족했다.
남은 건 던전 공략의 실적 뿐. 김가온이 합류한 이상 그마저도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인원 수의 문제가 해결되니 이제는 사실상 길드 등록만 남긴 상황. 시안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럼 새 길드 이름은 뭐로 하지?"
길드장, 길드원 2명, 그리고 잡역부의 격한 토론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