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874화 (874/1,497)

EP.874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1권 021

<잠시 뒤.>

"아저씨는 나한테 고마워해야 돼요. 내가 진짜 안오려고 하다가 여기 온 건데."

"......정말 고맙다, 누리야. 몸둘바를 모르겠어. 진심이야."

시안은 무릎을 꿇은 상태로 누리와 마주했다. 슬슬 다리가 저려왔지만 극한의 인내심으로 참았다.

"저, 저기."

시안이 다른 둘에게 은근슬쩍 구조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둘은 가차없이 외면했다.

"길드장님은 반성을 좀 하셔야 해요."

"원래 입은 화를 부르는 근원이라 했습니다. 업보이니 달게 받으십시오."

"......억울해."

나는 그저 진실을 말했을뿐인데. 시안이 울상을 짓는 동안, 누리는 1층에서 가져온 종이가방을 테이블 위로 들어올렸다.

"짜잔. 이게 뭘까요?"

"...'Padre Juan'? 사장님네 카페잖아."

시안의 말에 누리가 큭큭 웃으며 가방 안의 물건을 꺼냈다. 누리의 손에는 곱게 비닐로 포장된 갈색 앞치마와 베레모 스타일의 조리모가 들어있었다.

"후후. 새 알바 자리를 구했죠."

"......너 설마?"

누리가 비닐을 뜯어 곧장 앞치마를 둘렀다. 앞주머니에는 후안의 카페 이름이 멋드러진 디자인으로 박혀있었다.

"이야, 사장님 경륜이 진짜 대단하시더라고요. 그 야밤에 이런 아이디어를 내시고."

"그, 그러니까."

시안은 말을 더듬었다. 누리가 쯧쯧 혀를 차며 제 앞치마 주머니를 가리켰다.

"대외적으로는 1층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걸로 할 거예요. 그럼 저 보러 오는 사람들 카페에서 자리 잡고 기다릴테니 사장님 매출도 오르겠죠? 제가 1층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동안, 아저씨는 아무 이능력자나 잡아오시면 돼요."

"1층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던전 갈 때만 몰래 슥 빠지겠다?"

"그런 거죠."

엉성하기 짝이 없는 작전에 시안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시안의 눈빛에 누리가 코웃음을 쳤다.

"왜요. 안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조력자도 있습니다!"

누리가 마도기어를 두드렸다. 곧 1층 커피메이커 앞에 서있던 후안의 얼굴이 떠올랐고, 후안은 슬쩍 스크린을 앞으로 비췄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그곳에는 누리와 똑같은 헤어스타일로 변신한 가온이 숙취에 절어있는 얼굴로 테이블에 커피를 올리고 있었다. 후안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매가 참 닮아서 다행이야. 키도 그렇고.]

"사장님?"

[흠흠. 아무것도 아닐세.]

"아무튼 언니랑 저랑 번갈아가면서 아르바이트 할 거예요. 제가 던전을 가는 동안, 언니가 1층에서 저인척 연기를 하는 거죠."

시안은 꽤나 진심으로 당황했다.

"가온 씨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작전에 동참한 거야?"

"......그냥 땡깡 좀 부렸어요."

"땡깡?"

"아빠가 아저씨한테 잘못한 거 가지고 내가 엄청 뭐라했거든요. 언니도 한국에 잠깐 있는 동안 나 도와준다고 했고. 대신 2월까지만 하기로 했어요. 흐흐흐."

누리는 머리카락을 베베 꼬며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유나는 뭔가 그 미소가 비밀을 숨기려는 것 같아 이상했지만, 굳이 그걸 지적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본인이 숨기길 바라는 눈치였으므로.

"그럼 '2월까지'라는 건...."

"네. 길드로 등록 안 되면 부모님이 아는 길드 소개해주기로 했어요. 애초에 협회에서 컨택 금지 기간을 지정한게 2월 말까지니까, 공교롭게 시기가 맞아들어갔죠."

"협회가 많이 봐줬군."

"아저씨 얘기는 안 하고, 수능 끝난 고3이라고 어필하니까 잘 먹혀들더라고요."

유나와 라온은 누리의 기책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 어떤 누구도 수능이 끝난 고3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누리의 수능 성적표는 비둘기 우는 소리가 들릴지라도, 이제 졸업까지 한 누리에게는 거리낄 게 없었다.

"졸지에 2월 안에 승부를 보게 생겼네."

시안은 아직도 무릎을 꿇은 채 고뇌에 빠졌다. 유나의 아카데미 잔류를 위해서도, 누리의 영입을 위해서도 길드는 무조건 27일까지는 등록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천안을 가기에는 무리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누리의 언니분이 연막작전을 펼친다해도, 천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이들이 수두룩할 겁니다."

"다른 D급 던전들은 대부분 신서울 근처고요. 천안도 일부러 가장 먼 곳으로 정했던 거잖아요."

"너무 유명인사가 되어버렸군. 으으."

시안이 원망어린 눈으로 누리를 노려봤다. 누리는 다리를 꼬며 옆머리를 손으로 쳐날렸다.

"유명해서 죄송! 쿠흐흐."

"...됐다. 네가 말을 말자. 그럼 지금 사실상 던전 공략은 길이 막힌거라고 봐야하겠지?"

"네. 서울까지 올라가서 C급 던전을 공략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분명 누군가는 누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을겁니다."

라온의 말에 누리가 식겁하며 자세를 바로했다.

"어, 어떻게?! 분명 협회에서 컨택 금지 기간이라고 했을텐데?"

"그건 공식적으로 그런 거지. 뒤에서는 분명 감시하고 있을 걸? 막말로...."

시안이 1층을 가리켰다.

"카페에 앉아있는 손님들 중에 정말 커피 마시러 온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적어도 협회에서 파견된 감시 요원은 한 둘은 있을 걸?"

"그, 그럼 내 작전은 망한 거 아니야?"

"그럴 리는-"

"걱정마십시오, 누리 양."

라온이 따뜻한 미소로 누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리 양은 언니분과 체형이 큰 차이가 없는 바, 제 생각에는 분명 완벽한 위장이 될 것으로-"

"언니 진짜 나빴다."

영혼없는 투덜거림에 라온이 큰 상처를 입었다. 시안은 자신이 할법한 말을 먼저 해버린 라온을 보고는 내뱉으려던 말을 황급히 철회했다.

"...어제 너희 집에서 얘기했다시피 네 언니도 상당한 이능력자야. 진심으로 연막을 펼치면 충분히 속아넘기겠지. 좋아. 그러면 이렇게 하자."

시안이 손뼉을 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길드를 만드는 조건은 기본적으로 '공적'이야. 헌터 길드라면 던전 공략이나 괴수 사냥의 공적을, 히어로 길드라면 구호 활동이나 빌런 체포의 전화를 쌓아야 하는 거지."

시안은 손가락을 두개 편 상태에서 유나에게 물었다.

"너 길드 가입 조건이 무조건 히어로 길드인건 아니지? 헌터 길드여도 되는 거였지?"

"네. 어느쪽이든 길드만 가입하면 돼요."

"그럼 이렇게 하자."

시안은 팀원들의 앞에 스크린 두 개를 띄웠다. 스크린에는 '던전 공략'과 '빌런 체포'라는 문구만 적혀있었다.

"어느 쪽이든 위험하기는 할 거야. 기적적으로 D급 던전을 발견하지 않는 이상, 위험을 감수하고 C급 던전을 공략하거나 그에 준하는 빌런을 체포해야겠지."

시안이 목이 마른 듯 커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커피로 목을 축인 시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주말 동안 내가 계획을 좀 짤게. 현재 전력으로 안전하게 공략 가능한 곳이 어디가 있을지. 그러니까 누리 너는 오늘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님이랑 쉬어. 아니면 밑에 가온 씨랑 교대를 해주거나."

"그럼 아저씨는 여기서 계속 지낼 거야?"

"사무실에서 그냥 자고 일어나면 돈을 아끼기야 하겠는데...."

시안이 라온과 유나를 흘깃 눈으로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집부터 구해야지."

일행은 해산했다.

* * *

<2월 7일 밤 11시, 시안의 사무실.>

언제까지 라온을 사무실에 재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시안과 라온이 사무실에서 함께 잠을 잘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라온은 유나의 강력한 의견 피력 덕분에 당분간 유나의 집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그럼 그냥 나랑 라온이가 같이 집을 구하면 되지 않을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쓰리룸이라도 구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시안은 사무실 소파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같은 지붕 아래에서만 잘 뿐 서로 다른 방에서 잠을 잘텐데, 도대체 뭐가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 걸까 싶었다.

"내가 너무 미국물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쉐어룸같은 느낌으로 지내면 괜찮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라온은 남자와 함께 지내는 것보다 역시 동성인 유나의 집에 얹혀 살기가 더 마음이 편했나보다. 시안은 고요한 사무실에서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가만히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못 있겠네."

시안은 누운 상태로 마도기어를 조작했다. 어둠 속에서 아주 약한 밝기의 스크린이 허공에 나타났다.

"사실상 신서울 근방은 공략 못 한다고 봐야겠지?"

누리를 포함한 던전 공략이라면 모를까, 이미 누리에게는 비밀리에 보호 요원이 붙었을 것이다.

"그럼 누리를 제외하고 라온이랑 유나 둘이서 공략을 해?"

그들이 이전에 들어갔던 D급 고블린 던전 공략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또다시 차원문 같은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역시 이유나 때문일까."

반 년에 하나 나타날까말까한 차원문.

그것도 D급 던전에 'SS급 마수'인 광마룡(光魔龍)의 등장.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짧았던 차원문 파괴의 골든 타임.

정황은 100% 확신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데이터가 없으면 시안도 섣불리 단언하기에는 어려웠다.

"이 새끼는 언제 내 검사기 보내주는 거야?"

시안은 오라클과의 메세지 목록을 다시 확인했다. 최근들어 바쁜 모양인지 전화를 하기에는 어려웠고, 오라클은 그저 '빠른 시일 내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역시 안전빵은 필드에 있는 괴수인데."

시스템에 의해 엿을 먹거나 어줍잖은 전력으로 빌런을 체포한다고 날뛰느니, 차라리 산골에 숨어든 괴수를 사냥하는 편이 훨씬 안정적이었다.

야외인 이상 시안의 총은 사용 불가. 괜히 걸릴 수 있으니 누리도 전력으로서 열외. 결국 라온과 유나 둘이서 잡을만한 괴수가 어디 있을까 고민하며 자료를 찾던 시안은 눈을 번뜩이며 몸을 일으켰다.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사무실에는 음흉한 음모를 꾸미는 청년의 웃음 소리만 가득했다.

* * *

<다음 날 오후 12시, 시안의 사무실.>

"그래서 임시 팀원으로 나를 고용하시겠다?"

가온은 카페 아르바이트생 차림으로 자신이 들고온 음료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시안은 밤새 정리해둔 괴수 공략 계획을 읊었다.

"가온 씨의 대외적인 이능력은 B급 수속성 이능력자죠. 물의 활을 사용하는 이능력자. 외국계 길드로 알려져있기에 운신의 폭도 누리보다는 훨씬 넓고요."

"길드 등록 조건은 3인 이상의 D급 던전 공략인 걸 잊었어? 저도 다른 길드에 등록되어있어서 안 돼. 세상 어디 호락호락한 줄 알아?"

전날의 대작 이후, 가온은 저보다 네 살은 더 많은 시안을 상대로 편히 말을 놓았다. 시안은 가온을 설득해야하는 입장에서 여전히 존대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찾아봤어요. 던전 공략 말고 다른 방법이 없을까. 역시 있더라고요."

시안은 밤을 새며 찾은 헌터 협회의 등록 메뉴얼을 가리키며 웃었다. 수 천 페이지에 달하는 메뉴얼 중 깨알같은 문구를 발견한 시안의 노력에 가온은 박수를 보냈다.

"'C급 필드 괴수 토벌'? 아하, 시스템이 인지 못하는 데미지 지분을 이용해서 막공장을 돌리시려고?"

"이런 계획이죠. 잘 들어봐요."

시안이 몸을 낮추며 검지를 들었다.

"동생이 걱정된 언니가 동생을 데리고 다니면서 경험을 쌓게 하고, 마침 지나가다가 나타난 배회 괴수를 토벌하는 거죠. 우리 팀의 라온, 누리. 그리고 가온 씨까지 셋이 배회 괴수를 공략한 전공을 내세워서 협회에 심사를 받는 겁니다."

"안 될 거야. 아마."

가온은 혀를 차며 시안의 계획을 비웃었다.

"협회에서 잘도 누리가 초기 멤버인 길드 창설을 받아주려 하겠다. 당신 여기 몰라도 너무 모른다. 심사 무조건 반려야."

"왜요? 조건은 다 갖추었지 않습니까?"

"시간을 질질 끌겠지. 심사에 차질이 생겨 차일피일 미루면서 어떻게든 3월을 넘길 거야. 그러면 어이쿠, 컨택 금지 풀리네? 그러고 협회에서도 여론을 흘리잖아? 왠 이상한 금발 양아치가 이 나라의 보배 김누리를 빼가려 하네? 그 새끼 누구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거지."

"하, 젠장."

시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여러모로 뒤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이유로 신경을 썼더니 머리가 아파왔다.

"어떻게든 2월 전에는 길드 만들어야하는데 어떻게 방법 없겠습니까?"

"글쎄? 후후. 어디 용병이라도 구해보는 건 어때? 은퇴한 히어로나 헌터 명함값만 빌려서 길드 등록 시켜버리면 되잖아."

"그게 어디 말처럼 쉽-"

시안의 숨이 멎었다. 커피를 마시던 손을 멈추고 가온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던 시안이 커피잔을 탕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김가온 씨."

"뭐, 뭐야."

가온은 제 위에 드리운 그림자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A급 이능력자가 무능력자에게 겁을 먹었다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그만큼 시안은 박력이 넘쳤다.

툭. 시안이 가온의 어깨 위 소파를 짚으며 시선을 맞췄다. 가온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당신, 제가 돈으로 살게요."

짝.

마력이 실린 손바닥이 시안의 뺨을 때렸다. 시안이 억울함에 소리를 질렀다.

"용병 말이에요, 용병!"

"알고 그런거야. 그러니까...."

가온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몸에서 흘러나온 푸른 마력이 주먹 끝에 맺혔다.

"남 오해할만한 말은 하지마, 이 변태 새끼야."

바닥에 우당탕 넘어진 시안은 얼얼한 뺨에 손을 올린 채 그저 억울해 할 수 밖에 없었다. 가온은 허리에 손을 올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뭐? 용병으로 나를 사? 참 나. 야. 어제 네가 클럽에서 처먹은 술값만 오십-"

"전세금 2억으로 가온 씨와 가족분들 고용할게요."

"개처럼 부려주십시오, 고용주 님."

가온은 싱글벙글 웃으며 시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안은 그 손을 맞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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