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73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1권 020
<2월 7일 오전 10시 30분, 신서울 여자고등학교.>
살면서 이렇게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은 적이 있던가. 김누리는 사방팔방에서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에 몸이 절로 으스스 떨렸다.
"...제 3기 졸업생 대표, 김누리 앞으로."
졸업생의 좌석 정중앙에 앉아있던 누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리는 이름이 호명되어 단상 위로 걸어가는 그 십 몇초 동안 속으로 온갖 생각이 다들었다.
'수능 만점자나 신서울대학 입학자를 두고 내가 졸업생 대표라니.'
이름조차 모를 지방 전문대조차 떨어진 자신이 그들을 누르고 졸업생 대표가 되었다는게 어이가 없었다.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졸업성 대표를 빼앗긴 아이가 자신을 선망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뚜벅. 누리는 단상의 앞에 섰다. 머리가 벗겨진 교장은 누리보다 긴장한 얼굴로 덕담과 졸업 증서를 건넸다. 누리는 슬쩍 단상 구석에서 촬영중인 카메라를 흘기며 표정을 관리했다.
'이게 뭐라고 전국에 생중계를 해.'
절로 부끄러워졌지만 누리는 내색하지 않고 교장이 내민 선언문을 받았다. 원래 신서울대학 입학 학생을 대상으로 만들어졌던 것을 급하게 수정하는 바람에 군데군데 어색한 문장이 즐비했지만, '높으신 분'에 의해 여러 명의 검수를 거친 명문이 탄생했다.
누리는 기계적으로 그 선언문을 낭독했다.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영웅으로서 다짐합니다. 졸업생 대표, 김누리."
와아아아아--!! 여고생의 졸업식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남정네들의 환호가 울렸다.
김누리! 김누리! 김누리!
강당 2층 응원석을 가득 메운 이들은 졸업생들의 가족이 아니라, 대부분이 길드에서 나온 스카우터나 그에 준하는 담당자들이었다. 심지어 그중에는 한국내 최고 길드라고 평가받는 길드의 히어로도 있었다. 오죽하면 협회에서 통제를 위하 요원을 파견해야 했을 정도로, 누리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
누리는 슬쩍 강당을 살폈다. 익숙하면서도 눈에 띄어야 할 금발 머리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누, 누리 학생? 무슨 문제라도...?"
"아. 죄송해요."
누리는 허탈한 미소와 함께 허리를 숙였다.
졸업식이 끝난 뒤, 졸업생들은 전부 교사와 협회의 파견 요원들의 인도에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졸업생이 앉아있던 의자는 곧장 온갖 길드에서 온 히어로, 헌터, 협회 등 이능력자들로 가득찼다.
올 것이 왔구나. 누리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어느새 정리된 단상 위에 떡하니 놓인 의자에 앉았다. 협회의 진행 요원들은 빛처럼 단상을 졸업식에서 기자회견장으로 탈바꿈시켰고, 누리의 앞에는 테이블용 마이크가 자리잡았다.
찰칵 찰칵. 카메라 플래시 터지는 소리에 누리는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협회에서 대표로 파견된 이가 마이크를 잡고 흥분한 이들을 진정시켰다.
"집중. 집중."
눈에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창백한 인상의 남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신경질적인 남자의 목소리에도 좌중은 함께 온 일행과 잡담을 주고받았다. 남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오랜만의 S급이고 SS급까지 오를 수 있는 인재라 흥분한 건 아는데, 좀 나한테 집중하세요. 자꾸 그러면 김누리 양이 아조씨들이 무서워서 컨택 꺼려할 수 있어요. 특히 거기 3번째 줄 앉아있는 선글라스. 너네 어디에서 왔냐, <월담>이냐? 너네 대장 S급 되면 어디 이름 좉같이 지어줘?"
남자의 말에 좌중은 클래식 공연장에 온 것 처럼 고요해졌다. 분위기를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누리에게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리도 맞장구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지금부터 이능력자 김누리 양에 대한 협회의 공식 인터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 *
Q : 대한민국 최초 암속성 S급이 된 소감은?
김누리(20세, 이하 김) : 사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요. 제가 각성한 마력은 누구나 다 각성하는 수속성 마력이고, 지금 능력치는 겨우 C급 하위 수준이니까요. 어쩌면 평생 암속성 마력을 각성하지 못하면, 전 그냥 평범한 이능력자에 불과하죠. 그러니 아직 저를 S급 이능력자라고 부르는 건 이르다 생각합니다.
Q : 어쩌다 재검을 할 생각을 하게 되었나요?
김 : 막막해서요. 방학은 끝나고 대학도 다 떨어져서 앞길이 막막하던 차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딱 해보자고 마음먹고 질렀죠. 기적이었어요.
Q : 학교에 나오지 않고 어디서 무얼 하셨나요?
김 : 학교 결석한 사흘 동안 집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과연 SS급에 오를 수 있을까. 도중에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을까. 당장은 조심스럽고 불안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왕 제 재능을 깨닫게 된 거 한 번 제대로 도전해보려고요. 네. 저 헌터든 히어로든 까짓거 한 번 해보려고 합니다.
Q : 그러면 바로 길드에 가입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
김 : 아, 당장 어느 길드에 들어가겠다는 건 아녜요. 저 수능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성적도 개판이라 '재수'하기로 부모님이랑 이야기했었거든요. 이능력자 각성 테스트 하기 전부터 대학은 가기로 약속했던 부분이라 재수는 꼭 할 거예요.
Q : 일부 대학이나 아카데미 관계자에서 특례입학을 검토하고 있다고 하던데
김 : 몇몇 분들이 기사에서 신서울대학이나 히어로 아카데미 특례입학 말씀하시던데, 저는 그런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곳은 진짜 노력하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지, 저같이 하늘에서 로또맞은...죄송합니다. 운 좋은 아이가 덜컥 들어가면 형평성에 맞지 않잖아요.
Q : 그럼 앞으로의 계획은?
김 : 그래서 남은 2월 한 달 동안은 집에서 좀 뒹굴려고요. 미래에 대한 생각도 좀 해보고, 어느 길드가 좋을지 저도 개인적으로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러다가 암속성 마력 각성하면 바로 얘기해드릴테니까, 너무 걱정마세요. 사실 방학 때 하던 아르바이트 계약이 2월 마지막까지 남아있거든요. 그래서 계약 날짜 채워야 해요.
Q : 마지막으로 국민 여러분께 한 말씀
김 : 국민분들께 까지요? 어, 음. 이미 전국에 얼굴팔려서 저 찾으려고 하실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는건데요, 저 찾아오지 마세요. 집 근처에 배회하시거나 아르바이트 하는 곳 찾으려고 오시는 분들 있으면 바로 협회에 스토커로 신고할 거니까.
김누리(20세, 일반인)는 2월 마지막까지 일상을 영위하며 영웅으로 태어날 준비를 하겠다는 당당한 포부를 밝혔다. 3월이 새학기의 시작인 만큼, 김누리 양도 히어로로서 새로운 시작을 하겠다는 다짐에 많은 길드 관계자들이 환호했다.
아울러 협회에서는 김누리 양의 자택 인근과 아르바이트 장소 근처를 특별 단속하기로 결정하였다. 기간은 2월 말일까지이며, 이 전에 김누리 양에게 컨택을 취하거나 영입을 제안하는 길드는 협회가 직권으로 해산시킨다는 강수를 두었다.
* * *
<오후 1시, 시안의 사무실.>
"그럼 이제 누리는 어떻게 되는 거죠?"
"본인 선택에 달렸지."
시안은 불어터진 자장면을 어떻게든 입에 꾸역꾸역 넣었다. 졸업식에는 중국집이라는 이유로 점심 메뉴는 중식으로 정했지만, 저도 모르게 주문한 누리 몫의 자장면은 결국 시안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역시 점심은 가족이랑 먹으려나?"
"생방송은 이제 멈췄지만 SNS에서는 아직 난리입니다."
누리네 가족은 고등학교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평범한 중식당을 예약했지만, 누리를 따라온 기자들과 온갖 인파로 식당이 붐벼 결국 자리를 뜰 수 밖에 없었다. 시안이 단무지를 삼키고는 휴지로 입술을 닦았다.
"연예인 다됐네."
"헌터든 이능력자든 등급 높은 사람은 다 셀럽인 걸요. S급 이상의 이능력자면 누구나 동경하죠. 빌런 중에도 팬이 있는 사람도 있어요. <괴도 저지>라고."
"괴도...뭐?"
"괴도 저지(괴도 Judge). 타인을 수탈하는 악인의 재산을 훔쳐 정의로운 심판을 내린다는 빌런입니다. 워낙 신출귀몰해서 원탁도 잡는데 애를 먹는다는 악당이죠. S급 빌런입니다."
시안이 그릇을 전부 비우고는 한 곳에 쌓았다. 유나가 1층에서 빌려온 신문지를 펼쳐 하나로 뭉쳤다. 둘은 그릇을 신문지로 감싸며 정리했다.
"별 희안한 녀석도 다 있네. 아무튼 누리 얘기를 마저 하자면 말야."
시안이 창문을 열어 환기를 했다. 2층에서 내려다보는 사무실 근처는 평소 보지 못했던 이들이 제법 많았다. 아래에 있던 이들과 눈이 마주친 시안은 눈썹을 찌푸리며 짜증을 부렸다.
"우리도 지금 일났어."
시안은 신경질적으로 창문을 반쯤 닫았다. 냄새 때문에 환기는 해야했지만, 바깥에 있는 이들 때문에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쾅쾅쾅!
밖에서 거센 노크소리가 들렸다. 시안은 머리를 쥐어 뜯었다.
"젠장...."
"계십니까! 저 예전에 면접 보러 왔던 <워커 비> 최주훈이라고 합니다!"
"설마 그 때 누리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인터뷰에서 누리가 언급한 아르바이트. 2월까지 생각할 시간을 벌겠다고 말한 변명일테지만, 그로 인해 졸지에 사무실이 습격당하게 생겼다.
지난 1월 한 달 사이 사무실을 방문했던 이들은 귀신같이 사무보조로 커피를 내어놓던 누리의 얼굴을 떠올렸고, 그들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끼이익. 시안이 라온에게 눈짓을 하고는 문을 열었다. 아주 살짝.
"무슨 일입니까."
"저, 저를 이 길드에 받아주십시오!"
최주훈은 막무가내로 사무실에 발을 들이밀려했다. 시안이 그 앞을 가로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길드 때려쳤습니다. 아무도 모집이 안 돼서 업종 바꿨어요."
"예?"
"아마 김누리 씨를 찾아오신 것 같은데, 김누리 씨와는 좋게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새로 사무보조를 구했거든요."
막 커피를 들고 움직이던 라온이 문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최주훈의 표정에 실망감이 스쳤다.
"그, 그러면 지금 어디로 갔는지-"
"글쎄요. 저도 모르죠. 막말로 SS급 이능력자가 옆에 있는 지도 모르고 사무보조로 쓰던 멍청이인데요. 하하하."
시안은 자책하며 최주훈을 밀어냈다.
"김누리 양과 계약이 끝난 건 1월 말입니다. 마지막에 누리 양이 알바 끝내면서 천안 쪽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했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쪽에서 뭔가 일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천안? 제, 젠장! 벌써 다른 길드에서-"
최주훈은 인사도 없이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시안은 한숨을 내쉬며 문을 닫고는 걸어잠궜다.
"유나야. 벌써 몇 번째지?"
"여섯 번째요."
"공고도 급히 내렸는데 어떻게 알고 오는 걸까."
시안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유나와 라온은 시안이 올린 공고가 약 한 달 동안 온갖 커뮤니티에서 '노답_신규길드의_가족같은_공고.jpg'라는 우스갯거리로 돌아다녔다는 것은 비밀로 하기로 했다. 커피를 다시 냉장고에 넣은 라온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시안. 정말로 누리를 포기해도 괜찮겠습니까?"
"포기라니. 우리가 지금 설득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누리가 배신이라도 하는 순간-"
"'배신'은 아니지."
시안이 라온의 말을 끊으며 단언했다.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고 자장면 그릇을 향해 걸어가며 말하는 태도에 라온의 눈이 격하게 흔들렸다.
"난 그저 남들보다 일찍 누리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 뿐이야. 본인이 그런 선택을 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럼 시안. 만약 누리보다 더 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도 포기하실 겁니까? 지금처럼?"
"하아."
시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나는 어째선지 바닥을 향해 있는 시안의 시선이 제 발치에 머무는 것 같아 오한이 들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할 지."
시안은 머리를 테이블 위에 놔둔 그릇을 들어올리며 입꼬리를 내렸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여기다가 묶어두고 싶은데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겠니. 내가 유성같은 대기업 상대로 자금이 많은 것도 아니고, 고작 남들보다 한 달 정도 커피만 사다 준 것 말고는 특별히 해준 게 없는데."
시안이 툴툴거리며 철문을 열었다. 신문지에 쌓인 그릇을 복도에 놓은 시안은 몸을 으스스 떨었다.
"누리는 가족이 있잖아. 누리랑 그 언니 성격 봐서는 부모님도 한 성격 하시겠더라. 아무래도 가족 의견을 제일 잘 따르겠지. 나보다는 가족이랑 훨씬 더 가까울테니까. 안 그래?"
"시, 시안."
라온이 당황한 얼굴로 뒤를 가리켰다. 그러나 시안은 눈을 질끈 감으며 기지개를 켜는 바람에 그 신호를 눈치채지 못했다.
"막말로 내가 누리 우리 길드에 들이려면 걔네 가족부터 설득해야하는데 그게 쉽겠어?"
"그러면 김누리가 원한다면 무조건 가입시킬 생각이야?"
"당연하지. 그러면 애걸복걸하면서 무릎도 꿇는다. 진짜-"
시안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대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아저씨, 여전히 입방정이 심하네. 히히."
누리는 1층 카페에서 테이크아웃 한 음료박스를 들며 웃었다.
"일단 말이야."
누리가 발로 시안을 안으로 밀고 철문을 잠궜다. 누리는 도도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며 검지를 아래로 내렸다.
"꿇어봐."
시안의 무릎은 몹시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