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872화 (872/1,497)

EP.872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1권 019

<2월 7일 새벽 1시, US 클럽.>

"절대 사적인 의도로 이런 곳에 온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마세요."

"이해합니다."

시안은 밀폐된 공간을 좌우로 훑었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에 가온은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이런 곳 와본 적 없어요?"

"네."

진짜일까. 가온은 시안의 말이 그닥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테이블 위의 메뉴판을 펼친 시안이 압도적인 가격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비싸네요."

"신서울 물가가 조금 높기는 하죠."

"아마 전세계에서 2등이었죠?"

"네. 영국 여왕폐하가 살고 계신 '카멜롯' 다음으로 가장 물가가 살인적인 동네죠. 신경쓰지마요. 오늘은 제가 사는 거니까."

"네?"

가온이 메뉴판을 빼앗으며 얼굴을 가렸다.

"아빠가 그쪽한테 좀 무례하게 대한 것도 있고, 저 잠깐 던전 들어가서 공략하는 동안 아빠 병원비 마련하게 해준 거에 대해 감사해서 그래요. 누리 돌봐준 거에 대해 감사인사도 할 겸.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요. 어디까지나 예의상 사는 거니까."

"......그럼 감사히."

드르륵. 가온이 부른 종업원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온은 간단한 안주거리로 튀김 세트를 시켰고, 시안은 메뉴판의 뒤를 가리켰다.

"3000cc 두 개 주세요."

"저기요?"

"사주신다면서요."

싱글벙글 웃는 시안의 얼굴에 기가 막힌 가온은 종업원에게 검지를 들어올렸다.

"일단 하나만 먼저 주문하고, 나중에 따로 하나 더 주문할게요."

"알겠습니다."

종업원이 사라지고 방문이 닫혔다. 가온은 목이 타는 듯 컵에 든 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우선 이것부터 말하죠. 왜 아빠가 그쪽을 탐탁찮게 여겨서 그런 행동을 하셨는지."

"...딸을 멋대로 데리고 도망간 놈팡이라서 그러신 거 아닐까요?"

"그건 제 시각이었구요, 부모님께서는 당신 되게 좋게 보고 계셨어요. 아빠가 왜 병원에 입원했는지 아세요?"

시안이 잠시 물을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제 전세금이 분명 아버님 치료비로 들어갔다고 했죠. 누리는 그걸 모르는 눈치였고. 레이드를 돌다가 다치신 거 아닙니까?"

"맞아요. 저희 부모님, 두 분 다 C급 헌터예요. 같은 길드에서 팀원으로 눈이 맞아서 결혼까지 하셨죠. 그러다가 누리 대학 등록금 벌어야 한다고 무리하게 레이드 뛰시다가...."

가온이 혀를 찼다.

"다치는 건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길드가 문제였죠. 저희 부모님 길드 어딘지 들으셨나요?"

"아뇨. 거기까지는 묻지 않았습니다. 누리도 모르는 눈치였고요."

"중국 길드 <중화>가 주인인 산하 조직이에요. <오월>. 부모님이 뼈빠지게 버신 코어값, 결국에는 다 이 나라가 아니라 해외로 흘러들어가게 되는 거죠. 자원유출. 그게 당신이 만들 길드에 누리가 들어가지 않았으면 하는 첫번째 이유에요."

"......?"

시안은 잠시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거를 두고 사자성어로 '내로남불'이라고 하던가요?"

"...그거 사자성어 아녜요."

가온이 잠시 짜증을 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의미는 맞아요. 하지만 현재 우리 나라 안에서 외국 길드에 대한 인식도 알아주셔야 돼요. 설마 길드를 하려고 만리타향까지 오신 분이 시장 조사도 하지 않으신 건 아니죠?"

"당연히 알고있습니다. '머리 검게 할 생각 아니면 한국에서 활동하지마라.' 유명한 일화 아닙니까."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게 현실이에요. 외국 길드에 대한 배척. 특히 당신은 단순한 투자자도 아닌 당신의 길드를 직접 만들어서 경쟁자로 뛰어들려고 하는 거죠. 당연히 이런 의심이 들 수 밖에 없어요. '저 뒤에 도대체 무슨 뒷배가 숨어있는 거지?' 하고요."

제법 수긍할만한 말이었다. 시안은 경청하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온은 일말의 반발없이 제 말을 귀담아 듣는 모습에 미안하기까지 했다.

"이제 아버지가 왜 그런 외국인 길드를 싫어하냐고 하냐면...."

"레이드에서 다친 것에 대해 보상도 없이, 길드에서 탈퇴당하셨군요. 그래서 치료비와 대여 장비들에 대한 반환금도 필요했고."

"......맞아요."

제법 날카로운 추리에 가온이 감탄했다. 시안은 컵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쳐서 코어웨폰을 놓게 된 이능력자가 살아가는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죠. 접수원이나 길잡이같이 관련 업계에 계속 남거나, 자활근로사업을 통해 새로운 직업을 얻거나. 아니면 그동안 벌어둔 돈으로 새로운 사업을 투자하거나."

"제법 잘 아시네요."

"저희 팀에 그런 분이 한 명 있거든요. 얘기하다가 잘 알게 됐습니다."

"그러면 길드에 의해 '버려지는 경우'도 잘 아시겠네요."

시안은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퇴직금이라도 챙겨주면 감지덕지죠. 넘쳐나는 이능력자를 두고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길드에 들어가면, 퇴직금은 커녕 가온 씨 아버님같은 일이 발생하기도 하죠. 특히 중국계 길드는 더더욱 그렇고."

"모든 중국 길드가 그런 건 아니에요. 원탁 히어로 <운장>님의 에스콰이어 길드는 다르죠."

"하지만 가온 씨 아버님의 길드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죠."

드르륵. 문이 열리며 종업원이 탁자에 그릇을 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튀김 안주가 방안의 열기를 더했다. 가온은 포크를 집어들었다.

"그러니까 이건 고마워서 사는 겁니다. 전세금은 제가 돌려드릴게요. 딸 역할도 제때 못했는데, 이렇게라도 해드려야죠."

"에스콰이어면 그렇게 돈 많이 벌지 못하지 않나요?"

시안이 왼손에 든 포크로 튀김을 찍었다. 허를 찔린 가온은 감자튀김을 씹으며 이를 갈았다.

"허이고, 에스콰이어에 대해 잘 아시나봐요? 누가 전직 원탁 지인 사칭 아니랄까봐."

"......그쪽 대장님이랑도 아는 사이인데."

"아하하하!"

가온이 빵 터지며 배를 잡았다.

"저도 한 번 못뵌 <라스푸틴>님을 아신다고요? 어떻게, J스타그램 친구라도 되시나?"

"뭐, 그렇다치고. 일단 전세금은 당장 돌려받을 생각 없어요."

시안이 벽면에 놓아둔 캐리어를 가리켰다.

"잠이야 사무실에서 자면 되고, 돈을 안 주실 분들 같지는 않으니까. 오히려 저는 그 2억으로 그분들의 환심을 사고 싶은 걸요. 덤으로 가온 씨도."

"풋. 왜요. 그걸로 환심 사서 누리 영입이라도 하게요? 장래의 S급 이능력자를 고작 2억으로 묶어두시려고?"

"저랑 함께하면 SS급으로도 갈 수 있는 걸요. 120%. 1년 안에."

"푸하하!" 시안의 과도한 자신감에 가온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흐흐, 이봐요. 도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거예요? 어디 꿍쳐놓은 비장의 수단이라도 있나?"

"한 두개가 아닌데, 그건 영업비밀이니까 말 안할게요.만약에 알고 싶으면......."

시안이 코트 안에서 제 명함을 꺼내 가온에게 넘겼다.

"가온 씨라면 저희 길드 문은 언제든지 열려있으니까, 혹시 에스콰이어 하다 지치면 제 품으로 오세요. 따뜻하게 안아드릴게요."

"우와, 지금 작업거는 거? 이탈리아 출신인가?"

"...어, 이게 그렇게 되나요?"

시안은 볼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가온은 슬쩍 시간을 확인하고 튀김을 뜯었다.

드르륵. 종업원이 3000cc 맥주를 테이블에 놓았다. 가온은 등을 돌려 나가려는 종업원을 불러세웠다.

"실례합니다. 튀김 세트 하나 더 주문할게요. 아, 그리고...."

가온이 시안을 바라보며 비웃었다.

"소주 다섯 병도 주세요."

시안의 얼굴이 핼쓱해졌다.

* * *

<새벽 4시, 시안의 사무실>

"누구냐!"

"접니다."

시안은 만취한 얼굴로 들어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라온은 시안의 몸에서 풍기는 술과 기름, 그리고 여자의 향수 냄새에 코를 찡그렸다.

"시안. 지금 이 시간까지 어디서 뭘...."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네?"

"그리고 클럽에서 술 마셨어요."

라온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시안은 소파에 다리를 대자로 벌리고 앉아 알코올 섞인 깊은 숨을 토해냈다.

"너무 심하게 빨렸어...."

쿵. 그대로 시안은 옆으로 쓰러졌다. 졸지에 잘 곳마저 빼앗긴 라온은 울상을 지으며 주섬주섬 시안의 캐리어를 벽에 밀어넣었다.

숙취에 절은 시안이 깨어나기까지 네 시간. 라온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 새근새근 잠을 자는 시안을 노려보며 뜬눈으로 새벽을 지새웠다.

* * *

<2월 7일 오전 9시. 시안의 사무실.>

"말도 안 돼요. 고작 그런 이유로 집에서 쫓겨났다고요?"

"쫓겨났다기 보다는 내가 자리를 피한 셈이지. 괜히 불똥이 튈 수 있으니까."

시안은 퀭한 얼굴로 커피를 마셨다. 라온도 마찬가지로 피곤한 얼굴로 커피를 마셨다. 그들의 손에는 유나가 싸온 샌드위치가 들려있었다.

"잘 먹을게, 유나야."

"잘먹겠습니다."

동시에 샌드위치를 베어 무는 둘의 모습에 유나는 절로 불안해졌다. 사무실에서 잠을 잔 것 치고는 둘다 몰골이 나름 멀쩡해보였다.

킁킁. 유나는 아주 연한 바디워시 냄새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분 씻고 왔어요?"

"요 앞에 목욕탕에서. 씻는 김에 같이 들어갔다 나왔어."

"...남탕 여탕 따로 되어있는 곳입니다. 지난 번에 갔던 거이요."

이제는 라온도 슬슬 시안의 말에 적응이 되었는지, 담담히 부연설명을 하여 오해를 풀었다. 하지만 유나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을 거두지 못했다.

"그럼 또 지난 번처럼 소파에서 같이 주무신 거예요?"

"쿨럭!"

시안이 놀라 기침할 뻔 한 걸 간신히 입을 틀어막았다. 유나는 시안에게 물티슈를 건넸고, 시안은 입술을 닫고 손에 묻은 잔여물을 물티슈로 닦아냈다. 그러면서도 유나와 라온의 눈치를 봤다.

"......모르겠어. 어제 너무 많이 마셨나. 기억이 없네."

"또 두 분이서?"

"아뇨. 여기 들어왔을 때는 이미 만취한 상태였습니다. 여자분과 둘이서 클럽에서 술을 마셨다고 하시더군요."

"......제가요?"

이제는 라온까지 시안을 노려보며 추궁하는 모양새였다. 기억을 더듬은 시안은 간신히 제가 겪은 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떠올렸고, 결국 사무실에 돌아오기까지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아야 했다.

잠시 후.

"그러니까 정리해보자면 누리의 언니랑 새벽에 클럽에서 방 잡고 둘이서 대작했다는 거네요?"

"심지어 자율주행차도 끊겨서 집에 바래다 주기까지 하시고."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술만 엄청나게 마셔댔는데. 으으, 뭔 여자가 술을 그렇게 쳐마셔대는지."

시안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확실히 친자매는 친자매더라. 아니, 누리보다 더해.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드셀 수 있지? 더 있다가는 내 기가 다 빨려나가겠더라."

"아, 그러십니까."

"응. 사람이 아니라 호랑이야, 호랑이. 어떻게 그 작은 체구에서 그런 에너지가 나올 수 있지? 으으, 무섭네, 진짜."

라온은 딱딱한 어조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안이 소파에 다시 몸을 눕히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일단 좀 쉬어야겠어. 두시간 정도만 쉬고, 뒷 일은 그 때 가서 생각하자. 던전 클리어 보상도 아직 정리 못했어."

"길드장님. 오늘 무슨 날인지 아세요?"

"2월 7일이잖아. 그게 왜?"

시안의 대답에 유나가 한심한 얼굴로 답했다.

"오늘, 누리 졸업식이에요."

"......젠장."

* * *

<그 시각, 가온누리 주차장.>

"넌 또 뭘 그렇게 술을 쳐마시고 다니는 거니?"

"......."

가온은 제 차에 머리를 박고 서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막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내려온 서향이 주변을 훑으며 가온을 부축했다.

"벌써 옆에 기자들 깔렸어. 언니가 이런 모습 보여서야 되겠어?"

"말 시키지 마.... 머리 울려...."

서향이 코를 찡그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아직까지 가온의 입에서는 알코올 향기가 강하게 올라왔다.

"안되겠다, 얘. 너 운전하지 마. 내가 할게."

"엄마. 이 정도는 마력으로, 우읍."

가온이 주차장 끝의 화단을 향해 달려갔다. 서향은 동네 부끄러워 얼굴을 가렸고, 가온은 남들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폭포를 쏟아냈다.

"......하아."

가온은 눈앞의 시큰한 흔적에 인상을 찌푸리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곧 허공에 떠오른 농구공만한 구름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세찬 빗줄기가 쏟아져내렸다.

가온이 구름을 손가락으로 훑어 입술을 훔쳤다. 연분홍 립스틱 위에 묻은 토악질의 흔적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마력을 이딴 식으로 쓰는 애는 너밖에 없을 거야, 정말."

"엄마. 이거 대한민국 물가촉천민 기본 패시브 스킬 같은 거야."

"엄마는 빼주렴. 정말, 애가 누구랑 밤에 그렇게 술을 마시고 온 거야? 너 혹시-"

"여보."

어느새 도윤과 누리가 주차장에 내려와있었다. 서향은 정장을 차려입은 남편의 옷을 다시 단정하게 정돈해주고, 밤색 코트를 입은 누리를 쏘아봤다.

"얼굴 펴. 너 그렇게 사진 찍히고 싶어?"

찰칵. 이미 저 멀리서있던 기자 하나가 플래시를 터뜨렸다. 가족 모두 이능력자라 플래시 정도는 버틸 수 있었지만, 주차장을 나서는 순간부터 카메라를 들이미는 기자들의 무례함에 도윤이 눈을 찌푸렸다.

"저게...."

끼익. 누리는 아무말없이 차의 뒷문을 열었다. 팔을 다친 도윤이 조수석에 앉고, 서향이 운전석에 자리를 잡았다. 막 다리를 절며 운전석으로 향하던 가온이 안전 벨트를 메는 서향에 움찔했다.

"엄마?"

"너 음주운전으로 히어로 면허 반납하고 싶으면 운전해."

"...알겠어."

가온은 뒷문을 열고 운전석의 뒷좌석에 앉았다. 옆에 앉아있던 누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있었다.

"가온아."

도윤이 자상하게 가온을 불렀다. 서향이 창문을 열어 환기했다.

"술은 앞으로 적당히 마시거라."

"......네."

자동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밖에서 대기하던 기자들도 그 뒤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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