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871화 (871/1,497)

EP.871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1권 018

D급 던전 클리어.

하지만 평범한 D급 던전은 아니었고, 던전이 폭주를 일으켜 이계의 마물들을 쏟아내는 '차원문'이 열리고 말았다.

시스템이 알려준 차원문 파괴의 골든 타임은 고작 1분.

그 짧은 시간안에 넷은 차원문을 파괴했고, 천안에 S급 괴수가 등장하는 재앙을 성공적으로 막았다.

시안과 일행이 던전 공략의 기쁨을 나누기도 잠시. 그들은 던전 클리어의 성과를 얘기하기 전에 먼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

* * *

<밤 11시, 시안의 사무실.>

"그래서 그건 뭐야?"

"그거? 그 거라니 뭘 말하는 걸까-"

"말 돌리지 마십시오. 시안의 총 말입니다."

누리가 묻고, 시안이 발뺌했지만, 라온이 쐐기를 박았다. 시안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제 총에 불안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그냥 호신용 무기야. 호신용."

"그런 호신용 무기가 던전 공략 지분을 43%나 얻을 정도로 강합니까? 그것도 방아쇠 한 번에?"

라온은 유나의 귓볼을 스치고 날아간 탄환에 오한이 들었다. 장기의 영향으로 마족으로 변한 고블린을 일격에, 그것도 십 수마리를 동시에 터뜨린 파괴력은 분명 일반 총기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후우, 알겠어."

시안은 두 손을 들었다. 그리고 지난 번에 유나에게 설명했듯, 제 총에 대해 빠르게 설명을 마쳤다. 라온은 공항의 일도 추궁했고, 시안은 긍정했다.

"부으으."

자기만 알고 있던 비밀이 이렇게 공개되어 버리다니. 유나는 빨대를 입에 문 채 핫초코를 불었다. 유나의 불만을 머금은 기포가 플라스틱 컵 속 음료 안에서 부글부글 끓는 사이, 라온은 제법 무거운 총을 들어올리며 이리저리 살폈다.

"마도공학으로 개조한 총기에 괴수의 사체와 코어를 갈아넣은 탄환...."

"아저씨, 이거 얼마 주고 샀어?"

은색 총신을 유심히 지켜보던 누리가 큰 관심을 보였다. 시안이 명백히 경계하는 눈빛으로 되물었다.

"왜?"

"아니, 궁금해서. 엄청 비쌀 것 같은데."

"......비매품이야."

시안이 라온에게 손을 뻗었다. 라온은 아쉬운 눈치로 시안에게 총을 건넸다.

"어디서 어떻게 이런 무기를 입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좋습니다. 그럼 다음."

라온이 던전 클리어의 결과창을 올렸다. 이건 유나도 제법 궁금한 사안이었다.

"당신의 이름, '시안'이 아닙니다. 그렇죠?"

결과창의 □▣■. 그건 누가봐도 오류였고, 최소한 시안의 이름은 아니었다. 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응. 맞아. 시안.w.히비스커스, 가명이야."

시안의 순순한 실토에 셋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먼저 누리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 범죄자인데 혹시 한국에 망명하러 온 거야? 길드 만들어서 공적 쌓은 다음 여기에 뿌리내리게? 망명이지?"

"아니."

칼같은 대답에 라온이 질문했다.

"던전 내의 시스템도 당신의 이름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나도 몰라. 던전에 들어가서 딜 지분 들어간 적은 처음이거든. 시스템이 오류난 건데 내가 어떻게 알겠어."

알았으면 더 조심했지. 명백히 뒷말을 흘리는 시안의 태도에 라온과 누리가 불편해하는 동안, 유나가 차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이름 가르쳐 주실 생각 없으시죠?"

"없어."

"그럼 계속 시안이라고 부르면 되죠?"

"응. ...응?"

시안이 당황하고, 라온과 누리의 시선이 유나에게 꽂혔다. 유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본인이 가명으로 불리기를 원하니까 따라줘야죠. 저 계약도 '시안'이랑 했으니까요."

"그건 그렇죠."

라온이 떫은 얼굴로 컵을 만지작거렸다. 유나가 다시 시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길드장님. 차원문 파괴에 대한 공적은 신고할 거예요?"

"어! 맞다!"

누리가 손뼉을 치며 놀랐다.

"그거 분명 보상금만 1억일텐데!"

"1억? 왜 그렇게 적어? 미국에서는 20억을 보상금으로 주는데."

시안이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경악했다. 아무리 차원문의 파괴에 대한 보상이 그 나라에서 주는 거라고 해도, 무려 20배나 차이가 나는 건 시안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미국이야 큰 피해를 입었지만, 여기는 그런 일이 잘 없었으니까요."

라온이 가상 키보드를 두드렸다. 시안의 눈앞에는 한국에서 차원문이 열렸던 역사가 한 눈에 드러났다.

"대전이랑 부산, 그리고 서울. 겨우 3번?"

"셋 다 조기에 제압되었죠. 한국이 다른 건 몰라도 차원문에 의한 피해는 전세계에서 가장 적을 겁니다. '마룡'이 단 한 번도 등장한 적 없으니까요."

"와. 너무한다. 광마룡이면 SS급 난이도 찍었을텐데."

시안이 툴툴거리며 커피를 쭉 들이켰다. 벌써 늦은 시간임에도 카페인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행동에 유나가 핀잔을 놓았다.

"자기 전에 카페인 마시면 몸에 해로워요."

"안 잘 거니까 괜찮아. 오늘은 집에서 해야할 일이 많거든."

시안이 제 마도기어를 가리키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마족화는 이해한다 쳐. 하지만 D급 던전에 SS급 광마룡이 등장하는 차원문이 나타날 이유가 없잖아? 그거 분석해야지. 오늘 너무 이상한 일이 많았어. 그러니까 밤새서 이거 분석 할 거야. 결과 나오면 알려줄게."

"정말 신고 안 할 거야? 돈이 1억인데?"

"신고했다가는 그대로 국외추방 당할 수 있어. 안그래도 코어유출이니 뭐니 말 많은데, 괜히 너 던전 데려가서 죽일 뻔 했다고 그대로 매타작 당할 걸? 20억이면 모르겠는데 1억 정도면 그냥 입 싹 닫고 묻어두는 게 나아."

시안은 차원문의 존재를 은폐하는 방향으로 셋을 설득했다. 누리가 그닥 납득을 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시안의 간고한 설득끝에 누리는 겨우 수긍을 했다.

"그럼 일단 오늘은 여기서 해산하자. 유나야. 뒤에 차 있어?"

"20분 정도 남았어요. 집에는 얘기해뒀으니까 괜찮아요."

"시안. 저는 여기서 히어로 슈트를 지키겠습니다."

라온이 사무실 벽 한켠에 놓인 두 개의 히어로 슈트를 가리켰다. 급하게 천안 던전으로 가는 바람에 라온의 숙소는 아직 구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제 집에 들이자니 유나와 누리의 시선이 신경쓰였다.

"부탁할게."

결국 시안은 라온에게 사무실을 맡긴 뒤, 유나와 누리를 데리고 사무실을 내려왔다. 쌀쌀한 밤 날씨에 유나는 입김을 불며 자율주행차를 기다렸다.

"길드장님."

"왜?"

누리가 집에 연락을 하는 사이, 유나는 막 도착한 자율주행차의 문을 열며 사무실과 누리 쪽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시안 편이에요."

"......."

시안은 아무말도 못한채 그대로 굳었다. 유나는 베시시 웃으며 시안의 코트 앞섶을 정리해주고는 자율주행차에 올라타 문을 닫았다.

덜커덩. 차가 밤공기를 가르며 사라지고, 시안은 제 코트 앞을 만지작거리며 숨을 뱉었다. 막 통화를 마친 누리가 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아저씨, 언니가 시선 끌어준다고 하네. 그 사이에 들어가자. ...아저씨?"

"어, 응. 그래."

밤거리를 밝히는 주황색 조명 아래 시안의 볼은 아주 살짝 상기되어있었다.

* * *

라온은 히어로 슈트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사무실에 남았고, 유나는 자율주행차의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시안은 누리의 보디가드처럼 옆에 붙어 건물에 들어가는데 성공했고, 다행히 주변에 서성거리던 기자들은 얼굴을 드러낸 누리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쟤 김누리 아냐?"

"또 김가온일 걸. 이번에도 착각하면 죽여버린다고 하잖아. 히스테리 장난 아니야."

시안은 기자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누리는 큭큭 웃으며 지문을 인식시키고는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거 꼭 첩보작전 같은 거 인정?"

"그래. 늦었으니 올라가자."

시안은 계단을 올라가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마력이 없다시피 한 그로서는 이제 슬슬 휴식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에 비해 아직 누리는 쌩쌩했다. 막 3층을 올라선 누리가 문을 열려던 시안을 향해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혼자 던전 한 번 더 돌아도 되겠는 걸?"

"그게 무슨 소리니?"

움찔. 누리와 시안이 동시에 죄지은 사람 마냥 몸을 떨었다. 계단 위에서 들린 목소리는 분명 둘에게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저벅. 저벅.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에 둘의 시선이 자연스레 윗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서향이 서릿발이 쌩쌩 날리는 얼굴로 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엄마...?"

"일단 집에 들어가자. 그리고 시안 씨. 그쪽도 지금 올라와야겠어요."

"네?"

"애 아버지가 화가 좀 많이 났거든요. 저도 그렇고."

시안은 사형대에 오르는 죄수처럼 계단을 올라갔다.

잠시 뒤.

"신분증은 확실하네."

기자들의 눈을 속인 가온이 집으로 돌아와 시안의 신분증을 확인했다. 외국을 자주 드나들던 가온의 보증에 누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 아저씨 신분은 확실하다니까?"

"김누리."

서향이 누리의 이름을 불렀다. 고저없는 목소리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있었지만, 분명한 건 표정은 누리를 향한 걱정과 질책으로 가득했다. 가온이 옆에서 서향을 거들었다.

"그래. 그러면 어디 그 '오라클 스튜디오'라는 것도 진짜야?"

"지, 진짜지. 언니 그 명함 봤잖아."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일지도 모르지. 오라클 스튜디오의 빈 명함에 제 이름을 박아넣은 걸 수도 있고. 그리고 뭣보다...."

가온이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시안을 노려봤다.

"내가 원탁 에스콰이어 길드 소속의 히어로예요."

"뭐? 언니가?!"

누리가 화들짝 놀랐다. 가온은 제 정체를 드러내기 싫은 티가 역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진짜 신분을 드러냈다.

"언니 그냥 외국계 길드 소속이라며?"

"멍청아. 그럼 진짜로 까발리고 다니겠어?"

"......."

누리가 아무 말도 못하자, 가온은 시안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쪽이 <오라클>님과 관련자라고 자칭했으니까, 저도 제 소개를 할게요. 원탁 히어로 <라스푸틴>의 에스콰이어 길드 <마트료시카>의 히어로, <운디네> 김가온이에요."

"...<운디네>?"

시안이 고개를 갸웃하자, 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신 이전 원탁 히어로 분의 이명을 제가 이어받았죠. 누리야, 미안. 나 사실 A급 이능력자야."

충격 발언에 누리가 숨이 멎었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진 놀란 표정은 더욱 가관이었다.

"언니 B급이었잖아!"

"에스콰이어 길드 소속이면 그 정도 정보조작은 기본이지. 속여서 미안해요. 하지만 알려져봐야 이 나라에서는 좋은게 없으니까 숨겼어요."

"A급 히어로-특히 원탁 산하 길드원의 가족이라면 세간의 이목이 끌리기 십상이죠. 자칫 잘못하면 빌런의 테러 대상이 될 수도 있고요."

"잘 아시네요. 그럼 제가 왜 정체를 드러냈는지 아시겠죠?"

시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정체가 의심스럽기 때문 아닙니까?"

"물론이죠. 만약 당신이 진짜로 연예계 종사자라면 딱히 뭐라 하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그쪽, 여기서 길드 만들 생각이잖아요?"

"아, 아저씨?"

누리가 사색이 되었다. 시안의 방한 목적이 스튜디오 개설이라는 것은 누리가 즉석에서 만든 거짓말이었다. 졸지에 제 거짓말 때문에 가족에게 추궁당하게 생긴 시안을 두고 누리는 가시방석처럼 안절부절 못했다.

"......맞습니다. 저는 한국에 길드를 만들러 왔습니다."

콰직. 서향이 껍질을 자르던 오렌지를 손으로 터뜨렸다.

"방금 뭐라고...?"

"한국에서 길드를 만들기 위해 자리를 잡았습니다. 저는-"

"나가시게."

잠자코있던 누리의 아버지, 도윤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갑작스러운 말에 서향과 가온, 누리 모두 안색을 굳혔지만, 시안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죄송합니다. 내일 다시 찾아뵙겠-"

"전세금은 내 빠른 시일 내에 돌려주겠네. 그러니 당장, 이 건물에서 나가주었으면 하네. 지금 여기 있는 것도 불쾌하군."

"아빠!"

폭거에 가까운 말에 누리가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다. 부들부들 두 주먹이 떨렸지만 서향과 가온도 도윤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시안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감사했습니다."

인사하는 시안의 표정은 그닥 좋지 않았다. 도윤은 시안이 코트를 집고 일어서 밖으로 나서는 순간까지도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 아저씨!"

"김누리. 너 지금 저 남자 따라가면...."

이서향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을 토해냈다.

"넌 이집에서 쫓겨나가는 거야. 누리야, 이게 다 널 위해서-"

끼이익. 시안은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누리는 현관문에 서서 그 자리에 멈춰 고개를 떨구었다.

"......."

가족과 시안. 둘 사이 놓인 누리는 현관에서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현관문은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다.

* * *

"이 정도로 심할 줄이야."

예상은 했다. 소문은 들었다. 하지만 외국인에 대한 배척이 이정도로 노골적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쇄국정책도 이정도면 병이다, 병."

시안은 캐리어에 제 짐을 전부 정리하고는 잠시 침대에 누웠다. 한달간 익숙해진 이 딱딱한 매트리스와 이별을 하게 되어서 그런지 아쉬웠다.

"...아니지. 뭔가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 거야."

한 달간 부대끼다시피 지내온 누리를 통해 바라본 누리 가족은 이렇게 무례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운디네>라 소개한 김가온은 처음 보기는 했지만, 서향과 도윤은 막되먹기 보다는 충분한 교양을 갖춘 이들이었다.

"꼭 한 달 전에 유성에 사무실 빼앗긴 것 같아서 기분은 좀 더럽긴 한데 어쩔 수 있나."

외국인이 길드장이어서 온갖 질타와 굴욕을 당하는 곳에 누리를 맡기느니, 차라리 검증된 길드에 맡기는 편이 부모 입장에서도 훨씬 마음이 놓일 것이다. 시안은 속이 꿀꿀해졌지만, 곧 미련없이 매트리스에서 몸을 일으켜 캐리어를 챙겼다.

"그래. 인연이 아니었던 거지."

아직 디데이까지 3주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그 전까지 라온을 서포터할 딜러를 영입하면 어떻게든 길은 열릴 것이다.

철컥. 시안은 문을 열었다. 콱. 무언가에 걸리는 느낌에 시안이 슬그머니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다.

"이야기 좀 해요."

밖에는 운디네, 김가온이 문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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