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869화 (869/1,497)

EP.869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1권 016

약 100회에 걸친 슬라임 던전 노가다.

이능력자로 각성시킨 것은 좋았지만 누리의 포텐이 너무나도 높아 전국민이 누리를 찾아나섰고, 결국 시안은 누리 어머니 서향과 연락을 통해 천안에 숨기로 했다.

던전 클리어를 하기가 무섭게 재도전(Retry).

필요한 물건은 시안과 유나가 번갈아가며 구입해 숙식도 모두 던전 안에서 해결하였고, 다행히 그 누구도 누리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누리는 집에서 쉬고있다'고 가족이 나서지 않았다면, 아마 온 나라가 나서서 누리가 납치되지 않았는지 확인했을 것이다.

그 덕분에 시안과 일행은 누구도 찾지않는 슬라임 던전에서 열심히 전투 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그만큼 전투의 피로도 많이 쌓였고, 샤워조차 제대로 못한 라온과 누리의 불만에 총대를 멘 유나가 하루 휴식을 할 것을 제안했다.

시안은 1:3의 다수결에 패배하여 근처의 조용한 호텔을 수배했고, 편안한 휴식을 위해 각자 방을 하나씩 잡기로 했다.

내일 아침, 다함께 호텔 조식을 먹고 D급 고블린 던전을 가기로 한 약속을 한 이들은 저마다의 방에서 사색에 잠겼다.

* * *

<오후 9시, 시안의 방.>

"프레깅이 이래서 일어나는 구나."

시안은 허벅지와 팔뚝을 냉찜질하며 이를 갈았다.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 이대로 D급 던전에 도전하자는 시안의 제안은 팀원들의 반란에 무위로 돌아갔다.

"설마 유나가 그럴 줄이야."

처음 라온과 누리는 본인이 지쳤음에도 순순히 시안의 말을 따랐다. 둘 다 슬라임과 맞상대를 할 수 있는 수준은 되었고, 몸은 지쳤어도 자신감은 어느정도 붙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걸 유나가 거부했다. 피로도가 너무 많이 쌓여 까딱 잘못하다가는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시안은 여차하면 자신이 나서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팀장은 저에요.'

"맞는 말이지. 맞는 말이긴 한데...."

유나의 일격에 그대로 깨갱하며 꼬리를 말았다. 던전 공략에 관해서는 팀장의 명령이 절대적. 시안이 유나의 말에 면박을 준다면 셋 중 그 누구도 팀장을 자주적으로 할 리 없었다.

"그래. 그렇긴 한데."

이래서야 길드장의 위엄이라는 게 없지 않은가. 아무리 팀의 리더가 던전 내에서의 상황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인도한다고 해도, 그 팀에는 길드장인 시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대로 던전 들어갔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지금 사람들 누리 어디 갔는지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을텐데, 만약에 누리 잘못해서 사고라도 당하면 그 뒷감당 하실 수 있어요?'

"내가 너무 심하게 쪼았나?"

솔직히 너무 무리하게 굴린 감이 없잖아 있다. 하지만 시안도 단독으로 잡을 수 있는 슬라임과 킹 슬라임에 고전하는 셋의 힘에 너무 답답했던 것도 사실이다.

킹 슬라임을 처치한 그 횟수동안 얼마나 마탄을 쏴버리고 싶었는지 몰랐다. 그나마 탄환을 유나에게 맡겨서 망정이었지, 아니면 분명 신나게 한 방 쏴댔을 것이다.

"유나 덕분에 참 많은 도움을 받네."

이유나. 이유나. 시안은 계속 유나의 이름을 곱씹으며 고뇌에 잠겼다.

유나가 시안의 길드와 가계약을 맺은 요 며칠동안 시안은 유나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수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비현실적인 소설이나 영화 속 설정들까지 떠올려가며 이유나의 정체에 대해 고찰했다.

"후우우."

시안은 캔맥주를 홀짝이며 코트에서 유나의 결과지를 꺼냈다. 기계를 일부러 망가뜨린 것도 혹시나 유나의 마력 검사 결과가 자동으로 등록될까봐 놀라서 그랬다.

"진짜 미치겠네."

지 10수 10화 10풍 10광 10암 10환 10

"......."

히어로 위키에 등록된 결과나 유나가 기존에 알고있던 결과나 하등 다를게 없었다. 그러나 던전에서 보여주는 '시스템'은 절대적이므로, 무조건 한계 성장치가 하나라도 늘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단 1도 늘어나지 않았다.

"진짜 게임처럼 현재 능력치라도 알 수 있으면 좋은데."

그런 마도구가 개발된다면 얼마든지 투자할 수 있다. 시안은 현 세대의 마력 검사기의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가 다시 자세를 바로하고 허리를 숙였다.

"아니지. 그덕분에 여신님을 만났잖아."

아직까지 확신은 없다. 하지만 마력 검사기의 기기 한계 때문에 시안은 이유나라는 사람을 길드장과 길드원의 관계로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오라클에게 부탁한 시안의 개조 검사기가 도착할 때 까지, 시안이 유나의 정체에 대해 품은 가설은 그냥 헛된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설령 아니어도 상관없지만."

시안은 첫 길드원으로 들어온 유나와 찍은 기념사진을 갤러리에서 꺼내며 피식 웃었다.

"꼭 외상만 치료해야 힐러는 아니지."

중재자. 라온과 누리라는 상극의 성향을 가운데에서 적절히 이어주리라. 함께 지낸 시간은 불과 일주일 가량이지만 시안은 유나의 성격과 성향을 알 수 있었다.

'신은 아닐지 몰라도 천사잖아.'

시안은 창문 사이로 비친 달을 바라보며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누구 하나 다치는 일 없이 고블린 던전을 공략하려면 아직 정리해야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홀짝. 한국 고블린 던전 공략 영상 수십개를 분석하는 시안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다음 날.

밤늦게까지 자료를 준비한 시안은 알람소리에 간신히 잠에서 깨어났고, 약속 시간에 함께 호텔 조식을 먹으러 모인 이들은 퀭한 얼굴로 서로를 맞이했다.

"...다들 잠 못 잤어요?"

시안의 눈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피곤한 기색을 보이는 건 유나나 라온이 특히 심했고, 오히려 누리가 제일 멀쩡해보였다.

"일단 이거부터 하나씩 보면서 얘기할까요?"

시안은 마도기어에서 스크린을 뽑아냈다. 그가 밤을 지새우다시피 정리한 고블린 던전의 구성과 공략 방법이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현재 우리의 전력을 분석했을 때, 가장 적절한 공략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우와...."

"시안, 이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아저씨 미친 거 아님?"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이는 팀원들에 볼을 긁적인 시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빵을 집어들었다.

"아무리 이제 슬슬 전투가 가능하다고는 해도, 안전하게 가자는 거지."

시안이 홀로그램 속 마네킹과 셋을 번갈아보며 음흉한 얼굴로 웃었다.

"그러면 다들 스리 사이즈 부터 재러 갈까?"

* * *

<오전 10시, 천안시 상가 >

"억울해."

시안은 등을 벽에 기댄 상태로 중얼거렸다. 유나는 벌게진 시안의 뺨에 차가운 캔커피를 대고 문지르며 딴죽을 걸었다.

"자업자득이에요."

"여자들한테 옷 사러 가자 하면 좋아한다던데."

순간적으로 힘이들어간 유나의 손이 캔을 으스러뜨릴 뻔 했지만, 유나는 간신히 진정하는데 성공했다.

"어디 사는 누가 그러시던가요?"

"오라클이."

흠칫. 유나의 손이 굳었다.

"내가 연애를 한 번도 못해본 입장으로서 걔랑 자주 얘기한단 말이야? 그래서 걔한테 자주 코치를 받고 그랬는데...."

"저, 자, 잠시만요."

유나가 시안의 말을 끊었다. 다행히 라온과 누리는 의류 매장에서 신체 사이즈를 측정하러 간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는 유나와 시안 둘 뿐이었다.

"오라클 님이랑 자주 연락해요?"

"응. 걔도 바쁘고 시차도 있어서 자주는 힘든데, 한 이주에 한 번?"

"그러면 그 때 주로 무슨 얘기를...?"

시안은 볼을 긁적이며 쑥스러워하다가 입을 간신히 열었다.

"내가 이렇게 여자들 많은 상황에서 있는 건 처음이거든. 그래서 오라클한테 자주 물어보고 그래. 그러더니 걔가 이런 책을 추천해주더라고."

시안이 마도기어를 조작해 홀로그램으로 책 한 권을 띄웠다. 유나는 그 책의 제목을 보고 이를 갈았다.

"오라클의 연애 특강'...?"

"헐리우드 스튜디오에서 오라클이 중매 맺어준 스타 부부만 몇 쌍인데. 오라클이 그 때 경험 살려서 이번에 책 낸다고 하더라. 나한테는 미리 받아서 좀 읽으라고 보내준거고."

"연애를 책으로 배운.... 그러면 길드장님 혹시?"

"지금은 솔로야."

지금은. 지금은. 유나는 등 뒤에서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조금 더 정보를 캐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라온과 누리가 옷 갈아입는 공간에서 나와버렸다.

"측정 끝났습니다, 시안."

"......."

누리는 검은 모자와 선글라스로 변장을 한 상태로 시안을 사정없이 노려보았다. 라온도 그닥 좋지 못한 시선으로 시안에게 제 마도기어를 비췄다.

"......결코 이상한 생각이 없으리라 믿습니다."

라온은 으름장을 놓으며 데이터를 전송했다. 시안은 그 데이터를 받고 감탄을 하며 입을 열었다가, 옆구리를 찌른 유나의 손가락에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러면 이대로 주문해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대여할 거잖아."

"...살 건데."

시안이 삐진 말투로 허세를 부리자, 라온과 누리가 놀라 시안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저씨 뇌절? 한 벌에 수 천만원 하는 걸 지금 사겠다고? 두 벌 다?"

"시안. 이건 아닙니다. 던전 공략이 아무리 중요해도 슈트를 사는 건-"

"투자라고 생각해. 던전은 원래 장비빨로 공략하는 거야. 그러니까...."

시안이 홀로그램으로 꺼낸 검은 카드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웠다.

"이거 사주는 대신 오늘부터 1일이다?"

"계약 얘기니까 오해하지 마요."

시안의 말을 유나가 보충했다. 시안이 손가락을 튕기며 유나에게 윙크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그거야!"

"......."

유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 * *

강화복, 히어로 슈트.

히어로에게는 그 능력에 어울리는 코스튬이 있어야 한다는 로망과 괴수를 상대로 맞상대하는 강화외골격이 필요하다는 현실적 요건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마도공학의 결정체.

초기에는 단순한 갑옷의 형태로 시작하였으나, 점점 기술이 발달하고 착용자인 히어로들의 마력이 늘어남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히어로 슈트가 개발되었다.

현재는 히어로 뿐만 아니라 자금적 여유가 있는 일반 헌터들도 강화복을 착용하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극히 일부의 빌런도 몰래 슈트를 개발하여 착용하기도 한다.

외형이나 세부 디자인은 개발하는 회사마다 개성이 차고 넘치지만, 유독 여성 이능력자들의 히어로 슈트는 몸의 선을 대놓고 드러내는 바디슈트의 비율이 압도적이었다.

신체의 노출을 꺼리는 여성 이능력자들은 중갑형 슈트를 입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에게는 '마력이 늘어날수록 체형이 더 아름답게 보정되는' 특징 때문에 노출도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몸의 선을 드러낸다는 건 그만큼 이능력자로서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증거'라는 모 SS급 이능력자의 돌발 발언 이후, 슈트 개발 업체들은 육체미를 자랑하고자 하는 고위 이능력자들과 99% 남성들의 압도적 지지를 등에 업고 바디슈트 개발에 착수했다.

물론 그중에는 과도한 성상품화로 세간의 뭇매를 받는 악성 기업도 있었지만, 평범한 히어로 슈트는 대중들이 납득할만한 수준의 디자인이었다.

디자인에 대한 문제가 해결된 이후 기업들은 강화복의 본래 목적인 '신체 보호 기능'을 향상시키는데 열과 성을 다했다. 발전한 마도공학 기술에도 불구하고 최하급 슈트가 수 천만원에 달할 정도로 비싼 편이었지만, 그만큼 착용자의 신체를 보호하는 기능만큼은 소위 돈값을 제대로 했다.

시안은 전위에서 근접전을 펼칠 라온과 누리에게 그 비싼 히어로 슈트를 사주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둘의 신체 사이즈를 파악하게 된 해프닝이 잠깐 있기도 했지만, 어쨌든 라온과 누리는 D급 고블린 던전 공략을 앞두고 히어로 슈트를 착용해 안정적인 던전 공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2025년 2월 5일 오전 11시. 시안의 길드는 D급 던전 중 난이도 최하위의 고블린 던전에 발을 디뎠다.

* * *

키에엑!

키가 1m도 되지 않는 고블린 한 마리가 썩어 문드러진 나무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라온이 이를 꽉 깨물고 단창으로 나무칼을 쳐내는 동안, 누리가 옆에서 튀어나와 칼을 휘둘렀다.

서걱! 빗겨나간 칼이 고블린의 손목을 잘랐다. 과도한 출력으로 인해 고블린의 손목은 그대로 뎅겅 잘려나갔지만, 정작 손목을 벤 누리가 헛구역질을 하며 물러섰다.

"우웁!"

살면서 언제 생명체를 상처입힌 적이 있을까. 누리는 코를 찌르는 혈향에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분노한 고블린은 고통을 감내하며 제 손을 자른 누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퍽!

누리의 슈트에 고블린이 닿기 직전, 라온이 창대를 움직여 간신히 고블린의 몸통을 찔렀다. 창끝은 던전 벽에 꽂혔고, 고블린의 몸은 부르르 떨리며 그대로 축 늘어졌다.

"하아, 하아, 하아."

누리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라온도 창백한 얼굴로 죽은 고블린의 시체를 멀찍이 확인하며 몸을 떨었다.

"휴우."

시안은 코트 안 홀스터의 총을 만지작거리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무리하게 돈 쓰기를 잘했네."

"길드장님."

유나가 질책어린 목소리로 말했지만, 시안도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았다.

"유나야. 봐봐. 첫 전투에도 저렇게 고생하잖아. 슈트 사온 건 신의 한 수 였어."

"아뇨. 그건 잘하셨어요. 제가 걱정하는 건...."

유나가 목소리를 낮췄다.

"만약에, 만약에 라온 언니나 누리가 그냥 다른 길드로 계약해버리면 어쩌려고 그러신 거예요...?"

"......글쎄."

시안은 볼을 긁적였다. 유나가 기가막혀 다시 쏘아붙였다.

"라온 언니는 그렇다쳐요. 길드장님 덕분에 마력 조금씩이라도 쌓아나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누리는요? 다른 길드에서 호시탐탐 인재 빼가려고 노릴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그 때는 인연이 아닌 거지."

담담한 시안의 목소리에 유나는 제가 다 화가났다. 아무리 김누리가 표준 체형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김누리의 체형에 거의 비슷한 히어로 슈트를 냅다 샀으니, 김누리가 만약 다른 길드로 떠난다면 저 히어로 슈트는 창고에서 먼지만 쌓이게 될 확률이 높았다.

"괜찮아."

시안이 유나를 보며 웃었다.

"오는 사람은 가리고 있지만, 그렇다고 떠나는 사람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질 생각은 없어. 자기 생각에 더 좋은 곳으로 더 간다고 하는데 내가 무슨 이유로 막겠니. 뭐가 아쉽다고. 다만...."

시안이 유나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유나는 숨을 삼켰다.

"너는...아니다. 아니야."

명백히 뒷말을 삼키는 태도에 유나가 추궁하려고 했지만, 시안은 노골적으로 그걸 무시하며 라온과 누리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라온 씨, 괜찮아요? 누리야, 숨을 크게 쉬어. 따라해. 후우, 하아."

누리는 시안의 부축을 받고 심호흡을 했다. 라온도 옆에서 작게 따라하며 숨을 골랐고, 유나는 스태프를 꽉 움켜쥐며 고개를 떨구었다.

과연 여기서 내가 필요하기는 한 걸까.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는 힐러로서의 아이덴디티는 강화복 덕분에 이제 의미를 상실했는데.

유나의 마음속에 어둠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휴우, 괜찮아! 조또 아니네! 흐아아!"

누리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박한 언사에 라온이 잔소리를 하려 했지만, 시안이 제지하고 나섰다.

"시안.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라도 긴장을 풀면 좋은 겁니다. 나중에 차차 교정해나가면 돼요. 누리야, 할만해?"

누리는 제자리에서 스트레칭을 하며 콧김을 크게 내뱉었다.

"할만하지! 흐흐, 아저씨. 나만 믿고 따라와. 내가 씹캐리해줄게."

"...말은 좀 예쁘게 하자, 누리야.

시안은 곧 제 발언를 철회했다. 라온이 키득거리고, 누리는 잠시 제 입술을 만지다 뚱한 얼굴로 던전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유나 언니! 뭐 해! 슬슬 가자!"

"응, 그래."

유나는 언제나처럼 사람좋은 미소로 다가왔다. 라온도 제 창을 회수해 누리의 앞에 섰고, 시안은 조용히 앞에 나아가는 둘을 보다가 뒤따라오는 유나에게 말했다.

"던전 돌고 나면 나랑 얘기 좀 하자. 유나야."

"...왜요?"

유나는 말하고도 숨을 삼켰다. 나름 숨긴다고 했는데, 살짝 퉁명스러웠던 것 같았다.

시안은 제 코트 안을 가리키고는 유나의 등을 두드려 앞으로 이끌었다.

"오늘 사무실 돌아가면 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려줄게. 일단 나한테는 천사님인 거 알지?"

"...풋. 오라클 님이 그렇게 말하라고 하셨나요?"

"아니. 진심이야."

시안은 유나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라온과 누리의 뒤를 따랐다. 유나는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다가, 얼굴을 붉히며 뒤를 따라갔다.

"푸흣."

던전 내부의 조명 때문일까. 유나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조금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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