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868화 (868/1,497)

EP.868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1권 015

비밀 작전을 방불케하는 유나의 움직임 덕분에 누리는 무사히 사무실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미 누리의 집 주소까지 털린 마당에 집에서 5분 남짓한 거리의 사무실에 있기는 상황이 마땅찮았고, 시안은 그에 묘수를 내었다.

- 어차피 던전가려는 거 지금 가버리자.

누리는 가족과 연락을 통해 천안에 피신하기로 했고, 누리의 어머니인 서향은 시안이 보호자로 나선 동행에 흔쾌히 허락을 했다.

다행히 그들은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고 무사히 신서울을 빠져나와 목적지인 천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오후 3시, 충남 천안시 E급 슬라임 던전>

"그래서 이번에도 슬라임 던전이에요?"

누리는 일행의 맨 뒤에서 빈정댔다. 사람들이 자신을 추켜세우니 제 능력이 하늘을 찌르는 줄 알고 콧대가 올라갔다. 누리와 라온은 절로 불편해졌지만, 시안은 이전과 같은 태도로 누리를 대했다.

"응."

"D등급 도전해봐도 되지 않아요?"

"안 돼. 너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었니?"

시안의 지적에 누리는 기가 죽었다. 갓 슬라임을 단칼에 베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누리가 보인 행동은 추태나 다름없었다. 시안이 연이어 누리를 질책했다.

"우리 팀이 D급 던전을 공략하는게 최우선적인 목표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게 있어. 바로 이거."

시안은 제 심장을 가리켰다.

"유나야. 현실 세계와는 달리, 던전에서 죽으면 어떻게 되지?"

"던전 입구에서 부활은 해도 성장 한계치가 내려가죠. 등급이 높을 수록 더 많이. E급은 2정도로 알려져 있어요."

누리는 그제서야 자신이 어떤 만용을 부렸는지 깨달았다. D급 던전을 이대로 들어갔다가는 누리는 괴수들에게 살해당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까딱 잘못하면 S급의 성장 한계도 영영 날려버리게 될지도 몰랐다. 시안이 누리의 기운을 북돋았다.

"E급 던전을 도는 이유는 다른게 아냐. 누리같은 '뉴비'들의 전투 경험을 쌓으러 가는 거지. 너는 여태까지 볼펜만 들었지, 칼을 들어본 적은 없잖아?"

"그건 그렇죠."

누리는 대여소에서 빌려온 코어웨폰 박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에서 사냥하기를 무서워했으면서도 굳이 또 검을 고집한 것에 라온은 여전히 불만이 강했다.

"누리 양."

"...왜요, 언니."

어제 저녁 라온의 오열 이후로 누리는 제법 얌전히 라온에게 존칭을 붙였다. 그마저도 가끔 반말 섞인 존대였지만, 라온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근접전은 아무래도 훈련이 필요한게 사실입니다. 그러면 적응 될 동안이라도 원거리 딜러를 하는게 어떻습니까?"

"나보고 원딜하라고? 그럼 언니가 탱커 할 거야? 어젠 하기 싫다며?"

누리는 의아함에 곧장 반문했다. 누리와 라온의 반목은 '딜러'자리를 두고 벌어진 트러블이었고, 둘 사이의 앙금은 해결되지 않았다. 아직 화해를 하지 않았기에.

"네. 그랬죠."

라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시안을 슬쩍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누리 양의 공격력이 저보다 훨씬 높은 것도 사실입니다. 시간이 흘러 경험이 쌓여나가면 해결될 문제였던 것을, 제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습니다. 어제 일은 사과드립니다."

"어...음.... 나도 미안. 언니가 나보다 훨씬 이런 일에는 잘 알텐데, 내가 너무 나댔어. 나도 미안해."

서로 사과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유나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시안을 쳐다봤고, 시안도 그에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작게 속삭였다.

"못난 놈들은 서로 보기만 해도 즐겁다더니 이게 딱 그런 거-."

퍽. 유나가 시안의 정강이를 살짝 걷어찼다. 시안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혼잣말을 유나가 들었다고 직감해, 제 실수를 깨닫고 신음조차 내지 않고 고통을 참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송구합니다...."

유나는 슬쩍 둘이 들었을까 싶어 눈치를 봤다. 다행히 둘은 아직도 이유 모를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화해까지 했는데 이제는 뭘로 투닥거리는 걸까 싶었다.

"그러니까 물가촉천민 안 한다고!!"

"그 발언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군요. 대한민국 이능력자 중 수속성만 20%가 넘습니다. 저같이 '이중속성'으로 수속성을 각성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아마 40% 이상일 테지요."

"이상하게 우리나라에 물속성이 많기는 하죠."

유나가 구두굽 앞을 슥슥 닦으며 말을 거들었다. 시안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궁금한게 있는데, 한국은 히어로 훈련 때 탄창에 물 채워서 쏜다는 게 사실이야?"

"......'수속성 마력'을 채워 쏘는 거예요. 사람 오해하게 하지 마요."

유나는 외국에 널리 퍼진 한국에 대한 속설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 금발 바보에게 진실을 전해야했다. 하지만 라온이 그 왜곡된 진실로 빚어진 오해에 쐐기를 박았다.

"제 옛 길드, <천군>의 예비군 선배님들은 K2에 물의 탄환을 만들어서 쐈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그 분들이 술자리에서 말씀하시던 걸 들었습니다. 강원도에 모인 예비군 물총부대가 부대 인근에 나온 괴수를 물리쳤다는 무용담도 들려주셨습니다."

시안이 혀를 내둘렀다.

"와, 한국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그런 기술을 만들어냈지? 그러면 총알값 안 나갈 거 아냐."

유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술자리 남자들의 군대 얘기를 그대로 믿는 이 연상 남녀의 상식이 붕괴되어가는 꼴을 도저히 지켜보지 못할 것 같았다. 유나가 잠시 속으로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정리해 입을 열려던 순간, 누리가 빽 소리를 질렀다.

"싫어! 나 물총잡이 안 할 거임!"

어째서인지 누리는 진심으로 격렬하게 싫어하고 있었다.

"뒤에서 숨어서 물총으로 찍찍 거리는 건 싫다고! 싫어어어어어억!!!"

"그게 그정도로 싫어할만한 일입니까?"

라온이 바닥을 구르며 난동을 부리는 누리에 질색을 했다.

어제의 트러블은 방금 해결했지만, 오늘의 트러블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굴곡이 있었다.

"효율적으로나 합리적으로나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인선입니다만."

라온은 코어웨폰 박스에서 자신이 강력하게 주장한 무기, '워터건'을 들었다. 시안은 호기심 넘치는 얼굴로 라온이 집어든 워터건을 손에 쥐었다. 이리저리 만지며 금방 구조를 파악한 시안이 벽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그냥 마력을 집어넣고 방아쇠를 당기면 끝이네? 이건 나도 쓸 수 있겠다."

시안은 제 마력을 불어넣었다. 손끝에 아주 희미한 푸른 마력이 총열로 흐르고, 총기의 몸통 옆 디스플레이에 붉은 안내 문구가 올라왔다.

- 현재 충전량 2%. 사격 불가. 마력을 더 충전하십시오.

"......."

시안은 총구를 잡고 라온에게 총을 건넸다. 라온은 제법 익숙한 자세로 총의 손잡이를 잡고는 저 멀리서 지나가는 슬라임을 향해 겨눴다.

"누리 양, 제 수속성 마력은 지금 약 15정도 될 겁니다."

- 충전 완료. 방아쇠를 당기십시오.

안내 음성이 나오자마자 라온이 방아쇠를 당겼다. 퓩! 바늘같은 물줄기가 총구 끝에서 쏘아져 슬라임을 맞췄다.

■■?!

부정형의 슬라임은 라온이 쏜 물줄기에 맞고 화들짝 놀랐지만, 라온은 침착하게 다시 마력을 장전해 방아쇠를 당겼다. 두 번, 세 번.

■■....

약 네 번의 사격 끝에, 슬라임은 코어만 남기고 터졌다. 라온은 시안이 제게 건넸던 것 처럼 총을 누리에게 건넸다.

"일단 한 번 해보십시오. 저보다 얼마나 더 강한지."

"......."

누리는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면서도 순순히 총을 잡았다. 시안은 서서히 누리를 조련해가는 라온의 태도에 혀를 내둘렀다.

"사람이 정신줄을 잡으니까 어제랑 확연히 다르네."

"...길드장 님."

유나가 시안의 곁에 바싹 붙어 속삭이듯 물었다. 다행히 누리와 라온은 슬라임 수색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제 진짜로 라온 언니랑 술만 마셨어요?"

"응. 왜?"

"...아무것도 아녜요."

당당하기 이를데없는 대답에 유나는 쑥스러운 미소로 시선을 피했다. 어느새 누리는 새로 나타난 슬라임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총을 쥐는 자세나 태도가 불성실하기 짝이 없었지만, 충전되는 마력의 양 만큼은 팀원들 중 가장 높았다. 하지만 누리는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냥 경험을 쌓는 걸텐데 왜 저렇게 싫어하는 걸까요."

"유나야, 너 아까 누리 데려올 때 언니 봤다고 했지?"

시안의 말에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리 언니, 가온 씨가 물딜러거든. 수속성 원거리 B급 딜러."

"...? 그러면 더 잘 된 거 아녜요? 언니한테 조금 배우면 될텐데. 가족이니까 더 잘 배울 거 같은데요."

시안이 유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오묘해졌다.

"유나, 너 외동이지?"

"네."

"...그럼 모를 수도 있겠다."

시안은 헛웃음을 지으며 누리를 가리켰다.

"원래 자매 중에 어느 한 쪽이 압도적으로 뛰어나면, 다른 쪽은 그거에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거든. 이건 내 생각인데 말이야, 누리가 각성한 계기도 아마-"

콰아아앙!! 총구 끝에 맺혀있던 거대한 물방울이 대포처럼 쏘아져 슬라임을 덮쳤다. 슬라임보다 더 거대한 물대포가 슬라임을 형체조차 남기지 않고 휩쓸어버렸고, 라온은 그 파괴력에 감탄의 박수를 보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역시 누리 양은-"

"안 해."

누리는 곧장 코어웨폰 박스에 총기를 쑤셔넣었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칼을 들고 천장으로 치켜들었다.

"내 영혼이 외치고 있어. 나는 근딜을 할 운명이라고."

...언니와는 죽어도 같은 길을 걷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발현인지, 아니면 똥고집인지 시안은 모른다. 그러나 누리는 죽어도 근거리 딜러를 하고 싶어했다.

"그럼 어디 이번에도 킹 슬라임 상대를 제대로 해보시겠습니까?"

"흥, 내가 앞에서 떨면 나한테 총 쥐어주려고? 어림없어."

근접 딜러를 고집하려는 누리와, 그런 누리에게 원거리 딜러로의 시작을 제안하는 라온이 또 티격태격거리기 시작했다. 시안은 잠시 관자놀이를 손으로 짓누르가다가 손뼉을 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 E급 던전 도는 데는 횟수 제한 없으니까...."

시안이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

"아직 시간 많으니까 모든 경우의 수를 다 해보자고. 어느게 제일 좋을 지."

넷은 던전을 마저 공략해 킹 슬라임을 처치하고, 다시 던전 뺑뺑이를 시작했다.

1안. 누리의 제안에 따라, 김누리가 칼을 잡고 박라온이 총을 들었다. 결과는 실패. 누리는 슬라임 앞에서 다시 몸이 굳어버렸고, 결국 시안과 유나가 총과 스태프로 킹 슬라임까지 매타작하여 던전을 클리어했다.

2안. 라온의 제안에 따라, 김누리가 총을 들고 박라온이 창을 들었다. 결과는 실패. 라온은 슬라임을 처치하기는 했으나 킹 슬라임의 돌진에 다시 몸을 피해버렸고, 결국 시안과 유나가 총과 스태프로 응전하다가 누리가 물대포로 킹 슬라임을 터뜨렸다.

누리도 라온도 제 생각대로 되지 않는 공략에 기운이 빠져 좌절한 사이, 시안과 유나는 잠시 거리를 벌려 긴급 회의에 들어갔다.

"어떡하죠? 누리는 끝까지 칼을 들고 싶어하는 눈치던데."

"언니랑 비교당하기 싫다는 거지. 흠."

시안이 잠시 숨을 골랐다.

"당장 D급 던전 공략해서 길드 등록하려면 누리에게 총을 쥐어주는게 맞아. 길드 등록도 아주 수월하게 하고, 너도 아카데미를 계속 다닐 수 있게 될 거고."

"라온 언니가 D급 됐으니까, 한 명만 더 구하면 되겠네요."

"응? 무슨 소리야? 너.... 크흠! 그래, 그래."

명백히 말을 돌리는 시안의 태도에 유나가 새초롬하게 시안을 노려봤다.

"검사 결과 빨리 말해봐요. 끝까지 숨기려는 이유가 뭐에요, 대체?"

"...나 힌트 좀 많이 준 것 같은데?"

"모르겠으니까 당장 말하라고요."

"미안. 며칠만 더 기다려 줘. 미국에서 제대로 된 검사기 도착하면 그걸로 다시 재검할테니까. 그걸로 설명해줄게. 알았지?"

시안의 말에 유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화제는 라온과 누리에게로 돌아갔다.

"알겠어요. 그래서 길드장 님 안건은 뭐에요? 저한테 했던 것 처럼 그러실려고요? 응큼하게?"

"그 때는 불가항력이었다니까. ...이렇게 할 거야."

시안은 마도기어를 두드리며, 지친 라온과 누리를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될 때 까지 쥐어짠다."

"네?"

"원래 숙련도 올릴 때는 노가다가 답이야."

3안. 박라온과 김누리가 겁을 먹지 않게 될 때 까지 굴리고 굴리고 또 굴린다.

그들은 그 날 자율주행택시가 끊기는 막차 시간까지 E급 슬라임 던전을 쉬지않고 돌았다.

천안에 도착한 2월 4일 저녁. 서서히 누리가 칼질에 익숙해졌다.

그 다음 날인 2월 5일 오전. 라온이 아주 조금씩 보스의 공격을 능숙하게 피해냈다.

드디어 2월 5일 수요일. 저녁 8시.

시안은 눈가에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상태로 유나에게 물었다.

"오늘로 몇 번째지?"

"...98번째에요."

쿵. 유나의 말과 동시에 갓 슬라임이 쓰러졌다. 온몸이 갓 슬라임의 사체에서 튄 점액질로 가득한 라온과 누리는 영혼없이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코어를 회수하고 보상을 챙겼다. 시안은 코어를 챙겨 바닥에 벌러덩 누운 누리를 가리키며 질색했다.

"던전 내에서 같은 괴수를 잡으면 '~~살해자'라는 업적이 생기지. 우리가 몰라도 시스템은 알아서 누적계산을 해주니까."

"기준이 200마리 잖아요."

"그래. 우리가 대충 100번 돌았다 치고, 그럼 그동안 2000마리에 가까운 슬라임을 잡았잖아?"

시안은 바닥에 누워 업적을 달성해 기뻐하는 누리를 보며 치를 떨었다.

"그럼 슬라임 200마리 잡는데 사흘이나 걸린 걸 빨리 끝났다고 기뻐해야하는 걸까?"

"저한테 묻지 마세요."

유나도 살짝 날카로워져 있었다.

"업적 딸 때 까지 집에 못 간다고 한 건 길드장 님 이셨잖아요."

"그랬지."

최초의 등장 이후 두 번째로 등장한 갓 슬라임이 쓰러지고도 어느덧 20초.

앞으로 10초면 사라질 슬라임 던전에 유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라온은 머리칼에 절은 땀을 털어내고, 누리는 칼면에 손가락을 쓸며 멋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시안은 그 모습을 보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바로 D급 고블린 던전 가자."

세 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동시에 던전이 무너졌다.

박라온 ['업적' 달성! <슬라임 살해자>]

김누리 ['업적' 달성! <슬라임 살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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