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867화 (867/1,497)

EP.867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1권 014

한 시간 뒤.

"서브 코어요?"

"그래."

시안은 마구 헝클어진 머리를 어떻게든 정돈하며 라온을 노려봤다. 라온은 한결 여유로워진 얼굴로 유나에게 제 하복부를 가리켰다.

"'단전'이라고 아십니까?"

"아뇨? 던전?"

유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즉답했다. 시안은 커피를 마시며 되물었다.

"너 단전 몰라? 중국 사극 드라마 보면 가끔 나오는 거 있잖아. 그럼 설명 더 복잡해지는데. 혹시 '환골탈태'는 알아?"

"...잠시만요. 지금 말씀하시는 단전이라는 게 혹시 그거 말하는 거예요?"

유나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쳤다.

"무협지에서 나오는 것처럼 상중하단전에 마력을 쌓아 경맥에 굳은 마력을 일깨운다는 그 '단전론'? 근거도 없고 근거라고 가져온 자료도 조작이라고 판명났잖아요."

"아이디어는 그대로 남아있었지."

시안이 상체를 숙이며 소리를 낮추었다. 자연스레 유나와 라온도 고개를 앞으로 밀며 귀를 기울였다.

"사장된 이론이라고 하더라도 구상 자체는 제법 재미있었단 말이야. 그래서 미국에서도 연구를 시작했어. 한 3년 가까이 중국 무술 서적을 끌어모아서 직접 번역까지 해가며 자료를 긁어모았지."

"그래서요?"

"실패했어. '대외적으로는'."

유나는 그제서야 시안의 말을 깨달았다. 그가 저렇게 말할 때는 무슨 의미로 저렇게 말하는 지 유나는 알고 있었다.

"연구해서 성공하셨군요?"

"내가 아니고 내 지인이. 서로 비슷한 연구 결과 하나씩 주고 받았는데, 그 녀석이 학술지에 등록도 안하고 요절하는 바람에 졸지에 나밖에 모르는 이론이 되어버렸어. 저작권자가 사라진 거지. 흐흐."

"......저기요? 길드장 님?"

유나가 눈을 찡그리며 시안을 노려봤다. 시안은 무안한듯 볼을 긁적거렸다가, 곧장 라온의 하복부를 가리켰다.

"아무튼 그래서 묵혀두기도 아깝고, 모처럼 들어온 A급 이능력자 그냥 떠나보내기에도 아쉽잖아. 그래서 다른 방법을 썼지."

"떠나간다니, 무슨?"

"그건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라온은 어젯밤 느꼈던 자신의 심정을 그대로 토로했다.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생각해 모든걸 포기해버리려던 찰나, 시안이 나타나 제게 새로운 길을 제안했었다.

"물론 듣고 나서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이 사람을 믿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예전에 제 팀의 동료들이 그러더군요."

라온은 결연한 미소로 말을 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믿어준다면 그 신뢰에 보답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입니다. 시안이 저를 믿기로 했으니, 저도 시안을 믿고 따를 뿐입니다."

"시안?"

유나는 둘을 번갈아봤다. 라온이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화들짝 놀라고, 당사자인 시안은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어제 한 잔 하면서 좀 편해졌거든."

시안은 사무실 구석 쓰레기통에 처박아둔 맥주캔을 가리켰다. 안주까지 챙겨 거하게 먹기라도 한듯, 마른 오징어나 땅콩을 포장한듯한 비닐들이 함께 들어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유나 선배님 덕분입니다. 위계를 중시하던 곳에서 지내다 보니 그 경험에 비춰 애써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유나 선배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친해지기로요. 그런 의미에서...."

라온은 쭈볏대며 유나에게 물었다.

"유나...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건 당연히 되는데 존대는 계속 하실 거예요?"

"...이건 제 습관같은 거라. 열심히 고쳐보겠습니다."

그 정도로 충분하다. 유나는 조금이라도 마음을 연 라온에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고, 시안은 사이가 좋아진 둘을 보며 푸근한 미소를 짓다가 다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지금 라온의 코어는 하단전에 만들어졌어. 유나 혹시 차에 대해 좀 알아? 자동차로 치면 하이브리드 같은 거야."

"......?"

"쉽게 말해서 심장의 코어에 저장되는 마력이 기름이라고 한다면, 단전의 코어에 저장되는 마력은 전기인 셈입니다. 연료가 다른 거죠."

"그럼 어떻게 마력을 쌓아요?"

유나의 의문은 당연했다. 마력은 다양한 방법으로 코어에 축적시키는 게 가능했지만, 가장 간단한 방법은 자연에 흐르는 마력을 숨을 통해 몸에 저장하는 것이다.

"마력을 산소처럼 코어에 저장해 혈관에 돌리는게 이능력자가 마력을 사용하는 방법이잖아요."

"그래. 근데 이 방법도 마찬가지야. 심장이 아닌 다른 곳에 코어를 두고, 혈관이 아닌 다른 곳으로 마력을 전도시키는 거지."

시안의 설명에 라온이 손을 들어 마력을 방출했다. 아랫배가 반짝이며 척추를 타고 흐른 마력이 손끝에 모여 희미한 녹색빛을 일으켰다.

"이 방법의 핵심은 혈관 대신에 뼈를 타고 흐르도록 하는 거야. 당연히 기존의 방식과는 다르지. 하지만 라온 씨는 성공했어."

"저는 골반 상부에 서브 코어를 만들었습니다. 이제 막 쌓아나가는 중이고 출력도 아주 적기 그지없지만, 그래도 예전의 마력까지 성장할 수 있다면 저는 얼마든지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저도 만들래요, 서브 코어."

유나의 말에 둘이 식겁하며 손을 휘저었다.

"저, 저는 심장의 코어가 망가졌기에 시안의 제안을 받아들인 겁니다. 몸에 코어가 두 개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심장의 코어는 말라 비틀어진다고 하더군요."

"그래. 부작용이 심한 방법이야. 거기에 합병증도 있을 수 있어."

"합병증요?"

"골다공증."

유나가 탄식했다. 인체에 기존에 있던 혈관 대신에 뼈에 마력이 흐르는 통로를 만드는 셈이니, 자연히 구멍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언니, 진짜 괜찮아요?"

"물론입니다. 저는 제 능력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그정도 고통은 감수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은데. 유나는 골다공증으로 고생하는 제 어머니를 떠올리며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라온의 저 밝아진 표정을 보고 대놓고 무어라 말하기는 너무 미안했다.

"축하해요. 그러면 이제 언니 예전처럼 A급 되겠네요."

"그건 아냐. 서브 코어의 한계는 어디까지나 B 수준이라, 아무리 노력해도 성장 한계는 70이랬어."

"그래서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어차피 전성기의 수준을 되찾을 거라고는 바라지도 않았으니 70이라도 감지덕지죠. B급 거의 끝자락 아닙니까."

라온이 두 주먹을 불끈쥐며 파이팅 포즈를 취했다. 유나는 그게 애써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 같아 안쓰러워졌다.

'등급이 괜히 나눠져있는게 아닌데.'

각 등급의 경계는 고작 1차이지만, 그 1차이는 하늘과 땅 수준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89A급 10명이 몰려와도 90S급 못이기는 것처럼.'

유나는 속마음을 삼켰다. 어쨌든 라온은 마력과 자신감을 되찾았다. 협회에 재검을 신청하면 길드 등록도 가능해지리라.

"이제 궁금증은 좀 풀렸니?"

"어느 정도는요."

말 그대로 '어느 정도'는.

유나는 아직도 방안을 채우는 시큼한 냄새와 천장 히터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열기, 그리고 어제보다 훨씬 가까워진 둘의 관계에 이런 저런 질문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괜한 오해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유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걷었다.

"그러면 일단 청소부터 하죠. 사무실이 계속 이래서야 오는 손님도-"

"유, 유나야."

쓰레기통으로 다가가려는 유나를 시안이 다급히 일어서서 불러세웠다.

"청소는 우리가 할테니까, 누리 좀 데려와줄래?"

"누리요?"

시안은 마도기어로 누리의 고등학교 중계 영상을 가리키며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얘 지금 학교에서 탈출 못할 것 같아."

누리의 고등학교 주변에는 인파로 가득했다.

* * *

<그 시각. 신서울여자고등학교 보건실>

"아, 그러니까 김누리 학생 오늘 조퇴했다니까!"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지금 학교 주변에 길드원만 수 백명이 깔렸습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해요?! 이 판에 그러면 정상적으로 하교 할 수 있겠어요?"

보건교사 최은영은 창 너머를 가리키며 소리질렀다. 이미 학교는 외부인의 발길로 쑥대밭이 되어 난리통이었다.

단축 수업 동안 교실에서 모여 현재 최고의 가십거리를 뜯는 학생들, 학기를 마무리하고 봄방학을 기다리던 교사들, 사고가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던 관리자들, 그리고 학교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능력자'들.

그들이 한데 어우러져 빚어낸 혼란은 화장실을 간다던 김누리의 행방불명으로 시작되었다.

"마지막으로 김누리 양이 왔던 곳이 보건실이라고 했습니다. 잠시 협조부탁드립니다."

"협조? 협조는 무슨. 여기 여고에요. 여학생 쉬는 곳에 어딜 들어오려고 그래?"

최은영은 보건실 입구를 가로막고 성질을 부렸다. 남자는 오히려 최은영을 위협하듯 한발자국 다가갔다.

"정 문제가 된다면 신고하십시오. 저는 길드장께 김누리 학생과 이야기를 하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최은영은 남자의 옷깃에 걸린 소나무 문장의 배지를 보며 이를 갈았다. 일개 여고의 보건교사가 막기에는 너무 뒷배가 대단한 사람이었다.

"......없으면 어떻게 할 거에요?"

결국 최은영이 한발자국 물러섰다. 남자는 정중한 태도로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지금 먼저 사과드리고, 추후 정식으로 다시 한 번 더 사과드리겠습니다."

이이상은 막을 수 없었다. 남자는 철옹성같은 보건실에 구둣발로 들어와 안을 하나하나 살폈고, 결국에는 가림막으로 가려둔 침대까지 샅샅이 확인했다.

"...죄송합니다. 여기에 있다고 학생의 제보를 받아서."

김누리는 없었다. 남자는 최은영이 무어라 말할 때 까지 허리를 숙였다. 최은영은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며 보건실 출구를 가리켰다.

"됐으면 나가요. 당장."

"실례했습니다."

남자는 바깥으로 나갔다. 따라들어오려던 부하들을 손으로 제지한 그는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이며 보건실의 문을 닫았다.

예의바른 행동이지만 그 목적이 고까워, 최은영은 좋게 봐줄래야 좋게 봐 줄 수가 없었다.

"애 납치하듯 데려가서 경매내놓듯 길드한테 들이밀거면서 무슨 신사적으로 대하겠다고...."

다행히 남자가 보건실에 온 이후로 뒤따라 들어오는 이능력자는 없었다. 온갖 길드의 방문 예고에 협회는 미리 선수를 치고 대표단을 파견했고, 아주 소수의 인원만 복도를 활개하며 누리를 찾고 있었다.

최은영은 의자에 주저앉아 흐트러진 안경을 치켜올렸다.

"...그래서 이제 어쩔 셈이야. 오늘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아르바이트 가야한다고 막 밀치면 소용 없겠죠?"

철제 캐비넷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최은영은 혹시나 밖에까지 들렸을까봐 노심초사하며 숨을 골랐다.

"그냥 마도기어로 문자 보내면 되잖니."

"혹시 모르잖아요. 제 마도기어 해킹해서 어딨는지 파악할 수도."

"그러면 진작에 걸렸겠지. 걱정도 팔자다."

덜컹. 캐비넷 속에 숨어있던 누리가 몸을 뒤척였다. 머리를 부딪히기라도 한 건지, 철제 문 틈으로 시름소리가 들렸다.

"씨댕, 존나 아파...."

벌써 캐비넷 안에 숨어든지도 30분째. 다행히 아직 하교 시간은 되지 않았다.

덕분에 차마 학교를 이잡듯이 뒤질 수는 없었는지 눈으로만 대충 파악하고 떠났지만, 학생들이 모두 빠져나간 방과후에는 본격적인 누리 탐색 작전이 시작될 것이다.

"너 왜 하필 여기로 왔니...?"

"씨이, 담임부터 저를 상담실에 감금시키려 했다고요. 안에 협회 꼰대 같은 사람도 있고."

"그래서 여기로 도망쳤다?"

"쌤은 그래도 저랑 말이 잘 통하잖아요. 으히히."

최은영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적당히 퇴근 시간 전까지 일을 하다가 집에가서 드라마나 볼 생각이었는데, 학생 한 명 때문에 그게 모두 어그러지게 생겼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최은영은 제 궁금증을 풀기로 했다.

"너 방학 때 무슨 일을 겪었길래 각성한 거야? 작년 겨울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는데."

"저도 몰라요."

"진짜 그거네. '자다가 일어났더니 내가 S급?' 후후."

"쌤도 U튜브 봐요?"

최은영은 한결 편해진 누리의 목소리에 키득거렸다.

"뉴스에서도 난리잖니. 한국 최초 어둠속성 S등급."

"지금은 수속성 각성자예요. 지내다보면 암속성 마력도 깨우치게 되겠지만-"

드르륵. 다시 보건실의 문이 열렸다. 누리의 목소리는 곧장 끊겼고, 최은영은 화난 척을 하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보세요, 지금 무례하고 노크도 없이 무슨.... 김가온?"

"오랜만이에요, 쌤. 제 동생 찾으러 왔는데요."

문밖에는 누리보다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 더 큰 키의, 누리와 똑 닮은 여자 이능력자가 서있었다. 누리보다 약간 젖살은 빠져있었다.

덜커덩! 누리가 철제 캐비넷을 박차고 튀어나왔다.

"어, 언니? 여긴 어떻게?"

누리의 친언니, B급 이능력자 김가온은 좌우를 살피며 바깥을 가리켰다.

"엄빠대신 내가 너 챙기러 왔지. 쌤, 아직 개구멍 살아있어요?"

"그거 아는 사람 너말고는 없을 걸?"

가온은 눈을 번뜩이며 누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야, 민폐 덩어리. 일어나."

"......대한민국의 미래님께 무슨 망발을."

누리는 툴툴거리면서도 가온의 손을 잡았다. 두 자매는 재빨리 복도를 달리며 사라졌고, 최은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다시 앉았다.

"정말 난리다, 난리야."

이미 포털의 검색어 순위는 김누리에 관한 내용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 * *

<잠시 뒤, 김가온의 소형차.>

"언니 어떻게 온 거야? 길드는?"

"알게 뭐야. 나보고 너 잡아오라더라."

누리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가온은 안전벨트를 풀며 도망치려는 누리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그래서 그냥 튀었어. 아빠 다치게 할 때부터 마음에 안들었는데 잘 됐지."

"...아빠는? 병원에 계시잖아. 사람들 찾아가고 그러지 않아?"

"엄마가 옆에 계셔. 그러니까 넌 네 걱정이나 해."

끼익. 붉은 정지 신호에 가온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어느새 차는 그들의 다세대주택, '가온누리'에 도착했다.

"일단 집에 들어가있어. 나는 엄빠 모셔올게. 어제 예상한 것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니까, 우선 집에서-"

"언니. 미안. 나 갈 곳이 있어."

누리는 곧장 차에서 내려 앞으로 달려갔다. 가온이 놀라 차에서 내리려했지만, 곧 옆에서 튀어난 갈색 단발의 여인과 누리가 합류하는 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야!!"

탕! 가온은 차를 정차할 겨를도 없이 운전석에서 내렸다. 곧 누리에게서 전화가 걸렸다.

[나 안전한 곳에 피신해있을테니까, 좀 있다가 연락할 게!]

"뭐?"

삑. 누리의 전화는 일방적인 통보만 전하고 그대로 끊어졌다. 가온이 황당함에 콧방귀를 뀌던 찰나, 뒤에서 빵빵거리는 경적소리가 들렸다.

"야아아아아! 도로에 전세냈냐아아아아!!"

젊은 남성의 성난 목소리에 가온은 혀를 차며 운전석에 다시 앉았다.

"짜증나게 진짜...."

집보다 더 안전한 곳이 어딨다고. 가온은 골목을 한 바퀴 빙 돌아 주차장에 세웠다.

"김누리, 돌아오기만 해봐. 죽었어."

그리고 누리는 던전에 간다는 전언만 남긴 채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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