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866화 (866/1,497)

EP.866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1권 013

박라온.

히어로 길드 <천군>의 톱 에이스 딜러. 길드의 단장인 S급 히어로 <단군>의 아래, 박라온은 길드 내 최강의 딜러로서 삼사(三師) 중 하나인 <운사(雲師)>라는 이명을 받았다. 성장 한계치는 비록 A급 초입이었으나, 뛰어난 전투 센스와 특별한 이능력 덕분에 그는 길드의 무한한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 부질없는 과거일 뿐.'

라온은 사무실 소파에 누워 천장의 얼룩을 새며 시간을 보냈다. 아까 카페에서 워낙 부끄러운 짓을 저지른 바람에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았다. 살면서 그렇게 감정을 드러낸 적이 얼마나 있었나싶을 정도로 라온은 펑펑 울었다.

'안 쫓겨나서 다행이다.'

사실상 쓸모가 없는 이능력자임에도 불구하고, 길드장인 시안은 라온에게 사무실을 내어주었다. 라온이 원한다면 사무실 인근의 방이라도 구해줄 기세였지만, 라온은 차마 거기까지 부탁할 수 없었다.

'원거리 공격도 못한다.'

카페에서 시안이 라온에게 한 그 말 소위 말하는 '팩트'나 다름 없었지만, 그 팩트에 폭격당하는 라온은 치명상을 입었다.

비록 이전에 퇴물이니, 한물갔니, 그냥 히어로 때려치고 다른 일이나 알아보라니 하는 말보다 훨씬 나았지만, 최후의 안식처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주륵주륵 흘렸다.

시안의 잘못이라면 그저 타이밍이 나빴다는 것.

'앞에서 탱커로 쓸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딜도 누리보다 못 해. D급 던전 들어가면 또 몸이 얼어버릴 거다.'

이성은 냉철하지만 몸은 항상 전투의 긴장감에 굳어버렸다. 라온은 병아리 이불 속에서 생각에 잠겼다.

'내일 떠날까.'

당장의 숙식을 제공받고 있지만 라온도 염치라는 걸 아는 사람이다. 라온은 집도 없는 제 상황을 은연중에 어필하여 동정을 샀고, 이제는 그런 자신의 행동에 자괴감이 들었다.

접수원으로 받아들여달라고 애걸복걸 해볼까. 아니면 옛 지인들을 찾아가 빌붙어 살기라도 해야할까.

밤은 깊어지고, 라온의 생각도 꼬여만 갔다.

끼이익-

"......!"

라온은 숨을 죽였다. 마력은 비록 잘 움직이지 않지만, 감각은 날카롭게 살아있다. 방금 전의 그 소리는 분명 1층 계단의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저벅,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라온은 주먹을 불끈 쥐며 아주 조금씩 마력을 끌어올렸다. 극히 희미하지만 일반인을 제압할 수준 까지는 충분했다.

'한 명.'

철컥. 철컥. 끼이익-

"......?"

열쇠 소리? 라온은 잠금장치가 돌아가는 쇳소리에 눈을 끔뻑거렸다. 라온은 절로 상체를 일으켰다.

끼이익.

"......안 주무셨어요?"

"길드장님?"

밤 11시. 시안은 온갖 난방 용품을 들고 사무실에 돌아왔다. 라온은 황급히 병아리 이불을 개며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자는데 방해했나요?"

"아니요, 아직 안 자고 있었습니다."

"잘 됐네요."

시안은 양손에 쥔 장바구니를 사무실 구석에 놓고 간접 조명을 켰다. 주황색 전등이 은은한 불빛을 뿜으며 사무실을 비췄다. 라온은 살짝 옆으로 쓰러진 장바구니에서 흐른 물건을 보고 난색을 표했다. 편의점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쓸어오기라도 한 듯 온갖 세면용품이 가득했다.

"길드장님, 이건...."

"라온 씨 방 구하기 전까지 얼마나 걸릴 지 모르니까요. 마음같아서는 어디 호텔에 보내고 싶은데, 그건 라온 씨가 거절했잖아요. 당분간은-"

"길드장님. 죄송합니다."

라온은 시안의 말을 끊었다. 숙여진 고개는 올라가지 못했다.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배려에는 감사드립니다만, 저는 더이상 이 길드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털썩. 시안이 막 믹스커피를 타려고 들어올린 종이컵을 떨어뜨렸다. 어두운 와중에 동그랗게 뜬 푸른 눈동자는 마치 올빼미 같았다. 시안의 입술이 벌벌 떨렸다.

"가, 갑자기 왜요?"

"......저도 염치란 게 있으니까요."

"아, 아까 카페에서 우신 것 때문에요?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어요. 그건 제가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라온은 고개를 들고 차렷자세로 섰다.

"물론 부끄럽기야 합니다만, 제가 길드 가입을 철회하려는 건 전적으로 제 무능 탓입니다."

"잠시만요. 설마 아까 탱커 얘기 때문에 그런 건가요?"

"그것도 있습니다만, 역시 저는 어쩔 수 없는 퇴물인가 봅니다. 이미 길드장님도 저에 대해 파악하셨지 않습니까? 코어가 깨져서 더이상 전장에 설수도 없고, 괴수만 보면 벌벌 떠는 겁쟁이. ...이제 은퇴할 때가 된 거죠."

"그렇지 않습니다. 라온 씨, 지금까지 계속 코어 복구하려고 노력하셨잖아요?"

시안의 말에, 라온은 어깨가 축 처졌다.

"이제 지쳤습니다. 길드장님, 그거 아십니까?"

라온은 제 심장-코어가 자리잡았던 위치를 가리켰다.

"지금도 제 코어는 마력을 쌓기는 커녕 점점 부서지고 있습니다. 한 번 생긴 균열은 아무리 노력해도 복구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히어로로 활동하면서 모아둔 돈, 전부 어디에 쓰신지 아십니까?"

"...재활에 쓰셨죠."

"예. 맞습니다. 다치고 난 뒤로 이능력자 전문 병원을 드나든 횟수만 아마 백 번은 훨씬 넘을 겁니다."

라온은 비통한 심정으로 그간의 고충을 토로했다.

"처음에는 <천군>도 저를 어떻게든 다시 복귀시키려고 노력했죠. 그러다 팀 하나가 전멸당하고, 저만 살아남았습니다. 저는 제발로 길드를 나와 치료에 전념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습니다."

"아직 전세계에 코어가 깨진 사람이 복구되었다는 이야기는 없었죠."

"네. 차라리 어디 해외에서 좋은 소식이라도 있었으면 진작 비행기를 탔겠지만, 저처럼 코어가 깨진 이능력자 중 그 누구도 다시 이능력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없었죠. 다들 이능력자가 아닌 삶을 살아가거나-"

"변해버린 삶에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시안은 굳은 표정으로 라온의 말을 끊었다. 낮게 가라앉은 시안의 목소리에는 '설마'하는 의심의 기운이 역력했다. 라온은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그런 선택을 하지는 않습니다. ...생각은 해본적이 있지만, 그럴 용기가 없습니다."

"그건 용기가 아녜요. 포기지."

제법 단호하기까지 한 시안의 말에 라온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시안도 자신이 내뱉은 말에 더 말을 잇지는 못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라온은 다시 허리를 숙였다.

"아무튼 감사했습니다. 잠시나마 다시 던전에 들어갈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그러면 라온 씨, 이제 어떻게 하시려고요?"

"...염치불구하고 딱 한 번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라온은 무릎까지 꿇을 기세로 쭈뼛대며 시안에게 부탁했다.

"오늘 하룻밤만 여기서 재워주십시오. 그동안 어떻게 할 지 고민을 하고 싶습니다."

시안은 간절한 라온의 부탁에 살포시 웃으며 답했다.

"싫은데요."

"......."

라온은 말문이 막혔다. 너무나도 단호한 그 대답에 라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칼같이 끊어내는구나. 시안이 손가락을 튕겼다.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저는 라온 씨가 떠나가는 거 싫다는 거예요. 라온 씨 같은 베테랑을 어디서 또 이렇게 구하겠어요?"

"길드장님. 다시 말씀드리자면 저는-"

"만약에 마력을 다시 쌓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쩌시겠어요?"

시안이 라온의 지척까지 다가와 내려다봤다. 라온은 저도 모르게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다 벽에 등이 닿았다.

탁. 시안이 벽에 한 손을 올리며 시선을 맞췄다. 은은한 조명 아래 잘게 돋아난 팔의 힘줄이 라온은 절로 침이 꿀꺽 삼켜졌다.

"다시 한 번 물어볼게요.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B급 정도는 복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라온은 멍청이가 아니다. 시안이 무슨 의도로 말하는 건지 라온은 금방 눈치챘다.

"만약 그런 방법이 있다면 말입니다."

라온은 시안을 올려다보며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악마와의 거래라도 응할 것입니다."

"그래요? 그러면...."

조명을 등지고 선 시안은 짐승같은 사나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일단 옷부터 벗을까."

"네. 이러면 됩니까?"

"...? 자, 잠깐! 꺄아아악!!"

* * *

<2월 6일 오전 9시 40분. 신서울.>

유나는 사무실에 출근을 하기 전, 근처 빵집에 들려 샌드위치를 세 개 샀다. 아직 용돈을 받고 사는 유나에게는 제법 큰 지출이었지만, 슬라임 던전을 공략하고 난 첫 회식에서 라온이 보인 식성은 대단했다.

'그런데 어떻게 몸을 그렇게 유지하는 거지.'

유나는 목욕탕에서 본 라온의 몸을 떠올렸다. 올림픽 경기에서나 보던 육상선수 같은 근육질의 몸은 이능력자 중에서도 흔치 않았다.

'그에 비해 나는....'

유나는 1층 후안의 카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몸을 확인했다. 조금 큰 베이지색 코트 아래에 가려진 유나는 제 몸이 어느정도 수준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됐어. 알아봤자 뭐해.'

"후우."

차가운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며 심호흡을 한 유나는 곧장 사무실로 올라가는 철문을 열었다. 초인종과 같은 낡은 경첩 소리에 유나는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흥, 흐흐흥~♪♬"

계단을 오르는 순간도 즐겁다. 길드에 들어오기로 한 설 날부터 유나는 길드로 오는 매일매일이 새롭고 설레었다. 비록 오늘은 시안 말고도 라온이 있겠지만-

킁킁. 유나는 코를 찌르는 악취에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이 냄새.'

처음 맡아보는 냄새였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조금 '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맡아봤더라. 유나의 기억에는 현장실습으로 남해에 갔을 때 봤던 오징어 괴수의 시체 냄새를 떠올렸다.

시큼하고 습한 기운의 냄새. 문제는 그 냄새가 계단을 올라갈수록 더 심해지고, 코를 마비시키는 냄새의 근원지가 사무실 안이라는 점이었다.

'이 언니 이 안에서 뭘 한 거야?'

어쩌지. 어느덧 시간은 9시 50분에 이르렀다. 앞으로 5분만 있으면 시안은 코트 차림으로 사무실로 들어올 것이다. 유나는 사무실에 방향제가 있나 잠시 고민하고 문을 열었다.

끼이익. 사무실 문이 반쯤 열렸다. 유나는 입구 바닥에 널브러져 자신을 맞이하는 검은 색 코트에 숨이 막혔다.

시안의 코트였다. 그것도 어제 입었던.

킁킁. 유나는 다시 냄새를 맡았다. 역한 냄새에 코가 마비되어있으면서도, 유나는 희미하게 남아있는 시안의 향수 냄새를 맡았다.

'설마.'

20대 후반의 젊은 남녀. 유나가 아직 모르는 농후하고 끈적한 어른의 세계. 유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사무실 문을 반의 반쯤 닫았다.

'진짜로?'

타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터치할 게 아니다. 특히 그것이 사랑을 나누는 행위라면 더더욱 사생활을 존중해줘야 했다. 역시 외국에서 온 사람이라 그럴까. 그쪽으로는 상당히 개방적인 사람인가보다.

울컥. 샌드위치를 담은 종이가방이 구겨졌다. 유나는 자신이 왜 울컥했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목욕탕에서 보았던 라온의 몸이 눈에 떠올랐다.

끼이이이익.

유나는 망설임없이 사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창문이 열려있었는지 안에 있던 차가운 공기가 사무실 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꿀꺽. 유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참상에 침을 삼켰다. 휴지든 물티슈든 닦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동원해 바닥을 쓸었는지, 비닐봉지 대여섯 개에 퀘퀘한 악취의 젖은 휴지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리고 유나는 보았다.

좁은 소파 위, 노란 병아리 이불을 함께 덮고 자고있는 시안과 라온의 모습을. 라온은 시안의 위에 몸을 겹치듯 거꾸로 누워있고, 시안은 몸을 오들오들 떨며 라온을 껴안고 있었다. 라온은 시안의 가슴팍 위에 올리고 고개를 테이블, 유나가 서있는 방향으로 향한 채 숨을 고르게 쉬었다.

새근, 새근.

둘은 유나가 온 것도 모른 채, 아주 곤히 자고 있었다.

털썩.

유나가 손에 쥔 종이봉투를 떨어뜨렸다. 그 소리에 라온이 눈을 떴다.

"......."

"......."

둘은 아무말없이 시선을 마주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라온이었다.

"오셨습니까?"

"아, 네. 네."

담담하기 짝이 없는 라온의 목소리에 유나가 외려 당황했다. 마치 자신이 둘의 단잠을 깨운 것 같은 상황에 유나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는 사이, 라온은 시안의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침 식사는 하셨습니까?"

"네, 네. 저기, 길드장 님이랑 무슨...."

유나의 시선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시안과 라온을 번갈아봤다. 명백히 오해를 사기 좋은 상황임을 깨달은 라온은 흐트러진 제 잠옷을 단정히 정돈하며 슬리퍼를 신었다.

"흐아암."

라온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어제 눈이 부을 정도로 서럽게 울던 사람은 어디갔는지, 시계를 확인하는 라온의 태도는 느긋하기 그지 없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새벽 5시까지 깨어있었더니...."

'새벽 다섯 시!'

"일어나세요, 시안. 벌써 10시입니다."

'이름으로 막 부르기!'

"이런. 많이 지친 것 같군요. 하긴, 그렇게 열심히 청소를 했으니...."

'청소?!'

"어, 언니!"

유나가 빽 소리를 질렀다. 느긋한 걸음으로 냉장고로 향하던 라온이 걸음을 돌렸다. 유나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개져있었다.

"도, 도대체 사무실에서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둘 다!"

"......."

라온은 냉장고에서 플라스틱 컵을 꺼내 손에 쥐었다. 흙탕물처럼 가라앉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홀짝여 목을 축인 라온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유나를 향해 웃었다.

"뜨거운 밤을 보냈습니다."

"......."

유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라온은 속으로 키득거리며 여유롭게 유나에게 다가가 눈으로 시안을 가리켰다.

"정말 대단한 남자였습니다."

라온은 슬쩍 제 아랫배에 양손을 올리며 베시시 웃었다. 얼굴에 홍조까지 띄우는 모습에 유나는 코웃음을 쳤다.

"하."

그리고 유나는 졸도했다. 막 등을 돌렸던 라온은 커피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제게 새로운 코어를 만들어주신 정말 대단한...유나 선배님?!"

놀란 라온이 달려가 간신히 유나를 쓰러지기 전에 부축했고, 소란에 놀란 시안이 잠에서 깨어나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다 소파에서 굴러떨어졌다.

한 명은 기절하고, 한 명은 소파에서 굴러 떨어져 고통을 호소하고, 한 명은 어쩔 줄 몰라하며 전전긍긍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

2월 4일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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