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62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1권 009
이유나가 본격적으로 시안의 사무실에 출퇴근하기 시작한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사무실 데스크를 지키던 김누리는 겨울 방학이 끝나 마지막 급식을 먹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학교로 떠났고, 텅 빈 사무실에는 시안과 유나 둘 만이 남게 되었다.
- 저 28일까지 길드에 연수 신청 안 되면 퇴학이래요.
- 길드 신청 심사만 하루 걸리지 않아?
유나는 시안에게 제 상황을 알렸고, 시안은 길드 등록일에 대하여 2월 27일을 마지노선으로 잡고 다시 인재 영입에 박차를 가했다.
누군가가 다시 나타날 때 까지, 둘은 막간을 이용해 간단한 훈련을 하기로 했다.
<2025년 2월 3일 월요일, 오전 10시.>
"길드장님...너무 힘들어요...."
"참아."
"조금만, 쉬면 안 돼요? 흐윽!"
"쉬면 더 힘들 거다. 괜찮아. 조금만 버텨."
"너무 아프, 아흑!"
유나는 저릿저릿한 손목에 더이상 힘을 주지 못하고 총을 놓아버렸다. 시안의 두눈이 크게 확장되었고, 시안은 간신히 총을 붙잡는데 성공했다.
"휴우. 큰일날 뻔 했어."
"...죄송해요. 근데 그 총, 너무 무거운 거 아녜요?"
유나는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투정을 부렸다. 시안이 개조에 마개조를 거듭한 50구경 단발권총 'Triple Action Thunder'는 이미 권총이라고 부르기 힘든 수준에 이르렀다.
시안은 핸드캐논에 가까운 총을 오른 손으로 아주 가벼운 플라스틱 모델건처럼 휘둘렀다.
"쉐도우 드래곤의 갑주로 만든 총이거든. 개조했으니까 무게만 7kg 가까이 할 걸?"
"......어디서부터 딴지를 걸어야 할 지 모르겠어요."
유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금발의 외국인과 계약을 맺고난 이후, 유나는 하루에 한숨을 내쉬는 빈도가 이전보다 훨씬 잦아졌다. 바로 지금처럼 상식을 벗어나는 발언을 하거나 뜬금없이 폭탄 발언을 하는 경우, 유나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쉐도우 드래곤이면 그거 잖아요. 환마룡(幻魔龍). 다저스 게이트에서 나온 S급 괴수 중 하나."
"최초로 등장한 영체(靈體)형 괴수. 이건 그 녀석의 갑주를 녹여서 만든 권총이야."
환마룡의 갑주를 구했다는 걸 지적해야할까, 아니면 그걸 재료로 만든게 총이라는 걸 지적해야할까. 유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말 길드장님이랑 있으면 머리가 아파지네요."
"난 밤새 네 생각으로 미쳐버릴 것 같은데."
뜬금없는 시안의 사랑고백에 유나는 잠시 얼굴이 붉어졌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또 빈말이죠?"
"...오해한 것 같은데, 나 네 생각 하는 건 진짜야. 여태까지 살면서 너같은 이능력자는 처음 봤거든."
"네, 네. 그러시겠죠. 포션보다 못하고 슬라임을 스태프로 때려잡고, 남의 총으로 던전 클리어하고도 D급 못 오른 이능력자는."
유나는 툴툴거리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1층 카페에서 주문해 가져온 유자차는 아직 따스하게 온기가 남아있었다. 유나가 시안을 노려보며 말했다.
"사기꾼."
"......그래서 계약 물릴 거야?"
시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유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위약금도 없어요. 세상에. E급 상대로 연 3천을 지르는 길드가 어디있어요? 저 아카데미 학부생 짤리면 그 때도 계속 쓰실 거예요?"
"당연하지. 너 후회할 걸? '아, 그 때 위약금 10배를 물어서라도 재개약을 했어야 하는데에에에!!!' 하고 말이야."
제법 리얼한 성대모사에 유나는 경멸어린 표정을 지었다.
"저 21살이거든요? 3억이 뉘집 개이름인 줄 알아요?"
"아. 좋은 생각이야. 나중에 사무실에 동물 들이면 이름은 돈으로 하자. 만원이 어때?"
"...내가 말을 말아야지."
평소에 하는 짓이 급식인 김누리보다 더 어려보인다. 유나는 속으로 진짜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설날의 저녁을 떠올렸다.
"......."
그 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던 날. 그 누구도 제 편을 들어주지 않아 마음이 꺾일뻔한 순간에 이 남자만이 유일하게 제 손을 잡아주었다.
두근, 두근. 가슴이 콩닥거리지만 그에게 시선을 돌린 순간 열기는 금방 식어버린다. 뭍에 나온 낙지처럼 책상위에 늘어진 모습을 볼때마다 유나는 제 눈이 삐었나 의심이 들기도 했다.
"만원이. 흐흐. 아니다. 이왕 하는거 십만원으로 할까? 아냐 더 올리자. 백만원이! 백...백.... 끄으으응!!"
시안이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개를 책상에 처박았다. 유나는 냉장고로 걸어가 미리 잘라놓은 과일을 꺼내 접시에 담아 시안의 옆에 올렸다.
"배 좀 드세요."
"배? 배...ㄱ. 백. ......하아. 그래."
드디어 시안이 진정했다. 유나는 쟁반을 안고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고민하시는데요?"
"유나야. 너 살면서 올백 받아본 적 있어?"
"갑자기?"
유나의 반문에도 시안의 표정은 진지했다. 유나는 제얼굴에 금칠하는 것에 부끄러웠지만, 일단 사실은 사실이었기에 제 성적을 그대로 밝혔다.
"고등학교 3년동안 한 네 번? 기말 세 번이랑, 6월 모의고사 만점 받았어요. 수능 때는 하나 틀려서 못 받았고."
"......대단한 건가?"
유나는 진심으로 울컥했다.
"저 히어로 아카데미 안들어갔으면 신서울대학교 마도공학부 차석이었거든요?!"
"뭐야, 그런 지잡대. 들어본 적도 없어."
"?!?!?!?!?!?"
제 모교는 아니지만, 모교가 될 뻔한 대학을 무시하는 처사에 유나는 얼척이 없었다.
"길드장 님은 그러면 얼마나 대단한 대학 나오셨는데요?"
"......."
시안은 입을 꾹 닫았다. 명백히 대답하기 싫어하는 눈치에 유나는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시안을 비웃었다.
"흥. 됐어요. 더 안 물어볼게요."
"...아니. 네가 말한 대학이라는 거, 대학원도 포함하는 거야?"
흠칫. 유나가 발걸음을 멈췄다. 시안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볼을 긁적거렸다.
"일단 스탠포드에서 학부 끝냈고, 하버드에서 대학원 조기졸업했지."
"......길드장 님 올해 나이가?"
시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두손을 들어올렸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나이를 세는게 꼭 어린아이같았다.
"내가 00년 10월생이니까, 올해 한국 나이로 26인가?"
"......진짜면 길드장님 진짜 축복받은 뇌를 가지셨네요."
유나가 질렸다는 듯 혀를 차자, 오히려 시안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그걸 네가 말하면 안 되지. 나따위랑 비교하면 너는.... 아니다. 됐어. 내가 비참해지니까 그만 말하자."
시안은 다시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구시렁거렸다. 유나의 청각이 제법 좋다는 것을 알게된 이후, 그는 입술만 움직이며 소리내지 않고 불만을 중얼거렸다. 유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설 연휴도 지났는데, 모집 공고 보고 오시는 분 있어요?"
"아니. 한 명도. 자꾸 누가 장난으로 자기 S급이니까 넣어달라고 하는데, 정말 같잖아서. 유나야, 나중에 혹시 사무실 전화 생기면 이 번호는 차단해. 알겠지?"
"저 이능력자로 계약한 거지, 사무보조로 등록한 거 아녜요."
유나는 툴툴거리면서도 순순히 시안이 넘긴 번호를 받았다. 차단, 등록 완료. 이제 이 번호로는 유나에게 그 어떤 연락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띵동. 밖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유나는 시간은 슬쩍 확인하고 눈을 좌우로 굴렸다.
"아직 점심 주문한 지 10분도 안 지났는데...?"
"유나야, 정리해줘."
시안은 어느새 책상에 널브러진 것들을 정리하고 구겨진 옷을 단정히 펼쳤다. 유나는 덩달아 마음이 급해져 사무실을 정돈했다.
똑똑똑. 노크 소리까지 들렸다. 그들이 점심을 주문하는 곳의 배달원은 항상 '식사 왔습니다!'하고 크게 소리치지, 저렇게 공손한 노크는 하지 않는다.
시안은 목을 가다듬고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어서오세...요?"
문밖에는 거지가 서있었다.
"누구세요?"
"......."
후드로 가린 얼굴 아래에는 수염이 덮수룩하게 나있었다. 유나는 실망감에 탄식을 금치 못했고, 시안은 난처한 미소로 볼을 긁적였다. 상대는 며칠 제대로 씻지도 못한 듯, 몸에서 퀘퀘한 냄새가 났다.
"어, 그러니까, 저기...."
"길드원 모집 공고를 보고 왔습니다."
"환영합니다. 커피 드실래요?"
시안은 반색하며 거지를 안으로 초대했다.
* * *
삑! 검사기가 거지의 마력을 읽어냈다. 시안이 몇 차례 쓰다가 터져버린 검사기의 후계로 새롭게 들여온 마력 검사기는 길드 가입 희망자의 마력을 빠르게 판정해냈다.
끼이익, 끼익.
검사기는 아래에서 길쭉한 프린트를 토해냈고, 시안은 그걸 느긋한 손길로 들어 쭉 읽어내려갔다.
"다른 건 차치하고 풍속성은 A급이시네요? 한계 성장치 76."
"...네, 전 A급입니다."
"다음으로 수속성은 72. 4만 올라가도 더블A가 되겠네요."
지원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안은 영 신통찮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왜 이런 곳에 오셨을까?"
움찔. 무릎에 손을 올리고 꼼지락거리던 지원자의 손이 그대로 굳었다. 꼭 나쁜 짓을 하려다 들킨 죄인처럼, 지원자는 조금씩 몸을 떨고 있었다. 시안은 거울을 보며 연습한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지원자 님, 지금 사기치려고 하신 건 가요?"
"사기는 아닙니다. 전 A급이 맞습니다. 가입 지원서도 성실하게 적었습니다."
"......좋아요, 그럼 왜 지원서에 적어주신 '현재 마력량'이 D급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지원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명백히 이유를 밝히기 꺼려하는 눈치에, 시안은 눈을 껌뻑거리며 결과지를 재확인했다.
성장 한계치는 분명 A급인데 현재 마력량은 고작 D급이라니. 스스로 A급을 자처하는 자가 거지꼴로 이런 하찮은 곳에 나타난 배경에는 분명 무언가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시안은 한숨울 푹 내쉬었고, 자연히 지원자의 어깨는 움츠려들었다.
"이래서야 조금 곤란한데...."
"저, 열심히 할 자신 있습니다."
지원자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E급 대우 받아도 좋습니다. 시키는 대로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제 능력이 닿는 선에서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합격."
"감사합니다. ...네?"
지원자가 고개를 들었다. 마침 유나가 1층에서 커피를 챙겨와 테이블 위에 올렸다. 시안은 유리컵 안에 들어간 커피를 쭉 마셨다.
"일단 계약서에 서명부터 하시고, 신상정보는 뒤에 적으세요. 커피 드시면서."
"저, 정말 괜찮으십니까? 저같은 퇴물을...아, 아닙니다. 서명하겠습니다!"
"'퇴물'이요...?"
유나가 떨떠름한 눈으로 지원자의 행색을 다시 확인했다.
창문은 활짝 열어둬서 환기는 나름 잘 되고 있었지만, 지원자의 몸에서 나는 악취는 여전히 코를 찔렀다. 지원자는 행여나 시안의 마음이 바뀔까 제 이름을 적으려다 멈칫거렸다.
"......."
시안은 그 머뭇거림에 슬쩍 종이를 뺐으려는 듯 손을 뻗었고, 지원자는 황급히 제 이름을 적어 서명을 마쳤다. 유나가 슬쩍 옆에서 곁눈질로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라온?"
"인연이라는 게 참 무섭네. 자, 그래서 일단 더 물어볼게요."
시안은 가입 신청서를 빼았아들며 입가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엉성하게 붙여둔 수염이 덜렁거리며 떨어질 것 같았다.
"한 달 전만 하더라도 공항 경비대에서 일하시던 분이, 어쩌다 이런 몰골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기억력도 좋으십니다.'
초췌한 몰골의 지원자, 박라온은 위장용 수염을 떼며 담담히 답했다.
"짤려서 새 직장 구하는 중입니다."
* * *
한 달 전.
김해공항의 경비대에 소속되어있던 박라온은 공항 측으로부터 일방적인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3개월 최저시급 인턴 기간을 거쳐 작년 연말에 연장 계약을 따낸 라온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같은 비극이었다.
- 공항 경비대라고 놔뒀더니 B급 괴수 하나 제대로 처리를 못 하더라.
라온은 억울했지만 반론을 할 수 없었다. B급 괴조 아르겐타비스의 공항 대합실 습격 사건에서 경비대는 열심히 사람들을 대피시켰지만, 현장 근처에서는 괴조의 근처를 서성거리며 두려워했을 뿐이었다.
- 이럴 바에는 경비대 해체하고 그 돈 모아서 A급 한 명 상주시키는 게 낫지 않나?
탁상행정이었지만 의외로 그 발언은 먹혀들었다.
풍마의 대대적인 자기자랑과 소속사의 홍보 덕분에 세간의 시선에는 '백 명 경비대원보다 한 명 A급이 더 낫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결국 경비대원 중에서도 등급이 높은 이능력자를 제외하고는 일방적인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고, 라온은 그대로 실업자가 되었다.
- 예전에 A급이었다고 해서 계약을 받아줬는데, 회복도 못하고 영 쓸모가 없구만.
그게 저를 짜른 공항 인사 담당자의 마지막 인사였다.
라온은 심장이 비수처럼 찔린 것 같은 충격에 방에 틀어박혀 진탕 술이라도 퍼마시려 했지만, 경비대 숙소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라온은 몸을 눕힐 집조차 없이 그대로 길구석에 내팽겨쳐졌다.
1월. 가장 추운 겨울 날. 라온은 추위에 벌벌 떨며 숙소를 찾아다녔다.
그나마 저렴한 방을 잡고 새 직장을 찾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 어느곳도 라온을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가지고 있던 돈마저 떨어져 공항 대합실에서 노숙을 하며 전전긍긍하던 찰나, 라온은 공항 공용 PC의 구인 사이트에서 우스갯소리로 들리던 구인 공고를 확인했다.
가족같은 분위기.
함께 성장하는 길드.
거들떠도 보지 않았지만, 당장 지폐는 커녕 지갑도 없던 라온은 마지막 차비를 불태워 이곳, 신서울에 겨우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길드장님, 이 분 어떻게 해요?!"
유나가 눈물을 흘리며 시안에게 매달렸다.
인생의 막장에 몰렸던 제 경험에 비추어 공감을 일으키라도 한 것 마냥 유나는 라온에게 온 신경을 써주었다.
"그래. 어떻게든 해야겠지. 그런 의미에서 하나 부탁을 좀 하자, 유나야."
"부탁요?"
시안은 방긋 미소지으며 카드를 한 장 꺼냈다. 검은색 신용카드에 유나가 눈물을 멈췄다.
"라온 씨 데리고 목욕 좀 다녀올래? 슬슬 코가 아파."
고개를 떨구며 침울해하는 라온 대신, 유나는 시안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게 여자한테 할 소리에요?! ...엣취!"
"...언제까지 창문 열어둘 수는 없잖니."
"죄송합니다......."
결국 둘은 가까운 목욕탕으로 가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