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61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1권 008
<충청남도 천안시, 일반관리구역 E. 슬라임 던전.>
퍽! 유나의 스태프가 슬라임의 몸통을 터뜨렸다. 스태프 끝에 마력을 불어넣어 '광속성'을 부여했고, 슬라임은 광속성을 머금은 타격에 맥을 못추며 그대로 터저버렸다.
"14마리."
콰직. 유나는 스태프로 슬라임의 시체를 휘휘 저으며 코어를 찾으려 애썼다. 다행히 목숨이 다한 슬라임은 금방 점성이 사라졌고, 동굴 아래로 시체가 빠르게 흡수되었다.
"15마리."
짝짝짝. 슬라임의 시체에서 코어를 회수한 시안은 성공적인 첫 사냥에 박수를 보냈다.
"대단하십니다. 원거리에서 공격할 줄 알았는데."
"...저 <광탄> 못 써요. E급이라."
"아뇨. 석궁같은 거 말이에요. 요즘 사냥용 키트 잘 나오지 않나?"
"학부생이라 그런 거 살 돈 없어요. 그리고 스태프로 충분히 킹 슬라임 전까지 사냥할 수 있으니까 문제 없어요."
유나는 기계적으로 동굴 벽면에 붙은 슬라임을 찾아 보이는 족족 슬라임을 터뜨렸다. 그게 꼭 쌓인 스트레스를 풀려는 것 같아, 시안은 유나에게서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퍽! 퍼벅!
까딱 잘못하다가는 실수라면서 꼭 자신을 칠 것만 같은 건 분명 착각이리라. 시안은 침을 꿀걱 삼키며 색깔이 다른 슬라임을 발견하고 유나를 불렀다.
"유나 씨. '수속성'이에요."
"괜찮아요. 어차피 다 똑같아요."
유나는 다른 슬라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파란 슬라임을 가차없이 찔렀다.
■■?
"한 번에 안 죽네...."
속성이 들어가서 그런지 일격에 터지지는 않고, 유나의 공격에 반응한 슬라임이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그럼 한 번 더."
퍽! 유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스태프를 휘둘러 파란 슬라임을 쳐날렸다. 골프공을 휘두르듯 슬라임을 쓸어 벽에 쳐날린 유나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개운해보였다.
푸드득. 벽면에 슬라임이 터지며, 그 점액질이 튀어 시안의 볼을 스쳤다. 시안은 제 볼에 묻은 슬라임의 점액을 손으로 닦아내고 벽에 슥슥 문질렀다.
꿀꺽, 꿀꺽. 벽은 슬라임의 점액을 먹어치웠다. 시안은 그 기괴한 광경에 혀를 내두르며 혼잣말을 했다.
"매번 볼 때마다 신기하단 말이지. 이건 도대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걸까?"
"'던전'은 '만들어진 이계'라는게 마도공학계의 정설이에요."
유나는 시안이 중얼거리듯 말한 혼잣말에 대답했다. 시안은 제 목소리가 컸나 곱씹으며 유나가 무안하지 않게 다시금 물었다.
"아카데미에서 그런 것도 가르쳐 주나요?"
"아뇨. 2학년 때 배워요. 예습했어요.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유나는 다시 나타난 수속성 슬라임을 때리며 말을 이었다.
"저 D급 못올라가면 2학년 진급 못할수도 있어요. 여태까지 아카데미에서 E급으로 1학년을 끝낸 학부생이 단 한명도 없어서, 교수님들도 긴급 회의에 들어갔대요. ...저 하나 때문에."
"......저런."
"한계 레벨이 고작 10밖에 안 돼서 온갖 영약이란 영약은 구할 수 있는대로 다 먹어봤는데 안되더라구요. 먹고 마시면 토하고, 주사를 놓으면...."
".......?"
유나가 말을 흘리고, 시안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영약이 받지 않는 몸이라.
'어쩌면?'
대박일까, 아니면 쪽박일까. 어느쪽이든 시안은 상관없었다. 이미 시안은 천사님과 함께 최강의 팀을 만들고, 이 땅에서 세계 최고의 길드를 만들 기로 마음을 먹었다.
'쟤 아니었으면 지금쯤 짐싸고 있었을지도 몰라.'
시안은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코어를 회수했다. E급 코어를 아무리 모아봐야 유나가 들고있는 스태프 하루 대여비도 안 나오겠지만, 이건 어차피 팔 생각이 없었다.
콰직. 어느덧 시안의 주머니도 제법 두터졌고, 유나는 던전 안에 생성된 슬라임을 모두 터뜨렸다.
"다 왔어요. '보스룸'입니다."
일직선 동굴의 끝에 있는 철문에는 악마의 얼굴이 반씩 양각되어 있었고, 둘은 철문 앞 공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화륵. 시안이 키트를 꺼내 모닥불을 피웠다. 간이 의자 두 개를 꺼낸 시안은 유나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유나가 스태프를 만지작거리며 시안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계획이에요?"
"흠, 두 가지 플랜이 있어요. 하나는...."
시안은 검지를 펼쳤다.
"이유나 씨가 킹 슬라임을 단독으로 처리하는 것."
"무리에요. 지난번에 시도해봤어요."
"고작 한 번이잖아요? 다시 해 보면-"
"정정할게요. 네 번이나 해봤어요."
유나가 시안의 말을 끊었다. 상당히 지친 기색이었다.
"두 번은 혼자 들어왔다가 결국 못 잡아서 도망쳤고, 다른 두 번은 친구랑 같이 들어왔어요. 마지막에도 지금처럼 슬라임들 혼자서 다 잡고 킹 슬라임이랑 1:1로 붙었다가...."
유나는 기억도 하기 싫다는 듯 몸을 으스스 떨었다.
"세 시간 동안 싸워서 장비 다 파괴당하고, 결국 친구가 마무리를 했죠. 지분율 90대 10. 저 혼자서는 클리어 못해요. 그 때는 이거보다 더 비싼 스태프 썼는 걸요."
"...그러면 원래대로 두 번째 플랜. 이유나 씨가 킹 슬라임을 '이걸로' 처리하는 것."
시안이 품에서 제 총을 꺼내들었다. 묵직한 그 크기에 유나가 흠칫 놀랐지만, 시안은 장난감처럼 총을 옆으로 빙빙 돌리며 웃었다.
"공항에서 보셨다시피 이게 B급 괴수도 한 번에 죽이는 총이거든요? 제원으로 말할 것 같으면 '.50BMG' 탄환을 사용하는 'Triple Action-"
"역시 당신이 죽였군요. 아르겐타비스."
다시 말이 끊긴 시안은 시무룩한 얼굴로 총기를 내려놓았다.
"...'썬더'라고 불러요. 예, 맞아요. 그날 그 괴수, 제가 죽였어요."
시안은 코트를 들어 안쪽으로 총을 겨눴다. 유나는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당신, 이능력자도 아니라면서요."
"네. 무능력자죠. 하지만 제 무기는 그렇지 않아요."
시안은 총끝의 덮개를 열어 탄환을 꺼냈다. 50구경의 탄환은 일반 탄환과는 달리 금빛을 띄고 있었다.
"괴수의 사체를 가공해 만든 탄환이죠. 이거 하나에 거의 이백? 그 정도 될 거예요. 탄환 한 발도 코어웨폰이죠."
"......네?"
잘못 들었나? 유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저 남자가 뭐라고 했는지 제 귀를 의심했다. 시안은 탄환을 유나에게 던졌다.
"힉!"
유나는 황급히 손을 뻗어 탄환을 두손으로 받았다. 스태프마저 떨어뜨릴 뻔 하며 받은 이 작은 탄환이 수백만원에 이른다는 것에 믿기지가 않았다.
"꼭 이능력자만 괴수 잡으라는 법은 없잖아요? 지금이야 아직 기술이 부족해서 코어웨폰이 이능력자들 거지만...."
시안은 볼을 긁적이며 총의 손잡이를 메만졌다.
"탄환 하나에 최대한 파괴력을 집약시키려다보니 단발권총으로 만들게 되더라고요. 연사는 포기하고 일격에 괴수를 죽이자는 일념으로-"
"그러면 왜 말을 안한 거예요?!"
유나가 드물게 언성을 높였다. 시안은 어리둥절하며 반문했다.
"뭘 말해요? 공항에 총기 몰래 반입했다고?"
"아뇨! 당신이 괴조를 잡았다고! 풍마가 아니라 당신이 먼저 죽였어요! 그렇잖아요!"
"아. 그거?"
"'그거'? 그게 고작 '그거'라고 끝낼 일이에요?!"
유나는 자신의 일처럼 성을 냈다. 괴조를 죽이고도 모른척 사라진 그 행동이 괴씸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수백만원에 달하는 탄환을 사용했으면서, 괴조 사냥에 대한 지분을 요구하지 않은 것이 이해가 안 갔다.
"당신이 마무리한 거나 다름 없잖아요. 그러면 숟가락 지분 10%는 보장받을텐데."
"세상에는 풍마처럼 관심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저처럼 조용히 살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에요."
시안이 코트 안에서 다른 탄환을 꺼내 총 덮개를 열어 탄환을 장전했다. 갈색 탄환이었다.
"뭐 낭중지추라고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겠지만, 적어도 당장은 그리 알려지고 싶지가 않아서요. 내가 뭐하러 한국까지 왔는데. 이렇게 '이계'나 다름없는 던전에 온 이유도...."
시안이 뒤돌아 보스룸의 철문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유나는 황급히 스태프를 들고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무, 뭐하는?!"
"귀 막고, 비밀로 해요."
시안은 싱긋 웃으며 철문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유나는 그 때의 우레소리가 착각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콰----앙! 철문이 폭발하며 보스룸의 문이 떨어져나갔다. 문을 여는게 아닌 '문을 파괴'한 그 행위에, 유나는 기가 막혀서 발을 동동 굴렀다.
"뭐하는 거예요! 저러면 보스가 보스룸에서 뛰쳐나오잖아요!"
"그러라고 하는 겁니다, 유나 씨."
멧돼지만한 몸집의 킹 슬라임이 바닥을 기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벌써 두 자릿수 가까이 본 이동 패턴이지만, 오늘만큼 저 느린 움직임이 두려운 적이 없었다.
"거기 있어봐요!"
시안은 총의 덮개를 열어 탄환을 빠르게 빼낸 뒤, 유나에게 달려가 등뒤에 섰다. 뒤에서 껴안듯 두 팔을 앞으로 내민 시안이 총신을 잡고 손잡이를 건넸다.
"자, 들어봐요. 총은 쏠 줄 알죠?"
"훈련이야 받았, 잠시만요. 진심?"
설마. 아니겠지. 유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시안을 뒤돌아봤지만, 시안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스태프 놓고, 이거 잡아요. 빨리."
■■■■■■■---!
킹 슬라임은 어느새 보스룸을 반쯤 달려왔다. 앞으로 십 초 안에 보스룸을 벗어나, 자신들을 추격할 것이다.
"아, 정말!"
유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손잡이를 두손으로 잡았다. 권총이라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무거웠지만, 시안이 유나의 손을 아래에서 받쳐주자 조금 가벼워졌다. 시안이 흠칫 놀라며 물었다.
"아까 탄환은요?"
"그, 제 점퍼 안주머니에-"
시안의 손이 망설임 없이 유나의 점퍼 안을 찔렀다. 유나는 무어라 항변할 새도 없이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
"가만히 있어요. 아, 찾았다."
시안은 금빛 탄환을 쏙 빼며 덮개를 열어 장전했다. 사무적인 그 태도에 유나는 오히려 더 화가났다.
"지금 뭐하는?!"
"카운트를 할 게요. 셋,둘,하나 하면 쏘-"
콰--------앙! 유나가 저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은 총구에서 금빛의 마력을 내뿜으며 킹 슬라임을 향해 레이저처럼 쏘아졌다.
■■■■■...?
"...세요."
시안은 서서히 쓰러지는 킹 슬라임에 헛웃음을 지었다. 딱히 조준을 해준적도 없는데, 유나는 정확히 킹 슬라임의 코어를 저격하는데 성공했다.
[던전 내 괴수 전멸 확인. E급 슬라임 던전 클리어.]
마도기어에 연동된 시스템에서 던전 클리어를 알리는 문구가 흘렀다. 저 멀리 보스룸 너머 보물상자가 떨어지자, 시안은 다급히 보물상자를 향해 달렸다.
"회수, 회수!"
던전 보스를 잡고 난 후 30초. 그 안에 모든 보상을 회수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던전은 폐쇄되고, 다시는 그 보상을 얻지 못했다.
"하, 하하, 하."
유나는 고장난 테이프처럼 헛웃음을 지었다. 나름 무언가 있어보이는 척은 다 하더니, 결국 마지막 동앗줄이라고 생각했던 끈은 성희롱범과의 만남이었다.
'결국에는 같이 쐈잖아.'
던전을 나가면 즉시 신고하리라. 유나는 눈물이 핑 돌려는 것을 참으며 마도기어를 들어올렸다.
[던전 클리어 지분 : 이유나 100%.]
"......어?"
구구구. 던전이 무너지는 동안, 유나는 아무 말 없이 멍청히 서있었다.
['업적' 달성! <혼자서 던전을 클리어 한>]
유나의 의식이 가라앉았다.
* * *
<오후 6시, 신서울 시안의 사무실.>
"킹 슬라임은 발악 패턴으로 광역공격을 하니까, 누구든 그걸 막으면 공략 지분이 1%라도 쌓일 거예요. 이런 방법은 안 써봤죠?"
시안은 테이블 위의 총을 가리켰다. 유나는 존경심 가득한 학생처럼 수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에서 나온 이래, 유나는 시안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였다. 마치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것 같았다. 시안은 유나의 그런 태도가 은근히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마지막에 시스템이 뭐라고 하던가요? 업적 땄죠?"
"네. <혼자서 던전을 클리어 한>. 진짜로 나왔어요."
유나는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시안은 침착한 표정으로 급히 거금을 주고 사온 마력 검사기를 손에 들었다.
"지금까지 이걸로 검사했죠?"
"네. 한국에서는 그게 최신이에요."
시안은 혀를 차며 검사기를 켰다. 전원이 켜지고, FND 표시로 된 디스플레이가 빛을 발했다.
"이 버전, 날 일(日)자 두 개로 최대 99까지 표기하는 버전이죠. 엘레베이터에서 볼법한 표시."
"누구한테 설명하는 거예요?"
"유나 씨 한테요. 일단 잘 봐요."
시안은 제 검지 끝을 바늘로 찔러, 검사기에 피를 한 방울 떨어뜨렸다. 혈관 속 마력을 읽은 검사기는 곧 검사 결과를 토해냈다.
- 지 04, 수 03, 화 00, 풍 02, 광 09, 암 09, 환 07
"지수화풍광암환. 7속성 전부 저는 10이하 입니다. 어느 하나 E등급을 벗어나는 게 없죠."
"......."
유나는 시안의 검사지를 받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자기보다 더 바닥은 없는 줄 알았는데, 그의 한계 레벨은 저보다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시안은 손을 휘휘 저으며 웃었다.
"아무튼 그 건 차치하고, 이제 유나 씨 차례에요."
시안은 검사기의 제 피를 깔끔하게 닦은 뒤, 설정을 다시 하여 검사 준비를 마쳤다. 혹시나 시안의 피와 섞여 검사에 오류를 주지 않을까, 그는 두 어번 예비 검사를 돌리며 검증을 확실하게 하고자 했다.
"자, 피 좀 주시겠어요?"
"......네."
유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바늘로 검지를 찔렀다. 붉은 피가 한 방울 검사기 위에 떨어지고, 곧 유나의 검사 결과가 나왔다.
찌익! 시안은 빛처럼 빠르게 종이를 찢어 손으로 가렸다. 유나는 수능 때보다 더 긴장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
그러나 시안의 표정은 심각하기 그지 없었다. 유나는 시안이 무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10초, 30초, 1분. 시안은 손으로 가린 결과표에 눈을 박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유나가 슬쩍 몸을 일으켜 검사표를 보려던 순간, 유나의 마도기어에서 계속 무시하던 호출이 울렸다.
[이유나 님께 긴급 전언. 이유나 님께 긴급 전언.]
"...엄마, 진짜!"
유나는 얼굴을 붉히며 스크린을 띄웠다.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 호출은 계속 될 게 분명했다. 유나는 어머니로부터 온 긴급 전언을 쭉 읽어내려가다, 손가락이 굳어버렸다.
[최종통보. 2월 28일 금요일까지 소속 길드가 없을 시, 히어로 아카데미 1학년 이유나 를(을) 퇴학 처리 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설 연휴 이후 아카데미 학생처로 문의를....]
"......잠깐 전화를 좀 하고 올 게요."
유나는 급히 사무실을 빠져나가 계단에서 영상통화를 걸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스크린에 뜬 유나의 어머니는 침울한 얼굴로 응답했다.
[미안해, 유나야. 이렇게라도 아니면 너 자꾸 엄마 호출-]
"이거 뭐야?"
[......실은 설 전에 이미 우편으로 도착했어. 너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 차마 알려주지 못하겠더라. 엄마가 미안해. 일단 집으로 돌아와서-]
삑. 유나는 신경질적으로 스크린을 내려버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계단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으, 으으으...!!"
어머니가 잘못한게 하나도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가족이 자신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도 잘 알고 있다.
그걸 알기에 유나는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성질을 부린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걸 미리 알려주지 않은 부모에게 화가 난 것도 사실이다. 모순적인 두 감정이 한데 얽히고 설켜 유나의 마음은 혼란스러워졌다.
- 포기해버려.
마음속에서, 악마가 속삭였다.
- 전부다 포기해버리는 거야. 너 무시하는 세상, 네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 모든 것을 다.
"......."
유나는 액정에 비친 제 얼굴을 보며 멍하니 웃었다. 이대로 포기해버리면 정말 편안해지는 걸까.
- 내 손을 잡아. 그러면 내가 너 편한대로 해줄게.
환상일까. 눈앞에 보랏빛 연기가 피어올라 유나에게 손을 뻗었다. 이 손을 잡으면 정말 모든게 편해질 것 같다는 생각에, 유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폭음이 들렸다.
콰---앙!
"꺄악?!"
유나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몸을 일으켜 소리가 들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검사기는 치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메케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콜록, 콜록!"
시안이 기침을 하며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사무실 안을 돌며 연기가 조금씩 사라졌다. 유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시안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에요?!"
"아, 아뇨. 검사기가 오류가 난게 아닐까 싶어서, 계속 확인하다보니까 터졌어요."
"네?!"
유나는 검사기와 시안을 번갈아봤다. 그의 눈가에서는 붉은 피가 폭포처럼 흐르고 있었다. 시안은 웃으며 눈을 감았다.
"하하, 파편이 튀었나보네요. 괜찮아요. 병원가면, 아. 오늘 설이지."
"이렇게 피가 철철 흐르는데 병원은 무슨! 잠시만요!"
유나가 손을 뻗어 시안의 눈을 덮었다. 혈관을 타고 흐른 금빛 마력이 유나의 손끝에서 방출되며 시안의 상처를 덮었다. 유나는 울상을 지으며 마력을 계속 퍼부었다.
"이 정도 상처는 제가 치료할 수 있어요. ...이 정도는."
시안은 묵묵히 유나의 치유에 몸을 맡겼다. 약 3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찢어진 눈가는 피가 멎었고 상처는 아물었다. 유나는 제 소매로 시안의 피를 닦으며 걱정했다.
"또 다친 곳 있어요? 제가 치료할 수 있으면 치료할게요. 말해줘요."
"......이유나 님."
시안이 무릎을 꿇으며 마도기어를 조작했다. 유나도 얼떨결에 마주 무릎을 꿇으며 시안이 전송한 화면을 넘겨받았다.
"저랑 계약해서 최고의 히어로가 되어주세요."
유나는 한없이 진지한 시안의 목소리에 울먹거리며 답했다.
"...이거 정식 길드 초대죠?"
"아직은 약식입니다. 이능력자 둘을 더 구해야겠죠. 하지만...."
시안이 고개를 숙였다.
"저는 이유나 님이 함께 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왕이면 끝까지."
유나는 울면서 웃었다. 마지막이라 생각했던 그 동앗줄이, 진짜로 자신을 위한 구명줄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고마워요, 저같은 애를 받아줘서."
"아닙니다, 제가 더 고맙죠. 제 첫 팀원이 되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무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누가 더 고맙네 감사의 레이스를 펼치던 둘은 서로를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이유나 히어로 님."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길드장 님."
1월 29일. 시안의 길드에 최초의 히어로가 가입한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어. 오라클, 나야. 왜 전화했기는, 너 보고 싶어서 연락했지."
"눈치 더럽게 빠르네. 그래, 용건 있어서 전화했다. 뭐? 아냐, 그런 거."
"그냥 물건 하나가 필요해서. 내가 지난번에 만들어준 마력 검사기 있잖아, 그거 여기로 하나 보내주라. 응.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데, 남들 모르게 비밀리에."
"......너같이 눈치빠른 꼬맹이는 싫다니까. 야, 나도 긴가민가 하니까 확실해지면 알려줄게. 근데 만약에 내 생각이 맞다면 말이야."
"그녀는 신이야."
"여보세요? 야, 야! 끊지 마! 술 안 마셨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