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860화 (860/1,497)

EP.860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1권 007

1월 29일. 그러니까 설날 당일 아침.

이유나의 친척들은 언제나처럼 신서울, 유나의 집으로 모였다. 유나의 부모는 그닥 내키지 않아 했지만, 유나는 자기는 괜찮다며 애써 부모를 위로했다. 그리고 유나 부모의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우리 성운이가 신서울대학에 합격했다, 이 말 아닙니까! 그것도 마도공학부!"

"축하드려요."

유나는 진심으로 제 사촌인 이성운을 축하했다. 유나 본인도 신서울 대학 마도공학부에 합격해봤기에, 그곳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축하한다."

유나의 아버지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유나의 어머니가 옆에서 허리를 찌르며 그에게 눈치를 줬지만, 유나의 아버지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고마워, 유나 누나."

자랑스러워하는 성운이 누구를 보며 웃고 있는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잘하면 누나가 내 선배 될 수 있었는데 아쉽다. 누나 차석으로 합격했었지?"

"...응."

명백한 도발이었다. 유나는 떨리는 주먹을 꽉 쥐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미 이 정도 굴욕은 아카데미에서부터 일상다반사였다. 유나가 참고 있기에, 유나의 부모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렇긴 했지. 축하해. 공부하느라 고생했을 텐데."

"고생은 무슨. 누나 공부하던 자료들 물려받아서 공부했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그래도 진짜 안타깝다. 누나가 내 한 학년 선배 될 수 있었잖아. 히어로 아카데미만 안 갔어도 대박이었을텐데."

"성운아."

제 아비가 아들을 말릴 정도로 성운은 본인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누나 이번에 길드 지원 넣었던 거, 다 탈락했다며? 어떡해? 그럼 2학년 수업 어떻게 되는 거야?"

"야 이성운!!"

정운의 부친이 아들을 격하게 나무랄정도로 성운을 다그쳤다. 자연히 거실에 모여앉은 친척들의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굳어진 분위기에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다름아닌 유나였다.

"글쎄. 이런 경우가 없어서 교수님들도 설 지나고 상의해본다더라."

유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베시시 웃었다. 유나의 어머니는 호들갑을 떨며 일어나 유나를 일으켜 세웠다.

"유나야, 잠깐 가서 엄마랑 과일 좀 깎을까?"

"응."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유나는 순순히 어머니를 따라 부엌으로 피신했다. '피신'이라는 말이 정확할 정도로, 친척들이 유나를 보는 시선은 동정과 한심함이 가득했다. 특히 그건 같은 비교대상이 생겨버린 올해 더욱 심했다.

"형님, 역시 유나는 히어로 길은...."

"그만해라."

서걱! 배를 반토막내는 유나 어머니는 일부러 큰 소리로 과일을 잘랐다. 유나는 과도로 사과 껍질을 돌려 깎으며 말했다.

"난 괜찮아. 내가 더 미안한 걸."

"......유나야."

"응?"

유나 어머니는 시선을 마주 보지 못했다. 유나의 순진무구한 눈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만 같아, 애써 도마만 바라보며 날카로운 칼처럼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냥 자퇴하고 재수하면 안 되겠니...?"

쨍그랑. 막 접시를 꺼내려던 유나가 접시를 떨어뜨렸다. 플라스틱 그릇이 팽이처럼 마룻바닥을 구르지만, 유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제 어머니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엄마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유나야. 실은...."

"......."

유나는 갑자기 부엌이 낯설어졌다. 아니, 이 집 전체가 낯설어졌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 등이 벽에 닿은 순간, 부엌으로 시선이 집중된 친척들과 눈이 마주쳤다.

피식. 유나는 보고 말았다. 유나를 바라보는 성운의 입꼬리는 비틀려있었다. 유나는 최후의 구조 신호를 제 아버지에게 보냈지만, 유나의 아버지는 고개를 숙인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유나의 아버지도 아내와 같은 의견이었다.

"...나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유나는 방에서 야구점퍼를 꺼내입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은 차마 마주 볼 수 없었다. 울컥한 기분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유나는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래. 길드만 가입하면 되잖아. 아무리 E급이라도....'

무작정 걸어가던 유나는 인도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상식적으로, 3만원짜리 상용 포션만도 못한 E급 광속성 힐러를 받아줄 만한 곳은 어디도 없었다. 성장 한계치가 B~A급 정도라면 장래를 바라보고 길드의 양성소에라도 들어갈 수 있었지만, 유나의 성장 한계는 전부 '10'이었다.

10.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해봐야 운동 좀 한 이들과 비슷한 출력을 내는 수준으로, 이능력자 취급도 받지 못하는 레벨이었다. 하물며 히어로로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나는 히어로의 길을 선택했다.

"......그래. 어디 하나 쯤은 있을 거야."

유나는 걸어오면서 익명으로 올린 게시글을 확인했다. 설 연휴라 다들 심심해서 그런지 답변이 제법 달렸다.

- 그냥 포기하세요

- 나 얘 누군지 알 것 같은데ㅋㅋㅋㅋㅋ진짜 독하다ㅋㅋㅋㅋ

- 아카데미,,조교입니다,,,진짜,,,보기,,,안타까워서,,,그런데,,,,다른길을,,,찾는게,,,옳을듯싶읍니다,,,

우울하다. 이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홀로 미국 배낭 여행까지 다녀왔는데, 세상 그 누구도 내 편이 하나 없었다. 유나는 눈을 깜빡거려 눈에 들어간 먼지를 눈물로 씻어냈다. 결국 마지막 댓글까지 확인한 순간, 유나는 깊은 절망감에 빠졌다

- 님같은 노답이면 여기■☜말곤 없을듯ㅋㅋㅋㅋ

가, 희망을 가졌다. 댓글은 친절하게도 링크까지 걸어줬다. 유나는 제 부모의 호출을 깡그리 무시하고 링크로 넘어가 공고문을 읽었다.

"와, 아무리 나라도 여긴 조금...."

유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이미 발걸음은 공고의 사무실 위치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천사님."

그게 약 50분 전. 유나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 * *

"히어로 아카데미 학부생 1학년. 이름 이유나. 현재 E등급 서포터. 주특기는 힐링."

시안은 유나가 가져온 프로필을 읽었다. 구면이라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이런 인재는 철저한 검증이 필요했다.

"'사람 한 명 데리고 다니는 것보다 포션 지참하는 게 더 효율이 높을 것 같다.'는 소리는 하지 않을게요. 본인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럼 하지나 말던가. 유나는 울컥했지만 밑저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참았다. 그래도 공항에서 목숨을 살려준 은인이니까.

"성장 한계치가 7속성 전부 10? 이야, 정말 밸런스 잡힌 인재네요. 힐링 주특기인데 광속성 마저 10이라니. 이런 경우는 저도 처음 봅니다."

그럼 당신이 어디서 영약이라도 찾아오시던가. 유나는 또 울컥했지만 차가운 커피를 마시며 속을 달랬다. 그래도 여기 말고는 면접이라도 봐주는 곳이 없었다.

"음.... 영 아닌 것 같은데."

시안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이상은 유나도 참기 힘들었다. 평소라면 웃어넘겼을 테지만, 지금의 유나는 상당히 삐뚤어진 상태였다.

"저기요, 아무리 그래도-"

"응. 합격."

"감사합니다."

유나는 절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시안이 한 말과 제 행동을 차근차근 곱씹었다.

"......? 네?"

"네. 합격이라고요. 축하드립니다. 인연이 이렇게 또 이어지네요."

시안은 왼손을 뻗었다. 유나도 얼떨결에 왼손을 뻗어 악수했다. 시안이 씩 미소지으며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자. 그러면 서명해요. 영광스러운 첫 팀원인 히어로님."

"자, 잠시만요. 저 학부생인데요?"

"그래서요?"

시안이 커피를 마시며 의문을 표했다. 왜 냉장고에 플라스틱 컵에 담긴 커피만 한 가득 있는지 상당히 궁금했지만, 유나는 애써 궁금증을 삼키며 제일 중요한 걸 되물었다.

"저 누구 말마따나 포션만도 못한 힐러인데 왜 덜컥 길드원으로 받아주신 거예요?"

"아, 아직 저희도 정식 길드 아니거든요. 길드원 모집 중. 최소 D급이 3인 이상 필요한데 아직 아무도 없어서 포기하려던 찰나였어요."

"저 E급인데요?"

그래, 이게 제일 궁금했다. 도대체 이 남자는 무슨 생각으로 E급인 자신을 덜컥 영입한 걸까. 혹시 인신 매매라도 하려는 걸까? 유나는 슬금슬금 엉덩이를 소파에서 떼며 출입구로 몸을 옮겼다. 시안은 헛웃음을 지으며 책상을 두드렸다.

"E급이면 어때요? 저같은 무능력자도 아닌데."

"...네?"

시안은 제 품에서 총을꺼냈다. 탁자 위에 묵직한 무게의 총이 올려지고, 유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같이 이런 코어웨폰 쓰는 것도 아니고, 유나 씨는 본인의 마력으로 싸우는 거잖아요. 괜찮아요. 지금이야 조금 약할 수 있지만, 경험을 쌓아나간다면 충분히 성장할 수 있어요. RPG 좋아해요? 그럼 설명하기 쉬운데."

"...저 게임 잘 몰라요."

시안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이론에 관해 설명하는 건 영 젬병이었다. 이를 어쩐다. 잠시 고민을 하던 시안은 총을 다시 코트 안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백문이 불여일견, 백견이 불여일행. 그럼 가실까요?"

시안은 사무실의 전등을 끄며 밖으로 나설 준비를 마쳤다. 갑작스러운 시안의 행동에 유나는 당황하면서도 뒤따라 일어섰다.

"어딜 가신다는 거예요?"

"헌터 길드인데 갈 곳이 하나 말고 더 있겠어요?"

시안은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튕겼다.

"던전 갑시다. 둘이서."

* * *

<오후 4시, 충청남도 천안시 던전관리구역 E.>

끼이익. 자율주행차량이 갓길에 멈춰 섰다. 유나는 얼떨결에 차에서 내렸고, 시안은 제 마도기어의 액정을 차 안의 리더기에 스쳤다.

[결제되었습니다. 오늘도 유성의 자율주행 서비스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칫."

시안은 혀를 차며 차에서 나와 차 문을 세게 닫았다. 유성이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살짝 짜증이 치밀었다. 유나는 신서울에서 대여한 마도 스태프를 양손으로 쥐었음에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 정말 저 혼자서 공략을 한다고요?"

"네. 꽤나 예전에 발견한 '꼼수'인데, 유나 씨의 문제를 해결할 '업적'을 딸 거예요."

시안은 스트레칭을 하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유나는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업적은 저도 알고 있는데, 그게 저 혼자 던전 공략을 하라는 거랑 무슨 관계에요?"

"바로 그거에요. <혼자서 던전을 클리어 한>. 성장 한계치를 1포인트 올릴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죠. 랜덤이지만."

"그래서 그걸로 저를 D급으로 올리시겠다??"

지난 1년간 어떻게든 D급에 올라가려고 얼마나 갖은 애를 썼던가. 유나는 시안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차라리 던전에 자신을 끌고가 음흉한 짓을 저지르려 한다고 믿는 편이 신빙성이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더 궁금해하는 사람은 시안이었다.

"이거 제법 유명해진 건데. 설마 몰랐어요?"

"모를리가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저는 힐러라구요."

"힐러는 공격 못하나?"

비꼬는 걸까. 유나는 스태프를 꽉 쥐었다. 시안은 유나의 손등에 선 힘줄을 가리켰다.

"그래요. 그 기세에요. 있는 힘껏 후려치는 겁니다."

"진짜 하라고요? 아무리 여기라도...."

유나는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를 가리켰다. 입구에 선 경비 요원이 아까부터 시안과 유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시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요원 옆의 동상을 가리켰다. 동상은 물방울 같은 모양의 괴수, 슬라임이었다.

"힐러라도 타격 세 방이면 슬라임은 때려잡던데."

"보스가 문제잖아요, <킹 슬라임>!"

유나가 그 업적을 생각을 안 해봤던 건 아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자신의 능력으로는 무리가 있었다.

"저 혼자서는 그거 못 잡아요. 만약에 당신이 그걸 쓴다고 해도...."

"데미지 지분 때문에 파티 클리어로 인정될 거다?"

유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시안이 총을 쏜다면 능히 킹 슬라임도 처리는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 봐야 유나가 홀로 클리어한 것으로 '시스템'은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다.

"괜찮아요. 믿어보라니까요? 제가 설마 수백만 원 날려가면서 유나 씨를 여기까지 데려왔겠어요? 말했잖아요, '꼼수'라고."

"...진짜 믿어도 되는 거죠?"

"저를 믿기 싫으면 오라클을 믿으세요. 설마 오라클도 못 믿어요?"

"오라클 님은 믿지만, 그분이 당신한테 이런 걸 줬다는 게 믿기 힘들어서 그렇죠. ...알았어요. 밑져야 본전이니까 해볼게요."

유나는 오라클의 마력이 깃든 시안의 명함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결국 시안은 오라클을 팔았다. 시안은 수 시간에 걸친 제 설득보다 오라클이라는 이름값 한 번에 제안을 수락한 유나에게 들리지 않게 구시렁거렸지만, 제법 청각이 민감한 유나는 그걸 그대로 들을 수 있었다.

"D급 올라가기만 해봐. 종신 계약 걸어버릴 거다."

"풋."

D급에 올려주기만 한다면 길드가 망하기 전까지 평생을 활약해 줄 수도 있다. 유나는 제 간절한 기도가 신에게 닿기를 빌며, 시안의 뒤를 따라 슬라임 던전으로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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