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57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1권 004
<2025년 1월 3일 오전 11시, 신서울>
"네? 그런 게 어딨어요?"
시안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이미 미국에서 오기 전부터 네트워크로 가계약까지 체결해뒀는데, 갑자기 사무실을 그대로 다른 이에게 빼앗기게 생겼다. 턱에 살이 두세겹 겹쳐진 건물주는 어색한 눈치로 변명했다.
"그러게 예정대로 도착하지 그랬어."
"갑자기 차원문이 생겨서 하루 늦어진 거잖습니까. 이건 계약 위반입니다. 고소할 겁니다. 당장 '걔'한테 전화를-"
시안이 으름장을 놓자 건물주는 오히려 역정을 냈다.
"아니, 누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당신이 쓴 계약서 보더니 위약금까지 입금하면서 이 건물 쓰겠다는데, 내가 어떻게 막아! 나도 억울하다고!"
"......혹시?"
시안은 숨을 들이켰다. 제법 입지가 좋은 사무실이라 웃돈을 주고 가계약을 체결했는데, 누군가 그 가계약을 물리게 할 정도로 돈을 퍼부어 사무실을 빼앗은 모양이다. 건물주는 본인이 적반하장으로 성을 냈으면서도 어딘가 미안한 눈치였다.
"일단 미안하게 됐네. 나도 답답한 마음이야. '그분'께는 자네 사무실 얻어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고. 그런데...."
건물주는 제 건물의 3층에 걸리는 간판을 가리켰다. 아예 일사천리로 알을 박을 생각인지, 시안의 계약을 가로챈 길드는 'Megrez'라는 저들의 간판을 그대로 벽에 걸어버렸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저 길드는 말이야."
"'유성 그룹'의 산하 조직이네요."
시안은 사무실에 집기를 집어넣는 이들의 점퍼에 박힌 '유성'의 마크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 사무실을 얻기 위해 시장 조사를 하면서 가장 경계했던 상대가 바로 유성 그룹이었다. 그제서야 시안은 왜 건물주가 지인의 소개에도 불구하고 건물을 팔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압박했군요, 안 팔 수 없게 으름장을 놓았어요."
"......이해해주시게. 신서울에서 땅장사든 물장사든 뭐든지간에, 유성의 밉보를 보였다가는 곧장 이거야."
건물주는 손날을 세워 제 목을 가로로 그었다. 그만큼 이 신서울에는 유성 그룹의 힘은 막강했다.
"자네도 앞으로 신서울에서 활동하려면 잊지 마시게. 한국에서 살려면 이 '연'을 잊으면 안 돼."
"지연, 학연, 혈연.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그래서 '지연'을 썼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그 세 가지보다 더 중요한게 있어. 명심해."
건물주는 제 건물의 층별 안내도를 가리켰다. 1층부터 5층까지 US Coffee, 유성생명, US모바일, US24등, 건물 전체가 유성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이 나라는 유성 공화국이야."
결국 시안은 계약금과 위약금을 받은 채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도합 2억에 가까운 돈이 수중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영 기분은 좋지 않았다.
* * *
<오후 4시, 신서울 카페 Padre Juan.>
"이제 어쩌지."
시안은 카페 테이블에 앉아 머리를 감싸쥐었다. 차선으로 눈도장을 찍어둔 사무실도 다른 길드가 귀신같이 계약을 해버렸다.
알리오츠(Alioth), 미자르(Mizar),그리고 원래 시안이 계약하려고 했던 건물의 메그레즈(Megrez)까지. 시안은 마도기어에서 꺼낸 검색엔진에서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북두칠성 별자리? 대놓고 유성 산하조직이라고 알리고 있네. 나 참."
세 길드 모두 작년 말-불과 이주 전에 협회에 등록한 신생 길드로, 제각기 활동 지역만 다를 뿐 길드의 주인은 전부 다 같은 사람이었다.
유성 그룹의 주인, 은하수 회장. 그 길드들은 전부 제 자식들에게 물려줄 상속재산이나 다름없었다.
"대기업 갑질 진짜 너무하네, 정말."
시안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무실을 찾아야 했다. 심신이 지쳐 잠시 어딘가 앉을 필요가 있었고, 머리를 식히기 위해 지나가다가 곧장 눈에 들어온 카페로 들어왔다.
Padre Juan.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사장은 시안처럼 전형적인 외국인의 상이었다. 시안은 마도기어의 카메라를 메뉴판에 겨눴다. 곧 마도기어의 번역기가 자동으로 문구를 번역했다.
[농부 후안 (스페인어)]
"......농담 아니고?"
시안의 시선이 곧장 벽으로 향했다. 벽면에 걸어놓은 사업자 등록증 옆에는 국제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당당히 걸어놓았다. 그의 이름은 분명 '후안'이었다.
문제의 그 바리스타, 후안이 트레이에 커피를 들고 와 직접 시안의 테이블에 놓았다.
"좋은 시간 되시길."
"아, 감사합니다."
흰 잔에 담긴 흑갈색 아메리카노에서 향긋한 커피 향이 풍겼다. 시안은 얼어붙은 몸이 그대로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에 그대로 테이블 위에 늘어졌다.
후룩. 시안은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시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커피가 이리도 맛있다고 느껴본 적이 언제였더라. 시안은 혀를 스쳐가는 깊은 풍미에 감탄해 손목을 들어올렸다.
찰칵. 마도기어가 커피잔을 촬영했다. 한 모금 마시기 전에 찍었으면 어땠을까 후회가 되기도 했다.
달칵. 테이블에 작은 조각케이크가 든 그릇이 올려졌다. 시안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릇을 놓은 팔을 따라 올라갔다.
"1월의 한국은 춥습니다. 어디서 왔나요?"
"아, 미국. LA에서 왔습니다."
"좋은 곳이죠. 다저스 게이트만 아니었으면 저도 그곳에 정착할 뻔 했죠."
후안의 말에 시안은 쓰게 웃었다. 다저스에 열린 던전은 히어로들의 공략 실패로 폭주하였고, 무려 S급 괴수 셋을 토해내는 대재앙을 초래했다. 시안이 어색해지기 전에 재빨리 말을 바꿨다.
"사장님은 본국이 어디십니까? 스페인?"
"예. 바르셀로나가 고향입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돌고 있죠. 한국에 정착한지는 이제 햇수로 6년이군요."
후안은 제 컵까지 들고와 자리에 앉았다. 파리 날린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가게에는 손님이 없었다. 시안은 제 테이블 위의 영수증을 확인하고 쓰게 웃었다. 이제 오후 4시인데 시안이 두번째 손님이었다.
"아무튼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도요."
심심하던 찰나에 두번째로 온 손님이 외국인이라니, 반가웠을 것이다. 한국은 검은 머리를 제외하고는 거의 외국인이없는 곳이니.
"신서울은 상당히 삭막한 곳이에요. 외국인이면 이능력자도 배척당하는 곳이죠. 오죽하면 히스패닉계 사람들이 여기서 살려면 머리 검게 염색하라고 할 정도로."
"그 정도로 심합니까?"
시안은 커피를 마시며 곁눈질로 케이크를 훑었다. 워낙 바쁘게 돌아다닌지라, 제대로 점심도 먹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이 계산한 것도 아니고 후안이 일방적으로 들고 온 것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후안은 인자한 미소로 조각 케이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케이크는 서비스니까 드셔도 좋습니다. 오늘 지나면 제 뱃속으로 들어갈 거라서."
"감사합니다."
시안이 귀신같이 포크를 집어 들었다. 한 입 크게 베어 무는 그 행동에 후안은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딸랑딸랑. 카페 문에 걸린 종이 흔들렸다. 롱패딩에 후드까지 쓴 여인은 마스크 밖으로 차가운 입김을 내며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후안이 그를 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군요. 언제나처럼?"
"네."
후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하고, 번데기처럼 의자에 앉아 몸을 녹였다. 시안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케이크로 고개를 돌렸다.
킁킁. 시안은 카페 안에서도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커피 향 내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이 냄새를 어디서 맡아봤더라. 분명 그때 파티에서 지나가다가-
'아니겠지.'
해외에까지 악명이 자자한 유성가 개망나니가 저런 몰골로 커피를 사러 온다? 시안은 제 빈약학 상상력에 자조하며 잔을 들어올렸다.
"......."
시안은 여인이 후드 아래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모른척하며 케이크에 집중했다. 곧 후안이 종이가방에 원두팩을 한아름 넣어 여인에게 건넸다.
"매번 감사합니다."
종이박스를 챙긴 여인은 꾸벅 고개를 숙여 떠나갔고, 후안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제 잔을 들어올렸다.
"이런 허름한 가게라도 저렇게 자주 찾아와주시는 분이 계셔서 다행이지요. 아, 손님. 혹시 저녁 시간도 괜찮으십니까? 모처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한 끼 대접하겠습니다."
후안은 가게 명패까지 뒤집으며 들뜨게 움직였다. 시안은 차마 그를 거절하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후안과 티타임을 가졌다.
밤 11시. 자고 가라는 후안의 제안을 겨우겨우 거절하며 탈출하다시피 가게를 나온 시각이었다.
* * *
"으, 추워."
시안은 찢어진 코트를 감싸안으며 캐리어를 끌었다. 원래는 사무실 근처에 숙소를 구할 계획이었지만, 졸지에 사무실을 찾을 때까지 장기 투숙할 숙소를 먼저 구해야 할 처지였다.
'호텔로 할까.'
사무실을 구하기 전까지만 호텔에 장기 투숙을 하고, 그 후에 방을 구하면 될 법도 했다. 잠시 네트워크를 뒤져보니, 월셋방은 많았다.
'그래도 5평짜리에 월100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
가급적이면 개인 공방을 차릴 수 있는 곳이면 좋으련만, 신서울의 주택들은 하나같이 좁은 평수의 집으로 가득했다.
'암만 서울이 망하고 여기에 급하게 인구를 수용했다고는 해도 말이지.'
2025년. 한국은 이미 수도를 대전 인근의 도시로 이전한 지도 벌써 13년 가까이 흘렀다. 인구 천만의 수도를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쳐야 했을 정도로, 서울은 더는 도시로서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 인원을 수용하려고 원룸형 건물들을 많이 지었다고는 하지만....'
너무 물가가 살인적이다. 차라리 사무실을 구하고 거기서 숙식을 해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신서울의 물가는 높았다.
딸랑딸랑. 시안은 편의점에서 핫팩을 사서 손을 데웠다.
해가 떨어진 뒤부터 기온은 영하로 떨어졌고, 코트는 방한 기능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호신용 무기를 넣기 위해 특수제작된 옷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공항 쓰레기통에 처박았을 텐데. 시안은 구시렁거리며 캐리어를 끌다가, 골목 끝에서 들려오는 고함에 귀가 번뜩였다.
"...서 얼롸가 술을 쳐먹고 이서! 당장 눼려놓지 못해?!"
정작 그렇게 외치는 목소리도 술에 취해 말이 꼬이고 있다. 시안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까 고민하다가, 고함의 주인인 벙거지의 노인이 손에 꼬나쥔 소주병을 보고 흠칫 놀랐다.
소주병의 병목을 쥔 그 자세는 금방이라도 쪼그려 앉은 츄리닝 차림의 소녀를 내려칠 것만 같았다. 녹색 캔을 손에 쥐고 있던 소녀는 음울한 눈빛으로 노인을 올려다보며 비꼬았다.
"신경쓰지 말고 가던 길이나 가세요. 내가 술을 마시든 말든 뭔 참견이야!"
"어린 자식이 어디서 어른 앞에서 말버릇이야! 니 애미 애비가 그리 가르쳤어?!"
노인의 손이 높이 올라갔다. 시안은 노인의 손목을 붙잡고 소주병을 빼았아 땅바닥에 던졌다.
"뭐여, 시벌?!"
"......."
시안은 그저 노인을 위에서 내려다봤다. 가로등 불빛을 등지고 위에서 노려보는 거구의 외국인에 노인은 겁을 먹고 뒷걸음을 쳤다. 그러나 곧 자신이 겁에 질렸다는 것에 화가난 노인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어디서 외국 놈이! 썩 꺼져라, 양키 고 홈!"
"이봐요."
시안은 사납게 웃으며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철컥. 당겨진 격철 소리에 노인은 술기운이 싹 가신듯 사색이 되었다.
"송장 치르기 싫으면 당장 사라져."
"흐, 흐아아아악?!?!"
노인은 비명을 지르며 골목 밖으로 뛰었다. 중간에 발이 꼬여 넘어졌음에도, 네발로 기면서까지 몸을 일으켜 대로변으로 도망쳤다. 시안은 표정을 풀고 스리슬쩍 웃으며 마도기어를 가리켰다.
"호신용 앱이에요."
"아닌 것 같은데...."
"맞아요. 신서울에 누가 진짜 총을 들고 다니겠어요?"
시안은 주변을 가리켰다. 막다른 골목길 끝에서 처량하고 홀로 캔을 들고 쪼그려 앉은 소녀. 이능력자가 아닌 이상에야 범죄가 일어나기 딱 좋은 상황이나 다름없다.
"신서울이 아무리 안전하다고 해도 사고라는 게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는 겁니다. 일단 일어나세요. 그리고 학생 같은데 벌써 술은...."
"이제는 외국인 꼰대까지 시비네. 십팔색 크레파스 같은 게. 가-족같이 굴지 말고 저리 꺼져요."
시안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앳된 얼굴과 목소리로 하는 발언은 그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소녀는 흙먼지가 묻은 엉덩이를 탈탈 털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뭘 봐요. 당신 변태야? 신고해? 하, 진짜 운수 더럽게 없네. 술맛 떨어지니까 가던 길 가요."
"하고 싶은 말은 많기는 하지만, 우선 이것부터 말할게요."
시안은 한숨을 내쉬며 소녀가 든 캔을 가리켰다.
"그거 맥주 아니야."
"......뭐?"
소녀가 든 캔에는 코끼리가 하늘 높이 코를 뻗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