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56 [라노벨외전] 창천의 데스디나스 1권 003
"의무실 천장이다."
이유나는 익숙한 약품 냄새에 몸을 일으켰다. 몸을 덮은 얇은 이불을 옆으로 치운 유나는 재빨리 주변을 훑어 상황을 확인했다.
'기절 후 깨어났을 시에는 당황하지 말고 냉정히 상황을 파악할 것.'
아카데미에서 강사가 고막이 찢어지라 외치던 수칙들이 떠올랐다. 유나는 저 말고도 침상에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사람들을 보며 한눈에 상황을 파악했다.
'기절한 사람들을 의무실에 다 눕혔구나.'
아르겐타비스의 공항 습격에 놀란 사람은 자신만이 아닐 것이다. 심신이 미약한 사람은 괴수가 내뿜은 포효만으로도 픽 쓰러졌을 것이고, 깨진 유리 파편으로 다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사람들을 지켜야 하는 입장인데.'
괴조의 습격을 받기 직전이었다고는 해도, 유나는 기절해버린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아무리 자신이 E급 이능력자라고는 해도 포효 한 번에 기절할 리는-
"아."
유나는 떠올렸다. 무엇 때문에 기절했는지.
'괴수 때문이 아니야.'
사람 때문에 기절했다. 정확히는 자신을 구해주려던 남자가 쏜 총격과 그에 따른 마력의 폭발에 의식이 끊겼다. 유나가 자신이 기절한 이유를 차근차근 곱씹는 사이, 사람들의 상태를 보러 온 젊은 여자가 깨어난 유나를 보고 소리쳤다.
"선배님! 그 학생 깨어났어요!"
"뭐?!"
우당탕탕하는 소리와 함께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목에 'US투데이'라는 기자 명찰을 걸고 있었다. 그는 기름진 손을 제 바지에 슥슥 닦으며, 안주머니에서 꺼낸 명함을 유나에게 건넸다.
"반갑습니다. US투데이의 기자 곽용우라고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잠깐 인터뷰를 할 수 있을까요?"
기자, 곽용우는 왠지 초조한듯 시간에 쫓기는 듯 했다.
* * *
"거절합니다."
시안은 박라온에게서 한발자국 물러섰다.
"상당히 직설적으로 물어보시는군요. 이미 검색대에서 통과된 캐리어 아닌가요?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제 감입니다. 구체적으로는...이무기의 사체. 그 냄새가 납니다."
시안은 코를 킁킁대는 라온의 행동에 뜨악한 얼굴로 놀랐다가 표정을 감추었다. 다행히 워낙 순식간에 표정을 고친 덕분에 상대는 눈치채지 못했다. 시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캐리어를 제 뒤로 숨겼다.
"시간이 지체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미 신서울로 가는 차표를 끊어놔서요."
"......금방 끝내겠습니다."
라온이 강제로라도 캐리어를 열 기세로 손을 뻗었다가, 시안에게 제지당했다. 의심은 확증이 되었고, 라온은 시안을 구인이라도 하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이 손 놓으십시오."
"무슨 법적 근거로 제 캐리어를 손대려 하십니까?"
"공항 보안 규정에 있습니다. 저는 규정에 따라 제 소임을 다하는 겁니다."
"......규정 가지고 오세요. 그럼 열어드릴게요."
라온은 묵묵히 제 마도기어를 조작해 관련 규정을 띄웠다.
규정을 요구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는 듯, 시안은 제 눈앞에 뜬 스크린을 보며 숨을 삼켰다. 공항에 위험물을 반입하거나 반출하려는 자에 대해서는 불시에 검문이 가능. 진짜 규정에 있었다.
"뭐 이딴 규정이 다 있어? 진짜 한국 오자마자 왜 이래?"
"...죄송합니다만 따라주시길 바랍니다."
라온이 캐리어에 손을 대려던 순간, 라온의 마도기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항 경비대 제3팀은 지금 즉시 지정 위치로 모이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공항 경비대 제3팀은....]
"......가셔야겠는데요?"
시안의 말에 라온은 입술을 쭉 내밀며 불만을 표했지만, 소집은 긴급을 요구했다. 라온은 시안과 제 손목을 수없이 번갈아 가며 갈등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한걸음 물러섰다.
"사람을 구하신 용감한 분이 밀수 같은 일을 할 리 없지요.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습니다."
"아뇨. 하실 일을 하신 건데요. 그럼 저는 이만."
시안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제 캐리어를 끌며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다행히 라온은 반대편을 향해 부리나케 달려갔고, 모퉁이를 돈 시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큰일 날 뻔했네."
안을 훑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시안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용변을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시안은 대변기 칸으로 슬쩍 들어가 문을 걸어잠갔다.
철컥. 변기 위에 캐리어를 눕힌 시안은 다시 비밀번호를 맞췄다. 위장용으로 맞춰놓은 번호가 아니라, 그의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물건들을 숨겨둔 금고의 비밀번호-1225를.
탈칵. 캐리어 아래가 슬라이드로 튀어나오고, 그 안에 있던 물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쿠션 안에 형형색색의 50구경 탄환 여섯개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시안은 떫은 얼굴로 회색의 탄환을 집어들었다.
'내가 넣었던 거랑 배치가 다른데.'
여섯개의 탄환이 모두 제각기 위치가 다르게 들어있다. 아마 이유나라는 그 학생이 캐리어를 열었다가 떨어뜨려서 다시 끼워넣은게 분명했다.
'세상 참 희안한 일이 다있네.'
똑같은 캐리어에 네 자리 비밀번호를 똑같이 쓰는 사람과 같은 비행기에서 내릴 확률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시안은 혀를 내두르며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깊숙히 집어넣었다. 특수제작된 방검코트 아래에 숨겨진 공간은 얼핏보면 그저 코트의 디자인이라고 착각할만큼 정교했다.
시안은 코트 안에서 꺼낸 총기를 쿠션 사이 홈에 넣고 황급히 닫았다.
'그 요원 아가씨 돌아오기전에 빨리 도망쳐야지.'
걸리면 귀찮다. 시안은 화장실에서 볼일을본 척 물을 내리고 짐을 챙겨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그 이후로 그를 공항에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네! 제가 바로 아르겐타비스를 일격에 쓰러뜨린 히어로, 풍마입니다. 반가워요, 예비 히어로 요원분."
유나는 얼떨결에 풍마가 내미는 손을 맞잡았다. 찰칵.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자 유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풍마는 웃는 낯을 유지하면서도 중얼거렸다.
"무슨 이능력자가 카메라 플래시도 못 버텨...?"
개미보다 더 작은 소리였지만 유나는 정확히 그 빈정거림을 들었다.
지난 1년간 히어로 아카데미에서 경험하고 배운 것 중 가장 발달한 것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타인의 말에 민감한 '청각'을 꼽을 것이다. 같은 훈련생이라면 무시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상대는 까마득한 고지에 있는 A급 히어로다.
유나는 굳어가는 풍마의 표정에 재빨리 미소를 지었다.
"아...저...정말 풍마 김규민 히어로님이신가요? <청송> 길드 소속의 그 오우거 킬러?"
"하하하! 역시 아는구나! 말 편하게 해도 되지, 후배?"
이미 말은 편하게 놓았으면서. 유나는 속마음을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 이러면 안 되는데, 저보다 훨씬 대단한 이능력자를 볼 때마다 드는 질투에 자꾸 자괴감이 들었다.
풍마는 유나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유나는 그 솥뚜껑만 한 손에 붙잡혀 빼내지도 못했다.
"만난 것도 인연인데, 후배님 1학년이라고 했지?혹시 2학년 길드 연수에 참가하려는 곳 있어?"
"......아직 없어요."
정확히는 아무곳도 유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유나는 그걸 곶이곧대로 말했다가, 눈앞의 남자에게 코가 꿰일 것 같아 애써 진실을 숨겼다. 역시 풍마는 몹시 반가워하며 유나의 손등을 두드렸다.
"그래?! 그러면 우리 길드 들어와! 내가 잘 얘기해줄게."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뭔가 엄청 무미건조한데. 후배님, 혹시 싫어? 싫으면 싫다고 얘기해."
'A급 히어로 면전에다 대고 싫다고 할 E급이 어디있겠어요.'
유나는 턱밑까지 차오른 본심을 숨기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해서 청송같은 큰 길드에 실습 신청을 하기가 그래요. 만약에 신청하게되면 꼭 선배님 소개로 왔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때는 잘 부탁드립니다."
"...아, 그래? ...뭐, 알았어. 그럼 후배님 몸조리 잘 해."
풍마는 유나의 손을 놓으며 무미건조하게 인사한 후 의무실을 빠져나갔다. 유나는 싱숭생숭한 속마음을 애써 숨기며 옆에서 기다리던 기자, 곽용우에게 고개를 숙였다.
"인터뷰 도중에 죄송해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라...."
"아뇨. 괜찮습니다. 그, 실례가 안된다면 길드 연수얘기는-"
"아마 안 될 거예요. 저 E급이라. 청송은 커녕 길드 연수 신청도 못 해요."
유나는 담담히 제 진실을 털어냈다. 히어로 아카데미 2학년 길드 연수에 참여 가능한 최소 등급은 D급, '현재 레벨'이 어느 하나라도 11을 넘기면 누구든지 참가 가능했다.
하지만 유나는 그 D급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현재 레벨이 고작 10이라는 E급이었다. 심지어 성장 한계인 '최고 레벨'도 10이라는, 히어로라고 하기에는 자격 미달에 가까운 재능.
곽용우는 어쩔 줄 몰라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녜요. 2달 동안 열심히 노력하면 되니까 괜찮아요. 머리 좀 식힐 겸 미국도 다녀왔으니. ...오자마자 이런 사고가 터질 줄 몰랐지만."
새 해 첫 사건을 괴조의 습격을 받은 것으로 시작했지만, 유나는 긍정적인 마인드로 상황을 받아들이려 했다.
'액땜했다고 치자.' 혹시 이번 위기를 겪으며 성장 한계가 올라갔을 수도 있으니까. 유나는 돌아가는 즉시 제 등급을 재검하기로 마음먹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희 어디까지 얘기했죠?"
"아. 아르겐타비스가 땅에 떨어진 곳까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른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괴수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가만히 계시다가 갑자기 달려가셨다고 들었는데요. 혹시 이유가 있을까요?"
"......."
유나는 기억을 곱씹었다. 분명 아카데미에서 가르쳐준 대로 가만히 몸을 숙였는데 왜 달려야 했더라.
"아."
떠올랐다. 한국말을 잘하던 금발 외국인.
"그 남자분이 도망쳐야한다고 했어요. 그러고보니 그 남자분은 괜찮으세요?!"
"지, 진정하세요. 그 분이라면 벌써 치료받고 공항을 떠나셨습니다."
곽용우는 이미 자신이 그와 인터뷰를 한 내용을 유나에게 보여줬다. 곽용우는 골치아프다는 듯 혀를차며 정리해놓은 임시 기사의 내용을 읊었다.
"한국에 놀러 왔는데 오자마자 겪은 사고에 대하여 몹시 당황했지만, 힘없는 소녀가 괴조에게 습격당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죽을뻔 했지만 한국의 히어로 <풍마>가 괴조를 물리쳐준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기적같은 순간이었다. "사랑해요, 한쿡." ......어휴."
"어.... 그 분이죠?"
유나는 떨떠름하게 웃었다. 곽용우는 그 웃음을 놓치지 않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유나를 바라봤다.
"뭔가 있죠? 솔직히 아까 풍마 님 오셔서 하다가 끊긴 이야기지만...."
곽용우는 제 수첩에 빠르게 볼펜을 끄적여 유나에게 보였다.
[풍마는 그만한 화력 못 내요. 절대로.]
아무리 유나가 이능력이 부족하더라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니다. 지금 이 기자는 괴조가 일격에 터진 그 기현상을 풍마가 아닌 그 금발 외국인이 저지른 짓이라 단정짓고 있는 것이다.
"......."
유나는 택시 안에서 있던 해프닝을 떠올렸다. 캐리어를 잠시 확인하기 위해 비밀번호 '1225'를 눌렀더니, 갑자기 캐리어 아래가 슬라이드로 튀어나오며 탄환들이 떨어져나왔다. 그리고 그 쿠션에 크게 나 있던 홈에는 분명 '총기'가 들어갈 만한 공간이 있었다.
- 비밀 지켜요.
"역시. 그 남자분이 뭔가 있죠?"
곽용우가 콧김을 내뿜으며 스크린을 펜으로 두드렸다. 특종 냄새를 맡은 기자의 모습에 유나는 속으로 크게 심호흡을 하고 대답했다.
"코트 비싼 것 같던데."
"...네?"
"저 구해주시려다 코트 다 찢어졌거든요."
유나는 눈치 없는 바보가 되기로 했다.
* * *
"신서울 가는 버스가 없어요?"
시안은 당황한 얼굴로 시각을 확인했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터미널로 달려왔건만, 벌써 시계는 오후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터미널 직원은 지친 얼굴로 안내판을 가리켰다.
"신서울로 가는 길에 A급 던전이 생겼어요. 그거 해결되기 전까지는 버스 못 올라갑니다."
"그, 돌아가는 길도 없나요?"
"네. 경부고속도로 말고는 이제 신서울로 올라가는 길이 없습니다."
시안은 볼을 긁적거리며 안내판의 공지사항을 다시 확인했다. 오후 6시, 동대구 IC 인근에 A급 던전 발생. 발생 즉시 신서울에서 길드가 던전을 공략하러 떠났다면, 아마 조만간 공략에 성공했다는 결과가 나올 터.
직원은 그런 시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제 마도기어를 두드려 시안의 앞에 스크린을 띄웠다.
"지금 <태양>, <우리>, <청송> 세 개의 길드에서 공략 신청해서, 어떻게 지분을 나눌 지 심의 중이에요."
"...길드에서 단독으로 처리하지 않고요?"
"외국과 달리 한국은 한 시간이면 어디든 갈 수 있어서 공동으로 던전을 공략하는 경우가 수두룩해요. 오히려 세 개 길드면 적은 편이죠. 지난 번에 대전에서 열린 던전은 9개 길드가 공략을 신청한 걸요."
"그럼 아직 공략을 시작도 안 했다?"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화면으로 스크린을 넘겼다. 터미널 인근의 숙박업소 위치가 나오는 지도였다.
"신서울에 숙소 잡으셨으면 취소 하시고 방 새로 잡으셔야 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시안은 떠나기 전, 다음 날 정오에 출발하는 버스를 예매하고 터미널을 빠져나왔다.
그 하룻밤 부산에서 발이 묶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시안은 아직 예감하지 못했다.
"푸엣취!"
구멍 난 코트 사이로 찬바람이 솔솔 불어, 그저 어깨를 웅크린 채 오들오들 떨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