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52 3부 2장 26 테라의 중심에서
"전선을 유지해! 어떻게든 버텨!!"
그레이는 청화단의 단원들을 다독였다.
다독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전선이 무너지면 적은 무참히 자신들을 짓밟을테니.
"아이들을 생각해! 물러서지마!"
전세는 불리하다.
아무리 멀리서 포격을 하려고 해도, 적들이 포격으로 터뜨리를 수 있는 이상으로 가까이 오면 접근전을 할 수 밖에 없다.
"크아아악!!"
가이아나치들은 괴성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들의 몸에 붙은 푸른 불꽃은 병사 한 명의 마력을 전부 불태울 때까지 달라붙었고, 실제로 적들은 하나 둘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이들도 다시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했으니, 그들의 마력이 완전히 사그라들었을지언정 그들의 체력이 줄어든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비살상.
청화단의 모든 공격은 창염이 깃들어있기에, 정령이나 마력을 쓰는 이들에게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총포로 중무장한 이들에게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았다.
적들을 죽이기 위해서는 진짜 살상을 저질러야 하는데, 청화단의 리더는 적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진짜로 죽여야 할 적은 따로 있으니, 그들을 죽여야 한다.
같은 테라의 사람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건 의미가 없다.
가이아나치 중에서도 진정으로 반성하고 뉘우치는 자들이 있으면 평생을 속죄하면서 살게 하면 되고, 간부급이나 악한 자들만 목숨으로 단죄하게 하면 된다.
그래서 피닉스는 직접 신관을 처단하기 위해 결계를 펼쳤다.
청화단의 승리 플랜은 오로지 피닉스가 신관을 이기기를 믿는 것.
"아아악!"
어깨에 총탄을 맞아도, 적들의 공격에 죽을 위기에 처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믿고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그레이 님! 무리입니다! 지금이라도 후퇴를...!!"
"믿고 기다려!"
믿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길이 없다.
"그러니-"
푸욱!
어디선가 들려온 총격 소리에 그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숙였다. 배에서 쓰라린 아픔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손을 배에 올리니 서서히 붉은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레이 님!"
"안 돼...!"
그레이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는 가장 큰 전차를 몰고 적을 향해 열심히 포격을 하고 있는, 겉에 달라붙은 적들을 떨쳐내기 위해 몸을 흔들고 있는 포격전차가 한눈에 들어왔다.
키샤아앗!
그리고 포격전차로부터 튀어나온 금빛의 정령 또한 몸으로 가이아나치를 들이받으며 떼어내고 있다.
"우리 뿐만 아니라 이국의 이들도 저렇게 열심히 싸우고 있다. 우리가 물러서면 안 돼!"
"그레이 님...!"
"내가 설령 죽더라도, 내가 죽었다고 알리지 마라! 네가 지휘해! 알겠나?!"
그레이가 결연한 의지를 다잡는 순간.
화르륵.
결계가 사라지며, 안에서 피닉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이전과 달리 몸에서 금빛을 내뿜는 피닉스의 색은 신관이 내뿜는 빛과 비슷했다.
"설마...?"
그레이는 절망했다.
혹시 신관에 의해 세뇌라도 당한 것이 아닐까?
당장이라도 저 고개가 뒤로 돌아와 우리를 향해 마구잡이로 손톱을 휘두르지는 않을까?
[신의 뜻을 참칭하는 자에게 단죄를.]
철컥.
"오오오!!"
피닉스는 두 팔을 하늘 높이 뻗었다.
그리고 피닉스의 뒤로 거대한 빛무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설마...대지의 여신...?"
피닉스의 뒤로, 마치 피닉스를 보듬 듯 대지모신의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지모신은 정말 사랑스러운 것을 감싸쥐듯, 신관이 아닌 피닉스를 품기 시작했다.
"여, 역시...!"
그레이는 악을 쓰며 소리질렀다.
"모두, 충격에 대비!!!"
그레이를 비롯한 모든 청화단은 파괴전차들의 뒤에 숨었다.
그리고.
[창염개진.]
□□□□□□□ㅡㅡㅡㅡㅡㅡㅡ!!
대지를 뒤흔드는 막대한 충격파가 울려퍼졌다.
* * *
지륜개진.
은 존재할 수 없다.
나는 창염의 것이고, 창염의 이름에 지륜을 대체할 수도 없다.
하지만 지금은 유나의, 지륜의 힘을 받아 싸우고 있다.
가이아나치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기 위해서 지륜의 힘을 이용하고 있으며, 궁극기 또한 지륜의 힘을 극강으로 활용하여 싸우는 중이다.
딜레마다.
내가 지륜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창염개진에 지륜을 넣을 수 있을까?
아니다.
그래서 저질렀다.
창염개진.
-유나개진이라고 해야죠!
'그건 안 되지.'
-지금은 제가 오빠의 배후성인데요!
'얘가 요즘 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
유나와 연동이 되어있어서 그런 걸까.
예전에 피닉스 시절, 창염과 연동이 되어있던 것처럼 유나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네가 지금 내게 힘을 주고 있는 건 맞지만, 성좌라기보다는 그냥 여신 아니냐?'
-제가 여신이기는 하죠. 그래도 그라운드 제로도 아니고 지륜개진도 아니고, 지륜의 피닉스라면서 창염개진이 뭐예요?! 당장 다시 외쳐요! 마치 이차 궁극기인 것처럼!
'안 되지.'
-도대체 창염개진이 뭐길래!
'근본.'
머리칼을 염색한다고 해서 모근의 색이 바뀌는 건 아니다.
뿌리염색을 한다고 하면 모를까, 지금의 나는 컬러링만 바꾼 수준일 뿐이다.
나의 몸에 흐르는 마력이 지속성의 마력이라고 한들, 이 아바타에 남아있는 모든 힘이 창염의 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인 이상, 나의 궁극기는 창염개진이다.
대신, 창염개진(유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보아라, 신의 분노를.]
지축이 흔들린다.
대지가 흔들린다.
땅 전체가 흔들린다.
가이아나 왕국이 만들어진 통로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나는 아래로 손을 뻗으며 모든 힘을 비틀었다.
구구구.
거친 진동이 울려퍼진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전조가 울려퍼지자, 신관을 비롯한 적들은 머뭇거리던 걸 멈추고 나를 향해 공격을 하려고 총구를 내게 겨눴다.
-아, 아-----
나를 보호하듯 선 유나가 노래를 부르듯 입을 열었다.
지륜의 힘을, 대지모신의 힘을 그대로 가진 그녀이기에 그녀가 내뱉는 말은 곧 가이아나 왕국 사람들에게 신언(神言)이나 마찬가지였다.
-He's Gone-
[.......]
유나도, 보통은 아니다.
현실로 넘어오면서, 20년의 지구에 있던 유나가 현실로 넘어오면서 그녀는 내가 알고 있던 원본 유나와 상당히 달라졌다.
-Out of my life-
물론 유나의 말의 의미는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유나는 한국어로 말하고 있는 중이고, 단지 엄청난 음파가 신성한 마력으로 퍼져나가고 있을 뿐이다.
두두두둥.
거칠게 땅이 울린다.
유나는 현실에서 아마 마이크를 붙잡고 외치고 있을 것이며, 나는 그녀가 부르는 노래에 맞춰 지축을 흔들었다.
쿵, 쿵, 쿵!
땅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불기둥이 치솟는다.
그 박자는 마치 드럼을 치는 박자처럼, 딱딱 맞아 떨어진다.
유나는, 그냥 노래를 부르고 싶을 뿐이다.
동전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붙잡고 열창을 하는 것처럼, 모두의 앞에서 나를 앞에 세워두고 노래를 부르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I can't live without his love.
"아아, 신이시여...!!"
"신을 찬양하라...!"
"신께서, 흐윽, 우리에게 노래를...!!"
가이아나 왕국의 병사들은 하나 둘 무릎을 꿇으며 신을 경배하기 시작했다.
귓가를 간질이는 감미로운 목소리와 유나의 진심이 담긴 가사 전달력은 짙은 호소력이 되어 전해졌다.
-I'm wasting away.
마치 영어를 잘 듣지 못해도, 한국 가수의 노래임에도 귀가 좋지 않아서 무슨 말을 하는지 가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경우처럼.
영어 가사를 한국 가수가 불러도 본토 사람들이 가끔 이해하기 어렵다고는 하지만, 음정에 실리는 마음은 확실하게 전달 되는 법.
유나가 아무리 외계인이라고 한들, 그녀의 영어는 수능 영어다.
외국에 나가본 것이 불과 몇 개월 되지 않는 토종 한국인이다.
그래서, 유나의 노래는 마력을 흔들어도 그 가사가 전해지지 않는다. 단지 여신의 슬픈 아리아처럼 들릴뿐.
'근데 노래에 정신이 팔리면 되나.'
유나의 노래는 창염개진이 아니다.
그냥 유나가 '어떤 현상'이 일어나기 전에 노래로 시선을 끌고 있을 뿐이다.
-Forgive me
'됐다.'
큰 거, 온다.
적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진정한 창염개진이!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콰ㅡㅡㅡㅡ앙!!
지면 아래가 폭발하며, 막대한 푸른 불기둥이 치솟았다. 불꽃은 아래에서 천장으로 솟구쳐 분수마냥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뭐, 뭐야?!"
"서, 설마 이게 신의 분노...?!"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ㅡㅡ□ □ □□□ □ □----!!
신의 음성이 고조되고, 불꽃은 아래에서 폭발하듯 사방에서 솟구치기 시작했다.
마치 나를 중심으로 가이이나치들이 포진한 적들의 진영을 푸른 불기둥으로 원형으로 휘감듯, 창염은 적들을 화려하게 집어삼켰다.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갈 지어니.]
지하로도, 천장으로도 도망칠 곳은 없다.
유나의 기술은 모든 것을 흙으로 감싸지만, 이 창염개진은 모든 것을 불꽃으로 휘감는다.
마치 어떤 섬의 역장이 조여오듯, 서서히 창염이 중앙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 도망쳐!!"
"도망? 하, 어디로? 이것이 신의 뜻인 것을."
두려워하는 자들도 있고, 순순히 두 팔을 벌려 받아들이는 자들도 있다.
"키아아아아악!!"
모두가 창염에 불탄다.
나는 그들을 향해 두 팔을 벌렸고, 벌벌 떠는 땅의 신관은 조용히 고개를 푹 숙였다.
푸슈우웃.
그녀의 귀에서 피분수가 터져나왔다.
나는 저게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연출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고막 쪽을 보호하기 위해 마력을 과하게 불어넣은 것이 터진 모양이다.
'고막은 의미 없는데.'
마력 전체를 흔드는 공격이라 범위를 벗어나는 것 이외에는 의미가 없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늦으면, 이렇게 불의 결계가 휘감는다.
그리하여.
영역 안에 있는 모든 마력이, 푸른 불꽃에 불타 영이-제로가 된다.
바야흐로, 그라운드 제로.
아.
유나의 힘을 빌려서 쓰고 있지만.
목소리는 내 목소리로 나간다.
데헷.
* * *
"이유나, 저 녀석이...."
"좋은 노래 아닙니까."
"저작권...!!"
"앗."
창염개진(地)는 없던 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