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843화 (843/1,497)

EP.843부 청화의 시대 No.5 세계의 비밀에 가장 가까운 자

이능력과 마력의 발견 이후.

괴수의 위협이 점차 사그라들어 인류의 승리가 보이기 시작하는 이 시대.

2021년.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를 '마도혁명의 시대'이라고 칭했다.

- 더이상 미국은 석유를 위해 전쟁을 할 필요가 없다!

- 코어! 더 많은 코어!

- 이제 민주주의는 석유가 있는 곳이 아닌 코어가 있는 곳으로 배달될 것이다!

에너지원의 대체!

고도로 발달된 과학은 마법과 같다고 누군가가 말했지만, 과학이 마법과 하나가 되는 순간 인류의 발전은 마하의 속도로 진보한다.

기존에 발전하고 있던 과학이 마력과 이능력의 힘 덕분에 기존 세계의 법칙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면서, 인류는 이전보다 더욱 편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발전이 더뎠다.

발전을 위해 공장을 짓고 연구소를 만들면 괴수에게 습격을 당하거나 괴인들이 들끓는 게 예삿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실험과 연구에 따른 이상현상 이외에는 그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면, 인류는 안전이라는 요소 앞에서 압도적인 기술로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프로페서.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 국적을 취득한 '히 씨'는 언제나처럼 개인 시간의 활용을 위해 연구실로 돌아왔다.

매일 매일 별 너머의 광경을 관측하고 있는 물주와는 별개로, 그녀에게는 휴식과 개인 연구를 취할 시간이 필요했다.

"오셨습니까, 교수님."

흑발에 안경을 낀 청년은 프로페서 H를 향해 인사했다.

프로페서, 히메지 히카리는 청년을 향해 등 뒤로 섰다.

사락.

청년은 자연스레 히카리가 입은 가운을 잡았다.

히카리는 스스로 벗지도 않고 팔만 슥슥 당긴 것으로 가운을 벗었고, 청년은 가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화르륵.

푸른 불꽃이 가운을 전부 덮었다. 그러자 먼지가 모두 사그라들었고, 옷은 금방 다려놓은 것처럼 구김 한 점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경악하리라.

세계를 구한 푸른 불꽃이 급속 다림질에 이용되고 있다니.

바야흐로, 초고성능의 의류관리기가 아닐까.

"P쨩."

"......."

"또 반응 안 한다. 내가 P쨩이라고 하면 P쨩인 거야. 알겠어?"

"알겠습니다, 교수님."

피닉스, 아니 P쨩은 대놓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호칭에 대한 무언의 항의였으나, 히카리는 깔끔하게 무시하며 흔들의자에 앉았다.

"회장님은 계속 이계의 피닉스가 회귀한 본체인 줄 알더라. 어떻게 생각해?"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네 감은?"

"...솔직히 얘기해도 됩니까?"

"응."

"사랑하는 여자를 구하는데 성공하고 난 뒤에, 이번에는 비극 자체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테라로 뛰어든 멍청이 같습니다."

히카리는 P쨩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게 말이나 돼?"

"물론입니다. 제 본체라면, 사랑에 미친 그라면 분명 그랬을 겁니다."

"만약에 너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내가 같은 상황이었다면."

"당연히 시도했겠죠."

두 사람의 말은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었고,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었다.

"나를 위해 십만 번을 죽어줄 수 있어?"

"예."

거짓이 아니었다.

빈말도 아니었다.

그는 담담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나를 위해 모두를 죽여줄 수 있어?"

"예."

"나를 위해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어?"

"예."

"일본을 불태워버리는 건?"

"그건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흐응."

히카리는 게슴츠레 웃으며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럼 나랑-"

"스톱."

"엣."

"미성년자 상대로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습니다."

P쨩은 칼같이 히카리의 행동을 제지했다. 히카리는 다시 셔츠 단추를 잠그며 한탄했다.

"사장님 때랑 다른 게 전혀 없어."

"성인이 되고 난 뒤에 말씀하십시오."

"성인이 되고 난 뒤에는 해도 돼?"

"하고 싶으시다면."

P쨩은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 연구실에는 '야메떼'하는 소리만 가득할 겁니다."

"나 일본어 안 쓰는데."

"P쨩이라고 저를 부르시지 않습니까."

"그건 다르지. P쨩은 P쨩이야. 그럼 매번 부를 때마다 사장님의 조각이라고 불러줄까? 응? 모바일 게임에서 파편 모으면 캐릭터 하나 주는 것처럼."

게임.

히카리의 언급에 P쨩은 자세를 고쳐잡았다.

"제가 게임 캐릭터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또 모르지."

히카리는 마도기어를 꾹 누른 뒤, 모든 영상기기의 음성 데이터 기록을 잠시 중단했다.

3분.

모든 마력적 흐름이 차단된 연구실의 이야기는 기록으로도 남지 않는다.

"우리가 게임 속 캐릭터였을 줄 누가 알아. 안 그래?"

"......."

"그렇게 노려보지마. 나만 알고 있는 걸. 세계의 진실. 두 개의 세계가 이계신에 의해 하나의 세계로 연결되고, 우리의 세계를 바탕으로 미연시가 만들어지고. 사장님은 그 게임을 플레이했다가 이 세계로 넘어왔던 플레이어고. 맞잖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히카리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불쾌감을 내비친다기보다는, 세계의 법칙을 알아낸 천재가 이죽거리는 것 같았다.

"딱히 환멸하거나 경멸하지 않아. 나는 나일 뿐이고, 이런 걸 괜히 연구했다가는 회장님을 비롯해서 언니들 멘탈 나가버릴테니까. 회장님 돌아버려서 전세계에 퍼진 X로이들 자폭시키면 어떻게 되겠어? 피닉스로이드 한 대에 원자폭탄 다섯 개 급의 화력이 들어있는데."

"그걸 만든 제작자가 교수님이잖습니까."

"그래. 내가 만들었지. 칭찬해."

히카리는 스스로의 어깨를 두드렸다.

"...제가 알던 히카리랑 너무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김치 많이 먹어서 그래."

"김치가 사람의 성격도 다르게 만듭니까? 그런 연구 결과는 저널에 없었습니다만."

"국뽕이라는 이름의 김치야."

"일본인이지 않습니까?"

"나는 일본 왕조가 백제의 혈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히카리의 말에 P쨩은 손으로 얼굴을 덮어버렸다.

"아차,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 아무튼 나는 별로 신경안 써. 내가 궁금한 건 그거야, 그거."

삐빅.

연구실의 패널들이 하나 둘 다시 점멸하기 시작했다.

[히카리. 뭘 한 거예요?]

바로 모니터에는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금빛의 별로 반짝이는 눈동자의 여인, 은유하는 걱정어린 눈으로 히칼를 살폈다.

"아, 죄송해요. 피닉스로이드의 코어 데이터를 잠시 손보고 있었어요."

[...조심해주세요. 그래도 그가 남기고 간 조각이니까.]

"당연하죠. 그분에게 얌전히 돌려주기 전까지는 절대 해부하거나 해체하거나 개조를 하거나 하지 않아요."

이미 본체를 상대로 그가 지구를 떠나기 전에 다 해봤으니까.

히카리는 뒷말을 삼켰다.

[아무튼 별 일 없다니까 다행이네요. 이쪽은 지금 전쟁 준비에 한창이라서.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

삑.

은유하와의 연결이 끊어졌다.

히카리는 손을 옆으로 뻗었고, P쨩은 어느새 도자기컵을 하나 건넸다.

안에는 따뜻하게 우려난 녹차가 가루 한 점 없이 말갛게 담겨있었다.

"...아무튼 P쨩이 생각하기에는 테라의 피닉스가 '과거의 피닉스가 아닐 것이다 이거지?"

"예."

"근거는?"

"이것입니다."

크리슈나가 촬영한 화상 데이터 속.

P쨩과 똑같이 생긴 흑발의 청년은 하얀 사제복을 입은 채, 태양을 향해 양팔을 45도 각도로 들고 서있었다.

"창염개진이잖아."

"태양만세입니다."

"이게 왜 증거야?"

"창염개진이야말로 저 남자가 과거의 테라 속 피닉스가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정말, 영문을 알 수 없네."

히카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기도 싫었다.

끼리릭.

2021년 1월 1일.

괴수의 위협이 사라진 뒤, 부산 해운대에 모인 수많은 이들이 백사장을 향해 횡대로 서 있었다.

-일동, 차려ㅡㅡㅡ!

해병대 모자를 쓴 장년인이 목청껏 외치자, 백사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일제히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들은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고, 노인도 있었고, 어린 아이도 있었고, 심지어 기계도 있었다.

영웅도, 악당도, 일반인도, 괴인도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인 해운대 백사장.

1월 1일.

동해에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향해, 그들은 모두 양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창염, 개진ㅡㅡㅡ!!

-창염, 개진ㅡㅡㅡ!!!!

정말, 해운대가 떠나라고 할 정도 많은 이들은 창염개진이라는 문구를 외쳤다.

그리고 떠오르는 태양에서 푸른 머리칼의 여인이 엄지를 척 들어올리는 것 같은 환영이 스쳤고, 해운대에 모인 이들은 모두 그 광경에 오열했다.

아아아......!!

피닉스! 피닉스! 피닉스!

인류를 위해 희생한 한 여인을 위해, 그녀에 의해 생명이 구해진 이들은 모두 피닉스를 연호했다.

자세를, 고치지 않은 채.

"세상 사람들이 알면 어떻게 될까. 저 자세가 실은 '태양만세'라는 걸."

"위험한 발언입니다, 교수님."

"뭐 어때? 내가 알았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히카리는 양팔을 들며 으쓱이려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봐. 나도 모르게 이러려고 하고 있어. 나만 이래? 전세계가 이런다니까? 저기 미국 대통령 중에 새로 당선된 사람은 백악관에서 이러고 있더라. 프로레슬러 중에 어떤 사람이 이 포즈 했다가, 45도 각도를 안 지켰다고 차가 테러를 당했다네. 이게 말이나 되는 세상인지."

히카리는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세계를 구한 영웅이 사실은 세계가 아니라 한 명의 여자를 구하기 위해 희생했다는 걸 알면 모두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P쨩은 답변하지 않았다.

"세계는 그 여자를 구하는 김에 덤으로 구원받았다는 걸 알면, 그 때도 저들은 저렇게 행동할까?"

"그건, 그렇다고 답하겠습니다."

P쨩은 이번에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왜?"

"피닉스의 희생 덕분에 인류는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더이상 괴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인류는 더이상 차원문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또 인류는...."

"아, 그건 아닌 것 같네."

히카리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녀는 즉시 키보드 위에 두 손을 올렸다.

"피닉스, 관측해줘. 위성 데이터 모아주고."

"좌표확보 완료. 송신."

히카리는 피닉스의 도움을 받아 마력의 이상 흐름을 단번에 간파해냈다.

지구 전역에 펼쳐진 마력 신호를 바탕으로 조금이라도 이상한 흐름이 감지되면 그 패턴을 파악하여 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상하는, 이른바 미래예측에 가까운 힘.

"큥라클, 시동."

히카리가 엔터 키를 누르자, 화면이 반짝이며 어떤 장소를 가리켰다.

"......피닉스, 여기다가 경보 울려줘."

장소, 일본.

"도쿄에 게이트 열리네...."

아직, 인류의 위협은 끝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