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염의 피닉스-842화 (842/1,497)

EP.842부 청화의 시대 No.4 나의 아저씨

정슈리.

난민으로 흘러들어와 서울에 도착한 그녀는 이제 완연한 한국의 시민으로 자라는 중이다.

다만, 정규 교육과정을 거쳐야 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에는 가지 못했다.

그녀가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능력.

아주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화속성 A급, 심지어 준 S급이라는 엄청난 재능을 발현했다.

전국의 많은 이들이 슈리를 노렸다.

슈리가 자신들의 세력에 가담해주기를 바랐다.

슈리를 자신들이 키워서 얼굴마담이든 뭐든 제 앞에 세워놓기를 바랐다.

아무리 S급이 다시 10명 이상이 되어 이름난 이능력자라고 하면 다 S급이라고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한들, S급이라는 사람의 가치는 지금도 명백히 유지되고 있다.

특히, 화속성.

세계를 구한 자의 속성이라면 더더욱 가치가 있다.

전세계에서 가장 화속성 이능력자의 비율이 많은 나라라고는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나이가 아직 고등학생이 되기 전의 아이가 준 S급이라는 것은 갈등의 여지가 많았다.

더군다나 외국인 출신이라서 그런지, 그녀는 좋은 영양과 규칙적인 생활 덕분에 아주 멋진 여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슈리는 모델해도 되겠다."

"으, 응...?"

헌터 길드, 청화단.

자신의 몸을 이곳저곳 훑으며 말하는 장발 여인의 말에 슈리는 몸을 웅크렸다.

"농담하는 거 아니야. 고등학생들도 모델하는 애들이 종종 있어? 10대 잡지 그런 거."

"10대 잡지가 나와?"

"그럼. 이제 슬슬 사람들이 평화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거지. 사실 그 이전부터 나오기도 했지만...."

"어린아이들의 문화 거리에도 신경을 쓸 만큼 이제 평화로워졌다는 거다."

선글라스의 남자가 다가와 슈리의 앞에 종이책을 내려놓았다.

상당히 낡았지만, 보관 상태가 양호한 물건은 마치 책받침과 같았다.

연예인과 같은 이들이 그려진 듯한.

"이거 엄청 오랜만이네. 나 어렸을 때 이거 없으면 학교에서 놀지도 못했는데."

"토요일마다 학교 가면 이거 종류별로 모은 거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었지."

"토요일에 학교를 가?"

슈리는 충격을 받았다.

"왜? 주말이잖아?"

"...그땐 그랬지."

"지금은 아니야. 후후, 그립네. 놀토도 있었고, 서로 낚는다고 등교하는 날 아닌데 오늘 등교하는 날이라고 거짓말하고 그랬는데. 자기는 그런 거 당했지?"

"안 당했어."

두 남녀의 대화에 슈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틀...."

"어허. 우리 아직 30대 초반이다?"

"그래. 이 아저씨는 30대지만, 나는 20대야."

나이를 두고 티격태격하는 두 남녀로부터 슈리는 슬쩍 빠져나왔다.

그들의 대화는 점점 더 유치찬란해졌고, 슈리는 전혀 공감할 수 없는 그들의 어린 시절 대화에서 물러났다.

누가 예상이나 할까.

저기서 소싯적 이야기를 하면서 트램폴린을 두고 방방인지 퐁퐁인지 진지하게 논의하는 저 남녀가 이 나라 헌터 집단의 최고봉이라는 것을.

휘이이잉.

슈리는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왔다.

여의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옥상에서 바라본 서울의 광경은 실시간으로 바뀌어나가고 있었다.

"조용해서 좋네."

한적하다.

비록 종로 방면에서 한옥형 초고층 빌딩 하나가 우뚝 솟아났지만, 슈리는 고요함을 즐기며 옥상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정말, 좋네."

고요하고 평화롭다.

누가 이곳이 일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괴수가 들끓고 피와 학살이 가득하던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아무리 세상이 눈 깜짝할 새에 변한다고 하더라도, 변화에는 정도가 있는 법이다.

서울은 지난 일 년 사이에 급격하게 변했다.

심지어 이곳 여의도 같은 경우에는....

"나중에 하늘로 뜨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닐걸?"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슈리는 잠시 웃었다가 바로 표정을 바꿨다.

"뭐야, 아저씨. 나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너 가는 곳이야 뻔하지."

저벅, 저벅.

금발벽안의 청년은 양산을 든 채 슈리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청년은 양반다리를 한 자신의 다리를 두드렸고, 슈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저씨 다리 근육밖에 없어서 싫은데."

"그건 좀 충격인걸."

"...농담이야."

슈리는 청년의 다리에 머리를 이고 누웠다.

파라솔 같은 양산으로 햇빛을 가리며, 청년-피닉스는 슈리를 향해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 아저씨는 토요일에 학교 갔어?"

"토요일에 학교를? 누가 그런 소리를 했어?"

"바지 단장님이랑 아내분이."

"세상에."

피닉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배려가 없네."

"...응?"

"아니야."

피닉스는 슈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슈리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까 입을 꾹 다물었다.

"아저씨."

"응."

"아저씨는 청화 님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거라고 했잖아."

"......."

피닉스는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여러 가지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했지만, 피닉스는 슈리를 향해 계속 말해보라는 듯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슈리는 조금 싫었다.

"아저씨는 내가 싫지 않아?"

"왜?"

"이야기를 해봐야 공감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걸."

"그런 말 하지마."

"아니야. 사실이잖아."

슈리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가끔가다가 생각나는 거지만, 세상은 정말 이상한 것 같아. 나는 하루하루가 살아남기 위한 전쟁이었는데."

"슈리야."

"학교에도 가본 적이 없었어. 학교가 폭격으로 날아갔었거든."

괴수와 괴인이 나타나는 시대.

그런데도 인간들끼리 전쟁을 벌이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나만 불행하다고 불평하는 건 아니야. 세상 모든 사람이 똑같이 고생했고, 다들 힘들었던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슈리야."

피닉스는 슈리의 볼을 쓰다듬었다.

"고생 많았어."

"......흥."

슈리는 한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피닉스는 슈리가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한참 가만히 있었고, 슈리는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저씨. 나, 학교에 가고싶어졌어."

"학교?"

"응. 학교. 내 나이에 맞는 학교에 들어가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해?"

"......이능력자라는 것 때문에 들어가도 쉽지 않을 걸."

피닉스는 슈리를 향해 다가와 양산을 씌웠다.

"일반 고등학교 들어가는 길이 있고, 전문적으로 이능력자 양성이나 이능력 코스로 걷도록 하는 특수목적 고등학교도 있지. 그런데 슈리는 그런 것 때문에 학교에 가고 싶은 게 아니잖아?"

"...응."

배우고 싶어서 학교에 가고 싶어 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것은 지식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알고 싶어. 사람들이랑 어떻게 친해지면 되는지."

타인과 친해지고자 하는 건 그녀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항상 사람을 의심하며 지냈거든. 저놈이 나를 어떻게 하지 않을까, 자는 사이에 누군가 내 품에 있는 동전 한 푼 훔쳐 가지 않을까. 아직도 이런데...내가 앞으로 다른 사람들이랑 잘 지낼 수 있을까?"

"그럼."

"나 막 A급에서 S급으로 올라갔다고, 내 맘대로 행동하면서 개싸가지 쓰레기 년이라고 욕먹는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피닉스는 부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슈리, 네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거야. 저기 누구는 매일 방에만 틀어박혀서 집에서 안 나온다고 하더라."

"...정말?"

"그래. 매일 누워서 TV만 보고, 컴퓨터만 하고, 그러다가 시간 되면 스마트폰 켜서 드라마 보고. 그걸 지금 몇 달째 반복하고 있다고 하더라."

"사람이 그래도 돼?"

"사람이 아니지."

피닉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저씨."

"응."

"아저씨는 뭐 때문에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는 거야? 나같이 피해망상밖에 없는 여자애한테. 가진 거라고는 마력 덩어리밖에 없는 난민 여자애한테. 동정심? 이능력? 그것도 아니면 내 몸?"

슈리의 말에 피닉스는 고개를 단호히 가로저었다.

"그런 거였으면 진작에 어떻게 했겠지. 내가 항상 네 곁에 있는 이유는...."

스륵.

피닉스는 슈리의 옆에 서서 그녀에게 양산을 씌웠다.

"세상에 내 편 하나 없을 때, 누구라도 항상 너를 믿어주고 지켜주는 네 편 한 명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흥."

슈리는 고개를 푹 숙이며 구시렁거렸다.

"그래봐야 다른 아저씨들 가득하면서."

"그건 할 말이 없네."

"원래는 언니였으면서."

"그건 애매한걸."

쏴아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른하늘에 갑자기 떨어지는 소나기에 슈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나는 기계야. 네가 생각할 때, 나를 프로그래밍 된 AI라고 생각할 수 있어. 공감해주는 것도 마치 상담 카운셀링 프로그램이 설치되어서 그걸 말하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고.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줘."

피닉스는 슈리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네가 어떤 길을 걷더라도 나는 네 곁에 있을 거니까. 내가 언제나 네 편이 되어줄게."

"누가 들으면 내 아빠인 줄 알겠네."

"아빠라고 한번 불러볼래?"

피닉스의 말에 슈리는 입 모양으로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아빠는 무슨. 아저씨는 그냥 아저씨야."

"너무한걸."

"아저씨가 그럼 아저씨지. 나한테 오빠 소리 듣고 싶어?"

"세상 모든 남자는 나이가 얼마라도 오빠 소리 듣고 싶은 법이란다."

"미친."

슈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저씨."

"응."

"아저씨는 학교 다닌 적 있지?"

"응."

"그럼 나 좀 도와줘."

슈리는 품에서 작은 칩을 꺼냈다.

"이거, 히카리 씨에게 받은 학교생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래. 아저씨가 내 옆에서 나를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응?"

"이걸 하면 학교 생활에 대해 잘 알 수 있다고 하더라."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피닉스는 칩을 이리저리 살피며 헛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그냥 학교 생활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를 같이 보는 건 어때?"

"왜? 그게 뭔데?"

"미연시. 19금이야. 안 돼."

"......."

슈리는 단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 아저씨. 그...."

"응? 왜?"

"한국 기준으로 내 나이상...이런 거 언제 할 수 있어?"

"...글쎄."

피닉스는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다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올해가 21년이니까, 한 24년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

슈리는 몇 번이고 24년이라는 단어를 입에 새겼다.

"아저씨, 그때가 되어도 내 곁에 있어 줄 거지?"

"당연하지. 나는 언제든지 네 곁에 있을 거야."

슈리는 빗속, 우산 속에서 조용히 피닉스의 품에 기대었다.

X로이드는 법적인 문제가 없으므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건 지극히 나중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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