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40부 청화의 시대 No.2 공무원 박 양의 일일
명왕성 낙하.
세계는 큰 위협을 한 악당의 희생으로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명왕성이 떨어지던 순간, 세계 전역에는 온갖 괴수들이 들끓었다.
괴수들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괴인이 되었고, 인류는 명왕성이 파괴되는 순간까지 목숨을 걸고 살아남고자 했다.
그 날.
명왕성이 지구에서 가장 가까워졌던 날.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지구 인구는 거의 6백만 명이 줄었다.
이 6백만 '사망자' 중에는 괴수나 괴인살해당한 이들도 있지만, 인간으로서 사망 판정을 받은 이들도 있었다.
괴인이 된 자.
이들은 인간을 포기했고, 괴인으로 자신의 파괴욕망을 마구 밖으로 드러내며 인류를 향해 적의를 드러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범죄를 마구 저질렀고, 이에 대해 히어로들은 괴인들을 전력으로 상대했다.
명왕성이 파괴된 이후.
완전히 미쳐버린 괴인들은 명왕성의 소멸과 함께 정신을 잃고 기절했고, 바로 히어로들에 의해 제압되었다.
하지만 정신을 잃고도 살아남은 괴인들이 있었다.
히어로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날뛰던 괴인들이라거나, 아주 운좋게 정신을 금방 차려서 히어로들로부터 도망쳤다거나, 모종의 방법으로 히어로들에게 붙잡히기 전에 몸을 숨겼다거나.
인류는 명왕성 붕괴라는 위협을 크나큰 희생을 통해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괴수와 괴인이라는 위협은 남아있었다.
한 가지 고무적인 것은 더이상 '차원문'과 같은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괴수나 괴인은 더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갑자기 차원문이 열려서 마룡이 튀어나온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스톤헨지에서 기존의 괴수가 아닌 또다른 형태의 괴수가 튀어나오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걸 제외하면 지금까지는 더이상 지구에 괴수와 괴인들이 늘어나지 않았다.
인류에게는 몹시 고무적인 일이었다.
바퀴벌레의 무서움은 한 마리를 죽인다고 해서 모든 바퀴벌레를 박멸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바퀴벌레가 아무리 들끓어도 번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죽이면 더 늘어나지 않고, 그 수가 줄어든다.
그럼 조금 고생을 하더라도 개체 수를 줄이고자 노력하게 된다.
태워죽이든 약을 치든 모든 바퀴벌레를 죽여 없애는 쪽이 인간의 삶을 더 평화롭고 윤택하게 해준다는 건 누구나 다 알 사실이었다.
명왕성의 붕괴 이후.
히어로들은 여전히 괴인과 빌런을 쫓고, 헌터들은 아직 살아남은 괴수들의 흔적을 쫓아 코어를 찾아나섰다.
시대는 바뀌어나가는 중이다.
이것은, '청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의 이야기.
* * *
"하아."
국가공무원, 박 양은 털레털레 걸으며 집으로 향했다.
옛 북한 지역에서 넘어오는 괴수들은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땅 곳곳에 숨어든 괴수들은 여전히 남아서 사람들의 위협이 되고 있다.
매일매일 괴수와 괴인을 퇴치하는 것이 그녀의 임무.
9시에 출근하여 6시에 퇴근한다는 저녁이 있는 삶?
그런 건 박 양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9시에 현장에 나가기 위해 7시부터 출근을 시작해야했고, 밤 9시까지 연장근무를 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본인이 안 하면 되지, 라는 말은 쉽게 통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요구되는 부분이 있었고, 그녀만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이 '이능력자 2급' 공무원의 숙명이었다.
20대의 나이에 국가공무원 2급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그녀가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만, 반대로 그만큼 책임을 져야할 일이 많다는 것도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헌터하는 건데."
박 양은 시간을 확인했다.
늦은 밤, 8시.
그래도 오늘은 금요일 저녁이라고 그나마 일찍 퇴근했다.
괴수대책부의 책임자들은 이번 퇴치를 성공적으로 자축하자는 의미에서 회식을 열었으나, 박 양은 핑계를 대고 적당히 빠져나왔다.
아니, 그래도 되나?
박 양은 그래도 된다.
그녀는 괴수대책부에서 단 다섯 명 뿐인 'S급'이니까.
'S급이 S급 대우를 받지 못하게 된 일에 대해서.'
박 양은 한탄과 함께 택시에 몸을 실었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피곤하여, 원래는 사용하고 싶지도 않지만 유성의 자율주행택시에 몸을 맡기고 목적지를 등록했다.
삐빅.
택시는 도로를 달려나갔다.
박 양은 수원에서 북서쪽으로 따라 올라가는 도로를 창밖으로 구경하며 감상에 잠겼다.
서울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청화의 기적인가…."
과거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렸던 것이 이제는 청화의 기적이라고 불리고 있다.
청화의 희생으로 세계는 평화를 되찾았다.
서울 또한 청화단을 비롯한 청화가 남긴 유산들이 서울의 재건을 위해 방방곡곡으로 노력하고 있다.
...신서울에서는 서울 후퇴 이전의 재산권에 대해 복구를 해야한다는 기득권층의 입법 움직임이 있었지만, 누구도 쉽게 서울의 재산권을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이게 서울이냐. 네오 한양이지.
서울은 바뀌어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높은 빌딩 같은 건물이 하나 번쩍 나타난다 싶더니, 마치 조선 시대의 한옥이 빌딩처럼 솟아나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나무도 마력이 깃들면 콘크리트처럼 단단해진다는 건가. 정말 대단하군."
박 양은 땅에서 우수수 솟아나는 대규모 전통 건물들을 보며 한숨이 나왔다.
"성균관이네."
마치 과거의 성균관을 새롭게 현대식으로 재건축하듯, 폐허가 되었던 대학 부지에는 옛 성균관이 고스란히 땅 위로 솟아났다.
"이제 서울은 갓 쓰고 돌아다녀야 하나?"
박 양은 전통 가옥 내부에 흐르는 전기선과 마력선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물들의 내부 구조는 정말이지 '마력의 축복'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만큼 신비했다.
네오 한양.
신서울이 서울의 발전을 신서울이라는 작은 땅에 압축해뒀다면, 서울은 미래와 과거가 만나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청화의 시대인가."
청화의 시대.
산업혁명이 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현대가 정보화 시대로 나아가는 단계에서 이능력과 괴수의 존재를 맞이하게 되었다.
명왕성과 달이라는 큰 위협이 사라진 지금, 인류는 마력혁명이라고 불리우는 '청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
수원에서 여의도까지 움직이는 자율주행택시라거나,
전통가옥에 네온사인 간판이 반짝이는 국밥집 안에서 한복과 같은 디자인의 제복을 입고 음식을 나르는 안드로이드라거나,
"라온아, 왔어?"
...가정에 보급된 나만의 기계남편이라거나.
"피곤해."
박 양, 라온은 쓰러지듯 남편에게 안겼다. 검은 머리의 남자는 라온을 지지한 뒤, 공주님처럼 번쩍 들어올렸다.
"오늘은 뭐부터 할래?"
"씻겨줘."
"본부대로."
쪽.
남자는 라온의 이마에 키스했다.
이질적인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라온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이질감이 좋았다.
"너는 남편한테 씻겨달라고 하는 거 안 부끄러워?"
"응애, 나 애기 라온."
"그건 또 어디서 배워온 거야?"
"우리 팀 애들이 그러던데. 자기는 애기니까 지켜줘야한다면서."
라온은 남자의 품에 안겨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나도 집에서는 애기할래."
"그래, 울 애기, 오늘 힘들었지?"
쪽.
남자는 라온을 안고 욕실로 향했다.
집 안에 마치 온천과 같은 시설이 있다는 것이 상당히 기이했으나, S급-개인의 경제적 가치가 걸어다니는 대기업이라고 불릴 정도이니 집에 온천이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벗겨줘."
"옷은 벗겨주는데, 속옷은 직접 벗어줬으면 좋겠어."
"왜?"
"그래야 꼴리니까?"
"...치."
라온은 남자의 말대로 따랐다.
남자는 라온의 셔츠를 직접 벗겼고, 라온은 스스로 브라와 아래를 벗었다.
"구석구석 씻겨줄게."
남자 또한 알몸이 되어 라온을 뒤에서 안았다.
엉덩이 쪽에서 느껴지는 우람하고 뜨거운 감각에 라온은 얼굴이 붉어졌다.
"흐으응…."
라온은 몸안이 따스해지는 감각과 함께 남자에게 몸을 맡겼다. 남자는 뒤에서 라온을 안고 따스한 물이 흐르는 온천에 들어갔다.
"하아아…."
라온은 남자에게 백허그로 안긴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남자는 라온의 뒷덜미에 키스를 하며, 서서히 손을 허리 위로 당겼다.
"가슴 뜬다."
"자연산이라서 그래."
"S급 히어로가 성형하는 경우가 어디있어?"
"그렇긴 하지. ...남편, 어때?"
라온은 남자에게 장난을 치듯, 남자의 치골에 붙인 엉덩이를 좌우로 문질렀다.
"나, 가슴 크지?"
"응. D컵, 아니 이제는 E컵 정도 되겠다."
"남편 덕분에 더 자랐지."
"그건 고맙네."
찌걱.
물속에서 뭔가가 살이 서로 만나는 소리가 들렸다.
라온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남편의 볼에 키스했다.
"......이제 나 결혼은 못하겠다."
"왜?"
"남편한테 처녀도 주고 마음도 줘버렸으니까. 아, 처녀는 아닌가? 내 처녀는 피닉스 님이 가져갔잖아."
"그런 건 농담으로라도 하는 거 아니야."
"후후, 왜? 본인한테 질투나?"
라온은 쓴웃음을 지으며 남자, 피닉스의 손등을 맞잡았다.
"피닉스 님께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덕분에 다시 이능력자가 될 수 있었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이렇게 당신을 남겨줘서."
"...라온아. 잊지마, 나는 그저 너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분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뭐야."
라온은 피닉스에게 더 달라붙었다.
"내가 남편으로 생각하고, 내가 사랑하면 그게 내 남편인 거지. 남편은 내가 싫어?"
"...그런 건 아니야."
"그럼 됐어. 다른 여자한테 눈 돌릴 걸 아니지?"
"죽어도 그런 짓 안 해."
"다른 피닉스랑 만나면 누가 더 좋다고 할 거야?"
"당연히 우리 애기지."
"...힛."
라온은 피닉스의 어깨에 기대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가짜든, 분신이든, 조각이든, 그런 건 나한테 중요하지 않아. 당신은 나를 구원해줬고, 내가 다시 살 수 있게 해줬고, 내가 사랑을 알고 살 수 있게 해줬어."
"라온아…."
"다른 분들은 모르겠지만...오히려 접점이 상대적으로 없었던 게 나는 더 좋았던 것 같아. 이렇게 객관적으로 사귈 수 있으니까."
찌걱, 찌걱.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당신이라면 여자였어도 나는 괜찮았을 것 같아."
"그건 좀 그런데."
피닉스는 라온의 가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매번 섹스하면 자지 달라고 아우성치면서 그러기야?"
"하핫, 그거야…. 으응…."
라온은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온천의 따스함과 몸안에서 퍼지는 따스함에 그녀는 더욱 나른해졌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하아. 그거 알아? 안드로이드랑 결혼이 가능해진다는 법안이 발의되었어. 이제 당신, 진짜 내 남편이야."
"...난감하네. 피닉스만 17명인데."
"당신은 내 피닉스잖아. 박청화 씨."
"동성동본이야?"
"그렇네. 후후, 아예 이름도 내 마음대로 부르게 바꿔버릴까?"
라온은 피닉스의 품에서 피로를 풀었다.
"남편. 나 사랑해줄 거지?"
"당연하지."
피닉스의 대답에는 그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응, 좋아."
라온은 피닉스에게 몸을 맡겼다.
"남들은 가짜니, 거짓이니, 조각이니 뭐라고 해도, 당신은 내게 있어서 진짜야. 하아…."
주룩.
"이게 행복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