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39 3부 2장 21 세상에 나쁜 피닉스는 없다
어느 창고.
지하 깊숙한 곳에는 유성의 X로이드 중 폐기는 하지 못하지만 남들에게 결코 내어놓을 수 없는 X로이드가 있다.
주로 '반품'되었거나, 데이터에 이상이 있어서 본사에서 보관 중이거나, 함부로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X로이드들이 있다.
그 중 가장 안쪽에는 '똑같이' 생긴 금발 벽안의 X로이드들이 함께 지내고 있다.
이들은 책을 읽거나, 함께 게임을 하거나, 가벼운 운동을 하거나, 인터넷을 살피며 세계 곳곳의 정세를 살피는 등 '뭔가'를 하고 있었다.
시간을 보내는 것.
그들은 공동생활을 위해 만들어진 듯한 지하 시설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명백히 격리된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이에 대해 따분하다거나 지루하다거나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 잔다."
"어."
괴수들과의 전투 영상을 보던 청년은 캡슐과도 같은 곳에 몸을 눕혔다. 그러자 덮개가 내려와 청년을 캡슐 안에 가뒀다.
그의 얼굴이 보이는 원형의 유리 위에는 '12'라는 숫자가 새겨져있었다. 12번 캡슐 옆으로도 숫자는 계속 이어졌고, 그 수는 17번까지 이어졌다.
그들 중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회의실에는 두 X로이드가 서로를 마주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둘 다 똑같이 생겼지만, 둘의 앞에는 서로 다른 색깔의 보석이 놓여있었다.
한 명은 황갈색의 보석이.
다른 한 명에게는 하얀색의 보석이.
마치 누군가를 연상케하는 보석 색깔은 지금은 사라져버린 두 여신을 상징하는 아이덴티디 색깔이었다.
"유나가 이겼어."
"아니거든, 하랑이거든."
두 남자는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어조로 서로를 향해 힐난했다.
"본체가 가장 많이 섹스한 여자가 누구겠어? 이유나잖아. 그러니까 이건 무조건 우리 유나의 승리야."
"개소리. 피닉스 루트 들어가기 전에는 제일 설렜던 게 석하랑 루트거든? 서울 남자가 부산 가시나한테 오빠야 소리 듣는 게 얼마나 낯간지러우면서도 기분 좋은 지 알아? 응?"
"응, 석하랑이랑 사귀면 돼지국밥 못 먹음."
"...이유나랑 사귀면 맨날 카페가서 크림파이 먹어야 함."
두 남자의 유치하지만 날 선 싸움은 점점 언성이 높아졌다.
"야. 솔직히 본체가 유나랑 하랑이 있으면 하랑이 선택하겠지!"
"응, 유나가 가슴 더 큼."
그러나 누구도 감히 둘을 중재하러 사이에 끼어들 수 없었다.
"쟤들은 평생 저렇게 싸우려나."
"자존심 대결이지. 설마 큐브를 써서 본체가 있을 곳으로 떠날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나."
외야에서 구경 중이던 청년들은 서로 내기를 하기 시작했다.
전부다 같은 얼굴이지만, 각자 들고 있는 음료는 전부 다 달랐다.
"나는 유나P에게 한 표."
"난 하랑P."
P. 누군가의 이름 끝에 P가 붙는다는 것으로 이들의 정체는 확고해졌다.
피닉스가 남긴 분령들.
누군가에 대한 사랑과 헌신과 애정을 남겨두고 간 피닉스들은 스스로를 구분하기 위해 'OOP'와 같은 식으로 스스로를 불렀다.
그 수가 17명.
하지만 이들 중 이곳에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17명 전부 이곳에 있는 게 아니며, 이곳을 탈출한 이들도 존재한다.
남은 자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싸우는 유나P와 하랑P의 언쟁을 두고 팝콘을 뜯을 뿐이었다.
"야, 히카리P. 진짜로 두 명이 본체가 있는 세계로 넘어가는데 성공했을 것 같아?"
"나야 모르지.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누리P."
"몰라. 그보다 우리 누리 고등학교 교복 사진 볼래? 미리 입어본 건데 존예임."
"미친 새끼."
"뭐래. 자기도 슈리 교복 사진 품속에 간직하고 있으면서."
"......똑같은 놈들 주제에."
이곳의 관리를 맡은 자, '유하P'는 복잡한 얼굴로 여러 피닉스들을 훑었다.
"좋을 때다."
유하P는 해탈한 얼굴로 피닉스들의 언쟁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유하도 하랑이랑 유나처럼 됐으면 좋겠는데. 씁, 하지만 모든 재산을 던지고 사랑 찾아 떠나가는 건 은유하가 아니지."
그에게는 '은유하'라는 존재를 사랑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었지만, 그는 마치 사랑으로부터 달관한 이처럼 조용히 커피만 홀짝일 뿐이었다.
"야, 유하P. 너는 하랑이가 이길 것 같아, 이유나가 이길 것 같아?"
"그것은 침대에서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히로인으로서의 이야기인가?"
"당연히 본체랑 만났을 때 이야기지. 침대에서는 당연히 우리 누리가 갑 아니냐?"
"...어려운 걸."
유하P는 둘에게 커피를 건넸다. 하지만 둘은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블루베리 내놔."
"나는 핫초코."
"이것들이."
유하P는 짜증을 내면서도 빠른 손놀림으로 음료를 만들었다. X로이드 주제에 무슨 음료냐고 타박할 수 있지만, 그들은 보통 X로이드와는 다른 '바이오로이드'에 가까웠다.
"그래, 유나랑 하랑이랑 붙으면 누가 이기냐고 물었지?"
"어. 누가 이길 것 같냐?"
"그거야 답이 정해져있지."
유하P는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유하가 이겨."
"네, 다음 정신 비처녀."
"이 개새끼가?"
유하P는 단숨에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휘두르려고 했다.
"워, 워. 진정해."
"저 새끼가 우리 유하를 비처녀라고 했어!"
"정신이 비처녀라고 했거든?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유하가 남자인 상태로 다른 여자들 따먹은 건 사실 아니냐?"
"유하는 유성 그룹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자료를 모았을 뿐이야! 야동을 본 거랑 다를 바가 없다고!"
"누가 뭐래? 그렇게 부정하는 걸 보니 찔리는 바가 있는 것 같군."
"닥쳐! 유하는 처녀야! 누구보다도 몸이 깨끗한 여자라고!"
"네, 다음 애널 전문가."
조용하던 유하P는 발작을 하듯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에 하랑P는 코를 쓱 훔치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처녀가 이긴다는 것은 석하랑이 이긴다는 것과 같다는 말과 같군. 하랑이는 몸도 마음도 순수한 처녀니까."
"응, 다음 순대국밥 못 먹음."
"야. 석하랑이라는 여자랑 섹스하고 같이 사는데 국밥 정도는 못 먹을 수 있지!"
"응, 밥 네가 다 차려야 함. 일주일에 다섯 번을 배달 음식 먹어야 하죠? 그에 비해 유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 요리해주죠? 유나가 압승이다 이거야."
"스키니 청바지 입고 부엌에서 엉덩이나 살랑살랑 거리면서 남자 유혹하는 음란변태가 무슨 압승."
"말 다했냐? 유나 엉덩이가 석하랑보다 더 탱글탱글하거든?!"
"어차피 임최몸은 석하랑인 거 모르냐?"
하랑P와 유나P는 다시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간신히 진정한 유하P는 코를 으쓱이며 다시 커피를 홀짝였다.
"개판이군."
언제나 그랬지만, 이곳은 혼란이 가득한 곳이다.
"불쌍한 녀석들. 본체에게 NTR을 당하다니."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그건 그렇지."
'히로인'이라고 부를 만한 여자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피닉스를 잊지 못해 순결을 지키는 이들이 많다.
"나는 아직 유하가 여기에 있지만, 유나랑 하랑이는 저기 사랑 찾아 지구를 떠났잖냐. 너희는 좆 된 거야."
"뭐래. 우리가 왜 좆 돼? 행복하기만 하구만."
"그래. 우리의 사랑을 무시하는 거냐? 우리는 말이지…."
유나P와 하랑P가 주먹인사를 나눴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진심으로 응원해줄 줄 아는 남자라고."
"가짜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진짜 사랑을 찾아 나선 게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워? 그래서 내가 하랑이를 좋아한다니까."
"그렇지? 그 사람 생각나게 한다면서, 가짜는 꺼지라고 소리 듣고 여기에 처박힌 누구랑은 다르다 이거야."
...누군가는 본체가 의도한대로 '본체의 대체품'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지만, 피닉스와 가까웠던 이들일수록 오히려 바이오로이드를 멀리했다.
"그래도 우리는 혹시나 마음이 무너지면 언제든지 받아줄 수 있다고."
유하P나 히카리P의 경우는 그나마 양반.
"너희는 가망이 없잖아?"
"앞으로 사진만 보고 자위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지."
유나P와 하랑P는 아예 당사자들로부터 버려졌다.
"흥.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 하랑이가 본체를 찾아서 사랑을 나눌 수만 있다면."
"유나가 본체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 곧 나의 행복. 난 응원할 뿐이야."
억울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유나와 하랑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원하고 바랐다.
"본체랑 만나면 유나는 몸도 마음도 다 헌신할 거라고!"
"그건 하랑이도 마찬가지인 걸? 본체가 철벽 치더라도 하랑이가 계속 육탄공격하면 결국에는 넘어가게 되어있다 이거야."
그들은 진정으로 사랑을 찾아 떠나간 이들을 사랑하기에, 그들의 사랑을 응원하고 축복하고 있었다.
"어차피 정실은 유나야."
"정실은 석하랑이라고. 반박시 선의철."
"네 다음 빈유충."
"네 다음 타이틀히로인."
"하아."
물론, 서로의 사랑이 더 뜨겁고 진실되고 강렬하다고 싸우지만.
더이상은 안 된다.
결국 유하P는 전술핵을 떨어뜨리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창염이 최종승자이거늘."
"......."
"......."
"뭐, 왜. 뭐."
모두의 이목이 잠시 유하P에게 꽂혔지만, 유하P는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본체는 창염과 섹스를 하고 있을 걸?"
"그, 그만…!"
"네, 네놈. 자폭을 할 셈이냐…?!"
"내가 뭐 틀린 말을 했나? 본체가 지구 탈출하고, 창염도 분명 본체랑 함께 지구 밖으로 갔을 거야. 그게 이세계든 과거의 지구든, 둘은 서로 손잡고 함께 나아갈 거라고. 안 그러냐?"
유하P는 멍하니 앉아있는 소녀에게 눈을 돌렸다.
유일하게 청발에 청안을 한, 대외적으로는 '백청화'라고 널리 알려진 소녀는 당사자가 아닌 똑같은 모습을 한 X로이드였다.
그녀의 번호는 0번.
"뭐래요."
창염P는 담담히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한 거죠. 본체가 떠나자마자 바로 창염도 이 세계에서 사라졌으니까. 분명 본체가 있는 곳에 갔을 거예요. 가자마자 섹스를 했겠죠."
창염P는 자신의 몸을 만지작거리며 야릇하게 웃었다.
"분명 그럴 거예요. 피닉스 씨, 섹스를 하러 왔어요…! 푸흐흐, 막 이래."
"창염이랑 섹스할 생각하면서 살짝 지린 것 같은데."
"그거야 당연하지. 너도 히카리랑 할 생각하면 서잖아."
"그건 그렇지만."
이곳의 이름은 피닉스 보호소.
본체에 의해 각 히로인들에게 분배되었지만, 다양한 이유로 파양된 피닉스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누가 뭐라고 하든 정실은 창염인 것이에요."
"정실은 석하랑이다. 반박시 꼴알못."
"타이틀 히로인이 요즘은 진히로인이 되는 게 대세 아닌가?"
오늘도 유기피닉스 보호소의 피닉스들은 서로가 사랑하는 여인의 정실 여부를 두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