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0화 〉3부 2장 07 왕국의 어둠
링크, 스타트.
나는 테라에 접속했다.
눈앞에는 익숙한 메이드복의 가슴부위가 보였고, 머리 뒤로는 포근한 허벅지의 감촉이 느껴진다.
그러나 내가 눕고 있는 등 부분은 뭔가 시리다. 딱딱한 돌 위에 누워있는 듯 하다.
"하리야?"
"죄송해요, 피닉스 주인님. 갇혔어요."
"......뭐라?"
자고 일어나니 내 팔에는 밧줄이 묶여져있고, 하리도 마찬가지로 팔에 밧줄이 채워져있었다.
"갇히다니?"
"저희들, 잡혔어요. 가이아나 왕국 사람들한테."
어떻게 하면 S급 괴수들, S급 적들을 상대로 컷씬으로 나올만한 전투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즐거운 꿈에 부풀어 들어온 나로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게 무슨…."
나와 하리는 감옥에 갇혀있었다.
로그아웃을 한 사이, 나는 기절한 상태로 하리와 함께 바닥이 차가운 벽돌로 된 감옥에 갇혔다.
"무슨 일이지?"
"...대규모 망명 사태를 봐버린 이유로 구속당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봤다는 이유로 구속해?"
"네. 지금 여기는 국경수비대가 사람들을 수감하는 곳이에요. 저희 말고도 지금 많이 잡혀있어요."
"세상에."
죄를 저지른 자들을 잡아들이는 게 아니라 죄를 저지른 걸 본 사람들을 잡아들인다?
"잡아서 사상검열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미친 건가?"
"...조금, 그렇다고 봐야죠."
하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피닉스 님, 혹시 국경지대에서 제일 처음 탈출했던 이들을 기억하시나요? 저보다 살짝 키가 낮은, 그러면서도 갑옷 입은 병사들보다는 조금 키가 높은 사람들이요."
"음."
기억난다. 국경을 지키는 수비대를 뚫고 달려오던 그들은 절박한 얼굴로 수비대를 지나 비슈니아 왕국으로 달렸다.
만약 지마룡 샌드래곤이 없었다면, 상대적으로 키가 큰 무리가 우리를 비롯한 가이아나 왕국으로 들어가려던 사람들을 제대로 덮쳤을 것이다.
좁은 협곡에서 사람과 마차를 넘어 경비병들로부터 도망치려고 아수라장이 되었을테지.
그런데 대규모 망명 사태라.
종잡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가이아나 왕국의 악습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해요."
"말해봐."
"그러니까…."
하리 왈.
가이아나 왕국은 크게 세 개의 신분으로 나뉜다고 한다.
하나는 순혈 중에서도 극한의 순혈인 '로열 블러드'.
이들은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 어떤 피도 섞이지 않은, 순수하게 몸 속에 있는 마력이 땅 속성밖에 없는 이들을 말한다.
수치적으로 표현하자면 수화풍광암환이 전부 0인데 지속성, 땅속성만 1~99에 이르는 자들이다.
정령인 지륜이 땅속성만 99임을 감안하면, 이들은 확실히 순수한 가이아나 왕국의 혈통이라고 스스로 증명할 수 있다.
즉, 누구보다도 여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로 평가받기에 이들은 가이아나 왕국에서 고위층으로 여겨진다.
여느 곳이나 다 그렇지만, 순혈우월주의는 어디든지 있는 법.
화수풍지암광환의 7속성 중 지속성을 제외한 다른 하나라도 '1'의 마력이 검출되기라도 한다면, 이들은 순혈로 분류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순혈이 아닌, 조금이라도 다른 마력이 섞인 이들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순혈과 대비되는 이들은 바로 피와 마력이 섞인 이들, '믹스 블러드'라고 한다.
태초에, 가이아나 왕국의 사람들은 모두 순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왕국과의 교류를 통해 서로 알게 되고, 순혈 중에는 다른 왕국의 인간이나 정령과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생겼을 것이다.
사람 마음은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 많다.
가이아나 왕국에서 순혈로 지내면 더 혈통적으로 좋아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마력 속성을 가진 외국의 이와 사랑에 빠져 스스로 순혈임을 포기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들은 어느 땅속성 이외에 어느 하나라도 마력을 부모로부터 물려받는다. 땅속성의 마력이 아무래도 가장 크겠지만, 다른 마력의 양도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수준이다.
그렇게 태어나는 아이는 부모의 마력을 모두 가지게 되어, 순수한 땅속성이라고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들, '하프'나 '쿼터' 등을 향해 모멸과 괄시의 시선을 보냈을 것이다. 그들의 수가 적으니 차별하고 천대하는 것으로 그쳐,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마력이 섞인 이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세월의 흐름이 길게 이어짐에 따라, 아무리 피가 옅어지고 희미해져도 몸 속에 남아있는 아주 약간의 마력은 도저히 지울 수 없었다.
1/2을 무한히 곱하는 것도 결국에는 0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순혈들은 점차 자신들의 수를 위협하고 결국에는 넘어서며 가이아나 왕국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 이들을 상대로 새로운 지배체계를 갖춰야 했다.
그것이 순혈우월주의.
마력이 아무리 적든 말든, 지속성 마력 이외의 마력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믹스들을 지배하는 체제를 만들었다.
1%의 사람들이 99%의 사람들을 지배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딱히 나쁠 것도 없었고, 이미 사회의 주요 구성원이 된 믹스들도 순혈의 앞에서만 예, 예 하면 끝날 일이었다.
결코 대규모 망명을 위해 목숨을 걸고 도망치거나 할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은 도시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럴 수밖에 없다고 판단을 내렸기 때문.
그럴 만한 일이 있었으니까 국경을 몸으로 돌파하려고 했던 것일 터.
그게 순혈들이 사회를 지배하는데 문제가 되는 일이라면, 우리는 순혈들의 지배에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일을 보고 만 것이다.
'재수 더럽게 없네.'
그냥 국경을 지났으면 아무 문제가 될 일이 아니었을텐데.
"차라리 정체불명의 푸른 불꽃을 찾겠다고 잡아들인 거라면 이해라도 할텐데말이야."
"그러게요. 괴수를 쓰러뜨린 사람은 여기에 있는데."
하리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뭔가 웃는 것처럼 소리는 들려오는데, 가슴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하리, 조용. 온다."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하리의 무릎베개에서 몸을 일으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멈춰."
우리에게로 다가온 이는 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키는 140cm 전후로 추정되며, 전형적인 드워프들의 모습과 비슷했다.
갈색의 제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그리고 다른 간수들이 그에게 깍듯하게 대하는 것으로 보아, 제법 높은 직위의 존재가 틀림없었다.
"이들이 확실한가?"
"예. 틀림없습니다."
"가져와."
그는 부하로부터 뭔가를 건네받은 뒤, 직접 철창을 열어 안으로 들어왔다. 하리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앞을 막아서려고 했고, 남자는 하리를 올려다봤다.
"...흠, 비슈니아 왕국 사람인가?"
"네."
"가만히 있...으시오."
남자는 뭔가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하리에게 겨눴다.
"주인님!"
"스캐너야. 마력을 감지하는 도구지."
"아."
하리는 나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날린 상태로 굳어버렸다. 졸지에 나는 하리의 가슴에 대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얼굴이 붉어진 하리가 옆으로 나오고 나서야 나는 남자와 시선을 맞출 수 있었다.
"훌륭한 종자를 두셨군."
"칭찬 고맙소."
삑, 삐빅.
남자는 마력으로 우리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마력 스캐너를 부하에게 건넨 뒤, 마치 포권같은 자세를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무례를 용서하시오. 이국의 순혈이시여."
"......음."
대충 감이 온다. 사실 철창을 통해 비친 스캐너의 패널을 확인해서 이 남자가 우리를 향한 대우가 단번에 바뀐 이유도 대충 감이 왔다.
하리는 비슈니아 왕국의 공주다.
신관이 왕가의 사람들만 이어받는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하리는 광속성 이외의 마력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나는 화속성 그 자체.
화속성 이외에는 그 어떤 속성도 느껴지지 않을테니, 이곳에서 보는 순혈의 기준과 같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본인은 불의 나라에서 온 귀족이오. 이쪽은 내 사용인이고."
"아, 역시...!"
기존의 설정은 폐기한다. 지금은 저들이 우리를 대우하고 이해시켜줄 직위가 필요했다.
"아버님의 명으로 견문을 넓히기 위해 시종과 함께 여러 나라를 구경하고 다니는 중이었소. 증서는...혹시 이렇게 생긴 가방 못 봤소? 그곳에 보관하고 있었소만."
"죄송해요, 주인님. 그...괴수 때문에 가방을 놓쳤...."
하리는 눈치좋게 내 말을 받았다. 나는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괜찮다. 블루플레임 가문의 증거가 어디 그깟 종이 쪼가리에 좌지우지 되더냐. ...다만 곤란하군. 미안하오. 신원 증명에 시일이 조금 걸릴 듯 하오."
"아니오. 그 정도면 충분하오. 그대의 마력이 그대의 신원을 증명하고 있거늘, 뭘 또 굳이."
남자는 손사레를 치며 자신을 가리켰다.
"가이아나 왕국 대 비슈니아 방면 국경 수비대장, 드라칸이오. 드라칸 장군이지."
"장군...."
장군 치고는 키가 작다.
하지만 이 작은 키야말로 그가 이 나라에서 상당히 높은 존재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도 그럴게....
'A급 지속성. 순혈.'
다른 마력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A급의 지속성이다.
"너희들은 잠시 뒤로 물러나라. 이분들에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충성!"
병사들은 일제히 뒤로 빠져나갔다. 드라칸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나라에 오자마자 미안하오. 못볼 꼴을 보이게 되어."
"가급적이면 못본 척 하고 넘어가고 싶지만, 혹시나 또 같은 일이 생길까 두렵군. 무슨 일이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이길래 국경을 탈출하려고 한 것이오?"
"...다들 가족을 지키려고 한 자들이오. 이곳에서 잠시 체류 중이었던 이들이지."
드라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대의 겉모습을 보니 내 아들이 생각나서 하는 말이니 새겨들으시오. 지금, 이 나라의 신관은 제정신이 아니오."
"......신관을 그렇게 모욕해도 되는 건가?"
"모욕?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 걸. 그 마녀, 에키드나는 지금 미쳤소."
드라칸은 환멸이 난다는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의 딸에게 어울리는 이를 결혼시키겠다고 아주 벼르고 있지. 문제는 그녀가 찾는 신랑감이 아주 특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오."
"특별한 조건?"
"그렇소. 정말, 상스러워서 차마 말할 수는 없지만...."
드라칸은 인상을 팍 찡그렸다.
"140cm에 이게 이만한 아이를 찾고 있소."
드라칸은 자신의 손을 치골 아래에 놓았다. 나는 그 뜻을 바로 파악하고 속이 뒤집어졌다.
"...실좆?"
"그런 셈이지."
"......음."
다음 도시로 넘어갈 때는 원래 몸으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나야 해당사항이 전-혀 없지만, 그래도 이런 곳에서 어린 아이의 모습이면 상당히 곤란할 것 같다.
가이아나 왕국의 신관 에키드나.
그녀는 쇼타를 찾고 있다.
"그거랑 별개로 사람들이 망명하는 이유는 무엇이오?"
"...그들은 전부 자식이 있는 부모들이오."
"뭣? 설마...."
"그렇소. 신관 에키드나는 이런 사람이오. ...없으면 만들면 된다는, 그런 여자. 자연산이 없다면, 양식으로 먹겠다는 것이오."
"강제로 작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오. 자라지 못하게."
EP.826 3부 2장 08 비뉴시르죠 가스
크리슈나, 이형의 금빛 정령은 피닉스와 하리로부터 잠시 떨어지게 되었다.
[쳇, 하필이면 진짜로 짐승처럼 취급을 받다니. 굴욕이에요.]
[일단 움직여 보는 건 어때요? 이 철창, 몸 비집고 나가면 될 것 같은데.]
크리슈나의 두 눈이 반짝였다. 양쪽 모두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고, 아주 약하게나마 검게 물든 부분도 있었다.
스륵.
크리슈나는 여유롭게 철창 사이를 빠져나왔다. 그림자가 없는 곳, 태양빛이 반짝이는 곳에 몸을 옮기니 그 누구도 크리슈나가 철창 속에서 탈출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러니까 꼭 그 사람 같아요.]
[태양빛 아래에서 투명화를 할 수 있다는 게 참 비상식적이기는 하지만, 효과는 확실하네요.]
[네. 햇빛이 없는 곳은 사람 없을 때 돌파해야하지만....]
크리슈나는 주변을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우는 소리 안 나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저기 지하에서 들리는 것 같은데....]
크리슈나는 갈림길에서 지하로 향하는 길을 향해 달렸다. 분명 피닉스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은 굴뚝같았지만, 그보다도 머릿속에 맴도는 광경 때문에 자꾸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드워프같은 이들에게 끌려가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 중에는 어린 아이인 듯 가이아나 왕국의 사람인 듯 애매해보이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표정이나 분위기로 보아 대부분은 아이들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아이들.
만약 아이들이 뭔가 이상한 일에 동원되고 있다면?
크리슈나의 안에 깃들어있는 은유하나 히카리나 둘 다 가만히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설령 피닉스가 왜 늦게 나타났냐고 해도, 피닉스와 잠시 떨어지게 된다고 해도 이번 일은 조사가 필요했다.
으아앙, 아아앙!!
지하실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울음 소리. 크리슈나는 안으로 들어가기가 괜히 무서웠지만, 주변 간수들의 눈을 피해 안으로 빠르게 달려내려갔다.
"!!"
그리고 크리슈나는 제자리에 멈췄다. 창문에 살짝 있는 태양빛에 몸을 숨긴 크리슈나는 멀리서 걸어오는 두 남녀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도태 작업'은 잘 되고 있나?"
"예, 장군님. 가장 피가 많이 섞인 아이들부터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상대로 작업을 한다. 크리슈나는 '장군'이라고 칭해진 남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행이군. 아이들이 커지면 곤란해. 누구든 순혈과 똑같은 모습이 되어야 하는 거야. 혹시 이걸 넘어가는 아이들이 있던가?"
장군은 검지를 하나 들었다. 장군의 옆에 따라붙은 부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없습니다. 다만 아직 확인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 '불꽃의 순혈'...."
"그 분은 안 돼. 그런 자를 건드렸다가는 괜히 위험할 수 있어. 제법 대화가 통하는 자였으니, 그 자를 상대로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지 마라."
"알겠습니다, 장군님."
장군은 제자리에 멈춰 손으로 턱을 쓸었다. 뭔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한 그의 눈은 지하 감옥의 안쪽을 향했다.
"저녀석들이 자라면 나중에 다 섹스하고 그러겠지?"
"성은 인간이 본능이니까요."
"그래. 그러니 그 성을 도태시켜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인간의 3대 욕구 중 하나가 성욕이니 뭐니 하지만, 그 성욕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들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지 않을 수 없지."
장군은 진심으로 혐오감이 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동 성범죄라니, 결코 이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렇지 않나?"
"물론입니다, 장군."
"그래. 그러니 우리는 결단을 내려야 하네. 더이상 아이들이 고통받는 일이 없도록, 아이들이 앞으로 더는 성 문제로 괴로워하는 일이 없도록. 비록 지금 당장은 고통스럽겠지만, 향후 수 세대가 지나고 난 뒤에는 달라지겠지."
장군의 눈에는 결연한 광기가 엿보였다.
"...혼혈들이 자기보다 체구가 작은 이들을 상대로 성행위를 하는 일이 없도록, 내가 아이들을 지킬 것이다."
위잉, 철컥.
장군은 벽에 있던 레버를 당겼다.
그러자 지하실 안쪽을 향해 뭔가 연녹색의 안개가 스멀스멀 안쪽으로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이것이 전부 너희들을 위한 것이다."
"비뉴시르죠 가스, 살포 개시."
푸쉬이이.
"미안하다. 아이들아. 너희가 20살까지 안전하게 자라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장군과 부관은 자리를 떠났다.
크리슈나는 몰래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 뒤, 녹색 가스를 위아래로 훑었다.
[히카리, 이거 뭐예요?]
[......미쳤어요. 이곳은 진짜로 미쳤어요.]
순식간에 가스의 실체를 파악해낸 히카리의 목소리는 분노로 벌벌 떨렸다.
[성 호르몬 억제제.]
[네?]
[간단히 말해서 마시면 테스토스테론이나 에스트로겐을 파괴하는 가스예요.]
[미친.]
* * *
인간은 저마다 자랄 수 있는 성장 가능성이 있다.
신체의 발달이란 자라면서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며, 어느 날 갑자기 한 달 사이에 키가 10cm이상 자라는 일도 생길 수 있다.
성장 과정에서 주변 환경의 영향이 크다고는 하지만, 가이아나 왕국에서는 이 환경의 영향보다 유전적 요인이 큰 영향을 차지한다.
다른 국가의 사람과 마력이 섞였다?
그럼 바로 가이아나 왕국의 순혈 기준인 140보다 더 커지게 되어있다.
단순히 생각해서 140과 180이 더해져 반으로 갈라지면 160이 되는 것처럼, 가이아나 왕국의 혼혈들 또한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다른 속성 마력으로 인해 신체가 성장하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이곳 가이아나 왕국의 신관, '에키드나'라고 하는 자는 이들은 가만히 두지 않았다.
과거의 영광.
가이아나 왕국의 사람들이 모두 140 이하였던, 남들은 다들 난쟁이라고 부를 지 몰라도 가이아나 왕국이 역대급으로 융성했던 시절.
그 때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그 날의 번영을 다시 되찾기 위해 에키드나는 '혼혈의 순혈화'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이미 자란 이들을 강제로 줄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치 프로크루스테스처럼 침대에 눕혀놓은 다음 침대를 삐져나온 부분을 톱으로 잘라냈다가는 엄청난 폭정으로 이어질테고, 그러면 아무리 신관이라고 한들 분노한 민중에 의해 사지가 찢어질 터.
그래서 에키드나는 가이아나 왕국의 '어른'이 아닌 '아이'를 타깃으로 잡았다.
이미 성장이 다 끝난 어른을 상대로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자라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수작을 벌이는 것이다.
그 누구도 키가 140이 넘지 않게.
단적으로 말하자면.
남자아이들은 전부 남자 김누리로 만들고,
여자아이들은 전부 여자 김누리로 만든다.
그리고 남자아이들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니, 이 아이들은 모두 '선의철'로 만들어버린다.
왜 이런 끔찍한 짓을 벌이는가?
그것은 '어른'과 '아이'의 구별을 위해서다.
가이아나 왕국의 어른과 아이는 크게 구별이 가지 않는다. 물론 자라나는 유아기의 아이들은 훨씬 작지만, 청소년기를 넘어가는 아이들의 성장은 성적 발육만 일어날 뿐이다.
즉, 키는 자라지 않는 상태에서 성적인 부분이 어른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는 구조적으로 수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성인인 줄 알고 반했던 상대가 아이였다. 이건 차라리 양호하다.
성인인 줄 알고 엄한 짓을 했던 자가 아이였다? 나라가 뒤집히고 땅의 신이 분노할 일이었다. 그들은 당연히 극형을 당했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치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성인과 아이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고자 했다.
가이아나 왕국의 성인들의 특징.
키가 작다고 가슴이나 남근까지 작은 건 아니다.
당연히 성인인 만큼 아이들과 확연히 차이가 나고, 가이아나 왕국 사람들은 가시적인 크기를 통해 미성년을 구분한다.
그 구분을 좀 더 명확히 하자면?
어린 아이는 어린 상태로 계속 존재하고, 성인이 되었을 때부터 빠르게 성장하게 된다면?
그 누구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여 성적인 문제가 생기는 일이 없을 것이다.
가이아나 왕국의 아닌 다른 국가의 사람들이 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가슴이 부풀어오른 여자는 어른이라는 것을.
바지 앞섶이 부풀어오른 남자는 어른이라는 것을.
그렇게 성인과 미성년자를 구분하면 결코 어린 아이를 대상으로 일어나는 흉악 범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성범죄의 원인은 어른과 아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에 있다.
신관이 그렇게 믿었다.
-그러므로 어른과 아이를 명확히 구분짓는다면,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어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한다.
* * *
"미친 소리가 따로 없군."
"그러니까요."
우리는 지하감옥 곳곳을 누비는 크리슈나를 통해 상황을 파악했다. 크리슈나는 우리에게 돌아오자마자 하리에게 자신의 마력을 건넸고 , 자신이 본 것을 소상히 우리에게 밝혔다.
비뉴시르죠 가스.
듣기만 해도 끔찍한 이름이다.
"하리야, 너는 이거 알고 있었냐?"
"아니요. 죄송해요. 저는...."
"괜찮아. 모를 수 있지. 상황을 보아하니 지금 이게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것 같거든."
성 호르몬의 제거를 통한 성적 발달의 억제!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계획인가!
"발상은 엽기적이지만, 자기네 나라에서 그런 문제가 있다면 충분히 이런 미친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지. 이걸로 자기네 나라가 바로 선다면 말이야."
"하지만 사람들은 망명하려고 했잖아요."
"그래. 사람들은 도망쳤다. 자기 아이들을 타국으로 데리고 도망치려고 했지. 왜 그러겠어?"
"그게 엄연히 미친 짓인 걸 아니까요."
"그래. 크리슈나, 그게 확실한가?"
나는 크리슈나의 등을 토닥이며 물었다.
"정말 여자는 D컵까지밖에 자라지 않고, 남자는 15cm가 끝이라는 거야?"
큐르르.
크리슈나는 내 말에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내 말을 알아듣는 건지는 모르지만, 크리슈나가 가져온 정보가 확실하다면 이는 끔찍한 일이었다.
"F컵까지, 22cm 대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아이들도 가스를 마시면 아무리 많이 자라봤자 D컵에 15cm 수준이라는 건가."
"...성장을 2/3가량 억제한다고 하니까, 거의 그 즈음 되겠죠?"
"이건 아니지."
당연히 제 자식을 그런 끔찍한 모습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하는 부모들은 자식을 데리고 가이아나 왕국을 탈출하려고 했다.
"안되겠다. 하리야, 여기는 내가 좀 조져야겠어."
"네?"
"이곳에서 레지스탕스를 조직한다."
신관 에키드나의 그릇된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 나는 이곳 요새로부터 집단 봉기를 일으킬 것이다.
"어차피 이 나라에서는 깽판을 칠 계획이었는데 잘 됐어."
땅의 신관을 쓰러뜨려 그녀의 마력을 강탈한다.
나는 처음부터 그 목적을 가지고 가이아나 왕국에 왔다.
작전명, <김누리 프리덤>.
EP.827 3부 2장 09 자유의 불꽃
하리에게는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내가 이 가이아나 왕국에서 신관을 만나고자 하는 목적.
신관으로부터 마력을 강탈한다.
신의 힘을 가지고 있는 신관으로부터 마력을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든다.
그럴 이유가 있다.
그걸 위해 나는 비슈니아에서 가이아나 왕국으로 바로 달려왔다.
신관으로부터 마력을 빼앗으려면 신관에게 접근해야하고, 비슈니아 왕국의 팔부신중처럼 내 앞을 가로막는 이들을 전부 쓰러뜨리거나 피해서 신관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저항하는 신관을 쓰러뜨려, 그녀로부터 마력을 흡수해야 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전부 다 거치려면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혼자서는 힘들어.'
나는 20년의 지구에서 개인의 무력함에 대해 통감했다.
아무리 강력한 존재라고 한들, S급 수준의 힘으로는 지구는 커녕 국가 단위도 제대로 도모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가이아나 왕국의 수도로 들어가 신관에게 몰래 접근하여 마력만 강탈하는 행위였으나, 가이아나 왕국에 오자마자 보이는 가이아나 왕국의 어둠에 나는 개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두면 혼돈이 퍼지게 되어있다.
세상 누가 실좆이 되기를 바라겠는가!
세상 누가 빈유가 되기를 바라겠는가!
그 석하랑도 가슴이 커지는 걸 기뻐했고, 20년의 지구에서는 자신의 3cm 자지를 키우기 위해 수많은 이들을 학살하고 나라를 몰락으로 이끈 최악의 독재자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대로 놔둘 수는 없다.
하지만 혼자서는 안 된다.
그러니, '집단'으로 움직인다.
"하리, 마음의 준비는 되었나?"
"주인님의 뜻대로 하겠어요."
하리는 내 계획에 동참했다.
"비슈니아 왕국의 공주가 타국의 쿠데타에 개입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너는 정치적으로 끝장이야. 비슈니아 왕국은 너를 손절할 거고, 너는 그냥 반란군의 수괴 중 하나가 될 뿐이지."
"성공하면 되잖아요?"
"그래. 성공하면...이국의 불합리함을 참지 못하고 일어난 구국의 공주가 되는 거지."
망명한 나라에서 지지기반을 마련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는 스토리라.
으레 있는 이야기다.
그게 실제로 일어나게 되어 참 신기하기는 하지만, 해피 엔딩으로 끝나려면 지금부터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상태로 움직이는 건 정말 어색할 것 같기는 한데."
나는 내 몸의 상태를 확인했다.
마력으로 몸을 줄여놓기는 했지만, 형태를 유지하는데 다소 마력이 소모되어 전력을 낼 수는 없었다.
창염의 피닉스로서 가진 마력을 풀파워로 활용하려면 결국 본신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
'그건 안 돼.'
20년의 지구에서 나는 나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지금, 테라에서 일으킬 혁명은 구심점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
'내가 구심점이 되겠어.'
테라의 인류를 위해.
가이아나의 인류를 위해.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성장 유전자를 기반으로 성장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창염개진."
나는 자물쇠를 향해 마력을 뿜어냈다.
열쇠가 걸리는 부분을 녹인 다음, 열쇠로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주인님? 문을 저렇게 하면 저희가 못 나가지 않아요…? 혹시 부수고 나가실 건가요?"
"그래. 부수고 나갈 거다. 저렇게 해두면 누가 철창을 부수거나 자르는 게 아니면 출입이 불가능하지."
나는 불안해하는 하리의 등을 두드린 뒤, 밖으로 난 작은 창을 가리켰다.
"잘 들어, 하리야. 새는 하늘로 날아가는 존재라는 걸."
창염개진.
"와장창."
콰ㅡㅡㅡ앙!!
막대한 창염과 함께 벽이 박살났다.
창이 있던 곳을 중심으로 넓은 구멍이 뻥 뚫렸고, 마침 밖은 아직 어둠이 가득한 밤이었다.
"역시. 방화는 밤에 일어나야 제맛이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불빛이 더 밝게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법.
태양빛 아래에서 타오르는 불꽃보다는 역시 어둠이 짙게 깔린 야밤의 불꽃이 더 환하게 타오르는 법이다.
"하리, 크리슈나와 함께 결계에서 절대로 나오지 마라. 나오면 죽인다."
"네, 네?!"
"내가 결계에서 나오는 녀석에 대해서는 트라우마가 있어서."
나는 하리를 중심으로 결계를 펼쳤다.
푸른 불꽃은 감옥 안의 새로운 감옥이 되었고, 안쪽에도 푸른 불꽃이 타오르게 되었다.
이제 밖에서 누구도 창염의 감옥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안에 있는 하리도 나올 수 없다.
"하, 하지만 만약에 누군가가 제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요?"
"네가 도울 힘은 있고?"
"그렇지만…. 어린 아이가 앞에서 죽어가고 있다면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음. 그래. 좋은 말이야."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눈앞에서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결계가 있다고는 해도 지키려고 뛰쳐나가는 게 착하고 선한 사람의 본성이다.
"이걸 주마."
나는 하리에게 아주 특별한 힘이 담긴 원통을 건넸다.
덕분에 내 몸의 힘이 또 뭉텅 빠져나갔지만, 그건 적당히 싸우면서 마력을 회복하면 그만이다.
"만약 네가 이 안에서 뭔가 밖에 도움을 주고 싶다면, 마법의 주문을 외치고 이걸 눌러라."
"이게 뭔데요?"
"일반인 배우도 밖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제압할 수 있는 마법의 아이템. 참고로 주문은 이거다."
속닥속닥.
나는 하리에게만 조용히 마법의 주문을 알려줬다.
그리고 내가 하리의 안전을 꾀하는 사이, 푸른 불꽃이 감옥 벽을 무너뜨린 것에 감옥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이제 이 비상은 국경 요새 전체로 퍼져나갈 터.
"무슨 일이야!"
"여, 여기 안이 이상합니다! 이국의 귀빈을 가둔 곳에서 폭발이!!"
"큭, 당장 열지 못해?! 이 불꽃은 또 뭐고!"
요새의 주인, 드라칸을 비롯한 이들의 시점에서 보면 철창 안에 푸른 불꽃의 벽이 펼쳐진 것으로 보이리라.
철창을 열고 손을 뻗는 즉시 손에 창염이 달라붙어 마력이 전부 타버릴 것이고, 그러면 그는 마력과 스태미너 고갈로 탈진하여 쓰러질 터.
'역시 창염은 대단해.'
사람을 죽이지 않고 너무나도 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다.
성주는 신라를 세뇌하며 마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모두 무력화 할 힘을 부여했지만, 이제 그 속성은 성주로부터 비롯된 악의 근원을 쓰러뜨리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시작은 이 요새에서부터 시작될 쿠데타, 혁명에 있다.
"남자에게는 거근 쇼타가 될 자유를. 여자에게는 H컵이 될 자유를."
이것은 신체의 자유를 위한 혁명이다.
"작전명, [히드라]."
나는 감옥 밖으로 뛰쳐나왔다.
푸른 날개를 펄럭이며, 우리가 갇힌 곳의 지형을 살폈다.
"오."
동굴 안에 요새가 세워져 있었다.
지저왕국이라는 이름답게 공동은 제법 큰 도시의 도심 급으로 넓었다.
요새의 뒤로 여러 건물이 펼쳐져 하나의 국경 마을을 형성하고 있을 정도였다.
천장과 바닥 사이의 높이가 추정 200m 가량 된다면, 이걸 과연 동굴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기다!"
작은 경비병들이 나를 보고 황급히 달려오기 시작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듯, 그들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사방에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 짜릿해."
누구든 자다가 깨면 제 컨디션이 아닌 법.
갑작스러운 사태에 다들 냉철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하늘을 날고 있는 나를 상대로 특별한 공격 방법이 있을까?
탕!
있다.
어디선가 나를 향해 저격이 날아왔고, 나는 내 심장을 노리고 날아온 마탄을 살폈다.
"이건…."
파아앗!
손 안에 잡힌 마탄이 갑자기 터졌다.
동시에 내 손이 물로 잔뜩 젖었다.
"과연. 마냥 멍청하지는 않다 이거군."
하나 둘 지붕 위로 올라오는 경비병의 손에는 장총이 들려있었다.
근대에 사용한 라이플과 같은 형태였으나, 그들이 장전하는 것은 마력이 실린 '수속성' 마탄이었다.
"그런데 아직은 창염을 잘 모르는 것 같구나."
화륵.
"창염은 물도 태워."
마력으로 이루어진 물 한정이지만.
"그리고 너희들에게는 볼 일이 없다."
나는 바로 날개를 접어 아래로 향했다.
크리슈나를 통해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나는 내가 빠져나온 곳보다 훨씬 아래로 내려가 벽에 멈춰섰다.
똑똑똑.
"벽을 부순다. 물러서."
안쪽을 향해 가볍게 노크를 한 뒤.
"창염펀치."
주먹에 마력을 실어 벽을 부쉈다.
안으로 부서진 벽돌이 튀지 않도록 조절한 덕분에, 감옥 안에 있던 이들은 다행히 무사할 수 있었다.
"무, 무슨…!"
"혼혈. 어른들 맞나?"
나는 누리만큼 작아진 나보다 더 큰 이들을 둘러봤다.
하리와 비교하면 훨씬 작지만, 누리의 시선으로 보면 너무나도 큰 존재들이었다.
"당신은 누구죠?!"
"아이들을 구하러 가지."
나는 두려워하는 이들의 사이로 다가가 철창을 좌우로 붙잡았다.
끼이익.
철창은 좌우로 열렸고, 나는 안에 있던 이들을 향해 손짓하며 밖으로 나왔다.
"거기 둘은 이걸 줄테니 다른 곳에 있는 철창을 망가뜨려라. 위...아래에서 오는 병사들은 내가 막겠다."
"이, 이런 짓을 하면…!"
"아이들이 있는 곳에 녹색의 가스가 살포되었다."
"!!"
감옥에 있던 이들의 눈에 살기가 깔렸다.
나는 내가 지정한 이들에게 창염으로 이루어진 구체를 넘긴 뒤 손끝에 마력을 모았다.
"저기다!!"
멀리서 들려오는 경비들의 소리.
나는 다른 경비들과 마찬가지로 다소 인상이 험악한 이들을 대상으로 내가 마력으로 구현한 것을 집어던졌다.
"싸울 준비, 됐나?"
"...아이들이 있는 곳에 가스가 살포되었다는 것이 사실이오?"
"물론."
"......젠장, 젠장!"
사내들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푸른 불꽃으로 일렁거리는 무기에 상당히 어색해했지만, 익숙하다는 듯 불꽃의 총기를 어깨에 견착했다.
"한 발만 맞춰. 그러면 불꽃이 알아서 놈들을 집어삼키고 무력화시킬 것이다."
"죽이지 않소?!"
"죽이지 않아. 아이들을 구하는 게 우선이다."
"큭…!"
나는 혁명군을 원하는 것이지, 폭도를 바라는 게 아니다.
탕!
나는 멀리서 날아오는 마탄을 손으로 쳐냈다.
그리고 바로 내 손에 구현화 한 마탄으로 화답했다.
"창염 인 더 홀."
"아아악!!"
엄폐물 뒤에 숨어있던 놈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마탄에 맞아 괴성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그는 몸에 붙은 불꽃에 괴로워하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푸쉬이이--
"저렇게 된다."
"...끔찍하군."
쓰러진 병사의 투구가 옆으로 떨어졌다.
그의 머리는 아주 맨들맨들 반짝이고 있었다.
"잘 들어라! 우리는 지금부터 아이들을 구할 것이다!"
처음부터 원대한 계획을 말하면 안 된다.
당장 이들에게 '가이아나를 쓰러뜨리자!'와 같은 말은 하면 역효과만 일어난다.
"지하로 내려가! 아래쪽에 아이들이 있다!"
지금은 그저 아이들을 구한다.
철창 안에 갇혀있던 망명자들에게 반드시 이루어야 할 목적만 상기시켜주면 된다.
그리하여.
와아아아ㅡㅡㅡㅡ!!
망명을 하려던 혼혈들이 주축이 되어, 우리는 가이아나 요새의 국경 수비대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하여!!"
'이게 테러지.'
"가이아나의 억압된 이들이여, 혁명의 푸른 불씨를 피워라."
'창염개진.'
"자유의 불꽃을 피워라!!"
모든 인간에게 거근과 거유를 상대로 섹스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하여.
EP.828 3부 2장 10 영웅
와아아!!
요새 전체에 함성이 울려퍼진다.
각각의 위치를 지키고 있던 간수들은 철창을 뚫고 나온 폭도들에 의해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아니, 젠장! 이게 무슨 일이야!"
"반란입니다! 죄수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제압해! 마포로 사살해버려!"
"불가능합니다!!"
"왜!!!"
드라칸은 부하의 멱살을 움켜쥐며 아래로 소리를 질렀다.
"사살하라고 했잖나! 명령이 말같지 않나?!"
"이미 발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놈들의 저항이 보통이 아닙니다!
"이미 발포를 했어?! 그런데도 저항이 저 상태라고? 젠장…!"
드라칸은 거칠게 멱살을 놓으며 이를 갈았다.
"이래서 부모들을 함부로 건드리기 싫었던 건데…! 여차하면-"
"보고! 폭도들이 지하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구하러 가는 듯 합니다!"
"뭣…?!"
드라칸은 전신의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막아! 어떻게든 지하를 사수해! 지하가 들키면 좆된다!"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보고! 적의 수괴로 보이는 자를 발견했습니다!]
부하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수정구에서 마력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했다.
"저게...뭐야?"
수정구에는 푸른 라이플을 든 남자들이 경비병들을 상대로 마탄을 쏘고 있었다.
그들은 한 명 한 명이 숙달된 포수처럼 정규군을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았고, 오히려 경비병들을 정확히 저격하여 푸른 불꽃을 붙였다.
아아아악!!
푸른 불꽃에 닿은 이들은 모두 몸이 불타기 시작했다.
옷은 타지 않았지만, 마력이 불타기 시작했다.
"크윽…!"
드라칸은 부하의 참담한 모습에 두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수괴는 누구냐!"
[저 자 입니다!]
수정구는 하늘에서 푸른 날개를 펄럭이고 있는 한 소년을 가리켰다.
드라칸은 그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피닉스…? 도대체 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피닉스가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능숙하게 경비병들을 '저격'하는 것은 분명했다.
화륵, 화륵.
피닉스의 손에서 불꽃이 피어오를 때마다 경비병들을 향해 불꽃의 화살이 휘어져 날아갔다.
아무리 엄폐를 해도 화살은 마치 자유의지를 가진 새처럼 유선형으로 날아 경비병들에게 꽂혔다.
"크윽…!"
[장군님! 급보입니다!]
여부관의 비명이 들려왔다.
[폭도들이 지하실로 진입하기 직전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묻어."
[...예?]
"묻으라고! 전부! 입구를 파괴하여 출입구를 막으란 말이야!"
[그, 그러면 저는…!]
"야."
드라칸은 굳은 목소리로 수정구에 대고 말했다.
"너는 가이아나 왕국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하는 거다."
[아….]
여부관의 목소리에 절망이 흘렀다.
드라칸은 비통한 심정으로 지하에서 뭔가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다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저, 저는 이대로 죽지 못해요! 나는, 나는 이대로 죽을 수 없어!!]
"지하실의 자폭 정도는 원격으로도 가능하다."
삑.
드라칸은 붉은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여부관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끊어졌고, 드라칸은 지하로 향하는 죄수들이 당황하는 것을 보며 고개를 들었다.
"오늘, 이곳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거다."
"......장군님의 명령대로."
부관들은 모두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허리에 찬 칼을 튕긴 드라칸은 허공을 날고있는 피닉스를 가리켰다.
"저 자가 무슨 목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저 피닉스라는 자가 '그 놈'이겠지."
"그놈이라고 하시면, 그 괴수를 쓰러뜨린…?"
"그래. 인간의 몸처럼 자신을 숨긴 것이다. 그러니...반드시 죽여야 한다."
드라칸은 칼을 뽑아들며 밖으로 나섰다.
"타이탄을 꺼내라! 놈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
"""예!"""
드라칸과 함께 부관들은 일제히 어딘가로 달리기 시작했다.
* * *
"명분이 섰다."
마력으로 오다니는 대화를 캐치한 나는 드라칸의 행동에 절로 기가 막혔다.
"아이들을 통째로 묻어서 지하실의 존재 자체를 없애려고 하다니. 대단하군."
부모들은 당연히 땅을 파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빨리 요새 밖에 있던 병사들이 우리 혁명군을 진압하기 위한 장비를 갖추고 달려올 것이다.
펄럭.
나는 무너진 지하실로 향하는 통로에 착지했다.
위에서 싸우던 이들은 더욱 격렬히 경비병들을 막아서기 시작했고, 그 사이 나는 지하실 안쪽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확인했다.
'뚫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하리를 위한 결계를 펼치느라, 혁명군에게 무기를 나눠주느라 마력이 A급 평균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대로 여기를 뚫으면 거의 B급 수준만큼 떨어질 터.
"아악, 내 아들!!"
"물러서."
"다, 당신…?!"
"가장 빠른 길로 간다."
한둘이 일일이 무너진 바윗덩어리를 옆으로 치우는 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사람들 절대 들어오게 하지마. 알겠나?"
"뭐, 뭘 하려고…?"
"길을 뚫는다."
나는 모든 마력을 내 몸에 집중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에테르 육체로 바꾸어 무너진 지하통로의 사이사이로 파고들었다.
새애액!
무너진 바위 틈을 파고들어 순식간에 통로를 통과했다.
강제로 몸을 파리보다 작은 수준으로 축소하여 마력의 소모가 상당했지만, 마력의 소모보다 더 중요한 게 아이들이었다.
"아아, 아아아…!"
스멀스멀.
혼자 남겨진 여부관은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공포에 질렸다.
"나는 이제 죽을 거야. 여기서 평생 나가지 못한 채 죽어버릴 거라고…!"
그녀의 아래에 으슥한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감정을 눈치채고 다가온 어둠의 손길은 여부관을 집어삼키며 그녀를 절망으로 이끌었다.
"그래, 어차피 죽을 거라면 저기 안에 있는 것들도 다 같이-"
탕!
나는 여부관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그녀의 몸에 붙은 창염은 그녀의 부정함과 함께 그림자처럼 스며들던 어둠도 함께 태워버렸다.
털썩.
여부관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동시에 나도 머리가 살짝 아파왔다.
"음…."
한꺼번에 많은 양의 마력을 사용하여 머리가 아프다.
회복되는 양보다 더 많은 양을 사용한 만큼, 이대로 계속 쓰기만 하다가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근데 그건 나중 일이고.'
MP는 소모되는 게 당연한 것.
나는 지하실 안으로 달렸다.
안은 감옥과 크게 형태가 다르지 않았고, 통로를 달리며 나는 안쪽 끝까지 확인헀다.
"으, 으아앙!!"
"...얘들 상대로 나 혼자 말하기는 골치아픈데."
아이들은 전부 울고 있었다.
부모와 떨어진 것도 슬프고 당황스러울텐데, 갑자기 지진같은 것이 일어나니 겁에 질리는 게 당연했다.
'그래도 지금은 움직여야 해.'
설명할 시간은 없다.
"물러서."
나는 철창의 자물쇠를 녹이고 문을 열어젖혔다.
안에 있던 이들 중 제법 나이가 찬, 겁에 질린 듯 하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아이들을 지정하며 밖을 가리켰다.
"나는 문을 부수고 위로 통하는 길을 열 거다. 너희들은 아이들을 다독여서 전부 빠져나와. 여기는 곧 무너진다!"
나의 다급함이 통했을까.
아이들은 울면서 몸을 일으켰다.
"언니!"
"어서 따라나와! 여기 무너질 수 있어!"
"나, 나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크읏, 업혀!"
아이들은 서로 도우며 나를 따라 달렸다.
부모를 따라 망명하려고 했던 아이들답게, 자신들에게 놓인 처지를 어느 정도 알고 신속하게 따라왔다.
"...많군."
부모의 수와 아이들의 수가 엇비슷했다.
"흙먼지가 날 거다. 숨을 잠시 참아."
나는 통로 안쪽 넓은 방으로 아이들을 데려와 조금 멀리 떨어지게 만들었다.
"후우."
떠올리는 이미지는 하나.
"나의 불꽃은-"
하늘을 꿰뚫을-
* * *
그 시각.
크리슈나는 결계에 꼼짝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크리슈나를 통해 밖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 결계칠 때는 이렇게 철두철미했었네요.]
[이 아가씨, 절대 안 나가려고 하고 있네요.]
둘은 하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리는 피닉스의 신신당부를 듣고 결계 안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밖에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까 최소한 절대 나가지 않을 것이다.]
[테라의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했으니까, 그분도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마력도 지금처럼 나눌 수 있을만큼 여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S급 석하랑 님을 상대해야했으니까, 전력을 나누지도 못했을 거고.]
[하아.]
[하아.]
둘은 동시에 한숨이 나왔다.
[저런 세상에서 지내던 분이 지구로 와서 그 고생을 했으니….]
[그러니까요.]
크리슈나는 피닉스의 행동을 살피며 괜히 가슴이 울컥했다.
죄수들을 위해 자신의 힘을 마음껏 나눠주는 행위는 청화단에서의 피닉스가 사람을 선별하고 고르고 살아남을 수 있을만큼만 딱 나눠주던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자신이 위험에 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닉스는 적극적으로 죄수들을 포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정말,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이 아가씨도 마찬가지고.]
하리는 피닉스가 준 원통형의 물건을 꼭 쥔 채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눈은 크리슈나와 마찬가지로 피닉스를 향해있었고, 피닉스의 움직임에 매료되어있었다.
그리고.
구구구.
[원을 그리고 있는데요?]
[뭔가 아래에서 솟구칠 것 같은….]
파아아앗!
푸른 불꽃이 회오리처럼 휘몰아쳤다.
그와 동시에 피닉스가 아래에서 날개를 펼치며 바닥을 뚫고 튀어나왔다.
척.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 착지한 피닉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곁에있던 어른들은 피닉스가 뚫은 구멍을 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구멍 아래에는 아이들이 위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른들은 창고에서 가져온 밧줄을 아래로 던지며 구멍 아래로 내려갔고, 직접 아이들을 안고 다시 밧줄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후훗.
[아, 웃었다.]
[저렇게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네요….]
아이들을 구한 피닉스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인자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스샷.]
[저게 히어로죠. 하아....]
크리슈나가 피닉스에게 푹 빠진 사이.
"피닉스 님!!"
하리가 비명을 질렀다.
"골렘들, '타이탄'이 와요! 조심하세요!!"
순간.
콰아앙ㅡㅡㅡ!!
[발진ㅡㅡㅡ!!]
감옥의 벽이 무너지며, 몸집이 3m에 다다르는 기계골렘들이 나타났다.
EP.829 3부 2장 11 다시, 그 이름으로.
요새에 테러를 일으키는데 마냥 쉽게 끝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구하고 분명 위기가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흐하하, 모두 쓸어버려!"
하지만 위기가 찾아오는 텀이 너무 빠른 거 아닐까?
콰앙!!
벽이 무너짐과 동시에 나는 전방으로 마력을 뿌렸다.
벽의 잔해와 돌가루는 푸른 불꽃으로 일으킨 바람으로 튕겨나갔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실탄' 덩어리들.
"모두 엄폐!!"
나는 목청껏 소리지르며 주변을 훑었다.
내 외침에 몇몇 눈치빠른 이들은 전부 주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몸을 숨겼다.
문제가 되는 곳이 있다면, 내가 뚫어놓은 구멍.
창염개진.
나는 구멍으로 달려가 날개를 앞으로 접었다.
내 앞에 X자로 접힌 날개는 단단한 방패가 되었다.
투두두두!
모래먼지 속에서 들려오는 총탄 소리.
날개 위로 떨어지는 묵직한 감각은 분명 실탄이었다.
"쳇."
설마 내가 수속성 마탄을 터뜨리는 걸 보고 바로 실탄으로 바꾼 걸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냥 실탄이 장전되어있는 골렘들을 끌고 온 것일 터.
"누가 드워프같은 녀석들 아니랄까봐."
이 경우에는 노움이라고 해야할까.
날개 너머로 보이는 적들은 로봇처럼 생긴 골렘 위에 탑승하고 있었다.
"흐하하! 반동분자 놈들! 이 참에 잘 됐다! 내가 네놈들을 전부 날려버려서 내 실적으로 쓰겠다!"
색이 다른 골렘에 탑승한 남자는 유독 머리가 반짝거렸다.
아직 창염의 공격을 받지 않았음에도 맨들맨들한 그는 드라칸이었다.
"하하, 피닉스! 그 이형의 괴수를 상대하느라 힘이 소모되었나보지?!"
드라칸은 거대골렘의 팔 한쪽을 내게 겨눴다.
놈의 팔은 마치 개틀링처럼 긴 총신이 여러 개 달려있었다.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위장하여 국경을 넘을 생각하다니! 네놈이 누군지는 몰라도, 법을 어긴 자는 죽어마땅하다!"
두두두두.
"네놈의 정체는 이제 상관없어! 우리 위대한 가이아나 왕국에 테러를 일으킨 반란종자일 뿐이다!"
날개 위로 드라칸의 골렘이 쏜 포격이 떨어졌다.
날개에 닿은 실탄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으나, 그 충격은 분명히 내게로 전해졌다.
"...음."
아프지는 않다.
하지만 실시간으로 깎여나가는 마력이 느껴진다.
'이대로 가다가는 큰일난다.'
내가 문제가 아니다.
내가 여기서 마력이 다해 소멸되더라도, 나는 아바타가 만들어지면 다시 여기로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내 뒤에 있는 아이들은? 어른들은?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하리는?
모두 어떻게 될 지 뻔하다.
테라든 지구든 입막음을 하기 위해 어떤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자들이 곧 빌런이며, 악당이다.
'내가 잘 알지.'
저 자, 여기에 있던 이들을 모조리 죽일 생각이다.
그리고 학살의 이유를 '폭도의 제압'이라고 거짓 보고를 할 자다.
실제로 그걸 20년의 지구에서 직접 보지 않았던가.
저 자는 모두를 죽일 생각이다.
실제로 그럴 각오로 직접 병기를 몰고 왔으며, 까딱 잘못하다가는 여기있는 모두가 죽을 수 있다.
하지만 악인이 있으면, 그와 대척점에 있는 존재도 있는 법.
이미 나는 그걸 20년의 지구에서 경험했다.
자신에게 아무리 힘이 없는 사람이라도,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서는 용기가 있는 '영웅'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그 용기가 만용이 되지 않게 힘을 주고 나왔다.
"테라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었군."
"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아니. 내가 보험을 들어놓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딱.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소리쳤다.
"창염개진!!"
날개의 빛에서 서서히 푸른빛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날개는 그 열기를 마구 방출하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뭔가 기술을 쓰려고 하는 모습.
사실, 그냥 마력 방출일 뿐이다.
"큭! 집중사격!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지 모른다!"
투두두두두두!!
내 몸 전체를 휩쓸 듯한 총탄 세례가 퍼부어졌다.
일부는 날개를 뚫고 내 몸을 관통해 구멍 안으로 도탄되기도 했다.
"큭…!"
꿰뚫린 부위만큼 마력의 결속이 흩어졌다.
다시 마력을 불어넣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겠지만, 그랬다가는 날개를 통한 실드가 금방 깨질 것이다.
"흐하하! 허세구나! 뭔가 하려는 척 하면서 개수작을 부리려는 거야!"
"그래. 수작일 수 있지."
나는 앞으로 손을 뻗었다.
"패배자에게는 말이야."
"뭣?!"
"끝이다. 학살자들."
나는 뻗은 손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이런.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건데."
"뭣?!"
드라칸과 수하들은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며 환영했다.
"염화접(炎花蝶)."
넓은 공동 위에서 푸른 불꽃의 나비들이 나풀나풀 내려와 그들을 덮쳤다.
으아아악!!
나비들은 유리를 통과하여 골렘의 위에 타고 있던 조종사들의 머리에 내려앉았다.
긴급탈출도 하지 못하기에, 그들은 모두 조종석 안에서 비명을 지르며 난리를 쳤다.
두두두두!!
그러면서 아무 곳이나 난사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최대한 몸을 엄폐하며 골렘들이 쓰러지기를 기다렸고, 골렘들은 모두 갸우뚱거리며 넘어지거나 무릎에 총탄을 얻어맞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쿵, 쿠웅, 쿵!
골렘들은 도미노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를 향한 총탄세례도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고, 나는 마력을 갈무리하며 날개를 접었다.
"........"
공동 위.
나는 결계 안쪽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을 하리를 향해 엄지를 들었다.
직접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결계 안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