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9화 〉3부 2장 06
"아...!"
하리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정체불명의 괴수는 비슈니아의 팔부신중이 와도 쉽게 이길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 크기와 힘을 자랑했다.
국경 지대에서 나타난 괴수를 상대로 과연 피해 없이 쓰러뜨릴 수나 있을까?
일단은 비슈니아 왕국에서 '출현'한 괴물이니까, 비슈니아 왕국에서 처리하라고 책임 소재가 넘어오지 않을까?
그러면 당장 피해를 입은 가이아나 왕국의 사람들은?
하리의 그런 생각은 피닉스가 공중에서 잡아먹히는 순간 전부 사라졌다.
"아...!"
절망. 공포. 두려움.
다시는 피닉스를 보지 못할 수 있다는 괴로움.
화륵.
그 모든 것을 일소하듯, 괴수의 입에서 푸른 불꽃이 폭발했다. 그리고 연쇄작용으로 푸른 불꽃이 몸속에서 뿜어져나오기 시작했고, 이윽고 피닉스는 괴수의 몸통을 꿰뚫으며 빠져나왔다.
"하아아...."
하리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몸통이 산산이 조각난 괴수는 잔해만 남아 흩뿌려졌고, 피닉스는 하리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투구에는 아무 표정도 비춰지지 않으나, 그는 뭔가 웃고 있는 듯 보였다.
화륵.
피닉스가 불꽃과 함께 사라졌다. 하리는 순간적으로 옆에 느껴진 따스함에 화들짝 놀랐다.
"순간이동이다."
피닉스는 어느새 인간형-아주 작은 크기의 소년 상태로 나타났다. 그는 살짝 피곤한 얼굴로 하품을 하며 주변을 살폈다.
"저런 괴수가 갑자기 튀어나왔는데 도련님이 기절 안하면 이상한 거겠지? 음. 하리, 뒷 일을 부탁한다."
철푸덕.
피닉스는 하리를 향해 쓰러졌다. 놀란 하리가 급히 받아내느라 피닉스의 얼굴이 가슴에 닿았지만, 피닉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
키이잇!
바닥에 굴러 떨어진 크리슈나가 하리를 향해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지만, 하리는 잠든 피닉스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쉬세요, 주인님."
* * *
"멋지게 싸운 기념으로 섹스하러 로그아웃 했다. 보지 딱 대."
나는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셋과 질펀하게 섹스를 했다. 전투에서 이겼다는 쾌감과 짜릿함을 나는 자지와 허리를 움직여 마음껏 토해냈고, 신라도 하랑이도 유나도 전부 가버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쉽다.
"오빠야는 싸우는 것보다 침대에서 싸우는 게 더 지리는데."
"오빠는 자지를 휘두를 때가 더 멋져요."
"......."
나의 섹스 테크닉을 칭찬하는 건 당연히 기쁘다.
하지만.
'나의 전투 테크닉도 좀 봐줬으면 좋겠는데.'
창염 시절의 신라를 상대로도 제법 승리를 따내던 나다. 그녀의 정신세계에서는 내가 몇 번이고 승리를 따냈고, 패배가 억울했던 창염이 내가 이긴 기억을 지웠을만큼 나는 전투에 재능이 있었다.
아마 판타지 세계에서 태어났다면 소위 그랜드 소드마스터 급의 실력이 아니었을까.
"전장에서도, 침대에서도 말이죠."
"그 전장에서라는 부분을 좀 더 강조해줬으면 좋겠는데?"
"전장에서 SS+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침대에서는 SSS급이니까 당연히 비교할 수밖에 없죠."
"뭐라고? 내가 싸움 실력이 섹스 실력보다 못하다고?"
"네."
신라의 단언에 나는 잠시 나 스스로를 되돌아볼 시간을 가지기 위해 샤워를 했다.
쏴아아.
적당한 온수를 맞으며, 나는 내가 전투 실력을 쌓아왔던 때를 떠올렸다.
'인게임에서 그렇게 맞아가며 배웠는데.'
창염의 피닉스를 최초로 공략하기 이전.
나는 청운 박라온과 무신 샤오린, 그리고 이들을 비롯한 숱한 히로인과 NPC로부터 전투 기술을 배웠다.
아마 나뿐일 것이다.
게임 속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시스템이나 심장 속 창염의 백업 없이 S급의 전투력을 쌓은 건.
그 뒤로 나는 정신세계의 창염에게 승리하기 위해 실력을 가다듬었고, 결국 승리를 거뒀다.
그렇게 실력을 쌓아, 나는 20년의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김펜릴, 아지다하카, 히드라를 상대로 1:3으로 이겼다. 솔직히 창염이 나를 막지만 않았으면, 셋이 큐브를 몇 개를 쓰든 말든 전부 다 태워서 세계의 평화를 앞당길 수 있었다.
'그 때는 절박했지.'
20년의 지구는 언제 어디서 어떤 폭탄이 터질 지 모르는 위험 투성이였다.
'살아남으려고 싸웠어.'
이곳에서 나는 살아남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야만 했고, 특히 나의-창염의 몸을 지키기 위해 진심을 다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
그러나 테라는 다르다.
아바타를 만드는데 조금 시간과 노력과 예산은 들어가지만, 테라의 아바타가 죽는다고 내가 죽는 건 아니다.
'죽음은 익숙하니까.'
20년의 지구에서 죽음의 고통은 수도 없이 겪었다. 그래서 아바타가 죽는다고 해도 두려울 게 없었다.
내가 두려운 건 하나.
모종의 사고든 뭐든 내가 테라에 갇혀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지게 되는 경우.
육체는 원래 세계에 있고 정신만 다른 세계로 넘어간다고 해도, 어떤 사고로 인해 나의 정신만 테라에 남아 육체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태가 생길 수 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나도 20년의 지구에서 했던 것처럼 똑같이 할 것이다.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하고, 더 모르는 만큼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날아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여차하면 로그아웃으로 탈출할 수 있는 지금은?
'한 두 번 정도는 괜찮지 않아?'
하늘을 나는 것도, 적을 상대로 내가 멋지게 적을 쓰러뜨리는 것도, 그리하여 내 여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도.
나중에 자식이 태어나면 '아빠가 이계에서는 이렇게 적을 쓰러뜨렸단다'하고 보여줄 수 있는 것 정도는 만들어놓아도 괜찮은 거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아주 화려하게 저질러봤지만, 돌아오는 건 그냥 평범한 인사치레였다.
"......."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남녀차이이리라. 남자들이 보면 등골이 짜릿하게 울려퍼질만한 장면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나의 아내들은 내 의도에 대한 공감이 낮았다.
유나는 적을 깔끔하게 제압하는 걸 선호한다.
적을 땅 속에 묻어버리거나, 압축하거나, 시멘트 공구리를 치듯 철판 속에 가두어 지저에 묻어버려 보이지 않게 처리하는 걸 선호한다.
하랑은 아름다운 것을 선호한다.
적을 무참히 태우거나 짓밟아버리는 게 아니라, 통째로 얼려버린 다음 산산이 조각나는 걸 선호한다.
신라?
그녀는 재조차 남기지 않고 전부 소멸시켜버리는 걸 선호한다.
하지만 나는 그냥 괴수의 속을 달리면서 놈을 갈기갈기 찢어버렸고, 잔해가 사방으로 튀게 만들며 괴수를 쓰러뜨렸다.
입으로 들어가 꼬리까지 워터 슬라이드를 달리는 것 마냥 하나의 선으로 놈을 돌파했고, 마지막에 일부러 몸을 돌리며 날개를 펄럭였다.
오직, 멋을 위해서.
나중에 내 자식에게 '저게 아빠였어'라고 말해주는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하지만 어쩌면 이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냥 헛짓거리였다면?'
20년의 지구에서처럼 원거리 포격을 하는 식으로 싸울 수도 있었다.
멋은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압도적인 화력으로 놈을 전부 굽고 태워버리는 식으로 싸울 수도 있었다.
놈을 최대한 공중으로 띄운 다음, 전력으로 창염개진을 날려 존재 자체를 소멸시킬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굳이 위험을 택했다.
흔히들 남자들이 빨리 죽는 이유에서 말하는 것처럼,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사서 고생을 한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알면서도 무시하고 해버린 것이다.
'다음 번에는 그냥 원거리에서 죽이자.'
만나면 반갑다고 창염개진.
가루라를 상대로 공중전을 펼칠 게 아니라 공중에서 직화구이를 만들었어야 했다.
킨나라를 상대로 근접전을 펼칠 게 아니라 사지를 부수고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쓰러질 때까지 몸을 불로 지졌어야 했다.
샌드래곤을 상대로 끝까지 돌파할 게 아니라, 놈의 입에 들어가지도 않고 먹히지도 않은 상태에서 빨갛게 될 때까지 익혔어야 했다.
반성.
다음 번에 어떤 괴수가 나올 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철저히 실용적으로 싸울 것이다.
쏴아아.
"......."
나는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침대에는 가운을 입은 신라가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회사에서 새로운 제안서를 보냈어요."
나는 가운을 챙겨입은 다음 신라에게 다가가 그녀가 건넨 스마트폰을 살폈다. 그것은 하선태가 보낸 연락이었다.
"테라를 바탕으로 하는 모바일 게임 있잖아요. PV."
"응."
"거기에 당신의 영상을 쓰고 싶다는 데요."
"...뭐?"
나는 하선태가 보낸 영상 파일을 확인했다.
30초 정도 되는 짧은 영상은 중간 중간 여러 히로인들이 S급 괴수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 컷씬처럼 지나가고 있었고, 그 중간에-
펄ㅡ럭!
샌드래곤의 몸을 찢고 회전하면서 나오는 내가 있었다. 나는 두 날개를 펼치며, 카메라를 향해 투구 속 빛나는 푸른 눈동자를 번뜩였다.
그리고 화면, 전환.
"세상에."
"당신."
신라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게 엄지를 들어올렸다.
"정말 멋졌어요."
"...이렇게 보니까 좀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앞으로는 이거 안 할 거야. 보는 사람들 불안하게 하는 거, 조금 그래."
"어머, 정말요? 돈 들어오는데?"
"뭐?"
"이거 봐봐요."
신라는 내게 메신저 연락의 윗부분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하선태가 먼저 보낸 연락이 있었다.
"회장님의 특별 지시 하에, 피닉스의 활약상이 중간 중간 들어가도록 또다른 PV 영상을 제작하기로 했습니다. 혼돈을 상대로 생동감 넘치게 싸우는 만큼, 피닉스 님께서 멋진 전투 영상을 제공해주신다면 저희가 그에 상응하는 값을 치르겠습니다. 앞으로도 멋진 활약 기대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멋지게 싸우면 그만큼 대우하겠다는 거죠. 한 마디로 위험수당? 푸흐흐."
"전혀 위험하게 싸운 게 아닌데?"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다르죠. 당신이 샌드래곤을 사람들로부터 떨어지게 협곡 위로 유인하면서 싸운 것부터 그래요. 잡아먹힐 듯이 아슬아슬하게 피하잖아요?"
"그거야 약올리려고 그랬던 건데."
"보기만 하는 입장에서는 모른다 이거죠."
신라는 내 귀에 아주 끔찍한 유혹을 속삭였다.
"컷 당 2천."
"뭐...라고...?"
"멋있게 싸울 때마다 돈을 준대요. 심지어...태양이 계좌에도. 인센티브로."
"뭣."
즉, 내가 멋있게 싸우는 만큼 내 자식에게 돈이 들어간다?
"신라야."
"네."
"분윳값을 벌기 위한 일이 절대 추한 건 아니지. 그렇지?"
나는 가장으로써 최선을 다할 뿐이다.
* * *
"성공했습니다. 이제 PV를 찍는데 추가 비용이 나가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 잘했다. 크으, 이건 내가 봐도 멋지군. 조회수 폭발하겠어."
"...PV 제작 비용 절감 차원으로 추진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응? 아닌데? 나 혼자 저걸 보기에는 아깝잖아. 다 같이 봐야지."
"......."
"선태야. 클립따서 적당히 하이라이트로 흘려라. 알겠지?"
"......네."
하선태.
그는 이사고, 대머리는 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