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1화 〉3부 1장 23
"피닉스 님의 지시대로, 저는 이 나라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킨나라는 우리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 땅에서 혼돈의 세력을 찾아내어, 영원히 타오르는 푸른 불꽃으로 놈들을 정화하겠습니다."
"그래, 그 자세다. 창염의 사도가 가져야 할 좋은 마음가짐이야."
척.
"태양만세."
"태양만세."
태양을 향해 두 팔을 들어올린 킨나라의 행동에는 그 어떤 수치심도 없었다.
태양을 향해 밝게 빛나는 눈에는 창염의 색이 담겨있었고, 그녀의 몸속에는 분명한 창염의 마력이 깃들어있었다.
킨나라는 명실상부한 창염의 사도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비슈니아 왕국을 잘 부탁한다."
"본부대로. 피닉스 님, 혹시 이제 어디로 가실 겁니까?"
"지하."
나는 비슈니아 왕국의 잡화점에서 산 지도를 꺼냈다.
"땅의 신을 숭배하는 나라. 지저왕국 가이아나."
"그럼 저희는 서쪽으로 가는 건가요?"
"그래. 중앙에서 서남, 그리고 광활한 평야로 간다."
지도는 내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지형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테라는 지구와 똑같았다.
비슈니아 왕국은 중앙아시아 일대에 넓게 퍼진 왕국이었고, 우리가 지금부터 갈 지저왕국-땅속성 신의 나라 '가이아나'는 아프리카 대륙과 서남아시아 일부분에 걸쳐진 국가였다.
테라는 지구와 너무나도 흡사했다. 북유럽도 있고, 동유럽도 있고, 아메리카도 있다.
'이렇게 보니 진짜 새삼스럽네.'
이 광활한 대륙 전부를 일곱 명의 신이 지배하고 있다니, 새삼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마도 원작에서는 '피의 일주일'로 나오는 사건, 괴수화 된 간부들이 지구로 넘어가며 거대한 차원문을 만든 장소가 아마 각국의 수도나 그와 비슷한 장소가 아니었을까?
"그럼 피닉스 님, 물의 신이 사는 곳은 나중에 가는 건가요?"
"그래. 원래는 북쪽으로 올라가서 얼어붙은 물의 나라, '로드니아'로 가려고 했지만 생각을 바꿨다. 우리는 먼저 가이아나 부터 확인해야해."
설야를 먼저 선택하느냐, 지륜을 먼저 선택하느냐.
나의 선택은 지륜이었다.
아무래도 확실한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보다는 혹시나 모를 혼돈의 씨앗이 '대지모신'에게도 뻗어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만약 지륜이 아닌 대상과 설야를 비교했다면 설야에게로 갔겠지만, 지륜과 설야라는 두 대상을 비교하라면 나는 현재 더 위험한 곳을 선택하기로 했다.
'나도 강해질 필요가 있어.'
킨나라를 상대로 이긴 건 한 번에 불과하다. 킨나라보다 더 강한 자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나는 킨나라보다 강한 자들을 상대하기 위한 대비를 해야했다.
간단히 말해, 파워업.
아직 S급 수준인 내게 S+, SS급으로 나아가려면 설야나 지륜의 땅에서 아주 특별한 의식을 치를 필요가 있다.
그러니 가까운 지륜, 땅의 신에게로 간다.
"가시는 길, 제가 끝까지 모실까요?"
"아니. 너는 비슈니아 왕국으로 돌아가라. 나와 하리, 둘이서 여행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그, 그런데…."
킨나라는 뜸을 들이며 내게 뭔가를 부탁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 그것을 만들어주고 가시면 안 될까요…?"
"그거?"
"그, 피닉스 님의 페닉스…."
킨나라는 고개를 숙였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섹스의 즐거움을 알아버린 킨나라는 내게 떠나기 전에 자신이 성욕을 잠재울 수 있는 물건을 주고가기를 원했다.
...아니, 섹스가 아니다. 내가 섹스한 건 아니다.
"미안하지만 네가 말한 페닉스, 딕배트는 내가 직접 만들어내는 거야. 주고 간다거나 할 수 없어."
"그, 그런…."
"대신 이렇게는 할 수 있지."
화륵.
"가짜를 주마."
나는 손바닥 위로 미니피닉스 한 마리를 만들어 올렸다.
그리고 미니피닉스에게 마력을 머금은 숨을 불어넣은뒤 킨나라에게 건넸다.
"이건…?"
"딕배트까지는 아니더라도, 섹스하는 느낌은 날 거다. 미니피닉스, 큥큥 모드다."
킨나라가 미니피닉스를 건드리자, 미니피닉스가 순식간에 푸른 불꽃의 인간으로 변했다.
"히익…!"
"모, 몸이 불타고 있…. 거기도 타고 있…."
미니피닉스(인간형)은 전신이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아랫도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의 모습을 비슷하게 만들어놓았기에, 아주 단순한 체위밖에 할 줄 모를 거다. 정상위, 후배위 정도가 끝이야. 그리고 최대한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해. 정 급할 때만 쓰라 이거야."
"이 몸은...피닉스 님의 몸인가요?"
"그런 셈이긴 하지."
미니피닉스는 아바타의 마력으로부터 만들어진 나의 분신이다.
지휘관의 분신도 아니다.
아바타를 만들 때 뽑아간 나의 신체 모델링과 똑같은, 현실의 나와 똑같은 몸이다.
불로 이루어져 있고 활활 타고 있다는 것만 빼면 나 그 자체였다.
"미니피닉스라는 말 자체가 피닉스의 열화판이라는 거지. 테라의 풍부한 마력 덕분에 인간형으로 모습을 갖추게 할 수는 있지만, 이런 게 한계기도 하고."
저건 나의 마력이다.
내 마력으로 만들어진 분신이다.
20년의 지구에서 히카리의 마법공학 기술력을 빌려야했던 그 분신들과 달리, 테라에서 만드는 분신은 말그대로 그림자 중 하나일 뿐이다.
"이거, 저한테 주시는 건가요?"
"그래. 혹시나 섹스하고 싶어지면 네 품에서 미니피닉스를 불러라. 인간형태로도 좋고, 아니면…."
나는 미니피닉스를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냈다. 그것은 킨나라에게는 새로운 세계를 눈에 뜨게 만들만한 물건이었다.
"정 찝찝하면 정조대 형태로 쓰든가."
"정조대…!"
킨나라는 미니피닉스를 안으며 활짝 웃었다.
아직 직접 체험해보지도 않았으면서 킨나라는 미니피닉스 하나의 양도에 엄청 기뻐했다.
"이걸로 피닉스 님과 섹스를…!"
"섹스 아니다."
마력 덩어리가 킨나라와 섹스를 한다고 내가 섹스를 하는 게 아니다.
"나는 너와 섹스한 게 아니다. 알겠지?"
"네!"
킨나라는 웃으며 자신의 품에 안긴 미니피닉스를 쓰다듬었다.
"이 아이가 피닉스 님이라고 생각하고 소중히 할게요!"
정조대와 같은 형상에서 다시 뱁새와도 같은 모습으로 돌아간 미니피닉스를.
그렇게 나는 하리와 함께 비슈니아 왕국을 떠났다.
킨나라에게 비슈니아 왕국의 미래를 맡긴 채.
* * *
"킨나라, 괜찮을까요?"
"그럼. 잘못될 리가 없지. 창염신교의 사도에게 실수는 용납되지 않아. 나중에 돌아왔을 때는 킨나라가 네 아군이 되어있을 거다."
나는 불안해하는 하리를 말로 다독이며 말들이 천천히 이동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나를 믿고 지저왕국으로 같이 가자. 알겠지?"
"그곳에서도 신관을 만날 건가요?"
"그래. 신관만이 내 목적을 이룰 수 있는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신이 아닌 설야, 지륜에 해당하기 때문에 더 잘 안다.
"나중에 만나보면 알게 될 거다. 혹시 뭐 아는 거 있나?"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 알아요."
"응?"
"가이아나 왕국의 신관은 공식석상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저도 멀리서 한 번 봤을 뿐이에요."
"그런가…. 그렇다면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야겠어."
사실상 지하 왕국의 수도까지 가야한다.
제법 먼 여정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는 없다.
테라를 지키기 위해.
테라 정화를 위한 순례 여행의 끝은 옛 신라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섹스를 하는 것으로 끝나야 한다.
그러니, 중간에 우리를 가로막는 자가 있다면 다 태워죽인다.
"하리, 밖으로 얼굴 내밀지 마."
나는 마차에 결계를 펼쳤다. 그리고 마차의 지붕 위로 전이한 다음, 주변에서 서서히 나타나는 이상현상들을 향해 마탄을 날렸다.
키아아악!
허공에 열린 검은 그림자는 안에서 형체가 튀어나오기도 전에 닫혔다.
하리는 결계 안의 창을 통해 밖을 보며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저 녀석들은…?!"
"테라리스트. 아무래도 나를 눈치챈 것 같다."
S급, 그것도 킨나라를 창염의 사도로 만들면서 혼돈은 나를 포착해낸 듯 했다.
키아아악!!
마치 20년의 지구에서 게이트가 열리듯, 소규모 차원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거기서 튀어나온 놈들은 전부 테라리스트.
탕, 타당!
나는 놈들이 나타날 때마다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다가 중간에 손을 가볍게 움켜쥔 뒤, 마력으로 변형한 무기를 양손으로 강하게 휘둘렀다.
퍼---억!
끼이익!
나를 뒤에서 덮치려던 마수형 테라리스트는 딕배트에 얻어맞고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원본보다 찰진 맛은 없지만, '딕' 형태가 아닌 배트 형태에 더 집중하고 있는 만큼 살상력은 더 높았다.
키아아악!
멀리서 괴수의 비명이, 아니 괴인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비명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마력을 뿌리니, 그곳에는 수십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차원문이 열리고 있었다.
쿵, 쿵, 쿵.
"와, 여기서 쟤를 보게될 줄은."
수십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몸체.
서양식 판타지 드래곤을 그대로 빼다박은 듯한 검은 형체.
그리고 몸속에서 흘러나오는 금빛의 기류.
"광마룡."
지구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정령의 오염된 부산물이 기어이 테라에 모습을 드러냈다.
놈은 아직 나를 눈치채지 못한 듯 했지만, 곧 자신이 테라에 소환된 이유를 깨닫고 난동을 부리기 시작할 터.
"그냥 여기에 나타나던 거라면 타이밍이 나빴군."
물리적으로 나는 모든 혼돈의 괴수를 죽일 수 없다. 하지만 지나가다가 이렇게 발견한다면, 쓰레기는 치우고 가야하는 게 도리다.
"나오자마자 미안하지만, 죽어줘야겠다."
창염개진, 빛!
"2페이즈는 없다."
나는 광마룡이 2페이즈의 상태로 들어가기도 전에, 내 몸에 가득한 마력을 마탄에 실어 쐈다.
* * *
뒤틀린 어둠 속.
검은 안개는 푸른 불꽃에 타들어가는 마룡에 피를 토했다.
자신이 힘을 쥐어 짜내서 만들어낸 이계의 괴수는 일격에 터져버렸다.
하지만 안개는 보았다.
푸른 불꽃을 다루는 흑발 청년의 모습을.
찾, 았, 다.
안개는 연결을 이었다. 세계와 세계 사이에 구멍을 만들고, 구멍을 통해 악의를 불어넣었다.
저 자를 빼앗으면, 나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어.
검은 안개는 혼돈 속에서 몸이 갈려나가며, 구멍을 잇고 또 이었다.
그래서 안개는 보지 못했다.
구멍과 구멍 사이.
아주 작은 금빛의 기운이 테라를 향해 빨려들어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