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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염의 피닉스-814화 (814/1,497)

〈 814화 〉3부 1장 16

의류점에 왔다.

여관 주인에게 물어물어 의류점에 온 이유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당장 델피아에게 입힐 평상복을 찾는 것.

그녀는 내가 주는 금액 내에서 최대한 자신의 몸에 맞는 옷을 챙겨입었다. 셔츠에 튜닉에 가죽바지까지 입으니 이제야 좀 여기사 다운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리에게 입힐 옷을 찾는 것.

이 세계에서 노예의 옷은 정말 다양하다. 아직 내가 다른 노예들의 견본을 본 건 아니지만, 노예라는 자를 대상으로 하는 보편화된 시각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지금은 전문가의 손길에 맡겨야 할 때.

"이 노예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히고 싶소."

"아이고, 어르신! 그런 거라면 잘 찾아오셨습니다! 금방 대령하도록 합죠!"

의류점의 사장에게 맡겼다.

다행히 사장은 남자가 아닌 여자였고, 그녀는 하리를 웃으면서 데려가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델피아 옷 사라고 금화부터 먼저 던진 게 다행이군.'

노예를 대상으로 옷 사이즈를 측정하는 거라 다소 불쾌하게 생각할 줄 알았다. 곁눈질로 대충 보고 옷을 가져올 줄 알았지만, 전문가는 전문가였다.

내가 델피아에게 금화를 준 것을 봤으니, 내 노예를 상대로 그냥 싸구려 옷을 입힐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터.

"최고급 품질의 옷을 가져오게."

"앗...! 그런 플레이군요!"

"그렇다네."

무슨 플레이를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해를 하게 내버려두면 알아서 의상을 맞춰올 것이다. 나는 그냥 가만히 서서 하리가 입고 올 노예의 복장을 기다리면 된다.

"그럼 잠깐 이야기를 하도록 할까. 델피아 공."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감옥을 탈출할 줄이야."

델피아는 절도있는 자세로 내 근처로 다가왔다. 나는 그녀로부터 한발자국 옆으로 물러섰다. 절대 그녀가 비처녀라서 거리를 벌린 건 아니다.

"네가 지금 저기 데리고 있는 노예, 혹시 그분이 맞나?"

"왜? 모욕죄로 잡아가려고?"

"일단은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부터 하지."

일단은. 이를 갈며 말하고 있으니, 나중에 어떻게 조지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어째서 노예라는 명목으로 데리고 다니려고 하는 거지?"

"데리고 다니는 게 아니다. 그녀가 나를 따라오는 것일 뿐."

"무슨 차이가 있어?"

"나는 저 아이가 없어도 내 목적을 달성하는데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저 아이는 지금 나를 상대로 국가의 명운을 걸었다."

나는 하리와의 거래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를 했다. 델피아는 착잡한 얼굴로 하리 쪽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사이비 교주라니. 전대 신관께 참으로 죄송하군."

"신관은 절대적이니까. 너도 비슈니아 왕국의 기사가 아닌가? 신의 말씀은 절대적이니, 신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신관을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지. 네 속내야 어떻든."

"내 속내?"

"신관은 거지같지만 신께서 신관을 정하셨으니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 아닌가."

델피아는 멍하니 나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혹시나 누가 들었을까봐 급히 주변을 살피기도 했다.

"위험한 발언이야."

"애초에 나는 이교도다. 그리고 미리 얘기 안 했는데...."

나는 델피아와 나 주변을 가리켰다.

"결계를 펼쳐놔서 소리가 외부로 나가지 않아. 여기서 있는 이야기는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진짜?"

"그래. 직접 보여줘?"

나는 한 손을 입 앞에 놓고 소리질렀다.

"신관은 탈모 걸린 심문관이랑 불륜섹스를 저질렀다!!! 신관의 자식은 심문관과 낳은 자식이다!!! 하리는 처녀다!!!!"

"이런 미...."

델피아는 기겁을 하며 나를 말리려고 했지만, 보이지 않는 결계 너머의 사람들은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봤지? 여기서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밖에서는 들리지 않아."

"......후우, 진짜, 미쳐버리는 줄 알았네."

델피아는 십년 감수한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그러다가 퍼뜩 놀라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신관의 아드님이 심문관이랑 낳은 자식이라고?"

"그건 몰랐나?"

"그, 그럴 리가! 그 말인 즉슨...."

"전 신관은 아무것도 모르고 죽었다는 거지. 불륜의 희생자라는 거다."

"아아...."

델피아는 사색이 되었다.

비슈니아 왕국이 아무리 성적으로 개방된 곳이라고는 하지만, 내 아내가 다른 남자와 몰래 섹스를 하고 낳은 자식을 내 자식이라고 하는 정도까지는 아니다.

"어째서...? 빛의 신께서는 그런 걸 아시면서 왜 신관을...?"

"글쎄. 빛의 신께서 지상을 돌볼 여유가 없을 수도 있지."

예상되는 이유가 하나 있기는 하지만, 그 바람에 신관은 더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있다.

신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뭐라고 말하지도 않고 벌도 내리지 않으니, 그걸 가지고 자기가 그렇게 해도 되는 걸로 생각하고 패악질을 부리는 셈이다.

단지 지금 당장 신이 신관 따위를 볼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니 네가 만약 진짜로 하리를 생각한다면, 부탁을 하나 하지."

"부탁?"

"안에서 증거를 찾아다오. 하리가 다시 이곳에 돌아왔을 때, 당당히 신관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는 정통성을 가질 수 있도록."

"...그건 무리야."

델피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증거를 찾는 건 노력할 수 있어. 아니, 네가 말한 것이 사실이고 증거까지 확보된다면 신관이 주최하는 회의에서 정식으로 이 문제에 대해 퍼뜨릴 수 있어. 하지만 그걸로 끝이야. 왜 그런지 알아?"

"신관을 정하는 건 신이기 때문에?"

"그래! 설령 그런 불륜을 저질렀다고 해도 신관은 신관이야. 우리가 누구 하나 거리에 매달고 불륜을 저지른 죄인이라고 죽인다고 해도, 다음 신관이 '짠'하고 나타나는 건 아니야."

델피아는 스스로의 목을 엄지로 그었다.

"신관을 죽이기라도 한다면? 신께서는 감히 자신이 선택한 신관을 죽였다는 것에 분노하시어, 다시는 신관을 내려보내주시지 않을 지도 몰라. 그러니까 기다려야해. 신께서 새로운 신관을 내려주실 때까지."

"신관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에는 공감하는 건가."

"......그녀는 무능해."

델피아는 초조해했다.

"비슈니아 왕국에 펼쳐진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전혀 해결할 생각이 없어. 팔부신중에게 명령을 내리기는 하지만, 팔부신중도 각자 해야할 일이 있어서 사실상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두 셋 밖에 안 돼. 그런데 지금 왕국 전역에는...."

"강간촌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가?"

"그래. 왕국 곳곳에 이상한 일이 생기고 있어. 네 표현을 빌리자면, 그래. 혼돈에 물드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거야. 기존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녀석들. 그런 자들이 미친듯이 늘어나면...우리는 그걸 감당하지 못할 지도 몰라."

델피아는 내게 손을 뻗었다. 악수를 청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잘 부탁해. 이방인."

"나야말로."

악수는 하지 않는다. 델피아는 무안한 듯 뻗은 손을 쥐락펴락하며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결계를 해제한다."

나는 멀리서 다가오는 주인장과 하리를 보며 결계를 해제했다.

"...어우야."

내가 낸 소리는 아니다. 델피아가 낸 소리고, 나는 묵묵히 하리와 주인장을 번갈아봤다.

"노예의 복장?"

"그렇습니다."

"...이게?"

어깨를 전부 오픈한 드레스.

메이드복을 적당히 어레인지 한 것 같은 야한 복장은 정말 비슈니아 왕국 답다면 다웠다.

"최대한 노출을 줄였습니다."

"이게?"

"예. 어르신께서 눈요기를 하실 정도만 남겨두고, 배나 중요부위는 꼭꼭 숨겨둔 모습이죠. 흐흐."

"......."

공주가 입을 드레스 치고는 조금 많이 야하기는 야했다. 그리고 입은 당사자 또한 얼굴이 시뻘게진 상태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약간 뭐라고 해야할까, 여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급사의 모습같다고 해야할까. 적당한 섹스 어필을 하면서 청순함을 간직한 모습이라, 어깨와 윗가슴 일부를 노출한 부분이 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 아니다.

"와우."

델피아는 눈을 반짝이며 놀랐다.

"가슴에 점이...."

"일부러 이런 옷으로 골랐습니다. 흐헤헿...."

의류점 사장은 꼴잘알이었다.

* * *

-저는 최대한 신관의 불륜 증거를 찾아보겠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델피아는 떠났다.

아마 당분간은 이제 만나지 못할 것이며, 나는 하리와 함께 마을을 나섰다.

"우, 으으...."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렇게 비음을 흘리지 말고 이야기를 해라."

"그, 그냥 부끄러워서 그런 거거든요?!"

하리는 드러난 쇄골을 계속 신경쓰며 눈치를 봤다.

"이, 이렇게 살을 드러낸 적은 처음이라고요...."

"공주님이니 드레스를 입으면 약간은 노출하지 않나?"

"백성들은 개방적이어도 왕족은 보수적이어야 해요. 그래야 왕족은 특별한 존재로 우러러 보니까요. 백성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신의 말씀을 따르는 이들은 경건한 자세로 있어야 하니까요."

"그런가."

갑자기 청화양 시절에 입던 사제복이 떠올랐다. 나는 딱히 경건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사제복을 입은 건 아니지만, 확실히 노출은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다.

물론 사제복도 야하기는 야했다. 바람이라도 불면 몸의 윤곽이 전부 드러나버리니, 나는 안에 우산 프레임처럼 옷이 펑퍼짐한 상태로 유지되도록 뭔가 조치라도 취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덥잖은 생각을 하면서 마차를 모는 사이.

마을에서 조금 벗어난 순간, 뒤에서 막대한 마력이 느껴졌다.

"...여유가 있나 싶더니, 드디어 찾아오는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렇게 마력을 풀풀 풍기면서 달려오는 적을 상대로 가만히 앉아있을 이유는 없다.

"온다."

쿵!

뒤에서 달려오던 존재가 우리의 앞을 가로막아섰다. 두 다리를 땅에 디디며 마차의 앞을 가로막아선 여인은 두 다리에서 금빛의 기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딜 가시나요?"

"미친...!"

하리는 앞을 막아선 존재를 바로 알아챘다. 금색을 기조로 한 드레스, 붉은 장식, 그리고 머리 위로 쫑긋 솟은...말의 귀!

"킨나라!"

"그렇습니다, 공주님. 그런데 인사는 나중에 드려도 될까요?"

킨나라는 찰랑거리는 금발을 펄럭이며 싱긋 웃었다.

"거기, 이교도. 당신이 그렇게 싸움을 잘한다면서요?"

"싸우기 전에 질문."

나는 킨나라의 머리 위를 가리켰다.

"너는 말딸인가?"

"......?"

"아, 미안하다. 그랬지, 참."

가루라, 킨나라.

둘 다 기본적으로 수인을 근간으로 한 정령이었다.

"창염개진."

"뭣-"

선빵, 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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