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2화 〉3부 1장 14 공공복지시설
딩딩딩, 굿모닝.
"기상."
나는 일어나자마자 아침해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섰다. 저쪽 세상에서 푹 자고 있을 때와 테라에서 푹 자고 있을 때나 언제나 아침에 일어났을 때의 몸은 몹시 개운했다.
"응?"
내 앞에는 밤을 지새운 듯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하리가 눈을 뜨고 있었다. 그녀는 밤새 눈물을 흘린 듯 눈이 퉁퉁 불어있었다.
"울었나?"
"...운 거 아니야."
하리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나는 방에 준비되어있는 차를 찻잔에 넣은 뒤, 물을 빠르게 끓려 차를 우려냈다.
"차 한 잔 하지."
나는 컵을 건넸다.
만약 신라나 하랑, 유나가 저랬다면 침대 옆 자리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겠지만, 나는 유부남이다.
감옥에서 구할 때는 불가항력으로 신체 접촉이 일어났지만, 이런 상황에서 굳이 신체 접촉을 할 필요는 없다.
"......."
하지만 하리는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나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예쁘고 귀엽기는 하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속상한 일이 있으면 이야기해봐라. 들어는 주지."
"이야기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요?"
갑자기 존댓말?
"저같은 노예는...."
덥썩.
나는 단숨에 하리에게 다가가 두 볼을 손으로 잡아올렸다. 갑작스레 잡혀 볼이 입술이 앞으로 몰리는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되었지만, 하리의 얼굴에는 우울함이 사라지고 당황스러움이 서리기 시작했다.
"무, 무슨...."
"현실을 자각하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삽질을 하라는 건 아니었는데."
이대로 두면 혼자서 우울해질 터. 귀찮은 건 질색이다. 적당히 케어가 필요하면 나름의 케어가 필요하다.
"너는 지금 충분히 잘 하고 있다. 내가 나의 사명만 아니었으면, 나는 네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너를 도왔을 것이다."
"아...."
"절대 네가 이런 일로 속상해 할 필요는 없다. 너는 충분히 가치있는 사람이다."
고작 노예 취급을 한 것 정도로 이렇게 낙담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 우울해하지마라. 지금은 비록 이런 상황이지만, 너는 한 나라의 공주이며 왕족이며, 훗날 신관이 될 사람이다."
"으, 으으...."
하리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에게 얼굴이 잡힌 것이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격려를 받는 게 쑥쓰러운 건지.
"아, 알았어요...."
하리는 얼굴을 붉혔다. 나는 그녀의 반응에서 갑자기 등허리에 오한이 들었다.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보자면, 지금 이 상황은 그런 상황이다.
'얘 설마 나한테 반했나?'
반할 이유가 하나도 없을텐데? 나는 하리를 데리고 이곳까지 오면서 했던 행동들을 하나하나 되돌아봤다.
감옥에서 공주님 안기로 납치하기. 이건 처음 보는 여자를 공주님 안기로 잡았으니 호감도가 깎이는 건 당연하다.
하리를 안고 공중전 펼치기.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도 있었으니, 하리가 겁을 먹으면 먹었지 호감을 살 이유는 없다.
노예취급하면서 밤시중 드는 것처럼 꾸미기. 이것도 하리를 마치 성노예처럼 취급했으니, 뺨을 맞아도 싸다.
아무리 생각해도 반할 이유가 없다. 스톡홀름 증후군도 이보단, 금사빠인 정령도 이보다는 빠르게 사람에게 반할 리가 없다.
그러나 만약.
아내가 있는 남자에게 반해서 이렇게 우울해하는 거다?
'난 잘못 없어.'
잘못은 하리가 한 거다.
'누가 반하래?'
원래 반한 쪽이 지는 거다. 그건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나는 하리를 이대로 대할 것이다.
설령 하리가 왕자였다고 한들, 똑같이....
'는 아니지.'
공주님 안기가 아니라 대가리를 붙잡고 날았을테고, 소파에 놈을 내던지고 내가 침대에서 잤을 것이고, 우울해하고 있다면 '사내 새끼가 그 정도로 질질 짜냐'면서 걷어찼을 것이다.
'여자라서 봐줬다.'
하리는 자신이 왕자가 아니라 공주인 것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 * *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오니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하리를 내 앞에 앉혀놓고 여관의 주인을 잠시 불렀다.
"실례하오."
"무슨 일이오? 음식에 뭐 이상한 거라도 들어갔소?"
"그건 아니고, 묻고 싶은 게 있소."
나는 여관 주인에게 하리를 가리켰다.
"저 노예에게 입힐 하녀복을 찾고 있소만, 어디 좋은 곳이 있소?"
"하녀복이라. 흐흐, 역시 아는 사람이구만. 저기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좋은 곳이 있소. 내 약도를 그려줄테니 그곳에 가보시오."
역시 남자를 상대로는 대화가 쉽게 통한다. 하리를 상대로 음흉한 눈으로 바라본 것은 하리에게 조금 미안하지만, 앞으로 그런 시선들은 견뎌내야 속이 편안할 것이다.
'그 때 솔직히 힘들었지.'
내가 창염의 피닉스, 그러니까 청화쟝이었던 시절.
내색은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를 상대로 음흉한 시선을 보내던 수많은 남자들 덕분에 나는 남자임에도 시선강간의 위험성에 대해 뼈저리게 느꼈다.
'나'를 상대로 딸친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가에 대해서도 실감했다.
연예인보다 더 대단한 인기를 가지고 있기도 했고, 실제로 나를 납치하려는 일도 범죄 조직 수준이 아니라 국가 단위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하리는 앞으로 이런 시선을 견뎌내야한다. 자신을 숨기기로 작정했다면, 그에 따른 굴욕도 감내해야한다.
"그러고보니 당신,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오? 여행 중에 훈수는 조금 그렇지만, 노파심에 하는 말이라 귀담아 들어줬으면 좋겠소."
"무슨 일이길래?"
"어둠의 나라에는 가지 마시오. 그곳은 지금 전쟁 중이라고 하니."
전쟁.
위험한 단어가 나왔다.
"무슨 이유로?"
"별 건 아니오. 신관의 자리를 두고 일곱 마왕이 서로 다투는 중이거든. 어둠의 신관이 모종의 사고로 누군가와 싸우다 죽어서, 새로이 어둠의 신관을 뽑아야 한다고 들었소."
"그건 처음듣는 얘기인데."
나는 하리를 슬쩍 바라봤다. 그녀는 살짝 억울한 눈치였다. 마치 '안 물어봤잖아요'라고 어필을 하는 것 같았다.
"마왕보다 신관이 더 높은 건가?"
"그렇소. 어둠의 신은 이명이 '마신'이라고도 불리니까. 마신께서 신관을 선택하는데, 그분의 선택 기준은 가장 '강한 존재'이니까."
"그렇군."
잠깐 떠볼까. 나는 슬쩍 차를 홀짝이며 아래를 가리켰다.
"비슈니아의 신관도 그런 강한 존재가 되는 건 어떻겠소? 혹시나 전쟁이 일어나면 강한 자가 신관이 되는 것도 좋으니."
"위험한 소리. 그런 소리 했다가는 저기 광장에 묶이게 될 것이오."
여관 주인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나는 그에게 주머니에서 은화 하나를 꺼내 튕겼다.
"미안하오. 내가 너무 오랜만에 와서 조금 정신을 놓았군."
"조심하시오. 나 말고 다른 사람이었으면 바로 신고했거나, 이런 거 받아먹고 뒤에서 몰래 신고했을테니."
"괜히 얘기를 해서 불안한데."
"흐하하! 걱정마시오. 예전에 그런 짓을 저질렀다가 호되게 당한 자를 잘 알거든."
여관 주인은 바닥을 가리켰다.
"이 여관의 전 주인이 그 짓을 하다가 된통 당했지. 입막음비를 받아놓고 밀고를 한 거야. 그리고 그 자는 경비들을 피해서 돌아와 여관 주인을...슥. 흐흐, 상도덕을 지키지 않은 벌이야."
"그럼 이건 어떻소?"
나는 은화를 하나 더 튕겼다.
"안전장치를 하나 만들어둡시다. 그대는 지금 이 나라의 신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에 대한 정보료라고 생각하면 되는가?"
"그렇소. 어차피 서로 신고하면 귀찮아지는 바, 서로 신고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그 은화로 사겠소."
"...끙. 알겠소."
여관 주인은 주변을 살폈다. 하리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귀를 쫑긋 세웠다.
"...빛의 신께서 정하신 신관이니 믿고 따라야지. 비슈니아에서는 빛의 신께서 정한 것이 곧 법이며 진리요."
"그, 그러면...!"
하리가 입을 열었다.
"신께서 잘못된 선택을 하신 거라면...아얏!"
나는 안쓰는 스푼으로 하리의 정수리를 때렸다. 그리고 은화를 세 개 더 꺼내서 여관 주인에게 던졌다.
"이래서 노예요."
"과연. 신성 모독은 그럴 만 하지."
하리는 억울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으나, 곧 자신의 잘못을 알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해해주시오. 지금의 신관을 엄청 싫어하오. 노예지만 공주를 지지하거든."
"공주? 그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공주? 공주가 신관이 되면...."
여관 주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신께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공주를 신관으로 만드신다면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겠지."
"그렇군. 신께서 정한 것이 곧 법도인가."
"그렇소. 신의 말씀을 어기는 자, 신성 모독을 저지른 자들은 벌을 받지. 아, 혹시 거기 옷 사러 가기 전에 한 번 그 옆에 있는 건물에 잠시 들어가보시오. 아주 재미있는 광경이 있을테니."
"재미?"
"뭐, 옆에 데리고 다니는 여자 정도는 아니지만...."
여관 주인의 눈에 음흉함이 스쳤다.
"거기에는 거기만의 맛이 또 있거든."
* * *
비슈니아 왕국에서 강간은 범죄다.
프리-섹스를 지향하는 이 나라에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고 범하는 것은 큰 범죄다.
하지만 강간이라는 것은 혼돈의 오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 나라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성에 가장 자유로운 나라가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할까?
그 비결은 여관 주인이 알려준 창관에 있었다.
[넣고 싶은 구멍에 싸세요!]
[자유. 요금 없음.]
"미친."
건물 안에는 벽에 구멍이 여러 개 있었다. 그리고 구멍 밖으로 엉덩이만 쏙 빠져나와있었다.
누구는 하반신이 뒤집혀서 나와있고, 누구는 고간부만 나와있고, 누구는 또 엎드려있다.
아마 구멍에 박혀있는 여자들의 '취향'인 듯 하다.
"범하러 왔소? ...옆에 있는 여자를 여기다가 넣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그런 사람도 있습니까?"
"여자 혼자 오기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지. 그래서 동행이 있는 경우가 있소."
관리인처럼 보이는 남자는 여러 '구멍'을 가리켰다.
"마음껏 쓰시오."
"돈은?"
"돈? 공공재를 쓰는데 돈을 쓰나? 이곳은 창관이 아닐세. 거 사람 이상하긴. 외국에서 살다 왔나?"
"물의 나라에서 오긴 했지."
나는 적당한 변명을 하며 하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리는 수치심 때문인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여자들이 이런 상태라서? 아니다.
하리는 이 나라의 성문화 중 하나를 내게 들킨 것에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저기 저 구멍을 추천하오. 신분을 말할 수는 없지만...여기 와서 박히길 바라는 여자들 중에는 진짜 최고거든."
"하, 하하."
세상에 아무 남자에게나 사용되기를 바라는 여자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새삼 카르나가 떠올랐다.
그녀는 문란하기는 했지만, 자신을 이긴 상대만 자신을 범할 수 있게 조건을 내걸었다.
어쩌면 성주는 개천광이 아무나 박고 다니지 못하도록 '조건'을 거는 식으로 타락시킨 게 아닐까.
두렵다.
빛의 신은 진짜로 빛이인가.
"정말...응?"
순간.
나는 관리인이 추천하는 구멍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낯이 익은 보지다.
"...델피아?"
"...앗!"
델피아와의 만남은 최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