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1화 〉3부 1장 13 잠을 자는 사이
하리는 당황했다.
스스로에 대해서 부끄러워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당당히, 그녀는 자신에 대해 감히 미녀라고 칭할 자신이 있었다. 감히라는 표현도 감히 어불성설.
하리는 미녀다.
비단 왕족이라서, 공주라서 그런 게 아니라 누구나 다 하리를 두고 미인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외모였고, 하리는 그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자신의 처지가 상당히 좋지 않은 건 맞다.
신관에 의해 정치적으로 제거당하기 일보직전인 상황이 그녀를 왕족으로서 가진 권위를 내세우지 못하게 되었고, 감옥에 갇힌 적이 없는 존재가 되어 아예 감옥에 갇혔다거나 탈출했다거나 하는 일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다.
하리 공주는 여전히 성에서 잘 지내고 있답니다.
그래서 하리는 자신이 공주라는 것을 내세우기보다는 자신의 외모, 몸매, 아름다움을 강렬히 어필했다.
미래 비슈니아 왕국의 신관이 되겠다는 미래가치에 대해서도 어필을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창염신교의 교도로서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뿐이다.
피닉스 개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이용하려는 건 아니지만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스스로의 매력인만큼 매력을 발산해야한다.
그런데.
-네 먹을 것은 너 스스로 만들어 먹어라. 뭐? 밥을 할 줄 모른다고? 쯧, 내 아내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풀코스로 만들어 줄 수 있는데.
-화장실은 다녀왔나? 휴지는 아까 전에 준 천으로 해결해라. 뭐? 내 아내한테도 이럴 거냐고? 내 아내는 똥 같은 거 안 싼다.
-아내에 대한 기억을 잃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건 기억해. 내가 아내와 어떻게 사랑을 나눴는지, 아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아내가 뭘 좋아하는지, 아내가 내게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인지.
-아내와 비교할 수 없지. 어떻게 사람과 여신을 비교할 수 있겠나?
-너는 그냥 인간 중의 공주일 뿐이다. 지금은 공주도 아니니 한낱 인간일 뿐이지.
-스스로 해결해라. 창염신교의 교인은 자기 일은 스스로 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직접 포크로 입에 다 집어넣어줘야하나?
-내가 왜 너를 노예로 만들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나?
그래도 일국의 공주인데.
나름 왕족인데, 설마 노예처럼 자신을 부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너는 노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여자다.
-매몰차다고? 이게 네 현실이다. 왕궁을 벗어나면 한낱 여자에 불과하지.
-창염신교의 교도가 아니었으만 나는 진작에 너를 떨쳐내고 떠났을 것이다. 설령 공주라고 하더라도.
-밥도 제대로 못하는 녀석의 뒤치닥거리를 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니야.
속에서 화가 들끓었다. 감히 공주를 이런 식으로 대하냐고 성을 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진짜로 자신을 내버려두고 훌훌 떠나버릴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파악할 눈치가 있기에, 하리는 피할 수 없다면 운명을 받아들이자는 생각으로 피닉스의 지시를 이행했다.
이것은 피닉스가 나의 자립심을 길러주게 하려는 의도다.
절대 피닉스가 나빠서 그런 게 아니며, 설령 자신이 없어지더라도 홀로서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거다.
아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짐짝을 들고있는 것 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자기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아아, 그렇구나.
이 남자는 나를 신경써주는 거구나.
비록 철벽을 치고 있지만!
'어디 어디까지 철벽을 치나 해보자고.'
하리는 노예로 부려지면서, 여차하면 '노예'가 흔히 겪을 수 있는 일까지 상정했다.
부우욱
-무슨, 무슨 짓이예요!
-산적에게 잡혔을 때를 가정하는 것이다. 너처럼 예쁜 여자를 남자들이 가만히 둘 것 같나?
-이, 이 짐승! 믿었는데!
-믿을 사람을 믿어야지.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하겠다는 나름의 각오(?)는 했다.
'몸 하나 내어주고 이 남자와 긍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면 내가 더 이득 아닌가?'
하리는 손익계산이 빠른 여자였다.
자신의 순결에 대한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소중했지만, 그게 비슈니아 왕가의 명운이 걸려있다면 저울질을 충분히 할 수 있다.
특히 피닉스라면 더더욱.
이계에서 온 이 정신나간 태양의 사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령이든 말든 일단 '남자'로서 자신을 취하기라도 한다면 충분히 하리가 바라는 대로 이끌 가능성은 있었다.
'이런 강한 남자가 나를 안았다? 그럼 최소한 내 말은 들어주겠지.'
팔부신중 중에서 공중전 최강인 가루라를 상대로 일격이탈에 성공했다.
그게 가루라를 상대로 봐준 건지 아니면 하리라는 짐덩이를 데리고 있어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확실한 것은 피닉스라는 존재는 가루라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라는 것.
가루라는 전 세계에서도 상당히 강력하기로 이름난 존재다. 정령과 인간을 비롯하여 강자의 줄을 세우면 못해도 20위 권 안에 들어갈만한 강자다.
그런 강자로부터 도망친만큼, 피닉스라는 자는 강자가 분명했다. 아직 보여주지 않은 것들까지 포함하면 분명 엄청 강한 존재일 터.
'절대 나를 취하고 난 뒤에 '꺼억'하면서 버릴 남자는 아니야.'
한 번 몸을 섞으면 그에 대한 책임감을 가질 남자다.
여자가 남자를 이용하려고 작정하지 않는 한, 긍정적인 관계를 계속 맺으면 충분히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남자다.
'이쪽에서 선을 넘지만 않으면 되면서, 저쪽에서 선을 넘어서 나를 덮치게 하면 되겠네.'
포섭해야한다.
신관으로부터 비슈니아 왕가의 정통성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감히 왕가를 기만하고 대대로 내려오는 혈통을 뒤바꾸려하는 자를 단죄하기 위해서라도 피닉스를 포섭해야한다.
'태양 문제는 솔직히 별 거 아니니까.'
피닉스가 내건 조건은 충분히 수용 가능한 조건이다.
하늘에 태양은 한 개이나, 피닉스가 왕국에 드리운 암운을 걷어낸다면 푸른불꽃을 또다른 태양으로 인정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피닉스 본인이 빛의 신과 담판을 지어야 할 것이다. 자신이 신관이 되든 누가 신관이 되든, 신이 내리는 시련에 통과해야 할 것이다.
빛의 신이 "푸른태양 또한 태양이니라."라고 말한다면, 누가 감히 그걸 이단이라고 하겠는가?
지금 당장은 신관이라는 자가 앞장서서 이단이라고 하니까 이단이지만, 만약 하리가 신관이 된다면 신과 직접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일단 피닉스와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
아무리 공주라고 해도 여자인만큼 그녀는 남자를 상대로 어떻게 하면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자신은 다름아닌 비슈니아 왕국의 공주다.
'공주랑 했는데 설마 먹버하겠어!'
여자로서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남자에게 덤비면, 어떤 남자든 꼼짝도 못하고 넘어오게 될 것이다.
'공주의 처녀를 줬는데 그냥 넘어가지는 않겠지.'
이단으로 여겨질 수 있는 교리를 받아들였다.
공주의 처녀를 줬다.
피닉스의 숙명에 최대한 많은 도움을 줬다.
피닉스를 이용하는 셈이 되겠지만, 하리에게는 당장 믿을만한 구석이 피닉스 밖에 없었다.
그래서 노예라고 목줄이 채워졌을 때, 그녀는 아주 약간의 기대를 했다.
나로!
밤에!
즐긴다고!!!
'나 덮쳐지는 건가?!'
그리고 경비병과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리는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어차피 자신은 신관이 되지 못하면 심문관과 같은 변변찮은 남자에게 강제로 시집보내질 게 뻔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신비로운 매력이 있는 남자와 하는 게 훨씬 좋았다.
'어머님! 아버님! 어차피 할 거면 잘생긴 남자랑 하라고 하셨잖아요! 애 낳을 건 아니니까 뭐라고 하시면 아니됩니다! 이건 왕가를 위한 일이니까요!'
왕가를 위해, 피닉스가 자신을 취하게 만든다.
그런 각오로, 하리는 언제 피닉스가 자신을 덮치나 긴장했다.
그리고.
zzz.
zzZ.
ZZZ....
"......안 해?"
하리는 실시간으로 자존감이 깎이고 있었다.
거울 속으로 바라본 자신은 가루라의 인간형에 비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노예로 꾸며진 덕분에 초췌한 모습까지 더해져, 아름다움이 배가 되고 있었다.
'내가 봐도 나를 덮치고 싶게 생겼는데, 나를 안 덮친다고?'
스스로도 자신의 미모와 몸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만큼, 하리는 조금만 기색을 보여도 울면서 범해질 각오까지 마쳤다.
-저를 범해도 좋아요...! 제 처녀를 드릴테니, 제 나라를 구해주세요...!
-네 순결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제가 드릴 수 있는게, 훌쩍, 이것밖에 없으니까요...!
-좋다. 너를 가지지. 그리고 네 왕국을 가지마.
-꺄아아아악!
피닉스가 자신을 범한다는 가정하에, 미리 대사까지 준비해뒀다.
Zzz.....
"그런데 잔다고?"
피닉스는 하리를 침대에 던졌다. 그리고 자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아버렸다.
앉아서 자는 것도 신기하기는 하지만, 마치 관에 들어간 것 마냥 아무런 미동도 없이 숨만 쉬는 게 괜히 두려워졌다.
이 남자.
자신을 이성은 커녕 사람으로 보기나 하는 걸까?
"...죽은 건 아니겠지?"
하리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변장을 풀고 흑발로 바꾼 모습은 괜히 하리를 설레게 만들었다.
"음...."
턱선 아래, 로브 사이로 비치는 쇄골은-
[떽.]
"아얏?!"
뭔가가 하리의 이마를 찔렀다. 혹시나 암살자가 자신을 노리나 싶어 급히 방어자세를 취했지만,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건드리지 말란 것이야.]
"수, 수호정령...?"
하리는 푸른색의 작은 뱁새에 이마를 눌렀다. 뱁새는 날카로운 부리를 반짝이며 작은 날개를 펄럭였다.
[함부로 건드리지 말란 것이야.]
"거, 건드리다니. 나는...."
[눈에 음란함이 가득하다는 것이야. 분명 쇄골부터 가슴근육을 만지다가, 하악하악 거리면서 천천히 몸을 겹치려고 하겠지. 그러다가 자고 있는 사이에 몰래 살을 섞으려고 할테고. 요망한 것.]
"이, 이...."
피닉스와는 다르다.
분명 피닉스와는 다른 목소리에 다른 말투다.
"네가 피닉스 마누라라도 돼?"
[.......]
작은 뱁새는 가만히 있었다. 마치 고민을 하듯 날개를 펄럭이다가 한쪽 날개로 입을 가렸다. 닿지도 않았지만, 불꽃이 펼쳐지며 부리를 가렸다.
[주인님의 순결은 내가 지킨다는 것이야.]
"뭐...? 순결...?"
[사모님은 혼전순결이었던 것이야. 주인님은 그런 사모님을 존중했고, 두 분은 사랑을 싹틔워가며 결혼을 약속했지. 그리고 결혼식을 치른 첫날 밤, 혼돈의 세력들이 결혼식장을 공격한 것이야. 주인님께서는 사모님을 찾아 이 세계에 도착했지.]
"아...."
하리는 울컥한 마음에 눈물이 날 뻔했다.
"그런...!"
[그러니까 주인님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란 것이야. 주인님은 사모님 것이야.]
"...그 사모님이라는 사람,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거지?"
[물론. 주인님은 사모님을 찾으러 온 거니까. 주인님은 사모님과 함께 혼돈에 대적하다가 이곳으로 오신 것이야.]
"......사모님이라는 사람, 얼마나 예쁜데?"
[푸흐흐.]
작은 뱁새는 날개를 높이 펼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여신, 그 자체.]
* * *
"자율방어모드, 수호정령...미니피닉스 인격 누구로 설정해뒀어요?"
"청화 양."
"아하. 암컷 시절의 당신?"
"어허. 암컷이라니."